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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치리공공은 다시 생각해 봐도 나에게 있어 매우 당황스러운 기체였다.
기간트 주제에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좋게 해 줄 수가 없는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모든 병기에는 목표로 할당된 임무 수행 능력이 있는데, 치리공공의 경우는 ‘그냥 돌아만 가 줘’라는 식의, 지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려군스러운 발상의 로봇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더 짜증이 났다.
정체불명의 적성 기간트의 발밑에서 뻗어나간 나무줄기들은 소대원들을 덮쳤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든 C급 기간트가 작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카트린이 탄 B급 기간트마저 적지 않은 손해를 입은 상황.
그야말로 전멸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떤 상태냐?
아까 말했듯이 나는 지금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흠? 뭐야? 이걸 피했다고?]
적성 기간트의 스피커에서 파일럿의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대사가 흘러나왔다.
[소, 소대장님?]
유일하게 아직까지 작동하고 있는 B급 기간트를 탄 카트린 역시 통신으로 당황스러움을 전해 왔다.
피했다는 게 간발의 차로 피했다든가, 아니면 운이 좋아서 피했다든가 그런 게 아니었다.
[소대장님, 언제 거기까지 가신 겁니까?]
마치 스피드스터 계열의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마냥 치리공공이 고속으로 이동하더니 원래대로라면 치리공공의 꿰뚫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무줄기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이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피하는 움직임 자체는 내가 조종한 게 맞다.
절대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조종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게 되네’라는 정도의 느낌으로 내가 생각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치리공공이 완벽히 재현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야말로 허술함의 극치로 보이던 이 목재 소재의 하위 등급 기간트가 ‘이론상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나의 움직을 따라와 준다는 것.
이런 멋대가리 하나 없는 녀석이 멋있는 움직임을 구현해 주었다는 사실에 심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니, 진짜 ‘그냥 움직여만 줘’하는 느낌으로 만들어진 로봇 주제에 왜 이렇게 잘 가동되는 거냐고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건 전혀 불만사항이 아니었다.
기쁨의 배신감이라고나 할까.
마치 부모 입장에서 맨날 공부도 안 하고, 집에 오면 대화도 없이 그냥 잠만 자고, 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이런 골치덩이 아들을 보고 ‘밥벌이를 할 정도만큼은 해 줘’라고 했는데 갑자기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게이머가 된 느낌?
아니면 SKY나 카이스트, 이런 데에 입학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가 치리공공의 운동성에 대해 받은 느낌은 기분 좋은 배신감이었다.
[치리공공을 타고 있길래 전혀 마크하지 않고 있었더니, 알고 보니 위장이었던 거냐! 하, 재미있군!]
땅을 양손으로 짚고 있던 적성 기간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놈이 일어섬과 동시에 우리 소대원들을 덮쳤던 나무줄기 역시 놈에게로 회수되었다.
[카트린 하사, 소대원들의 피해 상황은 어떠한가?]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전사자는 없는 것 같지만, 부상자는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마친 카트린의 B급 기간트가 쓰러진 소대원들의 C급 기간트를 향해 움직였다.
놈이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지금이 다른 소대원들을 챙기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사용자 요청 감지.]
[아군 체력상황 파악완료.]
[현 시간부로 관련 데이터 제공이 승인되었습니다.]
응?
순간적으로 강한 위화감이 드는 듯하더니, 계기판 우측 하단에 작은 기간트 모양의 SD 캐릭터 실루엣들이 일렬로 생성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뭔가’라고 할 수도 있는 것들.
하지만 ‘로봇 대전 격투 액션 게임’ <하르마 로얄>을 즐겨하던 나에게는 이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레이드나 전장을 뛸 때처럼 아군 부위 파괴 상황과 체력 현황이 출력되는 거구나.’
<하르마 로얄>에서는 부위 파괴도를 나타낼 때, 색으로 나타낸다.
녹색이 정상인 상태고, 해당 파츠가 파손될수록 점점 붉게 물들어 간다.
