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어색한 공기가 마차 안을 가득 메웠다.
노기사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만 있을 뿐이었지만, 그게 이 마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사실 노기사의 저 사람 머리통만한 굵기의 팔통을 보고 있자면,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겁을 먹을 게 분명했다.
덜컹덜컹.
침묵을 깬 것은 마차의 움직임이었다.
잘 정돈된 도로를 빠져나온 것인지, 마차의 바퀴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마차 전체가 조금씩 상하로 움직였다.
마차 특유의 안 좋은 승차감이 비포장도로와 만나자, 내가 마차를 타고 있는지, 아니면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저…….”
내 말에 감겨 있던 노기사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노기사의 동공은 나이에 맞지 않게 맑고 초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자위 안쪽은 강한 의지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압박감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뭔가?”
똑부러진 목소리.
젊은 여성들이 환장한다는, 낮게 깔린 중후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매료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온화한 말투까지, 그야말로 상대를 무장 해제하기에 적합한 목소리라 여겼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수사관이었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범죄자들이 순수히 자백을 했을지도 몰랐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흐음…….”
내 말을 들은 노기사가 한 손으로 자신의 턱끝을 어루만졌다.
그윽한 눈빛의 그와 시선 교환을 하고 있자니, 없던 죄라도 만들어 내서 당장 실토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자네라면 그리 말할 줄 알고 있었네.”
뭐지?
노기사의 말투를 들어 보니 나와 안면식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단순히 지인이 아니라 친인척일지도 몰랐다.
아까 나를 2층 방에서 밖으로 집어 던진 아버지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노기사나, 둘 다 근육이라는 갑옷을 온몸에 두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다.
“저어… 혹시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노기사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봤다.
우락부락한 팔근육이 나를 협박하는 듯 했고, 인자한 얼굴은 나를 무장 해제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매일매일 부장 앞에 소환되어 1차로 혼나고, 이후 팀으로 돌아와 과장한테 2차로 깨지는 IT 계열 회사 생활을 한 나에게 이 정도의 압박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라면 모를까, 대리(진)까지 승진한 나에게 있어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설마 대리(진)이 될 때까지 여자친구를 한 번도 못 사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갑자기 눈물이 마음속 한편에 자리잡은 무언가를 살짝 적시자, 근육과 목소리에 위축되어 있던 감정이 회복되었다.
“호오.”
내가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계속 아이컨택을 하고 있자, 노기사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턱밑을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나야 자네의 악명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자네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후작가의 장남이 서부 순회순찰대의 연대장을 모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 말을 듣고 노기사를 다시 한번 위아래로 살펴보니, 견갑 아래로 노출된 셔츠에 무궁화 마크가 세 개가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계급 마크는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타군의 상급자를 보고 어떤 계급인지 쉬이 유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무궁화 마크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연대장이라는 말과 계급장을 보았을 때, 한국군의 구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보았다.
“다들 자네를 보고 후작님의 명성을 더럽히는 못난이라고 했지. 누군가는 그저 귀족의 의무를 수행할 생각 없이 권리만 누리고자 하는 멍청이라고 했고. 나 역시 자네를 겁쟁이라고 생각했네.”
“…겁쟁이 말이십니까?”
초면부터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이 사람.
혹시라도 내 상관이 될지도 모르니 최대한 참아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되질문에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신 후, 흉갑과 요갑 사이를 잇는 연결부에서 하얀색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종이였다.
하지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종이가 아니라, 서류의 위쪽 끄트머리에 금색으로 자수가 새겨진 그런 문서였다.
“입대… 지원서?!”
따로 무슨 특별한 과정을 거친 건가 싶을 정도로 정성들여 수기로 작성한 듯한 글씨체.
누가 봐도 공문서라는 생각이 들 법한 이 문서의 정체는 바로 입대지원서였다.
― 루겐바인 후작가의 장남, 아멜 루겐바인은 9월 27일부로 서부 순회순찰대(Western Circuit Rangers)에 장교 임관을 희망하는 바입니다.
— 작성일 동년 9월 24일.
아씨, 미친놈인가?
아니, 무슨 입대지원서를 3일 전에 작성해서 제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도 그거지만, 군도 웃기네.
