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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
새벽은 눈을 열자 으깨졌다.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벽은 지저분하게 얼룩져서 꼭 탁한 연못처럼 보였다. 린치앤은 새벽의 한기가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친 눅눅하고 텁텁한 공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뎠다.
“아침.”
치앤은 멍하니 읊조렸다.
“새벽…….”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휴가다.
“나 혼자.”
치앤은 한숨을 삼키며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불 위에 내려앉았던 먼지가 반동 때문에 나부꼈다. 창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살 위로 먼지가 노련한 광대처럼 외줄 타기를 시도하며 둥둥 떠다녔다. 시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가벼운 몸짓은 치앤에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빛과 먼지가 춤을 추는 새벽의 고요한 무대를 덤덤하게 지나치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조의 녹이 슨 수도꼭지를 비틀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치앤은 거리낌 없이 찬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맨살에 차가운 물방울이 닿자 소름이 상처처럼 돋아났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세면대 쪽으로 손을 더듬어 딱딱한 비누를 집어 손을 씻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찬물을 맞았다.
치앤은 언제나 찬물로 몸을 씻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몸에 묻은 피와 옷에 밴 핏물은 뜨거운 물이 닿으면 오히려 지워지지 않으므로 차가운 물로 씻어야만 했다.
치앤은 그 사실을 열일곱 살 때 알았다. 그가 처음 사람을 죽인 날이었고, 양동이 한 개를 족히 채우고도 남을 만큼 피를 뒤집어쓴 날이기도 했다.
샤워를 마친 치앤은 벽에 붙은 거울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표정이 없어 사람 같지 않은 제 얼굴을 보고,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았다.
눈꺼풀과 미간의 흉터는 찬물이 닿아 더 붉게 돋아났다. 치앤은 제 얼굴에 난 상처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양천이 어째서 흉터만 보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치앤은 양천이 자신을 쉰 음성으로 완완이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힐 때마다, 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몇 번이고 손으로 문지를 때마다 무거워진 분위기가 성가셔서 덩달아 가슴 아픈 시늉을 했다.
어느새 으깨진 새벽은 흔적도 없이 떠나 버렸다.
린치앤은 다시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베개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숨겨 둔 권총을 더듬었다. 45구경 글록 21C. 리윤이 첫 휴가를 축하한다며 선물이랍시고 떠안겨 준 것이다.
물론 치앤은 정말 리윤이 자신을 생각해서 선물할 리가 없단 것을 잘 안다. 치앤이 아는 리윤은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밀었으면 밀었지, 안녕을 바라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고마움에 눈물을 글썽이며 물어볼 것도 없다. 리양천이 리윤의 편으로 보낸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윈 팔도 바닥으로 늘어졌다. 창밖에서 무어라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 벽을 마구 망치질하는 소리도 났다. 햇살이 활개를 치자 방 안은 점점 더 환해졌다.
반대로 새하얀 무덤 같은 침대 위에 모로 누운 치앤의 그림자는 더욱더 어두워진다. 그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아프고, 외롭고, 슬프다고.
어느덧 치앤이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으나 그는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짐도 풀지 않았다. 그의 가방은 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문드러지고 있었다.
치앤이 짐을 풀지 않은 이유는 지금이라도 리양천이 휴가를 철회하리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이곳에서 달아나는 것을 가정했을 때, 자질구레한 짐을 챙기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치앤이 일주일 동안 가방에서 꺼낸 것이라곤 갈아입을 옷과 속옷 몇 벌, 그리고 치앤의 휴가를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던 괴짜 자오롱(赵龙)이 몰래 넣어 둔 쌉쌀한 과자가 전부였다.
자오롱은 린치앤과 같은 기수인 26기 요원으로, 살벌하고 음울한 망양원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남자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에게 장난을 쳤다. 하지만 지난 20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망양원 26기 요원 여덟 명 중, 자오롱의 짓궂은 장난을 받아 주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한 명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아 생불(生佛)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리우멍루(刘梦璐)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린치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치앤은 자오롱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줄도 몰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롱탕에 온 첫날, 가방 속에서 과자를 발견한 치앤은 그것이 단순히 어쩌다 실수로 섞여 들어간 줄로만 알았다. 자오롱의 호의가 담긴 장난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감흥 없이 그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봉지를 뜯었다. 약처럼 쓴 과자는 별로 맛이 없었다. 치앤은 자오롱의 미각이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오해했다.
