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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방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은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하던 대화를 멈추고 들어오는 선을 바라봤다. 들고 들어온 상에는 정갈하게 담긴 여러 반찬과 죽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음식을 권했다.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어요, 수삼 엄나무 닭죽이에요. 마침 토종닭 좋은 게 들어와서 황기 삼계탕을 끓였어요. 닭죽 먼저 드시고 계시면 삼계탕 가지고 들어올게요.”
앞에 놓인 처음 보는 신기하고 예쁜 음식을 보고 부인이 감탄했다. 약재 냄새가 역하지 않고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담긴 닭죽도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부인이 노신사에게 먼저 권했다.
“아버님, 약선 음식이라니. 아버님 따라와서 제 입이 호강하네요. 한번 드셔 보세요.”
그러자 노신사가 수저를 들고 닭죽을 한 입 떠먹었다.
“음, 괜찮구먼. 약재 냄새가 많이 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고…….”
“아버님, 이 반찬들 좀 보세요. 신기한 반찬이 많아요. 이 돌돌 만 건 김치인가 봐요. 안에 연근인 거 같은데요. 모양도 예쁘고 색도 곱네요. 어디.”
그녀가 돌돌 말린 연근 김치를 하나 집어 입으로 넣고는 말했다.
“맛있어요. 아버님. 맛이 깔끔하네요.”
두 사람은 다른 음식들도 하나씩 맛을 보고 그제야 약재가 조금씩 들어간 음식이란 걸 알았다. 이런 게 약선 음식이구나.
“그랴, 맛있구먼. 이런 것만 먹는다면 건강해서 오래 살아지겠어. 허허.”
죽이 바닥을 보일 무렵 선이 큰 뚝배기에 삼계탕을 가지고 들어왔다. 국물을 한 입 떠먹는데 삼계탕의 국물이 살짝 씁쓸하면서 구수했다.
처음 약선 음식을 맛보는 두 사람을 응시하던 선이 말했다.
“입에 맞으신지 모르겠어요.”
“너무 맛있네요. 젊은 아가씨가 솜씨가 좋네요. 이 예쁜 김치들하며 닭도 너무 부드럽네요.”
“맛있게 드셔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두 사람 모두 야들한 닭다리를 손에 들고 먹고는 안에 든 찹쌀까지 싹싹 비워 냈다.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 그녀가 후식으로 전통 찻잔에 계피차를 대접했다. 평소보다 든든하게 불러오는 배를 두드리던 노신사가 차를 따르고 있는 선에게 진짜 알고 싶은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젊은 아가씨가 어찌 이런 시골에서 식당이나 하고 있나이? 하고 싶은 게 많을 나이인데.”
“저에게는 제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 주는 게 가장 보람된 일이거든요. 여기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지켜 오신 곳이에요. 지금은 제가 지켜 나가려고 노력 중이에요.”
“흠흠, 젊은 아가씨가 요즘 사람 같지 않구만.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1년쯤 됐어요.”
“그랴, 필두가 간 지 1년이나 된 기야?”
처음 보는 손님의 입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놀란 선이 얼른 물었다.
“저희 할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 내 제일 친한 벗이었는디, 내 그 친구 가는 길도 못 보고 맘이 많이 안 좋아. 내가 이제야 찾아왔어이. 그랴, 처자 이름은 무엇이단가?”
“선입니다. 김선이에요. 어르신.”
소개를 하는 선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녀는 안 울려고 이를 꽉 물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 한다. 어쩐지 친근해 보이는 할아버지의 친구분을 뵈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더 보고 싶어졌다.
고개 숙인 선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 노신사가 말했다.
“눈매가 필두를 많이 닮았어. 나는 이수복일세. 자네 할아버지가 날 복이, 복이 이렇게 불렀어이.”
선이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나오던 눈물을 멈추고, 물기 맺힌 눈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찾아와 주셔서, 할아버지가 많이 좋아하실 거예요.”
“나도 그 친구가 많이 보고 싶어이. 가만있어 보자, 여기는 내 며느리야. 내가 먼 길 온다고 부러 따라왔어이.”
