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7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벌레 우는 소리,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 웃고 울며 몸부림치는 소리, 건물을 부수는 굉음, 떳떳하지 못한 비명, 아이를 어르는 남자의 낑낑거림, 발끝을 곧추세우고 걷는 여자의 구둣발 소리, 컥컥거리는 늙은이, 그 무엇도 두 사람이 몸을 숨긴 작은 차양을 뚫지 못했다. 그들은 그 평온 속에서 서로에게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레이옌은 핸드폰을 붙잡고 자신이 좋아하는 우스운 동물 사진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고, 치앤은 그런 레이옌을 쳐다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레이옌의 눈 밑에 난 연한 갈색 점을 발견했을 때, 치앤은 근사한 생일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환상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예컨대 어설프게 움직이는 로봇,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녹음된 메시지를 말하는 인형, 자동차 경적이 울리면 이어지는 격렬한 싸움, TV 안에서 오락가락하는 크고 작은 사람들, 천장에 매립한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 같은 것들.
그래서 치앤은 레이옌의 점을 꾹 누르면 새해 불꽃놀이처럼 휘황찬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두근거렸다. 하지만 애써 그 충동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둡고 사람 대하는 일이 어색하다고 할지라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만지작거려선 안 된다는 것 정돈 알았고, 무엇보다 레이옌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빠른 속도로 힘껏 깎아 낸 조각처럼 선이 날카롭고 섬세하게 생긴 남자는 자신이 힘만 살짝 실어도 파스스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순전히 치앤만의 생각이었다. 만약에 레이옌이 치앤이 이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 왔듯이 신랄한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모두가 질색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괴팍한 남자 천레이옌은 사람들과 그리 교류가 많지 않았으나, 그런 그에게도 끈질기게 구애 아닌 구애를 시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3년 전 이곳에 온 난징(南京) 출신 사진작가 황리(黄丽)였다.
황리는 레이옌을 처음 보자마자 홀딱 반해 제발 자신의 피사체가 되어 달라고 애원했다. 당연히 레이옌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레이옌의 외모에 찬사를 쏟아부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황리의 모습은 이제 이곳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상이 되었고, 레이옌은 그 고백을 황리만의 독특한 안부 인사처럼 여겼다.
종종 황리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저 그런 작가라고 말했다. 타인이 저를 헐뜯기 전에, 제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려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지 않으려 서글픈 방어벽을 친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무명 작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서, 아로마 캔들과 석고 방향제를 만들어 팔았고, 작은 장식 조각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실은 온갖 잡동사니가 즐비한 잡화점처럼 보였다.
황리는 자신의 작은 왕국에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열정을 쏟아부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황리는 어디서 용케도 주워 온 커다란 나무에 ‘GOGO’라는 글씨를 둥글게 새긴 입간판을 세웠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작업실을 고고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가*22라고 부르며 골려 댔다.
그 시작은 레이옌이었다. 그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코 툭 내뱉은 말이 빠르게 퍼졌다. 그래서 황리는 두고두고 이를 갈며 조만간 복수하겠노라고 이를 갈았지만, 지옥 불처럼 타오르는 복수심은 레이옌의 신경질적인 얼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황리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간만에 마음에 쏙 드는 고양이 사진을 찾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옌과 미소가 번진 그의 얼굴에 덩달아 미소 지으며 가슴을 졸이고 있는 치앤 앞에 황리가 나타났다.
“어?”
레이옌이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어?”
황리가 레이옌의 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휴…….” 레이옌은 얼굴을 싸매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리는 싱글벙글이었다.
치앤은 제 인생에 불시착한 또다른 낯선 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리는 노란색 프릴이 달린 민소매 셔츠에 새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절로 시원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팔에 건 묵직한 비닐봉지를 방정맞게 흔들며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천 사장, 나 왔어. 그리웠지?”
“아까 아침에도 왔잖아. 할 일이 그렇게 없어? 걸핏하면 드나들게.”
