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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레이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앤에게로 향했다. 가까이 가 보니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你问我爱你有多深、 我爱你有几分(당신은 내게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죠)。 我的情也真、我的爱也真、 月亮代表我的心(내 감정은 진실하고, 내 사랑도 진실이랍니다.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레이옌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순간 자신이 1980년대 언젠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낡은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는 구닥다리가 되어 버린 옛 유행가의 뒤처진 멜로디와 뿌옇게 보이는 청순하고 촌스러운 얼굴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테이블을 뒤덮은 그림자에 치앤이 흥얼거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빨갛게 익은 얼굴이 자신을 향하며 갸웃거리자, 레이옌은 웃고 말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남자는 서 있을 때보다 작아 보였고, 그 잔뜩 굽은 어깨와 등이 그리는 곡선이 팽팽하게 곤두섰다가 푹 꺼지는 모양새가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눈부셔.’

치앤은 레이옌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의 손가락은 유독 가느다랗고 길었다. 손가락 사이 둥글게 튀어나온 이마를 보고 레이옌은 또 웃고 말았다.

“이름이 뭐예요?”

테이블 위에 찻잔과 접시를 놓으며 레이옌이 물었다.

“린치앤.”

치앤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오른손을 더듬거리며 포크를 찾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레이옌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치앤?”

“치앤. 꼭두서니 치앤(茜).”

“이상한 이름이네.”

“그런가요.”

“…….”

“…….”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보통 여자 이름으로 쓰는데, 잘 어울리네요.”

그 말대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는 치앤이라는 이름이 제 옷처럼 잘 어울렸다.

“몰라요.”

치앤이 얼굴을 덮고 있는 손을 사르르 벌렸다.

“됐다.”

손가락 사이로 눈을 마주치며 레이옌은 시원스레 말을 이었다. 치앤의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 이름은 안 물어봐요?”

포크 위에 알이 작은 블루베리를 신중하게 담던 치앤은 레이옌의 느닷없는 물음에 그만 깜짝 놀라 포획물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목덜미에 뻗은 핏줄이 긴장으로 불거졌다. 치앤은 순식간에 굴러떨어진 블루베리 한 알을 뾰족한 포크의 끝으로 쿡 찌르면서 부랴부랴 “물어볼게요.” 하고 말했다.

“천레이옌이에요. 글자는 이렇게 써요.”

레이옌은 빳빳한 냅킨 위에 볼펜으로 ‘陳藟灩’이라고 썼다. 번체자였다.

“아버지께서 장약허*20의 「봄 강가에 꽃 피고 달 밝은 밤(春江花月夜)」을 좋아하셨거든요. 거기에 ‘달빛은 넘치는 물결에 따라 천리만리 곱게 번지니(灩灩隨波千萬里).’라는 구절이 나와요. 삼수변에 번체자로는 획수만 31획. 아버지께서 과하셨죠.”

레이옌이 이어서 말했다.

“간체자로는 이렇게 써요.”

레이옌은 냅킨 위에 다시 ‘滟’이라고 썼다. 치앤은 접시에 든 푸른 멍으로 눈길을 돌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안 이상한 이름이네요.”

“보기보다 성격이 좀 있네.”

접시에다 블루베리를 으깨는 치앤을 뚫어지라 보며 레이옌이 심심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그러자 치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네?”

“됐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레이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저녁 무렵에는 결린 어깨와 목의 통증이 경추를 타고 올라와 두통을 일으킨다. 이 고질적인 통증은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하고 살아온 남자가 받은 불명예스러운 훈장이었다.

과묵한 두 남자는 억지로 화제를 던지며 느슨한 끈을 팽팽하게 당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서로를 알아 가려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들은 괜히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가식적인 대화보다 침묵이 편한 사람들이었다.

치앤은 아주 천천히 타르트를 먹었고, 레이옌은 핸드폰으로 시답잖은 기사를 읽으며 그렇게 단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 그들은 조금도 불편한 것을 느끼지 못했고,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따금 시선이 마주치면 치앤은 온몸의 신경 세포가 복작거리며 날뛰는 탓에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때마다 레이옌은 접시 주변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익숙하게 손으로 걷어 냈다. 그는 새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활기와 호기심에 스스로 놀라워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강렬한 감정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



오후 4시,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이 동그란 젊은 남자가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후에 가게에서 일하는 신웨이(欣伟)였다.

신웨이는 반년 전부터 아상블라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종종 주변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는 기분 나쁜 농담을 던지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일을 빨리 습득했고 손도 빨라서 그 정도 흠이야 거대한 백사장의 모래 한 알만 한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익숙한 인기척에 레이옌의 뾰족한 귀가 쫑긋 곤두섰다.

“저 왔습니다.”

어깨에 멘 가방을 풀며 신웨이가 레이옌에게 건성으로 인사했다.

“왔어.”

무덤덤하게 대꾸하며 레이옌은 다시 핸드폰에 집중했다. 신웨이는 곧장 카운터와 연결된 창고 겸 작은 휴식 공간으로 들어갔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레이옌과 똑같은 차림으로 카운터에 나타난 신웨이는 끔찍한 사고라도 목격한 것처럼 파랗게 질린 샤오핑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샤오핑은 앞치마 끄트머리에 삐져나온 실 한 오라기를 잡아 뜯고 있었다.

“핑핑*21, 왜 그러고 있어?”

신웨이가 우샤오핑을 애칭으로 불으며 물었다.

