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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밥상


1화

프롤로그


어느 마을 어귀에서 한참이나 더 들어간 시골.
논바닥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봄을 맞아 새로 자라난 초록 이파리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살랑대고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는 마당이 보인다. 그곳에 조그마한 ‘선 한의원’과 ‘약선 밥상’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이 주변 경치와 한 그림의 퍼즐처럼 꼭 들어맞는다.
이른 아침부터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대문 열린 틈 사이로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구석의 식당 주방에서 흰 남방 위에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삐거덕 문소리가 들리더니 열린 대문으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소쿠리를 든 할머니가 들어왔다.
“선아, 선이 있냐?”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선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네, 할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어제 공짜로 침도 놔 주고 해서 닭 몇 마리 가지고 왔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안 되긴 무슨. 매일 공짜로 침도 놔 주고 돈은 안 받는다고 하니, 이거라도 줘야 내 맘이 편하지. 오늘 잡은 토종닭이야.”
“아,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두 손으로 닭을 받는 그녀를 보며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의 걱정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잇속도 챙길 줄 알고 그래야지, 그래 착하기만 해서는.”
내 이름은 선(善)이다. 착할 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을 위할 줄 알고 또 착하라고 지어 주신 이름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살았다. 여기는 모든 것이 좋은 곳이다. 공기도 좋았고,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이 되어 버린 부모님을 보는 것도 좋았고, 나를 선이라 불러주는 마을 사람들이 좋았다. 무엇보다 나를 착한 선, 이름대로 있게 해 준 이 마을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여기서 계속 자라다가 고등학교, 대학교는 서울로 갔다. 가기 싫다는 나를 ‘네 이름대로 남에게 베풀고 싶다면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생각이셨기에 이를 따랐다.
그리고 1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나인 곳으로…….
평소에도 할아버지가 하시던 음식을 어깨너머로 배워 온 선은 할아버지의 레시피에 약재를 가미한 약선 음식을 개발해 식당을 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평생 일구어 오신 식당 옆 빈 건물에 조그마한 한의원을 열었다. 선은 한의원과 약선 밥상을 함께 운영해 오고 있다.
친손녀처럼 안타까워하시며 계속 걱정하는 말을 하시는 할머니를 배웅하고 부엌으로 돌아온 선이 다시 칼을 들었다.
오늘 반찬으로 나갈 음식을 만드는 손이 분주해졌다. 주방에서 타닥타닥하는 도마 소리와 보글보글하는 냄비의 물 끓는 소리,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인 죽순과 호박을 네모나게 썰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볶아서 양념에 무쳐냈다.
겨자 소스의 톡 쏘는 맛이 매력인 콩나물 냉채부터 새콤달콤한 미역무침까지 다른 몇 가지의 밑반찬까지 만들어 내고 나서야 선이 허리를 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때가 가까웠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손님이 왔나 보다.
“계세요?”
손님을 맞으러 나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앞마당에는 이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중절모를 쓴 노신사와 우아한 중년의 부인은 처음 방문하는 손님인 듯했다. 그녀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 오셨나 봐요.”
“네, 저희 아버님이랑 식사나 한 끼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노신사와 중년 부인은 안내하는 계단을 올라가서 멋들어지게 수묵화가 그려진 여러 창호지 문 중에서 아가씨가 안내하는 매화가 그려진 방으로 들어섰다.
자수가 놓아진 방석을 꺼내 앉은 두 사람은 두리번거리며 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주 가는 고급스러운 한식집 분위기랑 다르게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가구들이며 소박하고 정감 있는 식당이었다.
노신사가 선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는 뭐를 잘하나?”
“저희는 약선 음식을 주로 대접해요. 오늘 좋은 토종닭이 들어왔는데,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좋지, 좋아. 그걸로 한 상 차려 와 보게나.”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문을 받은 선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이 식당에서 밥 한번 먹겠다고 6시간 넘게 운전해서 온 시아버지를 보며 도 여사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여기에서 식사하시려고 이렇게 먼 길을 오신 거예요?”
“그랴, 그리고 저 아가씨가 장차 니 며느릿감이야.”
“며느릿감이라니 누구, 저희 현재 말씀하시는 거세요?”
“그랴, 니한테 아들은 고놈뿐이고 내한테도 손자는 그놈 하나뿐 아니냐?”
“처음 보는 아가씨 같은데 아버님은 어떻게 아시는 거세요?”
“내 하나뿐인 친구, 필두 손녀야. 우선 한번 보기만 해 보란 말이야.”
“하지만 저희 현재가 어디 저희 말을 듣기나 하나요.”
며느릿감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년의 부인은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아들에게 할아버지께서 네 짝을 미리 점지해 두셨다는 말을 하게 된다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불 보듯 뻔했다.
언제나 냉철하고 사업가의 기질을 잘 발휘하는 아들이지만 무심하고 까칠하며, 거기다 얼마나 차가운지 엄마인 자신도 가끔은 자기 아들 대하기가 힘든데 그런 아들에게 저 아가씨를 소개시킨다니. 도 여사는 아가씨를 현재에게 선보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며느릿감으로 콕 점찍어진 것을 알 리가 없는 선이 주방에 들어섰다. 그녀가 손님께 나갈 상을 준비 중이던 아주머니께 부탁했다.
“아주머니, 아침에 미순 할머니가 주신 토종닭 있죠? 좀 꺼내 주세요. 수삼이랑 엄나무도 좀 부탁드려요.”
토실토실 살이 오른 토종닭에 불린 찹쌀을 넣고 대추, 수삼, 마늘, 생강, 깐 밤을 넣고 닭의 다리를 힘껏 꼬았다. 마침 딱 맞춰 물이 끓는 냄비에 황기, 통계피, 엄나무를 넣고 약재를 끓여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통째로 물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아침에 갓 만들어 놓은 반찬에 알맞게 익은 분홍빛이 예쁜 구기자 물김치, 말랑말랑한 버섯 장아찌까지 소담하게 담아서 쟁반에 담았다.
닭 익는 냄새가 날 즈음에 냄비를 여는 선의 손이 분주해졌다. 푹 익은 닭을 꺼내 먹기 좋게 살을 발라 수삼과 엄나무를 우려낸 국물에 넣고 닭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죽이 다 되자 완성된 죽과 갖은 반찬까지 해서 선이 쟁반에 담아내었다. 선은 쟁반을 내 가면서 뒤돌아 아주머니께 부탁했다.
“아주머니, 약재 건져 내시고 닭 좀 넣어 주실래요? 이것만 가져다 드리고 나올게요.”
음식을 담은 쟁반을 내려놓고 선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