지나치게 명랑한 황리의 모습에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진 레이옌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정도면 환대다. 황리는 푸대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으며 쪼그려 앉은 치앤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 사장만 할까. 이쪽은 아는 사람? 못 보던 얼굴인데.”
“오늘 처음 본 사람. 린치앤 씨. 저기, 이쪽은 황리라고 이 근방에서 장사하는 사람이에요.”
“안녕, 황리예요. 뉴 페이스 환영해.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네?”
붙임성 좋은 황리 때문에 다소 놀란 치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앞으로 잘나가는 사진작가가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응원해 주세요. 잘 풀리면 내가 쏜다!”
“그만해라, 좀. 붙임성이 아무리 좋아도 정도가 있지. 사람 불편하게.”
“뭐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지.”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레이옌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난 치앤은 끙끙 앓는 소릴 내며 다리를 펴고 주저앉았다. “거참.” 레이옌이 타박하며 슬쩍 그의 어깨를 건드리자, 치앤이 움찔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두 사람 왜 이러고 있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리가 물었다. 레이옌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뜸을 들였다. 기다리다 지친 황리가 발을 까딱이며 재촉하고서야 레이옌은 입맛을 다시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말하자면 좀 긴데, 나중에 할 일 없거든 말해 줄게.”
“난 또 천 사장 집에서 사람 보낸 줄 알았지.”
레이옌의 표정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에 황리는 내심 안도하며 맞장구치듯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레이옌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레이옌은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의 좁은 어깨는 유난스레 고달프게 보였고, 또 괜히 마음이 애틋해졌다.
레이옌은 황리에게 부질없는 희망과 여지를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자의 샘솟는 사랑을 완전히 모른 체하며 내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황리와는 가깝게 지내며 남들과는 다른 묘한 우정을 키워 왔다.
그들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고, 레이옌은 황리에게 자신이 상하이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적당히 가감하여 말해 주었다. 전부는 아니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조부에게 지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가 고작이었다. 또 여동생이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말했으나, 아버지가 그 사실을 몇 달이고 숨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요즘은 잠잠하다.”
에둘러 대답하면서 레이옌은 치앤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행이 쥐가 풀린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제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천 사장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나 봐.”
“그래야지.”
레이옌은 툭 끊어 말을 내뱉고는 무심코 치앤의 정수리에 앉은 가느다란 실오라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런 경계심 없이 치앤은 희푸른 뒷목을 내보이며, 레이옌의 손이 실오라기를 떼어 내길 기다렸다.
레이옌의 단단한 손끝이 가뿐하게 실오라기를 튕겨 냈다. 치앤의 광대뼈 언저리가 이른 저녁의 노을빛으로 넘실거렸다. 불쑥 레이옌의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귀가 먹먹해진 나머지 그는 허둥지둥 손을 거두었다.
“늙으면 독기도 좀 빠지고 그래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살 순 없잖아. 차라리 죽든가.”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황리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고, 신경을 온통 레이옌에게 기울이고 있던 치앤이 그 말을 포착했다.
“아버지?”
치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그런가. 오늘 어째 영 이상하네…….’
레이옌은 못 들은 체하며 작게 헛기침했다. 치앤의 무구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괜히 곤혹스러워져서 어금니가 갈릴 정도로 이를 깨물었다. 신기하게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이런 사적인 얘기를 흘려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우연하게 흘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치앤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열없이 웃었다. 그건 마치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 역시 나를 모르지만, 당신의 비밀을 애써 들추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같았다.
“이 남자가! 부모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황리가 레이옌을 타박했다.
“우리 아버진 그 고집 좀 어떻게 해야 해.”
레이옌은 누구에게도 3년 전, 동생이 죽었던 바로 그 병상 위에 제 아버지가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 있단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인근에서 레이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황리도 그의 아버지가 멀쩡히 베이징에 있는 줄로 알았다.
