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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서울 본가.
현재가 인상을 팍 쓴 얼굴로 방에 들어서자 모시 한복을 입고 난을 꼼꼼히 닦고 있던 이수복 영감이 인기척 소리에 눈을 들어 그를 봤다. 현재 녀석이 쓴 인상을 더 구기며 방석에 소리 나게 앉았다.
“이번엔 또 뭐가 필요하신데요?”
“흠흠. 니 오늘 부산 현장 안 갔니? 고라면 내일모레 부산 가서 현장 처리하고이, 김 실장한테 주소 물어서이, 누구 좀 모셔 와야겄다.”
그럼 그렇지. 부산에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일하러 가는 건데 가서 또 누굴 모시고 와야 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난 현재의 입에서 퉁명스런 말이 튀어나온다.
“누구요? 그냥 김 실장 시키시죠?”
“니 안 그라도 간다 아이가? 부산 가는 김에 모셔 오라는 기다. 정중하게 모셔 오란 말이야. 알갔어?”
“아, 별로 내키지 않는데요? 아, 또 다른 노친네 모시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요.”
현재의 버릇없는 말에 이 영감이 음성을 높였다.
“이놈이 근데 할아비보고 노친네라니!! 니는 안 늙을 거 같나?”
“글쎄요. 백화점 땅 저한테 파시면요.”
또 그놈의 땅 소리. 웬만해선 안 넘어올 것 같은데 아무래도 미끼를 던져야겠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 영감이 손자를 구슬린다.
“그건 안 돼야. 그라면, 니 이번에 잘 모시고 오면, 네 이번 달 땅값 안 받는다. 어떠냐? 그래도 싫으냐?”
“그럼 모셔 오지요, 거래 성사입니다.”
솔직히 현재는 다른 거래에서는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할아버지와의 거래에서는 항상 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현재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미끼를 문 현재의 맘을 다 아는 이 영감은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으려고 입을 꽉 다물었다.
부산에 선이를 만나러 간 건 꿈결에 친구의 부탁을 받아서이다. 꿈에 나타난 친구는 늙어서 흰머리가 희끗했지만 선한 눈매는 여전했다.
너무나 오랜만인 친구를 꿈에서라도 만난 것이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한걸음에 달려가 친구를 안았다. 그러나 인사할 겨를도 없이 그가 다짜고짜 손녀딸을 부탁했다.
‘내 손녀딸 말일세, 좀 부탁해도 되겠나? 그 애 혼자 두고 내 먼 길 가기가 발길이 안 떨어져서이.’
젊은 시절 전쟁으로 부모 다 잃고 고아의 처지가 된 자신에게 친구를 자청하며 손 내밀고는 밥이며 묵을 곳이며 너그럽게 베풀던 사람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도 전부 그 친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꿈결에 나타난 친구의 부탁이 맘에 걸려 목이 까칠까칠해졌다.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새벽부터 일어나 친구의 손녀를 만나러 간 것이다. 그리고 처음 보자마자 현재의 짝으로 정해 버렸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손에서만 컸는데도 반듯하게 잘 자란 티가 났다. 무엇보다 친구를 닮은 참하고 선해 보이는 눈이 가장 맘에 들었다. 살아온 인생이 얼만데,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고 자부한다. 자신이나 며느리에게 하는 걸 보니 어른을 진심으로 공경할 줄도 아는 것 같고 너무나 탐이 났다. 거기다 요리까지 잘하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욕심이 났다. 손자인 현재가 선이 같은 옥석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다만, 자기 마음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고집이 쇠심줄 같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한 번 선이에게 마음만 준다면 그는 그 아이를 세상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다. 자신의 손자는 그런 녀석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요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서 다리를 놔줘야 했다. 그래서 부러 거래를 핑계로 선이를 데리러 가게 했다.
02
약선 밥상.
일주일 중 목요일은 식당을 여는 날이다.
이곳의 젊은 사장인 선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시를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 목련회 사모님들 예약이 있는 날이다.
어젯밤 그녀는 어떤 음식을 낼까 계속 고민하다 저번에 시장에 갔다 뽕잎이 나온 걸 보고 사다 놓은 것이 기억나 메뉴를 정했다.
뽕잎 버섯만두전골, 음, 곁들일 메뉴로 약선 구절판.
메뉴가 정해지자 요리를 시작하는 손이 빨라진다. 백련초 가루에 꿀을 넣고 인삼을 재우고 만두소로 할 돼지고기, 버섯, 부추, 뽕잎, 당근 양파 등을 잘게 다졌다.
