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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저씨*8, 저 왔어요.”
치앤이 텅 빈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서 말했다. 양천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산지옥을 눈동자에 담을 수 있다면 저런 형상일 것이다.
“알고말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건 너밖에 없지. 자리에 앉아라.”
리양천이 깔깔한 음성으로 말했다.
치앤은 자리에 앉아 초콜릿은 한 움큼 입에 집어넣고 빨간 공을 쥐었다. 탄력 좋은 공은 치앤이 바닥에 가볍게 던질 때마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리양천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당분간 휴가다. 그간의 노고를 보상하는 의미지. 네가 바라는 대로 보통 사람처럼 살아 보려무나.”
“저는 바라는 게 없는걸요.”
치앤은 덜 녹은 초콜릿을 억지로 삼키고 읊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망령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처럼. 양천은 별안간 숨통이 막혔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은 참 서툴구나. 걸핏하면 사람 구경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제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유유자적(悠悠自適).”
공을 튕기던 치앤의 손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임무예요?”
“휴가라고 했지.”
노여움을 가장하며 양천이 대답했다.
“……임무예요?”
린치앤은 휴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그는 단 하루도 맘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같은 말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 두자.”
양천의 말에 치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삼키며 양천은 치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작은 치앤(小茜)*9아.”
양천은 치앤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금 전과 달리 다정한 음성으로 타일렀다. 그제야 치앤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멍한 얼굴이었다. 양천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쥐고 비트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나는 네가 아프고 슬프면 몹시 괴롭다.”
“그런가요.”
“아무렴.”
치앤은 공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리양천은 그 행위가 진실을 요구하는 강력한 호소처럼 보였다.
막다른 길에 봉착한 양천의 가슴속이 만화경(萬華鏡) 속 세상처럼 만 갈래로 찢어졌다.
리양천은 언젠가는 사적인 욕망으로 점철한 진실을 밝히고, 한 인간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버린 죗값을 겸허히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당장에 속죄하기엔 그가 쉬라이를 향해 품은 미련이 너무나도 컸다.
리양천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쪽지를 치앤에게 건넸다.
“자, 이쯤 하자. 이만 가 봐.”
양천은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이 설득보다는 명령을 선호했다.
“정말 가요?”
“가야지.”
“정말?”
엉거주춤 일어서며 치앤이 애처롭게 물었다.
“가고말고. 그렇게 가련한 얼굴일랑 하지 말려무나. 내 마음이 약해지잖아.”
리양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그는 치앤이 이처럼 불안해하는 까닭을 알았다. 치앤은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던져진 적이 없었다. 그의 인간성을 제거한 것은 전적으로 양천의 과오였다.
“아저씨, 제 ‘휴가’는 언제야 끝이 나죠?”
“네가 내키거든. 아니면 내가 내키거든. 누구라도 내키거든.”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건가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한 대답에 문으로 몸을 돌리며 치앤은 다시 물었다.
“완완(婉婉). 이만하자고 했지.”
양천의 음성이 바닥에 내리꽂힐 것처럼 무겁고 날카로워졌다. 그의 얼굴도 더더욱 엄격해져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완이란 매서운 부름에 치앤은 주눅이 들었다. 리양천이 자신을 완완이라고 부를 때는 무척 기분이 좋거나, 반대로 몹시 노여울 때뿐이었다.
완완이란 호칭은 경고다. 치앤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 이상 양천을 거스른다면 어떤 일을 당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매를 맞거나, 굶주리거나, 좁은 벽장에 갇혀 있거나. 그러다가 종래는 하루고 이틀이고 무릎을 꿇은 채로 리양천의 화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네, 그럴게요.”
치앤은 순종한다는 뜻으로 꾸며 낸 낸 미소를 지었다.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든 치앤의 어깨를 보고 양천의 마음 역시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과했던 건 아닌지 거듭 생각하며 망설였다. 치앤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있잖아요.”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치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리양천이 여운을 느끼도록, 자신을 좀 더 오랫동안 생각하도록. 그래서 고통스러워지도록.