이제는 열렬한 사랑이며, 슬픔이며, 기쁨이며, 차고 넘치는 감정에 허우적거리며 숨이 차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다시는 누구와도 절망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절망을 깊게 안다는 것은, 원치 않아도 같은 절망을 짊어져야 하는 막막한 미래를 약속하는 법이니까.
“더운데 먼저 들어가. 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갈게.”
레이옌이 황리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삐거덕 울었다. 치앤은 귀를 틀어막았다.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 이후로, 그는 소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냐, 그럴 시간은 없어.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
황리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그럼 왜 왔어?”
“짠! 이모가 양메이*23를 잔뜩 보내 줘서 천 사장한테 나눠 주려고 왔지.”
레이옌이 퉁명스럽게 묻자 그녀는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잘 가.”
레이옌은 양메이가 가득 든 비닐만 얄밉게도 잽싸게 챙기고 쌀쌀하게 웃었다. 황리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매정한 인간. 그래도 사랑해. 네 잘생긴 얼굴을.”
“빈손으로 보내긴 그러니까, 안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가지고 가.”
건성으로 가게 안을 가리키며 레이옌이 덧붙였다. 황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살짝 튀어나온 제 배를 살살 주무르더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됐어. 나 요즘 다이어트하는 거 몰라서 그래? 천 사장 소원대로 갈 거야. 간다고. 나중에 다시 올게.”
“응, 아니야. 꼭 다시 올 필요 없어. 잘 가. 양메이는 고마워.”
레이옌은 그 어느 때보다 산뜻하게 웃으며 그녀를 내쫓다시피 전송했다. 황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22) 嘎嘎(gāgā) 의성어. 우리나라의 인터넷 은어인 ‘ㅋㅋㅋ’ 와 비슷하게 쓰인다.
23) 杨梅 소귀 열매. 중국 남쪽 지방에서 여름 한철 수확하는 과일이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벌레 우는 소리,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 웃고 울며 몸부림치는 소리, 건물을 부수는 굉음, 떳떳하지 못한 비명, 아이를 어르는 남자의 낑낑거림, 발끝을 곧추세우고 걷는 여자의 구둣발 소리, 컥컥거리는 늙은이, 그 무엇도 두 사람이 몸을 숨긴 작은 차양을 뚫지 못했다. 그들은 그 평온 속에서 서로에게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레이옌은 핸드폰을 붙잡고 자신이 좋아하는 우스운 동물 사진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고, 치앤은 그런 레이옌을 쳐다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레이옌의 눈 밑에 난 연한 갈색 점을 발견했을 때, 치앤은 근사한 생일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환상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예컨대 어설프게 움직이는 로봇,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녹음된 메시지를 말하는 인형, 자동차 경적이 울리면 이어지는 격렬한 싸움, TV 안에서 오락가락하는 크고 작은 사람들, 천장에 매립한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 같은 것들.
그래서 치앤은 레이옌의 점을 꾹 누르면 새해 불꽃놀이처럼 휘황찬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두근거렸다. 하지만 애써 그 충동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가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둡고 사람 대하는 일이 어색하다고 할지라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만지작거려선 안 된다는 것 정돈 알았고, 무엇보다 레이옌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빠른 속도로 힘껏 깎아 낸 조각처럼 선이 날카롭고 섬세하게 생긴 남자는 자신이 힘만 살짝 실어도 파스스 부서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순전히 치앤만의 생각이었다. 만약에 레이옌이 치앤이 이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 왔듯이 신랄한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모두가 질색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괴팍한 남자 천레이옌은 사람들과 그리 교류가 많지 않았으나, 그런 그에게도 끈질기게 구애 아닌 구애를 시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3년 전 이곳에 온 난징(南京) 출신 사진작가 황리(黄丽)였다.
