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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수저를 들고 식사가 시작되자 그녀는 뒷걸음으로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그러자 앞에서 진주 엄마가 달려와 거실에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 선이야? 나 기억하시겠나? 날세, 이수복이.
“아…… 네, 어르신 기억하죠. 무슨 일 있으세요?”
― 다름이 아니라 왜 우리 집에 한번 오시기로 하지 않으셨나? 그래서 말인데 내일 어떠신가? 내일 내 사람 보낼 테니 편하게 서울 한번 올라오시게. 내 자네 할아버지 얘기도 듣고 싶고이, 그때 먹은 맛있는 밥상도 또 먹고 싶어서이.
“예 그럼, 제가 찾아 봬야죠. 저도 어차피 내일 서울에 올라가기는 해야 해서요. 근데 혼자 올라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 아닐세, 마침 그리 가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 불편해하지 마시게, 이 기사라는 놈이 오후 한 시쯤이나 데리러 갈 걸세.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내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르신,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 말해 뭐해. 나는 니가 맹글어 준 거면 다 맛있드라이, 내일 봄세.
“예. 들어가세요. 내일 저녁에 뵐게요.”
어차피 내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요리 클래스 때문에 서울에 가야 하는 날이다. 민망하지만 서울 모 문화센터에서 약선 요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열 명 정도의 수강생과 그때그때 알음알음 알아서 한 번씩 와 주시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은 식당 문을 열고 금요일에는 서울에 올라가야 했다.
한의원은 문을 항상 열어 두기는 하지만 동네 어르신들이 가끔 찾으셔서 침을 맞거나 뜸을 들이고 가시는 게 전부다.
식당은 예약 손님만 받아 영업하니 이래서야 먹고는 살겠나 하는 동네어르신들의 걱정도 있었으나 월급 의사 하며 모아 둔 돈도 있고,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것도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사모님들이나 어르신들이 식사하시고 가면서 보약을 지어 가시고, 한 번 지어 가신 분은 그 후에도 계속 지어 가시니 먹고살 만큼은 벌고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 한의원에서 얼굴 작아지는 미용 침을 놓거나 살 빠지는 약을 짓고 하는 일보다 훨씬 보람 있고 좋았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자신은 침술이나 이런 쪽보다는 약재나 음식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나저나 내일 어르신 드실 음식을 뭘 준비하나. 할아버지의 친한 친구분이시기도 하니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었다.
곰곰이 고민하는 선의 머리가 분주해졌다.
*
다음 날, 금요일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야 부산 공사 현장에 도착한 현재는 시공서와 다르게 지어지는 호텔을 보며 또 소리쳤다.
“정말 이렇게밖에 못 합니까? 이 호텔의 가장 중요한 곳이 여기 웨딩홀인데 이 웨딩홀의 크기가 평면도보다 작지 않습니까? 다음 주까지 시정 못 하시면 다른 공사업체로 바꾸겠습니다.”
평면도까지 보며 꼼꼼히 비교해서 날아오는 지적에 안전모를 쓴 직원이 비지땀을 흘리며 당황했다.
“아,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작업 중인 웨딩홀의 옆을 허물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평면도를 봐도 거의 표시도 안 날 만큼 다른 부분이다. 보통은 그냥 넘어가거나 눈치 못 채는 게 정상인데 역시나 이현재 사장은 한 번에 알아봤다.
깐깐하기로 유명하고 성격 더럽기로 더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이현재 사장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보다.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고 있는 직원의 머리 위로 이현재 사장의 경고가 들려왔다.
“그럼 다음 주를 기대하지요. 다음 주에도 제가 이 정도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뒤에 있던 김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분위기면 어르신이 모셔 오라던 아가씨에게도 불똥이 튈지도 모르겠다고…….
“김 실장, 출발하지. 얼마나 대단한 노친네길래 고이 모셔 오라는지 출발하자구.”
김 실장이 심기가 불편한 현재를 태우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까지 들어가나 보고 있는데 자동차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선 한의원, 약선 밥상이라는 간판을 단 한옥 앞마당에 차가 섰다.
‘아, 이런 촌에 한의원이라니…….’
정말 한 100세나 된 노인이 허리를 굽히고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한의원 문을 열고 나온 것은 하얀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정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플랫슈즈를 신은 여자였다.
그녀는 머리를 가지런히 한 가닥으로 묶고는 두 손에 보따리를 낑낑거리며 들고 나왔다.
“김 실장님, 안녕하셨어요?”
가녀린 팔이 늘어지게 보자기로 싼 통들이 무거워 보여 김 실장이 한걸음에 달려가 받아 들었다.
“이리 주십시오.”
“감사해요. 짐이 많아서 어쩌지 했는데 어르신께서 차편도 보내 주시고.”
선이 무거운 짐을 건네주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 냈다. 그녀는 함께 온 다른 사람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이 기사인 줄 알았다. 그래서 뒤에 있던 감색 슈트를 입은 현재를 보고는 살갑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 기사님! 여기까지 오신다고 수고 많으셨어요.”
김 실장이 크게 당황하며 선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러자 현재가 손을 내저으면서 시니컬하게 반문했다.
“아가씨, 이분은…….”