이 영감이 옆에 서 있는 고운 중년의 부인을 소개하자 선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선입니다.”
“반가워요, 나는 도옥숙이라고 해요. 아가씨가 요리를 너무 잘하네요.”
“아니에요. 과찬의 말씀이세요.”
“어머, 겸손하기까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새롭게 알고 인연을 만들어 가는 일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더구나 할아버지의 친구 되시는 분을 만나 기분이 더 좋은 선이 얼굴에 환환 웃음을 매달았다. 그 후 방 안에서는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깥이 어두컴컴해져서야 돌아갈 길이 멀다고 두 사람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이 앞치마 입은 모습으로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이 영감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아쉬운 듯 부탁했다.
“내 오늘 아가씨 덕에 잘 먹고 가네. 후에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오시게나?”
“예, 어르신. 초대해 주시면 한번 찾아 봬야죠. 그리고 어르신, 선이라고 불러 주시면 좋고요. 저 역시 저희 할아버지를 대접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았어요.”
“그럼 약속한 게야. 선이, 이 할비 집에도 놀러 온다고?”
“예, 어르신. 들어가세요.”
할아버지는 선이 손을 잡고 아쉬움에 끝까지 놓지 않으셨다. 운전사가 정중히 고급 세단의 문을 열자 그때서야 할아버지와 도 여사는 차에 올랐다. 차에 타서도 할아버지는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어서 들어가 보라며 손짓하셨다. 고급 세단이 천천히 출발했다.
선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서 바라봤다. 차 안에 탄 두 사람은 계속 뒤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점점 멀어져 식당이 눈에 보이지 않자 몸을 돌려 앉은 이 영감이 도 여사에게 물었다.
“내 친구가 손녀 하나는 잘 키웠어. 어떠냐. 니 맘에는 드는 게야?”
“저는 아버님이 맘에 드시면 무조건 좋지요. 젊은 아가씨가 소탈하고 어르신을 공경할 줄도 아는 것 같고, 거기다 눈이 너무 선해 보이네요. 저는 맘에 드는데 현재가 저 아가씨를 맘에 들어 할까요?”
이 영감은 호언장담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저런 애를 안 좋아하면 걔는 눈이 삔 기야, 내한테 좋은 수가 있어이. 김 실장, 현재한테 전화 넣으라이. 당장 집에 오라고이.”

01


T호텔 사장실.
넓은 사무실에서 이현재 사장이 책상에 앉아 직원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
한 치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와이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보라색 실크 넥타이도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매여 있다. 몸에 딱 맞게 입은 검은 조끼 실루엣에서 그가 얼마나 깐깐한 사람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현재가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응시하며 다음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 마케팅부 김 부장이 이번 달 분기 광고와 모델 기용에 대한 보고서를 들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장실로 들어간다. 매일 하는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보고할 때마다 어깨가 긴장되어 딱딱하게 굳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장 앞에만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눈만 마주쳐도 뒷머리가 찌릿하다.
눈을 마주친 김 부장이 인사를 하자 현재가 손을 까딱하며 시작해 보라는 표시를 했다. 그와 동시에 보고가 시작됐다.
“이번 분기 광고 콘셉트는 저희 호텔의 강점인 초호화스러움입니다. 모델로는 요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탑스타인 김민준 씨를 생각하고 계속 컨택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잠시만요. 그럼 저희 호텔의 이미지가 너무 굳어지지 않습니까? 저번 분기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또 시작이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기. 그렇게 잘하면 니가 한번 해보지?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김 부장의 입 밖으로는 딴 말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압니까? 다시 해 오세요.”
“네.”
차라리 원하는 콘셉트가 뭔지 말하기라도 하면 거기에 맞춰 준비할 텐데 자신이 원하는 보고서가 올라올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해 오라 한다. 이게 사장의 트레이드마크다.
김 부장이 안 그래도 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상태로 사장실을 나왔다.