안타깝게도 제일 상단에 있는 카트린의 B급 기간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기체가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카트린의 B급 기간트만 전반적으로 녹색을 띄고 있는 상황.
하지만 체력바와 그 아래에 위치한 에너지 게이지가 끝에 거의 다달은 상황이었다.
일명 ‘딸피’라고도 말하는 위기 상황.
솔직히 치리공공의 운동성이 내 반응속도를 따라올 수 있다고 해도, 반격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여기서 상대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아군이 도망치고 지원을 요청하는 게 정석적인 전술일 터였다.
이곳은 도장이나 무대가 아닌 전장이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대련이 아닌, 전투.
이기기 위한 모든 수가 다 허용되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카트린 하사, 내가 미끼가 되어 시선을 끌겠다. 자네는 소대원들을 데리고 퇴각함과 동시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해.]
[하지만 소대장님!]
전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카트린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이 가득한 말을 들으니 왠지 그에 호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사, 감성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군인이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늘 차가워야 하지.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하면 최악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도록.]
[…알겠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걱정해 줘서 고맙군.]
카트린이 탄 B급 기간트가 작동 정지한 C급 기간트들의 콕핏을 열어 소대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적에게 공격당하면 소대원들은 물론, 기간트에 타고 있는 카트린마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적성 기간트는 오로지 치리공공만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주시하고 있는 것과 달리, 상대 기간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상대한테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
아마도 녀석은 나를 먹잇감으로 여기고 신중하게 탐색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잠깐만…….
탐색?
왜 탐색하지?
치리공공은 D급 기간트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기간트를 상대로 상성상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잠시 머리를 굴려 놈의 의도를 파악해 봤다.
답은 금방 나왔다.
방금 내가 보여 준 움직임이 치리공공으로 할 수 없는 일반적인 회피 운동이 아니니까.
카트린이 보여 준 반응까지 더해서 생각해 보면, 이게 아마 그럴싸한 추리일 것이었다.
말하자면 익숙한 것에서 익숙하지 않음이 느껴져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를 더욱 살리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부우!
치리공공의 옆구리가 개방되더니 압축된 공기를 분사하며 상대를 향해 급속도로 접근을 시도했다.
[뭐야?!]
그러자 적 기간트가 크게 놀라며 급하게 후진했다.
애시당초 장갑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섣불리 타격을 가했다가는 오히려 이쪽의 피해가 극심할 터.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전 격투 게임에서 내가 자주하는 플레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플레이.
상대에게 접근하자마자 갑자기 점프를 시도했다.
갑작스런 타이밍에 뜬금없이 행해진 행동에 적 기간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리프어택은 여러모로 위험에 노출되는, 하이리스크 로우리턴 공격이라 어지간하면 시도되지 않는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심리전이 자주 걸리는 격투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렇지 않아도 치리공공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상대는 예상치도 못한 액션이 발생하니까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나저나 점프가 안 될 줄 알았는데, 점프가 되네?
나무로 만들었다고 해서 내가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오버 테크놀로지는 받아들이기 힘든 과거일수록 오히려 더 날림으로 보인다는 말이…….
쿠웅!
상대에게 위협만 가한 후,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돌려 바닥에 착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적지 않은 충격이 치리공공의 기체 전체에 전파되었고, 그 결과 기체 전체가 크게 흔들거렸다.
다행히 상대는 방어에만 집중해서 그런지, 치리공공의 휘청거림은 보지 못한 듯했다.
곧바로 계기판을 확인해 봤다.
“아, 씨!”
재평가는 무슨 얼어 죽을 재평가냐!
선입견이 아니었다.
고작 높게 점프 한 번을 했을 뿐인데, 하각부가 왼쪽, 오른쪽, 둘 다 주황색이 되어 버렸다.
진짜 어르신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치리공공은 진짜 그야말로 머리수 채우기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간트인 것 같았다.
[역시! 치리공공의 모습을 띄고 있던 것은 위장이었구나!]
“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대는 하각부가 살짝 파손된 치리공공을 보고 새로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상대의 시야에 치리공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야…….