“다녀오려무나.”
양천은 그런 치앤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얕은 꾐에 빠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예. 이만 갈게요.”
“잠깐.”
양천은 돌아서는 치앤을 붙잡으며 손을 뻗었다. 부스스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흉터가 양천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제 사랑에 흠이 생긴 것이 애석했다.
“치앤, 네 얼굴.”
“보기 싫으면 가릴까요?”
제 눈꺼풀을 남의 몸을 다루듯이 아무렇게나 더듬으며 치앤이 물었다. 양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너는 눈이 곱다.”
“그러면…….”
“이제 정말 가 보려무나.”
양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가요?”
치앤은 다시 한번 양천에게 진심을 묻는다. 그를 시험한다. 남자의 육욕을 저울질한다.
“그래.”
“정말?”
“그래야지.”
“갈게요…….”
치앤은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양천은 잘 알고 있었다. 린치앤의 습관과 감정의 역치는 전부 그가 라이를 그리며 만들어 낸 것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남자가 죽은 여자의 그림자가 되어 흉내를 내다가 이제는 제 본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풀이 죽은 것은 라이도 아니고, 치앤도 아니고, 치앤의 몸을 빌려 추억을 덧씌운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쉬라이의 잔상이다. 리양천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모른 체하며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화신을 키웠다. 순전히 이제는 썩어 버려 형체조차 가물가물한 오랜 사랑 때문에.
끼익. 문이 닫히고 복도를 걸어가는 쓸쓸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천은 문을 등진 채로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발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양천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힘껏 빨아들이는데 치앤이 손도 대지 않은 우유 잔이 눈에 들어왔다. 양천은 우유 잔을 잡았다. 이미 식어 미지근했다.
***
자두나무 롱탕은 젊은 연인이 설익은 사랑을 처음 시작하던 곳이다.
쉬라이와 린바이화는 1984년 따사로운 초봄, 봄비가 내리는 타이캉루에서 처음 만났고, 비가 그치자 사랑에 빠졌고, 서로 두 손을 잡고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이듬해 칠석(七夕), 두 사람의 아이인 린치앤이 태어났다.
린치앤은 봄이면 자두나무 꽃잎을 으깨며 놀았다. 여름이면 설익은 자두를 따고자 나무에 오르기도 했다. 그 시절, 세상 만물이 어린 치앤의 놀잇감이었다.
쉬라이는 치앤이 두 다리로 땅을 우뚝 짚고 섰을 때부터 매해, 아이의 키를 벽에다가 못으로 그었다. 린바이화는 자두나무 꽃과 들풀을 엮어 쉬라이와 치앤에게 화관을 만들어 주었다. 가난하고 힘든 시기였지만, 가슴속에 사랑과 희망이 가득했다. 그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치앤은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1992년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다만 세월을 고스란히 입어 칙칙한 화강석 문틀과 쪽빛 나무문이 낯익을 뿐이다. 싸구려 장난감처럼 새빨갛게 칠한 벽돌이 어쩐지 정겨울 뿐이다.
마침내 치앤은 롱탕 문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이 닿자 마법처럼 저절로 문이 열렸다.
끽끽거리는 을씨년스러운 소릴 내며 문이 열리고, 말쑥한 차림새의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위로 쭉 뻗은 짙은 눈썹에, 우뚝 선 콧대가 단단한 턱과 맞물리는 시원스러운 외모였다. 미간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주름과 가늘게 뜬 눈이 야릇한 느낌을 줬다. 그는 치앤보다 키가 작았으나 날씬한 몸매가 제법 탄탄하였으며 자세는 대나무처럼 곧았다.
얼떨결에 시선이 마주치자 치앤과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치앤은 곧바로 손목을 꺾어 여행용 가방을 기울이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도 몸을 기울였다.