무슨 훈련소 입대도 아니고, 장교 임관을 희망한다니까 바로 입대시켜 주는 행정처리는 뭐냐고.
처리 속도는 또 왜 이렇게 빠른건데.
서류를 3일 전에 제출했는데, 희망 날짜에 입영 마차가 와서 픽업해 간다고?
이게 진짜 입영 마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군에서 운영하는 수송 수단은 대량의 병력을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가축 수송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마차는 단순히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 용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푹신한 쿠션과 자수가 새겨진 커튼.
마감처리가 전혀 거칠지 않고 깔끔하게 되어 있는 걸로 봐서 이 마차는 제법 고급 마차처럼 보였다.
결정적인 것은 둘만 탔는데도 더 이상 여분의 좌석이 없다는 점이었다.
마차라고는 관광지에서 운영하는 꽃마차밖에 타 본 적 없지만, 최소한 그때의 꽃마차보다 이 마차가 훨씬 더 퀄리티가 좋아 보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스마트폰 시대에 뒤쳐지질 않을 정도로 빠른 이 일처리 속도는 뭐지?
이국의 땅에서 한국 공기관의 일처리 속도를 떠올리게 될 줄이야.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발현된 향수병(?)에 기분이 많이 얼떨떨했다.
“죄송합니다, 연대장님. 전날 술을 거하게 마셔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헷갈렸습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연대장은 나의 이 말에 크게 실망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는 마치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 몸의 원주인은 술과 악연이 깊은 듯싶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방금 그건 내 실언에 속하는 부분이었다.
이미 입대를 하는 게 확정된 지금, 이 이상 연대장에게 감점당할 수는 없었다.
말뚝을 박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관심장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싸늘하게 나를 쳐다보던 연대장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나도 연대장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는데, 한국의 현역들보다 훨씬 더 굵은 팔뚝과 달리 얼굴은 나이에 걸맞게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지금 이 마차는 연대 본부로 향하고 있네. 뛰어내리려면 지금이 기회야. 어떻게 하겠나?”
“전 자원 임관한 장교입니다. 사나이가 했던 말을 물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 말에 연대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입대지원서를 다시 품 안에 회수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임관을 환영하네, 아멜 소위.”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대장님.”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자네가 나랑 악수를 한 시점에서 자네는 임관이 확정되었네. 이미 자네는 군인이란 말일세.”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흥미롭군.”
“뭐가 말씀이십니까?”
언제까지고 악수를 한 채로 있을 수는 없기에 손을 놓고 연대장의 말을 경청했다.
“…사람은 역시 직접 겪어 봐야 아는 건가?”
“예?”
“아멜 루겐바인에 대한 악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제국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나 역시 자네에 대한 뒷소문 많이 들었다네. 하지만 뭐랄까… 소문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뭐, 지금 본 것만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 계속 두고 보겠네. 아무튼 1년 뒤면 제대하겠지만, 그래도 잘 지내 보세.”
“1년 뒤에 제대할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제가 군 생활에 재미를 붙여 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각이 잡힌 태도로 대답했다.
마치 휴가를 앞두고 당직사령에게 보고하는 이등병처럼 말이다.
무기력한 것보다 기왕이면 의욕이 넘치는 편이 더 보기 좋으니 나름대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물론, 말뚝 박을 생각 따윈 없었다.
복무기간이 고작 1년이라니.
엄청 짧네.
그런데 연대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똥을 씹은 듯한 표정.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왜 그러십니까?”
“으음, 자네 말일세… 의욕을 보이는 건 이해하네만, 애시당초 자네가 임관하게 된 계기가 있지 않은가.”
모르는데요.
입영지원서에도 사유가 적혀 있지 않은데다가, 이 몸의 기억 역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지원 동기 같은 건 전혀 몰랐다.
“솔직히 오늘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신교육을 제대로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네. 근데… 아무래도 그날에 무언가 일이 있었나 보군.”
“그날이라니…….”
“하지만 그게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그런 소문이 난 이상 다른 이들은 자네가 선을 넘은 거라고 생각할 걸세.”
“선… 말입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연대장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1년 동안 잘해 보게. 그러면 내 1년 뒤에 사단장님께 청원서라도 작성해 자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써 줄테니.”