“놔둬, 맞지 않나? 차비로 땅값 받고 이 여자 실어 가니 기사 맞지! 당장 출발이나 하지. 여기서 서울까지 6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그렇게 인사도 통명성도 하지 못하고 들고 있던 짐만 싣고는 바로 출발했다.
선은 뭔가 실수한 것 같아 뒷좌석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고, 현재는 긴 다리를 꼬고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비딱하게 앉았다. 운전하는 김 실장은 혹시나 현재가 언제 소리칠지 몰라 뒷좌석을 계속 힐끔거렸다.
지나가는 차를 응시하며 창밖을 보던 현재는 자기 어깨에 자꾸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자 눈을 옆으로 돌렸다. 조그마한 머리가 자신 어깨에 닿아 있었다.
고속도로를 진입하고도 정자세로 허리를 곧게 펴고 있던 여자가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병든 닭처럼 졸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자신에 어깨에 콩콩 부딪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반대편으로 밀어도 내 봤으나 계속해서 돌아오는 머리에 그냥 손을 놔 버렸다. 그러고는 기댄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작고 동그란 얼굴에 쌍꺼풀 없는 큰 눈, 뭐를 닮았는데…….
‘화려하게 예쁜 장미는 아니고…… 아! 노란 프리지아.’
여자에게서 뭔가 단내가 났다. 복숭아 냄새 같기도 하고 아주 달콤한 냄새…… 그러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아침도 건너뛰고 점심도 이 여자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맞춰 가다 보니 넘겼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차피 잠깐 쉬기도 해야 하고 간단한 거라도 먹어야 했다.
그가 운전하는 김 실장에게 말했다.
“김 실장, 가다 휴게소에 잠시 들르지. 간단하게 요기도 하고.”
현재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자고 있는 달달한 냄새가 나는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이봐! 일어나지? 계속 이렇게 잘 거야?”
“음……. 아!! 죄송해요.”
잠에서 덜 깬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침 내내 종종거리며 준비하느라 수선을 떨었더니 피곤해서 깜빡 졸았나 보다. 거기다 아까 옆의 남자에게 김 실장의 기산 줄 알고는 인사했는데 정작 이 남자는 운전석에 앉질 않고 오히려 김 실장님이 운전을 하는 걸 보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실수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남자가 그냥 출발하자 말했고 차에 타서도 사과할 기회만 힐끔힐끔 노렸다. 그런데 침묵이 내려앉고 두 시간쯤 지나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에 불끈 힘도 줘 봤는데 결국 졸았나 보다.
“죄송한 걸 안다니 다행이군. 잠시 쉬다 가지. 김 실장, 나가지. 간단한 요기라도 해야 될 거 같은데.”
“예, 사장님.”
가만히 듣고 있던 선이 조용히 끼어들어 말했다.
“저기, 제가 도시락을 간단히 싸 왔는데 같이 드시면 좋겠는데요.”
“아, 그 음식 먹을 수나 있는 건가?”
현재의 빈정거림에 그녀는 확 기분이 상했다.
‘고약한 말버릇하고는. 확 머리에 장침을 놓아 버릴까 보다.’
하지만 속마음과 다르게 자기가 잘못한 게 있기도 하거니와 여기서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차분히 말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할아버지께서 기사님 보내신다고 하셔서 실장님 모시는 분인 줄 알고. 정말 죄송해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선의 사과를 무시하고 현재는 다른 말을 했다.
“됐고, 밥이나 먹지.”
휴게소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 선이 자신이 싸온 찬합 도시락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한 층에는 색색의 김밥들이 들어 있었고 또 다른 칸에는 간단한 어묵볶음부터 도라지무침까지 담겨 있고 제철 과일도 들어 있었다. 거기에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시래깃국까지 현재와 김 실장 앞에 놓아 주었다.
“이건 녹차를 넣어 만든 밥으로 만든 김밥이구요. 이 노란색은 치자예요. 시간이 없어서 간단하게 쌌어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이 정도면 진수성찬인데요. 사장님, 드시지요?”
“음, 먹지.”
현재는 김밥 한 개를 입에 넣어 베어 물었다. 참기름 맛이 강하지 않으며 은근한 녹차향이 입안에 퍼졌다. 김밥을 들어 안을 보니 안에는 햄은 안 들어 있고 그저 우엉, 당근, 계란, 어묵이 다였는데 맛있었다.
‘먹을 수나 있나 하고 비아냥거린 거 취소다.’
시간이 없을 때 가끔 김밥으로 식사를 해결하곤 하는데 단 한 번도 김밥이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하나만 먹고 말아야지 했지만 하나만, 하나만 더,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 젓가락이 김밥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식욕이란 본능 앞에서 이성은 꼬리를 내렸다.
슬쩍 여자를 보니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괜히 얼굴에 열이 올라 민망해져 얼굴을 피해 버렸다.
앞에 놓인 도시락을 보니 김밥이 벌써 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머쓱해져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배부르니 나는 그만 먹지.”
현재가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김 실장이 남은 도시락을 자기 앞으로 당겨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상사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김 실장의 점수판에 현재가 속으로 무능력 도장을 찍은 줄도 모르고 김 실장의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선은 웃으면서 다 먹은 컵에 국을 따라 김 실장 앞에 놓아주었다. 현재는 눈치 없고 무능력 도장 쾅 찍힌 김 실장 입으로 들어가는 김밥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