맞닥뜨린 두 사람은 잠깐 어색하게 웃다가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둘은 잠깐 시선을 교환하며 서먹하게 웃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각자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두 사람은 맞닥뜨렸다.
“아니, 저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잠긴 목소리로 남자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급한 일이 있는지 일분일초가 아까운 눈치였다. 치앤은 남자의 조급함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였고, 두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지.”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두 어깨가 닿을 찰나 가까스로 몸을 멈췄다.
“아, 그러니까.”
남자는 서로 거듭 부딪치는 것에 당황한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두 사람은 방향을 틀어 걸음을 내디뎠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번에는 서로 코가 닿을 뻔했다. 더는 이 우스운 승강이를 벌일 여유가 없었던 남자는 대뜸 치앤의 가방을 낚아채, 안으로 들여놓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치앤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서서 눈만 깜빡였다. 남자가 헛기침을 뱉으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럼 먼저.”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롱탕 밖으로 뛰쳐나갔다. 웅덩이가 철벅철벅 소리 내며 울었다.
치앤은 남자가 떠난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의 모습이 치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치앤은 그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은 가방의 손잡이를 쥐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사…….”
드르륵, 드르륵, 닳아 빠진 바퀴가 아픈 소릴 내며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치앤은 지저분하고 좁은 롱탕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비좁은 골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과 턱 끝에 매달린 땀방울이 과거 이곳에 살았던 어떤 젊은 부부와 아이의 잔상을 지워 버렸다.
린치앤은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가슴이 벅찬 까닭은 그저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꼭 천사 같아서라고만 생각했다.
8) 叔叔(shūshu) 아저씨. 부모와 동년배이거나 자신보다 연상의 남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주로 어린아이가 어른을 부르는 말이다.
9) 원문은 “我的小茜.” 중국에서는 또래, 혹은 나이 어린 사람의 이름이나 성(性) 앞에 ‘小(xiǎo)’를 붙여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이후에 xiǎo를 사용하는 애칭은 원음을 그대로 표기한다.
“아저씨*8, 저 왔어요.”
치앤이 텅 빈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서 말했다. 양천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산지옥을 눈동자에 담을 수 있다면 저런 형상일 것이다.
“알고말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건 너밖에 없지. 자리에 앉아라.”
리양천이 깔깔한 음성으로 말했다.
치앤은 자리에 앉아 초콜릿은 한 움큼 입에 집어넣고 빨간 공을 쥐었다. 탄력 좋은 공은 치앤이 바닥에 가볍게 던질 때마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리양천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당분간 휴가다. 그간의 노고를 보상하는 의미지. 네가 바라는 대로 보통 사람처럼 살아 보려무나.”
“저는 바라는 게 없는걸요.”
치앤은 덜 녹은 초콜릿을 억지로 삼키고 읊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망령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처럼. 양천은 별안간 숨통이 막혔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은 참 서툴구나. 걸핏하면 사람 구경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제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유유자적(悠悠自適).”
공을 튕기던 치앤의 손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임무예요?”
“휴가라고 했지.”
노여움을 가장하며 양천이 대답했다.
“……임무예요?”
린치앤은 휴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그는 단 하루도 맘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같은 말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 두자.”
양천의 말에 치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삼키며 양천은 치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작은 치앤(小茜)*9아.”
양천은 치앤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금 전과 달리 다정한 음성으로 타일렀다. 그제야 치앤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멍한 얼굴이었다. 양천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쥐고 비트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나는 네가 아프고 슬프면 몹시 괴롭다.”
“그런가요.”
“아무렴.”
치앤은 공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리양천은 그 행위가 진실을 요구하는 강력한 호소처럼 보였다.
막다른 길에 봉착한 양천의 가슴속이 만화경(萬華鏡) 속 세상처럼 만 갈래로 찢어졌다.
리양천은 언젠가는 사적인 욕망으로 점철한 진실을 밝히고, 한 인간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버린 죗값을 겸허히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당장에 속죄하기엔 그가 쉬라이를 향해 품은 미련이 너무나도 컸다.