[사용자 요청 확인되었습니다. 외부 거울 카메라 가동합니다.]
이번에도 무미건조한 말투의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계기판 왼쪽 상단에 익숙한 모습의 기간트가 라이브 영상으로 투영되었다.
“치리공공?”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영상의 주인공은 내가 타고 있는 치리공공이었다.
그리고 카메라 영상을 통해 치리공공의 모습을 보자, 상대가 왜 그렇게 오해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활짝 개방되어 있는 옆구리를 통해 연신 뿜어져 나오는 증기.
그로 인한 열기 때문에 마치 가마에 들어간 것마냥 붉게 물든 몸통.
절묘하게 금이 가서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변한 것 같은 각부.
치리공공은 겉보기에는 그 누구도 한낱 D급 기간트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와… 이 정도면 오해할 만하네.
실제로는 숨긴 힘을 방출하고 있는 게 아니라, 파츠들이 파손되어서 불타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야.
문제는 이쪽의 기기에 문제가 발생한 이상 아까처럼 액션을 통해 상대를 기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되면 역시 대화만한 게 없지.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통성명도 안 한 것 같은데.]
[관군에 알려 줄 이름 따위는 없다.]
[깐깐하게 굴지 말고, 서로 이름이나 알지. 보아 하니 꽤 자주 만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럴 일은 없다. 넌 여기서 죽을 거니까.]
상대가 하는 말에서 웃음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냉혹한 킬러의 말투라고 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흐음, 아무리 봐도 우리 둘이 쿵짝이 잘 맞는 거 같은데?]
[헛소리.]
[아니아니, 맞는 거 같아.]
[저승에서라면 몰라도, 이승에서는 그럴 일 없다.]
갑자기 상대 기간트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만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나무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슬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며 치리공공을 꿰뚫으려 했다.
노리던 게 이거였나?
쿵! 쿵!
옆구리에 장착된 부스트 장치를 짧게 짧게 분사해 사실상 움직임이 정지된 각부를 대체해서 백스텝을 구사했다.
<하르마 로얄>에서 숨겨진 비기라 하며, 내가 공식 사이트 게시판에 직접 공개했던 기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단, 개발사 공인 기술은 아니라 우리끼리만 꿀을 빨자는 의미로 올린 공략글인데, 내가 나름 네임드다 보니 공략글을 올리자마자 패치로 바로 막혀 버린 비기였다.
게임에서 먹히던 비기가 현실에서도 먹히자, 새삼스레 <하르마 로얄>이 엄청 잘 만든 게임이라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치리공공이 잘 만든 로봇은 아니니까, 당연히 게임 쪽을 찬양해야겠지.
그때, 나무줄기 사슬이 마치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요동치며 거리를 좁혀 왔다.
[걸렸군.]
나무줄기를 후방 45도 각도로 백스텝을 밟아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쪽 공간에서 새로운 나무줄기가 솟아나며 치리공공을 휘감으려 했다.
뿌직!
스파크가 튀는 치리공공의 양 각부를 꽉 붙잡는 나무줄기.
이미 주황색 상태에 접어든 파괴율의 각부라 그런지, 압박이 가해지자마자 바로 으스러졌다.
[뭣이?!]
하지만 이 역시 상대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하, 관군답지 않게 무척이나 터프한 녀석이군! 보아 하니 비밀리에 개발 중인 신형 같은데, 그리 쉽게 파츠를 포기하다니. 하지만 각부를 버린 이상 자세를 제어하는 건 어렵겠지!]
상대는 아무래도 내가 적에게 발목을 붙잡힐 것 같자, 미련없이 파츠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냥 내구도가 다해서 파괴된 건데…….
[관군의 신형 병기를 처음으로 격추하는 영광, 내가 가져가겠다!]
마치 페어리 클로를 사용한 것마냥 상대 기간트가 나무줄기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 높이 뜬 상대 기간트가 흉수를 내뻗으며 치리공공의 콕핏을 노려왔다.
[지금입니다! 연대장님!]
[뭐?!]