황리는 레이옌을 처음 보자마자 홀딱 반해 제발 자신의 피사체가 되어 달라고 애원했다. 당연히 레이옌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레이옌의 외모에 찬사를 쏟아부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황리의 모습은 이제 이곳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상이 되었고, 레이옌은 그 고백을 황리만의 독특한 안부 인사처럼 여겼다.
종종 황리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저 그런 작가라고 말했다. 타인이 저를 헐뜯기 전에, 제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려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지 않으려 서글픈 방어벽을 친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무명 작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서, 아로마 캔들과 석고 방향제를 만들어 팔았고, 작은 장식 조각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실은 온갖 잡동사니가 즐비한 잡화점처럼 보였다.
황리는 자신의 작은 왕국에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열정을 쏟아부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황리는 어디서 용케도 주워 온 커다란 나무에 ‘GOGO’라는 글씨를 둥글게 새긴 입간판을 세웠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작업실을 고고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가*22라고 부르며 골려 댔다.
그 시작은 레이옌이었다. 그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코 툭 내뱉은 말이 빠르게 퍼졌다. 그래서 황리는 두고두고 이를 갈며 조만간 복수하겠노라고 이를 갈았지만, 지옥 불처럼 타오르는 복수심은 레이옌의 신경질적인 얼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그라지고 말았다. 황리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간만에 마음에 쏙 드는 고양이 사진을 찾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옌과 미소가 번진 그의 얼굴에 덩달아 미소 지으며 가슴을 졸이고 있는 치앤 앞에 황리가 나타났다.
“어?”
레이옌이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어?”
황리가 레이옌의 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휴…….” 레이옌은 얼굴을 싸매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리는 싱글벙글이었다.
치앤은 제 인생에 불시착한 또다른 낯선 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리는 노란색 프릴이 달린 민소매 셔츠에 새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절로 시원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팔에 건 묵직한 비닐봉지를 방정맞게 흔들며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천 사장, 나 왔어. 그리웠지?”
“아까 아침에도 왔잖아. 할 일이 그렇게 없어? 걸핏하면 드나들게.”
지나치게 명랑한 황리의 모습에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진 레이옌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정도면 환대다. 황리는 푸대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키득키득 웃으며 쪼그려 앉은 치앤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 사장만 할까. 이쪽은 아는 사람? 못 보던 얼굴인데.”
“오늘 처음 본 사람. 린치앤 씨. 저기, 이쪽은 황리라고 이 근방에서 장사하는 사람이에요.”
“안녕, 황리예요. 뉴 페이스 환영해.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네?”
붙임성 좋은 황리 때문에 다소 놀란 치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앞으로 잘나가는 사진작가가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응원해 주세요. 잘 풀리면 내가 쏜다!”
“그만해라, 좀. 붙임성이 아무리 좋아도 정도가 있지. 사람 불편하게.”
“뭐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지.”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레이옌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난 치앤은 끙끙 앓는 소릴 내며 다리를 펴고 주저앉았다. “거참.” 레이옌이 타박하며 슬쩍 그의 어깨를 건드리자, 치앤이 움찔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두 사람 왜 이러고 있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리가 물었다. 레이옌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뜸을 들였다. 기다리다 지친 황리가 발을 까딱이며 재촉하고서야 레이옌은 입맛을 다시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말하자면 좀 긴데, 나중에 할 일 없거든 말해 줄게.”
“난 또 천 사장 집에서 사람 보낸 줄 알았지.”
레이옌의 표정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에 황리는 내심 안도하며 맞장구치듯이 말을 이었다. 그녀는 레이옌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레이옌은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의 좁은 어깨는 유난스레 고달프게 보였고, 또 괜히 마음이 애틋해졌다.
레이옌은 황리에게 부질없는 희망과 여지를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여자의 샘솟는 사랑을 완전히 모른 체하며 내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황리와는 가깝게 지내며 남들과는 다른 묘한 우정을 키워 왔다.