리양천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쪽지를 치앤에게 건넸다.
“자, 이쯤 하자. 이만 가 봐.”
양천은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이 설득보다는 명령을 선호했다.
“정말 가요?”
“가야지.”
“정말?”
엉거주춤 일어서며 치앤이 애처롭게 물었다.
“가고말고. 그렇게 가련한 얼굴일랑 하지 말려무나. 내 마음이 약해지잖아.”
리양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그는 치앤이 이처럼 불안해하는 까닭을 알았다. 치앤은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던져진 적이 없었다. 그의 인간성을 제거한 것은 전적으로 양천의 과오였다.
“아저씨, 제 ‘휴가’는 언제야 끝이 나죠?”
“네가 내키거든. 아니면 내가 내키거든. 누구라도 내키거든.”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건가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한 대답에 문으로 몸을 돌리며 치앤은 다시 물었다.
“완완(婉婉). 이만하자고 했지.”
양천의 음성이 바닥에 내리꽂힐 것처럼 무겁고 날카로워졌다. 그의 얼굴도 더더욱 엄격해져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완이란 매서운 부름에 치앤은 주눅이 들었다. 리양천이 자신을 완완이라고 부를 때는 무척 기분이 좋거나, 반대로 몹시 노여울 때뿐이었다.
완완이란 호칭은 경고다. 치앤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 이상 양천을 거스른다면 어떤 일을 당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매를 맞거나, 굶주리거나, 좁은 벽장에 갇혀 있거나. 그러다가 종래는 하루고 이틀이고 무릎을 꿇은 채로 리양천의 화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네, 그럴게요.”
치앤은 순종한다는 뜻으로 꾸며 낸 낸 미소를 지었다.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든 치앤의 어깨를 보고 양천의 마음 역시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과했던 건 아닌지 거듭 생각하며 망설였다. 치앤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있잖아요.”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치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리양천이 여운을 느끼도록, 자신을 좀 더 오랫동안 생각하도록. 그래서 고통스러워지도록.
“다녀오려무나.”
양천은 그런 치앤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얕은 꾐에 빠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예. 이만 갈게요.”
“잠깐.”
양천은 돌아서는 치앤을 붙잡으며 손을 뻗었다. 부스스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흉터가 양천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제 사랑에 흠이 생긴 것이 애석했다.
“치앤, 네 얼굴.”
“보기 싫으면 가릴까요?”
제 눈꺼풀을 남의 몸을 다루듯이 아무렇게나 더듬으며 치앤이 물었다. 양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너는 눈이 곱다.”
“그러면…….”
“이제 정말 가 보려무나.”
양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가요?”
치앤은 다시 한번 양천에게 진심을 묻는다. 그를 시험한다. 남자의 육욕을 저울질한다.
“그래.”
“정말?”
“그래야지.”
“갈게요…….”
치앤은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양천은 잘 알고 있었다. 린치앤의 습관과 감정의 역치는 전부 그가 라이를 그리며 만들어 낸 것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남자가 죽은 여자의 그림자가 되어 흉내를 내다가 이제는 제 본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풀이 죽은 것은 라이도 아니고, 치앤도 아니고, 치앤의 몸을 빌려 추억을 덧씌운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쉬라이의 잔상이다. 리양천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모른 체하며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화신을 키웠다. 순전히 이제는 썩어 버려 형체조차 가물가물한 오랜 사랑 때문에.
끼익. 문이 닫히고 복도를 걸어가는 쓸쓸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천은 문을 등진 채로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발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양천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힘껏 빨아들이는데 치앤이 손도 대지 않은 우유 잔이 눈에 들어왔다. 양천은 우유 잔을 잡았다. 이미 식어 미지근했다.
***
자두나무 롱탕은 젊은 연인이 설익은 사랑을 처음 시작하던 곳이다.