내 말에 상대 기간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봐. 역시 너랑 나는 쿵짝이 잘 맞는다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상대 기간트의 몸체에 살짝 힘을 주며 밀었다.
지상에서라면 기체 간에 스펙 차이가 나서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공중이었다.
그리고 공중 밸런스는 작고 소소한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슈우우우!
쿵!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충돌해 떨어지고 마는 상대 기간트.
[이,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나를 속여! 곱게 죽을 생각 마라!]
상대가 극한으로 치닿은 분노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상대는 자신이 내 기만술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보였다.
[아, 연대장님! 지금입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것 같…….]
부우우웅―
쿵!
상대 기간트가 뒤쪽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지며 사실상 작동중지가 된 치리공공을 향해 걸어왔다.
[뭐, 뭐지?]
[순회 순찰대의 윌리엄 대령이다. 테러리스트 및 광신도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다는 순회순찰대의 방침에 따라 귀공을 여기서 척살하겠다.]
연대장이 탄 기간트인 우리넬이 흔히들 용사검술 제1초식이라고 부르는, 롱소드 검술의 플루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연대장의 기합 소리와 함께 오러 같은 것이 기간트용 대검에 깃들더니, 그 크기를 점점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강패참!]
플루크 자세에서 폼탁(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내려찍는 자세)로 변환한 연대장의 기간트가 대검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그러자 대검의 날 부분에 응집되어 있던 검기가 발사되어 그대로 적 기간트를 수직으로 베며 지나갔다.
치지지지지직!
쾅!
연대장의 기간트가 날린 검기에 의해 적성 기간트는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치리공공은 다시 생각해 봐도 나에게 있어 매우 당황스러운 기체였다.
기간트 주제에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좋게 해 줄 수가 없는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모든 병기에는 목표로 할당된 임무 수행 능력이 있는데, 치리공공의 경우는 ‘그냥 돌아만 가 줘’라는 식의, 지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려군스러운 발상의 로봇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더 짜증이 났다.
정체불명의 적성 기간트의 발밑에서 뻗어나간 나무줄기들은 소대원들을 덮쳤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든 C급 기간트가 작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카트린이 탄 B급 기간트마저 적지 않은 손해를 입은 상황.
그야말로 전멸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떤 상태냐?
아까 말했듯이 나는 지금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흠? 뭐야? 이걸 피했다고?]
적성 기간트의 스피커에서 파일럿의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대사가 흘러나왔다.
[소, 소대장님?]
유일하게 아직까지 작동하고 있는 B급 기간트를 탄 카트린 역시 통신으로 당황스러움을 전해 왔다.
피했다는 게 간발의 차로 피했다든가, 아니면 운이 좋아서 피했다든가 그런 게 아니었다.
[소대장님, 언제 거기까지 가신 겁니까?]
마치 스피드스터 계열의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마냥 치리공공이 고속으로 이동하더니 원래대로라면 치리공공의 꿰뚫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무줄기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이동을 했던 것이다.
물론, 피하는 움직임 자체는 내가 조종한 게 맞다.
절대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조종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게 되네’라는 정도의 느낌으로 내가 생각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치리공공이 완벽히 재현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야말로 허술함의 극치로 보이던 이 목재 소재의 하위 등급 기간트가 ‘이론상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나의 움직을 따라와 준다는 것.
이런 멋대가리 하나 없는 녀석이 멋있는 움직임을 구현해 주었다는 사실에 심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니, 진짜 ‘그냥 움직여만 줘’하는 느낌으로 만들어진 로봇 주제에 왜 이렇게 잘 가동되는 거냐고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건 전혀 불만사항이 아니었다.
기쁨의 배신감이라고나 할까.
마치 부모 입장에서 맨날 공부도 안 하고, 집에 오면 대화도 없이 그냥 잠만 자고, 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이런 골치덩이 아들을 보고 ‘밥벌이를 할 정도만큼은 해 줘’라고 했는데 갑자기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게이머가 된 느낌?
아니면 SKY나 카이스트, 이런 데에 입학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가 치리공공의 운동성에 대해 받은 느낌은 기분 좋은 배신감이었다.