회심에 찬 자오롱의 장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치앤은 마지막 과자 한 봉지를 뜯었다. 그 이후로는 물만 마시며 버텼다.
린치앤은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두렵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니까. 치앤은 제 목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손으로 되짚어 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추했다.
계획하길 싫어하고, 우연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린치앤의 삶보다 지루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수조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관상어였다. 리양천이 만들어 낸 좁은 수조 안에서 치앤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치앤은 좁은 수조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사느라 천천히 병들어 가고 있지만, 양천은 당장에 그를 놓아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치앤 또한 스스로 벗어날 의지가 없었다.
수조 속 린치앤의 삶은 다음과 같다.
새벽 5시 30분 정각에 치앤은 리양천의 다정한 손길과 욕망을 교묘하게 감춘 애틋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리양천은 치앤을 깨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소중한 5분을 할애했다. 치앤은 양천이 오기 10분 전에 눈을 뜨고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은 상태이지만, 양천이 자신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잠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면 부기를 가라앉히고자 차가운 물로 얼굴만 적신 다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바람이 세차게 불든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달렸다. 30분 정도 뛰고 나서 리양천의 관저(官邸)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면 리양천이 준비한 아침 식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상은 거의 똑같았다. 따뜻한 또우장*10과 요우티아오*11였다. 식탁은 양천과 치앤 두 사람만을 위한 오붓한 자리는 아니었다. 양천의 부인인, 매사에 차갑고 무기력한 장리앙(張亮)과 부부의 아들 리윤도 함께했다. 식탁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음식을 먹었다. 장리앙은 아침엔 설탕을 듬뿍 넣은 진한 커피 외에는 마시지 않았고, 리윤은 빵이나 삶은 달걀로 때우는 걸 좋아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집, 운치 있는 정원, 풍요로운 식탁, 부유함으로부터 나오는 여유.
리양천이 꾸린 가정은 겉으로는 이상적이지만, 그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마음이 여리고 주변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과 불협화음 일색인 그 식탁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치앤은 아무렇지 않았다. 제 맞은편엔 언제나 양천이 있었으므로.
임무가 없는 날이면 오전 일과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지만, 치앤은 거의 매일 쉬지 않고 훈련에 몰두했다. 오전 내내 체력을 단련하고, 사격부터 시작해서 실전을 대비한 각종 격투 훈련에 힘을 쏟아붓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입맛이 절로 사라진다. 그러면 억지로 견과류를 한 움큼 집어 먹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눈을 붙이거나 멍하게 넋을 놓으며 잠깐 휴식을 취하면 정오 무렵인데, 여지없이 돌아오는 점심엔 단백질 위주로 섭취했다. 만만한 게 삶은 닭 가슴살과 샐러드였다. 그래도 장리앙의 기분이 특별히 좋은 날이면 그녀가 준비한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식탁은 삭막했고 장리앙의 표정은 언제나 무심했으나 그녀가 손수 차린 음식은 따뜻하고 맛있어서 코가 시큰거리곤 했다.
부부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으나, 장리앙은 군식구인 치앤에게 뜻밖에 상냥했다. 그녀는 그를 학대한 적이 일절 없었다. 누구라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여자의 너그러운 친절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위 당원(黨員)의 외동딸인 장리앙은 사랑 없이 양천과 결혼했다. 리양천은 망양원을 존속시키기 위해 장리앙의 대단한 집안과 그녀의 아버지가 쥔 권력이 있어야 했다. 정략적으로 맺어진 부부는 현실에 밝았고, 구질구질하게 감정을 들먹이며 애정을 호소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뜻이 맞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해가 밝을지라도, 평생 다른 여자를 가슴에 품은 남자와 같은 침대에 몸을 누이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자야만 하는 삶이 평온할 리 없다. 더군다나 남편이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여자의 아들과 한집에서 산다는 건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장리앙은 치앤에게 친절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마치 제 신세와 같기에 동질감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처지에 대한 연민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리양천에게 삶을 저당 잡혀 송두리째 흔들리는 무기력함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가엾은 것.’