예?
명예 회복이요?
아니아니, 잠깐만.
혹시 아멜, 이 녀석… 무슨 큰 사고 쳐서 군대로 도망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연대장의 말도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았다.
자원 입대지만 그리 좋지 못한 이유로 입대를 했다는 것을 알게되자,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졌다.
앞에서 의욕적인 모습을 괜히 보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연대장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죄짓고 군대로 도망가는 주제에 깐죽거리다니…….
그보다 더한 비호감은 없을 것이다.
대화가 끊기자, 다행히 연대장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니, 깨어 있는 건가?
연대장이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자, 나라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주위를 살피던 그때.
“이거라도 보겠나?”
눈을 감고 있던 연대장이 어떻게 내 움직임과 생각을 알았는지, 질문을 해 왔다.
연대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이름칸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장교수첩이었다.
“…임관을 희망하는 자라면 당연히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하네만, 자네라면 다를 줄 알았지.”
뭔가 연대장의 마음속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최저점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크흠, 자네가 그간 해 온 짓이 있으니, 이 정도는 이해하게.”
“앞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나에게 장교수첩을 건넨 연대장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나 역시 연대장과 무언가 상호작용을 하기보다는 그냥 장교수첩을 읽기로 했다.
그렇게 마치 롤러코스터 안에서 잠이 든 것과 같은 기분으로 이동하기를 몇 시간.
연대장이 나를 불러 깨웠다.
“아멜 소위.”
“예.”
마차 특유의 좋지 못한 승차감 때문인지,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아니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실질적으로는 처음 보는 문자를 독해하는 데에 따른 피로감 때문인지, 장교수첩의 내용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연대장의 부름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의외로 내가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차 안밖의 밝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밖은 탔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차에 처음 탔을 때가 울트라마린 블루 필터의 오전이라면, 지금은 세피아 필터가 적용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대 본부에 거의 다 도착했네. 한번 보겠나?”
연대장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으로 어디에 배정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연대 본부 정도는 눈에 익혀 둬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
연대장이 살짝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더니 그대로 마차 천장을 양손으로 밀었다.
그러자 마차 뚜껑이 마치 게딱지를 쪼개는 것처럼 반으로 벌어지면서 열렸다.
…이거 오픈 카였구나.
아무튼 연대장이 열어 준 뚜껑을 통해 고개를 밖으로 내밀자, 시원한 바람이 안면을 강타했다.
하지만 시속 60㎞, 고속 도로에서는 100㎞ 이상으로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감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인 내가 보기에는 마차의 속도는 많이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말의 움직임이나 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덜컹거리는 바퀴나 마차 몸체 때문에 실제로 따지면 시속 4㎞ 정도의 속도였겠지만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저기가 바로 본부일세.”
내 옆에 선 연대장이 저 멀리 평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대장이 가리킨 곳을 본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통 연대 본부라고 하면 지휘소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과 부대 내에 거주 중인 병력들을 위한 막사, 그리고 군수창고와 같은 각종 부대시설이 있다.
또한 부대를 보호하기 위한 철조망이나 장벽들, 그리고 정문에 위치한 위병소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게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많이 달랐다.
완전히 개방된 개활지에 일정한 간격을 놓고 게르(유목민이 사용하는 이동용 천막)와 군용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망치와 대못을 이용해 텐트의 끝부분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는 병력들이 다수 보이는 걸로 보아 아직 설치가 다 된 게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연대 본부라기보다는 난민 보호소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연대장님, 설마 저게 본부입니까?”
생각치도 못한 야전시설에 내가 당황해하며 묻자,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상황 같은 게 아니라, 저게 본부라는 말씀이시죠?”
“소위, 순회순찰대는 영방군이나 국토방위군처럼 고정된 지점을 지키는 부대가 아닐세. 제법 실망한 모양이네만, 우리 부대 이름이 왜 순회순찰대인지 생각하게나.”
순회순찰대라고 해서 수색대 비슷한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름 그대로 지속적으로 이동을 하는 방랑 부대라니.
사실 군대가 주둔지를 가지고 그 지역만을 전담해서 지키는 게 대세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국가 권력이 강해져 대규모의 상비군을 보유하기 전에 대부분의 국가가 사용한 방위 체계는 제승방략식이었다.