쉬라이와 린바이화는 1984년 따사로운 초봄, 봄비가 내리는 타이캉루에서 처음 만났고, 비가 그치자 사랑에 빠졌고, 서로 두 손을 잡고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이듬해 칠석(七夕), 두 사람의 아이인 린치앤이 태어났다.
린치앤은 봄이면 자두나무 꽃잎을 으깨며 놀았다. 여름이면 설익은 자두를 따고자 나무에 오르기도 했다. 그 시절, 세상 만물이 어린 치앤의 놀잇감이었다.
쉬라이는 치앤이 두 다리로 땅을 우뚝 짚고 섰을 때부터 매해, 아이의 키를 벽에다가 못으로 그었다. 린바이화는 자두나무 꽃과 들풀을 엮어 쉬라이와 치앤에게 화관을 만들어 주었다. 가난하고 힘든 시기였지만, 가슴속에 사랑과 희망이 가득했다. 그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치앤은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1992년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다만 세월을 고스란히 입어 칙칙한 화강석 문틀과 쪽빛 나무문이 낯익을 뿐이다. 싸구려 장난감처럼 새빨갛게 칠한 벽돌이 어쩐지 정겨울 뿐이다.
마침내 치앤은 롱탕 문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이 닿자 마법처럼 저절로 문이 열렸다.
끽끽거리는 을씨년스러운 소릴 내며 문이 열리고, 말쑥한 차림새의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위로 쭉 뻗은 짙은 눈썹에, 우뚝 선 콧대가 단단한 턱과 맞물리는 시원스러운 외모였다. 미간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주름과 가늘게 뜬 눈이 야릇한 느낌을 줬다. 그는 치앤보다 키가 작았으나 날씬한 몸매가 제법 탄탄하였으며 자세는 대나무처럼 곧았다.
얼떨결에 시선이 마주치자 치앤과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치앤은 곧바로 손목을 꺾어 여행용 가방을 기울이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도 몸을 기울였다.
맞닥뜨린 두 사람은 잠깐 어색하게 웃다가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둘은 잠깐 시선을 교환하며 서먹하게 웃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각자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두 사람은 맞닥뜨렸다.
“아니, 저기.”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잠긴 목소리로 남자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급한 일이 있는지 일분일초가 아까운 눈치였다. 치앤은 남자의 조급함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였고, 두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지.”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두 어깨가 닿을 찰나 가까스로 몸을 멈췄다.
“아, 그러니까.”
남자는 서로 거듭 부딪치는 것에 당황한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두 사람은 방향을 틀어 걸음을 내디뎠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번에는 서로 코가 닿을 뻔했다. 더는 이 우스운 승강이를 벌일 여유가 없었던 남자는 대뜸 치앤의 가방을 낚아채, 안으로 들여놓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치앤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서서 눈만 깜빡였다. 남자가 헛기침을 뱉으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럼 먼저.”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롱탕 밖으로 뛰쳐나갔다. 웅덩이가 철벅철벅 소리 내며 울었다.
치앤은 남자가 떠난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의 모습이 치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치앤은 그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은 가방의 손잡이를 쥐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사…….”
드르륵, 드르륵, 닳아 빠진 바퀴가 아픈 소릴 내며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치앤은 지저분하고 좁은 롱탕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비좁은 골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과 턱 끝에 매달린 땀방울이 과거 이곳에 살았던 어떤 젊은 부부와 아이의 잔상을 지워 버렸다.
린치앤은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가슴이 벅찬 까닭은 그저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꼭 천사 같아서라고만 생각했다.
8) 叔叔(shūshu) 아저씨. 부모와 동년배이거나 자신보다 연상의 남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으로, 주로 어린아이가 어른을 부르는 말이다.
9) 원문은 “我的小茜.” 중국에서는 또래, 혹은 나이 어린 사람의 이름이나 성(性) 앞에 ‘小(xiǎo)’를 붙여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이후에 xiǎo를 사용하는 애칭은 원음을 그대로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