장리앙이 치앤을 두고 종종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면, 장리앙의 눈가는 언제나 붉게 짓물러 있었다. 치앤은 장리앙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매번 장리앙이 등을 돌렸으므로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오후에도 치앤은 달렸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지쳐 잠깐 여유를 가질 때면, 책을 읽기도 하고 붓을 들어 글을 쓰기도 했다. 한 획, 한 획 공을 들여 쓰다 보면 시간은 쏜살같이 달아나고는 했다.
린치앤은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리양천은 그가 예서를 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을 차리면 땅거미가 진 밖이 어둑어둑했다.
저녁 식사는 생략하거나 양천이 따로 부르면 그와 함께했다. 하지만 리양천은 바쁜 사람이었으므로 대개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치앤은 언제나 양천을 기다렸다. 창가에 앉은 채로 멍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이따금 리윤이 그런 치앤을 억지로 끌고 나가 저녁을 먹일 때도 있었다. 주로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는 식이었다. 하지만 리윤이 린치앤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저울질하고, 애증으로 점철한 감정이 순수한 정(情)에 기울 때면 근사한 식당에서 그럴듯한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제 아버지의 애정을 모조리 독차지한 치앤을 아무리 미워한들, 리윤은 천성이 아버지 양천처럼 모질거나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리윤은 어머니 장리앙을 더욱 닮았다.
돌봐 주는 사람이 없어 탁해진 수조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 죽음이 임박하자 본능적인 공포가 치앤을 엄습했다.
린치앤은 마침내 아사(餓死)를 꾀하던 어리석은 고집을 철회하고, 리양천에게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애걸하기로 했다. 치앤은 겨우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저씨.
10) 豆浆 중국식 두유로 기호에 따라 소금이나 설탕을 넣어 마신다.
11) 油条 중국의 대표적인 아침 식사 메뉴 중 하나로, 길게 늘여 반죽한 밀가루를 튀긴 음식이다. 보통 또우장과 함께 먹는다.
2
새벽은 눈을 열자 으깨졌다.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벽은 지저분하게 얼룩져서 꼭 탁한 연못처럼 보였다. 린치앤은 새벽의 한기가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친 눅눅하고 텁텁한 공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뎠다.
“아침.”
치앤은 멍하니 읊조렸다.
“새벽…….”
좀처럼 익숙하지 않은 휴가다.
“나 혼자.”
치앤은 한숨을 삼키며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불 위에 내려앉았던 먼지가 반동 때문에 나부꼈다. 창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살 위로 먼지가 노련한 광대처럼 외줄 타기를 시도하며 둥둥 떠다녔다. 시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가벼운 몸짓은 치앤에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빛과 먼지가 춤을 추는 새벽의 고요한 무대를 덤덤하게 지나치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조의 녹이 슨 수도꼭지를 비틀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치앤은 거리낌 없이 찬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맨살에 차가운 물방울이 닿자 소름이 상처처럼 돋아났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세면대 쪽으로 손을 더듬어 딱딱한 비누를 집어 손을 씻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찬물을 맞았다.
치앤은 언제나 찬물로 몸을 씻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몸에 묻은 피와 옷에 밴 핏물은 뜨거운 물이 닿으면 오히려 지워지지 않으므로 차가운 물로 씻어야만 했다.
치앤은 그 사실을 열일곱 살 때 알았다. 그가 처음 사람을 죽인 날이었고, 양동이 한 개를 족히 채우고도 남을 만큼 피를 뒤집어쓴 날이기도 했다.
샤워를 마친 치앤은 벽에 붙은 거울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표정이 없어 사람 같지 않은 제 얼굴을 보고,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았다.
눈꺼풀과 미간의 흉터는 찬물이 닿아 더 붉게 돋아났다. 치앤은 제 얼굴에 난 상처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양천이 어째서 흉터만 보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치앤은 양천이 자신을 쉰 음성으로 완완이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힐 때마다, 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몇 번이고 손으로 문지를 때마다 무거워진 분위기가 성가셔서 덩달아 가슴 아픈 시늉을 했다.
어느새 으깨진 새벽은 흔적도 없이 떠나 버렸다.