“저기 좀 봐, 웨이웨이(伟伟).”

앞치마에 삐져나온 실을 뜯다 말고 샤오핑이 레이옌을 가리키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뭘?”

눈을 가늘게 뜨며 신웨이는 샤오핑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샤오핑은 다시 실을 뜯기 시작했으나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헛손질만 반복했다. 샤오핑이 씨근덕거리는 것을 보다 못한 신웨이가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샤오핑은 라이터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미쳤나 봐. 벌써 한 시간 반째 저러고 있어. 오늘 처음 본 사람이랑.”

“내가 보기엔 네가 미친 것 같은데.”

신웨이가 픽 웃으며 빈정거렸다.

“콱― 진짜.”

샤오핑은 손날을 세우고 힘껏 팔을 휘두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신웨이는 도망가는 시늉을 하며 더 크게 웃었다.

‘내가 오늘 좀 이상하긴 한가.’

귀가 밝은 레이옌은 샤오핑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고, 수수께끼의 남자가 등장한 이후 자신의 행보를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옌은 오늘 자신이 그린 삶의 궤적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이제 그만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지나치게 평온해서 활기라곤 선인장의 가시처럼 뾰족하게 쪼그라든 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레이옌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쭉 기지개를 켜다가 치앤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말간 얼굴은 레이옌의 난폭한 본능을 자극했다. 그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이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파장을 일으켰다.

“엄청 깨작깨작 먹네요.”

“그래요?”

“네.”

“몰랐어요.”

레이옌은 일상으로 돌아가리라는 결심을 철회한다. 아니, 포기한다. 반이나 남은 타르트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우연히 제 앞에 나타난 흥미로운 대상을 좀 더 탐색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먹어서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런가요.”

가시 돋친 레이옌의 말에도 치앤은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이에 오기가 발동한 레이옌은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나갈래요? 종일 에어컨 바람 쐤더니 속이 좀 메스꺼운데.”

치앤을 떠볼 요량으로 레이옌이 넌지시 제안했다. 치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가 조용히 뒤로 밀려 나며 뽀얗게 쌓인 부스러기가 부서진 별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사람은 어떻게 울까?’

레이옌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점점 부푼다. 사람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잔잔한 호수 같은 남자의 우는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 레이옌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 나쁜 충동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는 어느새 제 권태로운 현실에서 유리(遊離)된 것이다.



***



늦은 오후는 푹푹 쪘다. 문을 열자마자 습기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어 빈틈없이 에워쌌다. 숨이 턱 막히는 후텁지근함에 인상을 찌푸린 레이옌은 차양 밑에 나무 의자를 갖다 놓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손으로 부채질하며 다리를 꼬았다. 자신은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데, 치앤은 이 정도 더위엔 끄떡없는지 차양 밖에 오도카니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거기 서 있지 마요.”

레이옌이 외쳤다. 치앤이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쪄 죽는다니까. 아주 모락모락 익고 싶나 봐요.”

“아니요.”

치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또다시 환상이 레이옌에게 찾아왔다. 호화로운 황금빛이 아닌 우중충하고 찌든 녹빛이 물든 처량한 고릿적의 거리와 얼굴을 희게 칠한 처량하고 우울한 남자의 흥얼거림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레이옌은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치앤은 열을 잔뜩 품은 바닥에 컨버스 밑창이 말랑말랑 녹기를 기대하면서 고집스럽게 버텼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거리를 빽빽하게 채운 수많은 사람 중 누구도 그런 치앤을 의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부 치앤이 사람이 아닌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스치며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치앤은 이 무더운 세상에 공기처럼 너울거렸고, 그와 아슬아슬하게 스친 사람조차 그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간 천레이옌은 두려움이 일었다. 기척을 감추고 그림자에 숨은 남자의 얼굴이 꼭 살인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레이옌은 간담이 서늘해져 눈을 비비고 다시 치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척 없는 살인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레이옌이 아는 유순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이리 좀 와요! 오늘 햇볕 장난 아니라고요. 그러다가 쓰러지면 나만 골치 아파지잖아.”

“네…….”

소리를 지르며 레이옌이 손짓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치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이렇게 양순한 표정을 짓다니. 레이옌은 또다시 남자의 엉엉 우는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오락가락하는 제 마음이 정상은 아니다 싶어 괜히 애꿎은 날씨를 탓했다.

터덜터덜 걸어온 치앤은 레이옌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야단맞은 아이처럼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는 무릎에 턱을 괸 채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레이옌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 흐려요.”

“그러네요.”

먼지가 뒤덮인 것처럼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레이옌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별로 안 뜨거워요.”

치앤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빛줄기가 그의 얼굴을 찬연하게 통과했다.

“내가 속에 열이 많은가 봅니다.”

레이옌은 몸을 숙여 치앤의 어깨 위로 제 머리를 비스듬히 걸었다. 기분 좋은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서글서글한 말투가 감미롭게 치앤에게 스며든다. 치앤은 웃었다. 무심코 치앤의 눈썹을 덮은 머리칼에 손을 뻗으며 레이옌이 말했다.

“배시시 웃기는.”









20) 張若虛(660 ~ 720) 당나라의 시인. 작품 대부분이 실전되어 현재는 두 수만 남아 있다.

21) 萍萍 우샤오핑의 애칭. 중국에서는 이름 글자 중 하나를 반복하여 애칭으로 부르는 일이 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