만두피를 꺼내 만두 빚을 준비까지 거의 다 됐을 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제가 해도 되는데…… 어쩜 이리 부지런을 떠시는지, 제가 월급 받고 여기 살기가 민망해요.”
밀가루가 묻었던 손을 씻고 앞치마에 닦으면서 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세요, 옛날 할아버지랑 살던 게 습관이 돼서 일찍 눈이 떠지네요. 진주는 일어났어요?”
“예, 벌써 일어나 씻고 학교 갈 준비하고 있지요.”
“그럼 얼른 들어가셔서 진주 아침 차려 주시고 나오시면 되겠네요. 매일 식당 청소하시고 관리하시는 것도 힘이 드실 텐데요. 설거지며 마무리도 다 하시잖아요, 어서 가 보세요.”
말이 그렇지 진주 엄마는 하는 일이 그다지 없다. 식당도 그렇게 크지 않으니 방도 몇 개 되질 않아서 청소하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고 거기다 식당도 일주일에 세 번밖에 안 여니 쉬는 날도 많다. 그래서 아침 일찍 나와 이렇게 재료 손질이라도 하려고 하면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난 후여서 자신은 할 일이 없었다.
“미안해서 그러지요.”
“엄마! 엄마! 내 실내화 어디 있어?”
멀리서 아이가 안달하며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진주가 부르네요, 어서 가 보세요.”
재촉하는 아이의 소리에 할 수 없이 몸을 돌리는 아주머니를 보고는 선이 몸을 돌려 구절판에 들어갈 실곤약, 도라지, 달걀, 건포도, 당근, 샐러리, 숙주를 다듬고 손질했다.
손질한 재료를 얇게 채 써는 칼질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얇게 썬 재료들을 프라이팬에 볶기 시작하니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 진동했고 다른 프라이팬에 동그랗고 얇게 밀전병을 부치는 손이 침착했다.
약선 구절판의 하이라이트. 선은 아까 담가 놓은 인삼을 꺼내 얇게 썰어서는 구절판에 담기 시작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얼마 전 만들어 놓은 밑반찬을 그릇에 담고 내갔다. 잠시 후 빈 쟁반을 손에 들고 아주머니가 주방에 들어서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손님들 오셨어요.”
선이 구절판에 들어갈 재료를 가지런히 담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한 후 밖으로 나가면서 아주머니에게 부탁했다.
“마무리는 다 됐고요. 전골 끓으면 담아 놓은 구절판이랑 가져다주시면 돼요.”
마당에는 중년 여사 대여섯 명이 차에서 내려 선을 보고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그중 곱게 한복을 입은 문인회 회장인 문 여사가 인사했다.
“그래, 선 선생은 잘 지내셨는가?”
선이 언제나처럼 곱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예,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야 뭐 항상 즐겁게 잘 지내죠. 식사 준비 다 됐으니 들어가세요.”
목련회 사모님들은 처음 여기서 식사를 하시고는 식사가 맘에 드셨는지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을 꼭 여기서 하신다. 조용한 분위기의 식사가 끝나면 차와 함께 시도 낭송하시고 대화도 나누시고 오랜 시간을 보내다 가시곤 했다.
수다를 떨며 마당에서 안으로 들어선 부인들이 돌계단을 올라갔다.
첫 번째 난이 그려진 벽창호 문을 여니 향긋한 음식 냄새가 풍겨 나왔다. 손님들이 하나씩 방석을 깔아 앉고 나서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준비한 메인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며 여사가 운을 뗐다.
“오늘은 또 어떤 음식을 준비하셨는가? 내가 매일 이리 입에 금칠한다고 바깥양반이 서운해하더구먼, 호호. 그래서 당신 보약은 빼먹지 않고 지어 간다고 웃으며 말했어. 우리 양반도 예약하고 찾아온다고 벼르고 있어. 그래, 보약은?”
“음식 다 드시고 가져가시면 돼요. 다른 사모님들 것도 다 지어 놨으니 갈 때 가져가세요.”
선이 진주 엄마가 들고 들어온 메인 음식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뽕잎 버섯만두전골이랑 인삼 구절판이에요. 뽕잎이 열을 내리고 당뇨나 고혈압에 좋거든요. 그리고 요즘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허하실까 봐 인삼구절판 준비했어요. 인삼을 꿀에 담가 놔서 쓴맛이 덜해 입에 맞으실 거예요. 그럼 저는 나가 볼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