린치앤은 다시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베개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숨겨 둔 권총을 더듬었다. 45구경 글록 21C. 리윤이 첫 휴가를 축하한다며 선물이랍시고 떠안겨 준 것이다.
물론 치앤은 정말 리윤이 자신을 생각해서 선물할 리가 없단 것을 잘 안다. 치앤이 아는 리윤은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밀었으면 밀었지, 안녕을 바라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고마움에 눈물을 글썽이며 물어볼 것도 없다. 리양천이 리윤의 편으로 보낸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윈 팔도 바닥으로 늘어졌다. 창밖에서 무어라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 벽을 마구 망치질하는 소리도 났다. 햇살이 활개를 치자 방 안은 점점 더 환해졌다.
반대로 새하얀 무덤 같은 침대 위에 모로 누운 치앤의 그림자는 더욱더 어두워진다. 그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아프고, 외롭고, 슬프다고.
어느덧 치앤이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으나 그는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짐도 풀지 않았다. 그의 가방은 방 한구석에서 조용히 문드러지고 있었다.
치앤이 짐을 풀지 않은 이유는 지금이라도 리양천이 휴가를 철회하리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이곳에서 달아나는 것을 가정했을 때, 자질구레한 짐을 챙기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치앤이 일주일 동안 가방에서 꺼낸 것이라곤 갈아입을 옷과 속옷 몇 벌, 그리고 치앤의 휴가를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던 괴짜 자오롱(赵龙)이 몰래 넣어 둔 쌉쌀한 과자가 전부였다.
자오롱은 린치앤과 같은 기수인 26기 요원으로, 살벌하고 음울한 망양원에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남자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에게 장난을 쳤다. 하지만 지난 20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망양원 26기 요원 여덟 명 중, 자오롱의 짓궂은 장난을 받아 주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한 명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아 생불(生佛)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리우멍루(刘梦璐)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린치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치앤은 자오롱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줄도 몰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롱탕에 온 첫날, 가방 속에서 과자를 발견한 치앤은 그것이 단순히 어쩌다 실수로 섞여 들어간 줄로만 알았다. 자오롱의 호의가 담긴 장난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감흥 없이 그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봉지를 뜯었다. 약처럼 쓴 과자는 별로 맛이 없었다. 치앤은 자오롱의 미각이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오해했다.
회심에 찬 자오롱의 장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이곳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치앤은 마지막 과자 한 봉지를 뜯었다. 그 이후로는 물만 마시며 버텼다.
린치앤은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두렵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니까. 치앤은 제 목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손으로 되짚어 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추했다.
계획하길 싫어하고, 우연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린치앤의 삶보다 지루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수조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관상어였다. 리양천이 만들어 낸 좁은 수조 안에서 치앤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치앤은 좁은 수조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사느라 천천히 병들어 가고 있지만, 양천은 당장에 그를 놓아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치앤 또한 스스로 벗어날 의지가 없었다.
수조 속 린치앤의 삶은 다음과 같다.
새벽 5시 30분 정각에 치앤은 리양천의 다정한 손길과 욕망을 교묘하게 감춘 애틋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리양천은 치앤을 깨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의 소중한 5분을 할애했다. 치앤은 양천이 오기 10분 전에 눈을 뜨고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은 상태이지만, 양천이 자신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잠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면 부기를 가라앉히고자 차가운 물로 얼굴만 적신 다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바람이 세차게 불든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달렸다. 30분 정도 뛰고 나서 리양천의 관저(官邸)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면 리양천이 준비한 아침 식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상은 거의 똑같았다. 따뜻한 또우장*10과 요우티아오*11였다. 식탁은 양천과 치앤 두 사람만을 위한 오붓한 자리는 아니었다. 양천의 부인인, 매사에 차갑고 무기력한 장리앙(張亮)과 부부의 아들 리윤도 함께했다. 식탁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음식을 먹었다. 장리앙은 아침엔 설탕을 듬뿍 넣은 진한 커피 외에는 마시지 않았고, 리윤은 빵이나 삶은 달걀로 때우는 걸 좋아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집, 운치 있는 정원, 풍요로운 식탁, 부유함으로부터 나오는 여유.