[치리공공을 타고 있길래 전혀 마크하지 않고 있었더니, 알고 보니 위장이었던 거냐! 하, 재미있군!]
땅을 양손으로 짚고 있던 적성 기간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놈이 일어섬과 동시에 우리 소대원들을 덮쳤던 나무줄기 역시 놈에게로 회수되었다.
[카트린 하사, 소대원들의 피해 상황은 어떠한가?]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전사자는 없는 것 같지만, 부상자는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마친 카트린의 B급 기간트가 쓰러진 소대원들의 C급 기간트를 향해 움직였다.
놈이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지금이 다른 소대원들을 챙기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사용자 요청 감지.]
[아군 체력상황 파악완료.]
[현 시간부로 관련 데이터 제공이 승인되었습니다.]
응?
순간적으로 강한 위화감이 드는 듯하더니, 계기판 우측 하단에 작은 기간트 모양의 SD 캐릭터 실루엣들이 일렬로 생성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뭔가’라고 할 수도 있는 것들.
하지만 ‘로봇 대전 격투 액션 게임’ <하르마 로얄>을 즐겨하던 나에게는 이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레이드나 전장을 뛸 때처럼 아군 부위 파괴 상황과 체력 현황이 출력되는 거구나.’
<하르마 로얄>에서는 부위 파괴도를 나타낼 때, 색으로 나타낸다.
녹색이 정상인 상태고, 해당 파츠가 파손될수록 점점 붉게 물들어 간다.
안타깝게도 제일 상단에 있는 카트린의 B급 기간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기체가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카트린의 B급 기간트만 전반적으로 녹색을 띄고 있는 상황.
하지만 체력바와 그 아래에 위치한 에너지 게이지가 끝에 거의 다달은 상황이었다.
일명 ‘딸피’라고도 말하는 위기 상황.
솔직히 치리공공의 운동성이 내 반응속도를 따라올 수 있다고 해도, 반격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여기서 상대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아군이 도망치고 지원을 요청하는 게 정석적인 전술일 터였다.
이곳은 도장이나 무대가 아닌 전장이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대련이 아닌, 전투.
이기기 위한 모든 수가 다 허용되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카트린 하사, 내가 미끼가 되어 시선을 끌겠다. 자네는 소대원들을 데리고 퇴각함과 동시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해.]
[하지만 소대장님!]
전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카트린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이 가득한 말을 들으니 왠지 그에 호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사, 감성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군인이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늘 차가워야 하지.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하면 최악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도록.]
[…알겠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걱정해 줘서 고맙군.]
카트린이 탄 B급 기간트가 작동 정지한 C급 기간트들의 콕핏을 열어 소대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 적에게 공격당하면 소대원들은 물론, 기간트에 타고 있는 카트린마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적성 기간트는 오로지 치리공공만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주시하고 있는 것과 달리, 상대 기간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상대한테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
아마도 녀석은 나를 먹잇감으로 여기고 신중하게 탐색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잠깐만…….
탐색?
왜 탐색하지?
치리공공은 D급 기간트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기간트를 상대로 상성상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잠시 머리를 굴려 놈의 의도를 파악해 봤다.
답은 금방 나왔다.
방금 내가 보여 준 움직임이 치리공공으로 할 수 없는 일반적인 회피 운동이 아니니까.
카트린이 보여 준 반응까지 더해서 생각해 보면, 이게 아마 그럴싸한 추리일 것이었다.
말하자면 익숙한 것에서 익숙하지 않음이 느껴져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를 더욱 살리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부우!
치리공공의 옆구리가 개방되더니 압축된 공기를 분사하며 상대를 향해 급속도로 접근을 시도했다.
[뭐야?!]
그러자 적 기간트가 크게 놀라며 급하게 후진했다.
애시당초 장갑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섣불리 타격을 가했다가는 오히려 이쪽의 피해가 극심할 터.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전 격투 게임에서 내가 자주하는 플레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플레이.
상대에게 접근하자마자 갑자기 점프를 시도했다.