평상시에는 소규모 군대만 운용하다 상황이 발생하면 징집을 통해 대규모 병력을 모아 대처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해산되지 않는 소규모 정예부대는 담당해야 하는 구역이 부대 규모에 비해 넓었고, 주기적으로 방랑을 하는 게 상비군 제도가 생기기 이전의 일반적인 방위 체계였다.
그나저나 이러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라면 알겠지만, 사실 군용 텐트를 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게 일반병들이 사용하는 A형 텐트가 아니라 지휘부가 들어서게 될 지휘 천막일 경우에 그 난이도는 배가 된다.
하아, 안 봐도… 아니지, 오히려 알고 있기에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때였다.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격하게 들려왔다.
설마 마적이나 그런 건 아니겠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하지만 반대로 연대장은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마차를 쫓아오고 있던 것은 말을 탄 한 남자였다.
그는 연대장이 입고 있는 것과 동일한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일단은 아군은 맞는 것 같았다.
“연대장님!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쫓아오고 있던 군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차 뚜껑을 치며 마부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
그때.
“연대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클로로 마차에 붙겠습니다. 속도를 늦추지 말아 주십시오.”
그 말에 연대장이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군인이 엉덩이와 허리를 말 위로 살짝 들어올리더니 고삐를 한 손으로만 잡고 왼손을 마차를 향해 뻗었다.
핑!
이내 왼손 건틀렛에서 갈고리가 발사되더니 마차 프레임에 달라붙어 고정되었다.
군인은 잡고 있던 고삐를 놓고 오른손으로 건틀릿 위를 눌렀다.
그러자 건틀렛이 줄을 끌어당기면서 군인이 마차로 날아왔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은 잘 훈련된 군마인 듯, 그대로 야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연대장은 마차를 향해 날아온 군인을 잡아 자세 잡는 것을 도왔다.
마차 옆 프레임에 바짝 붙은 군인이 왼손으로 마차를 잡고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단결! 연대장님! 큰일입니다!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어색한 공기가 마차 안을 가득 메웠다.
노기사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만 있을 뿐이었지만, 그게 이 마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사실 노기사의 저 사람 머리통만한 굵기의 팔통을 보고 있자면,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겁을 먹을 게 분명했다.
덜컹덜컹.
침묵을 깬 것은 마차의 움직임이었다.
잘 정돈된 도로를 빠져나온 것인지, 마차의 바퀴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마차 전체가 조금씩 상하로 움직였다.
마차 특유의 안 좋은 승차감이 비포장도로와 만나자, 내가 마차를 타고 있는지, 아니면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저…….”
내 말에 감겨 있던 노기사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노기사의 동공은 나이에 맞지 않게 맑고 초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자위 안쪽은 강한 의지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압박감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뭔가?”
똑부러진 목소리.
젊은 여성들이 환장한다는, 낮게 깔린 중후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매료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온화한 말투까지, 그야말로 상대를 무장 해제하기에 적합한 목소리라 여겼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수사관이었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범죄자들이 순수히 자백을 했을지도 몰랐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흐음…….”
내 말을 들은 노기사가 한 손으로 자신의 턱끝을 어루만졌다.
그윽한 눈빛의 그와 시선 교환을 하고 있자니, 없던 죄라도 만들어 내서 당장 실토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자네라면 그리 말할 줄 알고 있었네.”
뭐지?
노기사의 말투를 들어 보니 나와 안면식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단순히 지인이 아니라 친인척일지도 몰랐다.
아까 나를 2층 방에서 밖으로 집어 던진 아버지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노기사나, 둘 다 근육이라는 갑옷을 온몸에 두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다.
“저어… 혹시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노기사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봤다.
우락부락한 팔근육이 나를 협박하는 듯 했고, 인자한 얼굴은 나를 무장 해제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매일매일 부장 앞에 소환되어 1차로 혼나고, 이후 팀으로 돌아와 과장한테 2차로 깨지는 IT 계열 회사 생활을 한 나에게 이 정도의 압박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라면 모를까, 대리(진)까지 승진한 나에게 있어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설마 대리(진)이 될 때까지 여자친구를 한 번도 못 사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갑자기 눈물이 마음속 한편에 자리잡은 무언가를 살짝 적시자, 근육과 목소리에 위축되어 있던 감정이 회복되었다.