리양천이 꾸린 가정은 겉으로는 이상적이지만, 그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마음이 여리고 주변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과 불협화음 일색인 그 식탁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치앤은 아무렇지 않았다. 제 맞은편엔 언제나 양천이 있었으므로.
임무가 없는 날이면 오전 일과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지만, 치앤은 거의 매일 쉬지 않고 훈련에 몰두했다. 오전 내내 체력을 단련하고, 사격부터 시작해서 실전을 대비한 각종 격투 훈련에 힘을 쏟아붓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입맛이 절로 사라진다. 그러면 억지로 견과류를 한 움큼 집어 먹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눈을 붙이거나 멍하게 넋을 놓으며 잠깐 휴식을 취하면 정오 무렵인데, 여지없이 돌아오는 점심엔 단백질 위주로 섭취했다. 만만한 게 삶은 닭 가슴살과 샐러드였다. 그래도 장리앙의 기분이 특별히 좋은 날이면 그녀가 준비한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식탁은 삭막했고 장리앙의 표정은 언제나 무심했으나 그녀가 손수 차린 음식은 따뜻하고 맛있어서 코가 시큰거리곤 했다.
부부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으나, 장리앙은 군식구인 치앤에게 뜻밖에 상냥했다. 그녀는 그를 학대한 적이 일절 없었다. 누구라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여자의 너그러운 친절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위 당원(黨員)의 외동딸인 장리앙은 사랑 없이 양천과 결혼했다. 리양천은 망양원을 존속시키기 위해 장리앙의 대단한 집안과 그녀의 아버지가 쥔 권력이 있어야 했다. 정략적으로 맺어진 부부는 현실에 밝았고, 구질구질하게 감정을 들먹이며 애정을 호소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뜻이 맞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이해가 밝을지라도, 평생 다른 여자를 가슴에 품은 남자와 같은 침대에 몸을 누이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자야만 하는 삶이 평온할 리 없다. 더군다나 남편이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여자의 아들과 한집에서 산다는 건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장리앙은 치앤에게 친절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마치 제 신세와 같기에 동질감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처지에 대한 연민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리양천에게 삶을 저당 잡혀 송두리째 흔들리는 무기력함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일지도 모른다.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가엾은 것.’
장리앙이 치앤을 두고 종종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면, 장리앙의 눈가는 언제나 붉게 짓물러 있었다. 치앤은 장리앙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매번 장리앙이 등을 돌렸으므로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오후에도 치앤은 달렸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지쳐 잠깐 여유를 가질 때면, 책을 읽기도 하고 붓을 들어 글을 쓰기도 했다. 한 획, 한 획 공을 들여 쓰다 보면 시간은 쏜살같이 달아나고는 했다.
린치앤은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리양천은 그가 예서를 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정신을 차리면 땅거미가 진 밖이 어둑어둑했다.
저녁 식사는 생략하거나 양천이 따로 부르면 그와 함께했다. 하지만 리양천은 바쁜 사람이었으므로 대개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치앤은 언제나 양천을 기다렸다. 창가에 앉은 채로 멍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이따금 리윤이 그런 치앤을 억지로 끌고 나가 저녁을 먹일 때도 있었다. 주로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우는 식이었다. 하지만 리윤이 린치앤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저울질하고, 애증으로 점철한 감정이 순수한 정(情)에 기울 때면 근사한 식당에서 그럴듯한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제 아버지의 애정을 모조리 독차지한 치앤을 아무리 미워한들, 리윤은 천성이 아버지 양천처럼 모질거나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리윤은 어머니 장리앙을 더욱 닮았다.
돌봐 주는 사람이 없어 탁해진 수조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 죽음이 임박하자 본능적인 공포가 치앤을 엄습했다.
린치앤은 마침내 아사(餓死)를 꾀하던 어리석은 고집을 철회하고, 리양천에게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애걸하기로 했다. 치앤은 겨우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저씨.
10) 豆浆 중국식 두유로 기호에 따라 소금이나 설탕을 넣어 마신다.
11) 油条 중국의 대표적인 아침 식사 메뉴 중 하나로, 길게 늘여 반죽한 밀가루를 튀긴 음식이다. 보통 또우장과 함께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