그들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고, 레이옌은 황리에게 자신이 상하이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적당히 가감하여 말해 주었다. 전부는 아니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조부에게 지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가 고작이었다. 또 여동생이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말했으나, 아버지가 그 사실을 몇 달이고 숨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요즘은 잠잠하다.”
에둘러 대답하면서 레이옌은 치앤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행이 쥐가 풀린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제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천 사장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나 봐.”
“그래야지.”
레이옌은 툭 끊어 말을 내뱉고는 무심코 치앤의 정수리에 앉은 가느다란 실오라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런 경계심 없이 치앤은 희푸른 뒷목을 내보이며, 레이옌의 손이 실오라기를 떼어 내길 기다렸다.
레이옌의 단단한 손끝이 가뿐하게 실오라기를 튕겨 냈다. 치앤의 광대뼈 언저리가 이른 저녁의 노을빛으로 넘실거렸다. 불쑥 레이옌의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귀가 먹먹해진 나머지 그는 허둥지둥 손을 거두었다.
“늙으면 독기도 좀 빠지고 그래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살 순 없잖아. 차라리 죽든가.”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황리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고, 신경을 온통 레이옌에게 기울이고 있던 치앤이 그 말을 포착했다.
“아버지?”
치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그런가. 오늘 어째 영 이상하네…….’
레이옌은 못 들은 체하며 작게 헛기침했다. 치앤의 무구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괜히 곤혹스러워져서 어금니가 갈릴 정도로 이를 깨물었다. 신기하게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이런 사적인 얘기를 흘려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우연하게 흘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치앤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열없이 웃었다. 그건 마치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 역시 나를 모르지만, 당신의 비밀을 애써 들추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같았다.
“이 남자가! 부모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황리가 레이옌을 타박했다.
“우리 아버진 그 고집 좀 어떻게 해야 해.”
레이옌은 누구에게도 3년 전, 동생이 죽었던 바로 그 병상 위에 제 아버지가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 있단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인근에서 레이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황리도 그의 아버지가 멀쩡히 베이징에 있는 줄로 알았다.
이제는 열렬한 사랑이며, 슬픔이며, 기쁨이며, 차고 넘치는 감정에 허우적거리며 숨이 차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다시는 누구와도 절망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절망을 깊게 안다는 것은, 원치 않아도 같은 절망을 짊어져야 하는 막막한 미래를 약속하는 법이니까.
“더운데 먼저 들어가. 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갈게.”
레이옌이 황리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삐거덕 울었다. 치앤은 귀를 틀어막았다.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 이후로, 그는 소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냐, 그럴 시간은 없어.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
황리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그럼 왜 왔어?”
“짠! 이모가 양메이*23를 잔뜩 보내 줘서 천 사장한테 나눠 주려고 왔지.”
레이옌이 퉁명스럽게 묻자 그녀는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잘 가.”
레이옌은 양메이가 가득 든 비닐만 얄밉게도 잽싸게 챙기고 쌀쌀하게 웃었다. 황리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매정한 인간. 그래도 사랑해. 네 잘생긴 얼굴을.”
“빈손으로 보내긴 그러니까, 안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가지고 가.”
건성으로 가게 안을 가리키며 레이옌이 덧붙였다. 황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살짝 튀어나온 제 배를 살살 주무르더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됐어. 나 요즘 다이어트하는 거 몰라서 그래? 천 사장 소원대로 갈 거야. 간다고. 나중에 다시 올게.”
“응, 아니야. 꼭 다시 올 필요 없어. 잘 가. 양메이는 고마워.”
레이옌은 그 어느 때보다 산뜻하게 웃으며 그녀를 내쫓다시피 전송했다. 황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22) 嘎嘎(gāgā) 의성어. 우리나라의 인터넷 은어인 ‘ㅋㅋㅋ’ 와 비슷하게 쓰인다.
23) 杨梅 소귀 열매. 중국 남쪽 지방에서 여름 한철 수확하는 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