“호오.”
내가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계속 아이컨택을 하고 있자, 노기사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턱밑을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나야 자네의 악명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자네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후작가의 장남이 서부 순회순찰대의 연대장을 모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 말을 듣고 노기사를 다시 한번 위아래로 살펴보니, 견갑 아래로 노출된 셔츠에 무궁화 마크가 세 개가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계급 마크는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타군의 상급자를 보고 어떤 계급인지 쉬이 유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무궁화 마크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연대장이라는 말과 계급장을 보았을 때, 한국군의 구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보았다.
“다들 자네를 보고 후작님의 명성을 더럽히는 못난이라고 했지. 누군가는 그저 귀족의 의무를 수행할 생각 없이 권리만 누리고자 하는 멍청이라고 했고. 나 역시 자네를 겁쟁이라고 생각했네.”
“…겁쟁이 말이십니까?”
초면부터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이 사람.
혹시라도 내 상관이 될지도 모르니 최대한 참아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되질문에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신 후, 흉갑과 요갑 사이를 잇는 연결부에서 하얀색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종이였다.
하지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종이가 아니라, 서류의 위쪽 끄트머리에 금색으로 자수가 새겨진 그런 문서였다.
“입대… 지원서?!”
따로 무슨 특별한 과정을 거친 건가 싶을 정도로 정성들여 수기로 작성한 듯한 글씨체.
누가 봐도 공문서라는 생각이 들 법한 이 문서의 정체는 바로 입대지원서였다.
― 루겐바인 후작가의 장남, 아멜 루겐바인은 9월 27일부로 서부 순회순찰대(Western Circuit Rangers)에 장교 임관을 희망하는 바입니다.
— 작성일 동년 9월 24일.
아씨, 미친놈인가?
아니, 무슨 입대지원서를 3일 전에 작성해서 제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도 그거지만, 군도 웃기네.
무슨 훈련소 입대도 아니고, 장교 임관을 희망한다니까 바로 입대시켜 주는 행정처리는 뭐냐고.
처리 속도는 또 왜 이렇게 빠른건데.
서류를 3일 전에 제출했는데, 희망 날짜에 입영 마차가 와서 픽업해 간다고?
이게 진짜 입영 마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군에서 운영하는 수송 수단은 대량의 병력을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가축 수송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마차는 단순히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 용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푹신한 쿠션과 자수가 새겨진 커튼.
마감처리가 전혀 거칠지 않고 깔끔하게 되어 있는 걸로 봐서 이 마차는 제법 고급 마차처럼 보였다.
결정적인 것은 둘만 탔는데도 더 이상 여분의 좌석이 없다는 점이었다.
마차라고는 관광지에서 운영하는 꽃마차밖에 타 본 적 없지만, 최소한 그때의 꽃마차보다 이 마차가 훨씬 더 퀄리티가 좋아 보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스마트폰 시대에 뒤쳐지질 않을 정도로 빠른 이 일처리 속도는 뭐지?
이국의 땅에서 한국 공기관의 일처리 속도를 떠올리게 될 줄이야.
생각치도 못한 타이밍에 발현된 향수병(?)에 기분이 많이 얼떨떨했다.
“죄송합니다, 연대장님. 전날 술을 거하게 마셔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헷갈렸습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연대장은 나의 이 말에 크게 실망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는 마치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 몸의 원주인은 술과 악연이 깊은 듯싶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방금 그건 내 실언에 속하는 부분이었다.
이미 입대를 하는 게 확정된 지금, 이 이상 연대장에게 감점당할 수는 없었다.
말뚝을 박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관심장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싸늘하게 나를 쳐다보던 연대장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나도 연대장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는데, 한국의 현역들보다 훨씬 더 굵은 팔뚝과 달리 얼굴은 나이에 걸맞게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지금 이 마차는 연대 본부로 향하고 있네. 뛰어내리려면 지금이 기회야. 어떻게 하겠나?”