시답잖은 보고가 맘에 들지도 않기도 했지만 이현재 사장의 진짜 짜증을 유발한 것은 바로 본가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친네로부터의 호출이었다.
저녁에 본가로 들어오라는 말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 변명해 봤지만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고집이었다. 어떻게 해서 한 독립인데 이건 무슨 틈만 나면 불러 대니 기를 쓰고 한 독립이 말짱 도루묵이었다.
아, 노친네가 틈만 나면 전화해서 텔레비전에 나온 떡집에서 떡을 사 오라 하질 않나, 모 가수 트로트 디너쇼가 가고 싶다고 스케줄을 조정하라질 않나, 서 회장 아들은 서 회장을 모임마다 모셔 오고 모셔 간다며 자신을 운전기사로 쓰는 건 기본이요, 선풍기는 싫다며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 옆에서 부채를 부쳐라 등등.
요구를 할 때마다 코웃음 치면서 무시했다가도 결국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요구를 다 들어드리고 있었다.
말이 호텔 사장이지 주식은 할아버지, 어머니가 더 많이 소유하고 있지, 거기다 아버지가 세우신 호텔은 자신의 명의지만 호텔이 세워진 땅은 할아버지의 소유였다. 처음에 아버지께서 호텔을 시작하실 때만 해도 땅값이 이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근방이 발전하고 호텔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 갑자기 땅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땅을 팔라고 종용해 보았으나 들은 체 만 체고 다달이 어마어마한 임대료를 갖다 바쳐야 했다.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위치로 만든 것도 그였고 주식도 연일 상한가를 치는데 어찌 짜증만 느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열이 뻗쳤다. 당장 부산에 공사를 시작한 호텔 백화점을 둘러보러 가야 하는데 취소해야겠다 싶었다.
양복 상의를 휙 낚아채고는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나갔다.
“박 비서, 부산 현장 못 갈 것 같으니 취소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로 일정을 변경할까요?”
“아! 낸들 알겠습니까? 일단 보류해 두세요. 저는 지금 본가로 퇴근합니다. 저 갔다고 좋다고 퇴근하지 마시고 제가 내일 결재할 서류 아침에 볼 수 있게 준비해 놓고 퇴근하세요.”
말을 마친 그는 발에 모터를 단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박 비서님, 저희 오늘도 야근인 거예요?”
“그런가 보다……. 어찌 만날 말을 참~ 예쁘게 하시는지 모르겠네. 우리 사장님은…….”
속에서 더한 말이 나올 것 같았지만 박 비서는 이번 달 월급 때문에 참았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막내 비서는 박 비서의 비꼬는 말에 웃어 버렸다.
처음에 회사에 취업했을 때는 좋았다. 이 엄청난 청년 실업률을 뚫고 호텔업계에서 알아준다는 T호텔에 발을 내디뎠으니……. 그리고 출근해서 잘생긴 사장님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좋았다.
하지만 그 기쁨은 한 시간도 안 돼서 무너져 내렸다. 그 한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화내는 건 기본이요, 썩소 외에는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어찌나 깐깐한지 서류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빨간 펜으로 찍찍 표시해서 ‘죄송한 건 압니까? 다시 해 오세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밤늦게라도 보고서를 올려라 명령하고는 보고서가 되기 전에는 본인 역시 퇴근도 안 한다.
마케팅 여팀장은 울며 나갔고, 기획실 과장은 언젠가는 던지고 만다는 사표를 매일 품 안에 품고 다닌다고 하소연했다.
일처리 깔끔하고 추진력도 끝내주고 그만큼 성과도 좋으나, 화내기 일쑤에 칭찬에는 인색하며 무심하게 툭툭 뱉는 말이 그의 나머지 준수한 스펙을 다 깎아 먹었다.
계속되는 야근에 그녀는 다크 서클이 턱만큼이나 내려왔다. 이러니 연애를 하고 싶어도 근처에도 못 가 볼 수밖에. 연애는 무슨 집에 들어가면 쓰러져 자기밖에 더하냔 말이다.
젠장, 시집은 갈 수 있을라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