“전 자원 임관한 장교입니다. 사나이가 했던 말을 물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 말에 연대장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입대지원서를 다시 품 안에 회수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임관을 환영하네, 아멜 소위.”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대장님.”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자네가 나랑 악수를 한 시점에서 자네는 임관이 확정되었네. 이미 자네는 군인이란 말일세.”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흥미롭군.”
“뭐가 말씀이십니까?”
언제까지고 악수를 한 채로 있을 수는 없기에 손을 놓고 연대장의 말을 경청했다.
“…사람은 역시 직접 겪어 봐야 아는 건가?”
“예?”
“아멜 루겐바인에 대한 악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제국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나 역시 자네에 대한 뒷소문 많이 들었다네. 하지만 뭐랄까… 소문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뭐, 지금 본 것만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 계속 두고 보겠네. 아무튼 1년 뒤면 제대하겠지만, 그래도 잘 지내 보세.”
“1년 뒤에 제대할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제가 군 생활에 재미를 붙여 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각이 잡힌 태도로 대답했다.
마치 휴가를 앞두고 당직사령에게 보고하는 이등병처럼 말이다.
무기력한 것보다 기왕이면 의욕이 넘치는 편이 더 보기 좋으니 나름대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물론, 말뚝 박을 생각 따윈 없었다.
복무기간이 고작 1년이라니.
엄청 짧네.
그런데 연대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똥을 씹은 듯한 표정.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왜 그러십니까?”
“으음, 자네 말일세… 의욕을 보이는 건 이해하네만, 애시당초 자네가 임관하게 된 계기가 있지 않은가.”
모르는데요.
입영지원서에도 사유가 적혀 있지 않은데다가, 이 몸의 기억 역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지원 동기 같은 건 전혀 몰랐다.
“솔직히 오늘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신교육을 제대로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네. 근데… 아무래도 그날에 무언가 일이 있었나 보군.”
“그날이라니…….”
“하지만 그게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그런 소문이 난 이상 다른 이들은 자네가 선을 넘은 거라고 생각할 걸세.”
“선… 말입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연대장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1년 동안 잘해 보게. 그러면 내 1년 뒤에 사단장님께 청원서라도 작성해 자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써 줄테니.”
예?
명예 회복이요?
아니아니, 잠깐만.
혹시 아멜, 이 녀석… 무슨 큰 사고 쳐서 군대로 도망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연대장의 말도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았다.
자원 입대지만 그리 좋지 못한 이유로 입대를 했다는 것을 알게되자,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졌다.
앞에서 의욕적인 모습을 괜히 보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연대장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죄짓고 군대로 도망가는 주제에 깐죽거리다니…….
그보다 더한 비호감은 없을 것이다.
대화가 끊기자, 다행히 연대장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니, 깨어 있는 건가?
연대장이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자, 나라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주위를 살피던 그때.
“이거라도 보겠나?”
눈을 감고 있던 연대장이 어떻게 내 움직임과 생각을 알았는지, 질문을 해 왔다.
연대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이름칸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장교수첩이었다.
“…임관을 희망하는 자라면 당연히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하네만, 자네라면 다를 줄 알았지.”
뭔가 연대장의 마음속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최저점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크흠, 자네가 그간 해 온 짓이 있으니, 이 정도는 이해하게.”
“앞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나에게 장교수첩을 건넨 연대장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나 역시 연대장과 무언가 상호작용을 하기보다는 그냥 장교수첩을 읽기로 했다.
그렇게 마치 롤러코스터 안에서 잠이 든 것과 같은 기분으로 이동하기를 몇 시간.
연대장이 나를 불러 깨웠다.
“아멜 소위.”
“예.”
마차 특유의 좋지 못한 승차감 때문인지,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아니면 머리로는 이해해도 실질적으로는 처음 보는 문자를 독해하는 데에 따른 피로감 때문인지, 장교수첩의 내용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연대장의 부름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의외로 내가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차 안밖의 밝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밖은 탔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차에 처음 탔을 때가 울트라마린 블루 필터의 오전이라면, 지금은 세피아 필터가 적용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대 본부에 거의 다 도착했네. 한번 보겠나?”
연대장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으로 어디에 배정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연대 본부 정도는 눈에 익혀 둬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
연대장이 살짝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더니 그대로 마차 천장을 양손으로 밀었다.
그러자 마차 뚜껑이 마치 게딱지를 쪼개는 것처럼 반으로 벌어지면서 열렸다.
…이거 오픈 카였구나.
아무튼 연대장이 열어 준 뚜껑을 통해 고개를 밖으로 내밀자, 시원한 바람이 안면을 강타했다.
하지만 시속 60㎞, 고속 도로에서는 100㎞ 이상으로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감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인 내가 보기에는 마차의 속도는 많이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말의 움직임이나 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덜컹거리는 바퀴나 마차 몸체 때문에 실제로 따지면 시속 4㎞ 정도의 속도였겠지만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저기가 바로 본부일세.”
내 옆에 선 연대장이 저 멀리 평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대장이 가리킨 곳을 본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통 연대 본부라고 하면 지휘소의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과 부대 내에 거주 중인 병력들을 위한 막사, 그리고 군수창고와 같은 각종 부대시설이 있다.
또한 부대를 보호하기 위한 철조망이나 장벽들, 그리고 정문에 위치한 위병소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게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많이 달랐다.
완전히 개방된 개활지에 일정한 간격을 놓고 게르(유목민이 사용하는 이동용 천막)와 군용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망치와 대못을 이용해 텐트의 끝부분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는 병력들이 다수 보이는 걸로 보아 아직 설치가 다 된 게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연대 본부라기보다는 난민 보호소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연대장님, 설마 저게 본부입니까?”
생각치도 못한 야전시설에 내가 당황해하며 묻자, 연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 상황 같은 게 아니라, 저게 본부라는 말씀이시죠?”
“소위, 순회순찰대는 영방군이나 국토방위군처럼 고정된 지점을 지키는 부대가 아닐세. 제법 실망한 모양이네만, 우리 부대 이름이 왜 순회순찰대인지 생각하게나.”
순회순찰대라고 해서 수색대 비슷한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름 그대로 지속적으로 이동을 하는 방랑 부대라니.
사실 군대가 주둔지를 가지고 그 지역만을 전담해서 지키는 게 대세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국가 권력이 강해져 대규모의 상비군을 보유하기 전에 대부분의 국가가 사용한 방위 체계는 제승방략식이었다.
평상시에는 소규모 군대만 운용하다 상황이 발생하면 징집을 통해 대규모 병력을 모아 대처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해산되지 않는 소규모 정예부대는 담당해야 하는 구역이 부대 규모에 비해 넓었고, 주기적으로 방랑을 하는 게 상비군 제도가 생기기 이전의 일반적인 방위 체계였다.
그나저나 이러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라면 알겠지만, 사실 군용 텐트를 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게 일반병들이 사용하는 A형 텐트가 아니라 지휘부가 들어서게 될 지휘 천막일 경우에 그 난이도는 배가 된다.
하아, 안 봐도… 아니지, 오히려 알고 있기에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때였다.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격하게 들려왔다.
설마 마적이나 그런 건 아니겠지?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하지만 반대로 연대장은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마차를 쫓아오고 있던 것은 말을 탄 한 남자였다.
그는 연대장이 입고 있는 것과 동일한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일단은 아군은 맞는 것 같았다.
“연대장님!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쫓아오고 있던 군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차 뚜껑을 치며 마부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
그때.
“연대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클로로 마차에 붙겠습니다. 속도를 늦추지 말아 주십시오.”
그 말에 연대장이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군인이 엉덩이와 허리를 말 위로 살짝 들어올리더니 고삐를 한 손으로만 잡고 왼손을 마차를 향해 뻗었다.
핑!
이내 왼손 건틀렛에서 갈고리가 발사되더니 마차 프레임에 달라붙어 고정되었다.
군인은 잡고 있던 고삐를 놓고 오른손으로 건틀릿 위를 눌렀다.
그러자 건틀렛이 줄을 끌어당기면서 군인이 마차로 날아왔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은 잘 훈련된 군마인 듯, 그대로 야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연대장은 마차를 향해 날아온 군인을 잡아 자세 잡는 것을 도왔다.
마차 옆 프레임에 바짝 붙은 군인이 왼손으로 마차를 잡고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단결! 연대장님! 큰일입니다! 마수가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