갑작스런 타이밍에 뜬금없이 행해진 행동에 적 기간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리프어택은 여러모로 위험에 노출되는, 하이리스크 로우리턴 공격이라 어지간하면 시도되지 않는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심리전이 자주 걸리는 격투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렇지 않아도 치리공공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상대는 예상치도 못한 액션이 발생하니까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나저나 점프가 안 될 줄 알았는데, 점프가 되네?
나무로 만들었다고 해서 내가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오버 테크놀로지는 받아들이기 힘든 과거일수록 오히려 더 날림으로 보인다는 말이…….
쿠웅!
상대에게 위협만 가한 후,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돌려 바닥에 착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적지 않은 충격이 치리공공의 기체 전체에 전파되었고, 그 결과 기체 전체가 크게 흔들거렸다.
다행히 상대는 방어에만 집중해서 그런지, 치리공공의 휘청거림은 보지 못한 듯했다.
곧바로 계기판을 확인해 봤다.
“아, 씨!”
재평가는 무슨 얼어 죽을 재평가냐!
선입견이 아니었다.
고작 높게 점프 한 번을 했을 뿐인데, 하각부가 왼쪽, 오른쪽, 둘 다 주황색이 되어 버렸다.
진짜 어르신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치리공공은 진짜 그야말로 머리수 채우기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간트인 것 같았다.
[역시! 치리공공의 모습을 띄고 있던 것은 위장이었구나!]
“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대는 하각부가 살짝 파손된 치리공공을 보고 새로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상대의 시야에 치리공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야…….
[사용자 요청 확인되었습니다. 외부 거울 카메라 가동합니다.]
이번에도 무미건조한 말투의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계기판 왼쪽 상단에 익숙한 모습의 기간트가 라이브 영상으로 투영되었다.
“치리공공?”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영상의 주인공은 내가 타고 있는 치리공공이었다.
그리고 카메라 영상을 통해 치리공공의 모습을 보자, 상대가 왜 그렇게 오해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활짝 개방되어 있는 옆구리를 통해 연신 뿜어져 나오는 증기.
그로 인한 열기 때문에 마치 가마에 들어간 것마냥 붉게 물든 몸통.
절묘하게 금이 가서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변한 것 같은 각부.
치리공공은 겉보기에는 그 누구도 한낱 D급 기간트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와… 이 정도면 오해할 만하네.
실제로는 숨긴 힘을 방출하고 있는 게 아니라, 파츠들이 파손되어서 불타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야.
문제는 이쪽의 기기에 문제가 발생한 이상 아까처럼 액션을 통해 상대를 기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되면 역시 대화만한 게 없지.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통성명도 안 한 것 같은데.]
[관군에 알려 줄 이름 따위는 없다.]
[깐깐하게 굴지 말고, 서로 이름이나 알지. 보아 하니 꽤 자주 만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럴 일은 없다. 넌 여기서 죽을 거니까.]
상대가 하는 말에서 웃음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냉혹한 킬러의 말투라고 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흐음, 아무리 봐도 우리 둘이 쿵짝이 잘 맞는 거 같은데?]
[헛소리.]
[아니아니, 맞는 거 같아.]
[저승에서라면 몰라도, 이승에서는 그럴 일 없다.]
갑자기 상대 기간트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만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나무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슬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며 치리공공을 꿰뚫으려 했다.
노리던 게 이거였나?
쿵! 쿵!
옆구리에 장착된 부스트 장치를 짧게 짧게 분사해 사실상 움직임이 정지된 각부를 대체해서 백스텝을 구사했다.
<하르마 로얄>에서 숨겨진 비기라 하며, 내가 공식 사이트 게시판에 직접 공개했던 기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단, 개발사 공인 기술은 아니라 우리끼리만 꿀을 빨자는 의미로 올린 공략글인데, 내가 나름 네임드다 보니 공략글을 올리자마자 패치로 바로 막혀 버린 비기였다.
게임에서 먹히던 비기가 현실에서도 먹히자, 새삼스레 <하르마 로얄>이 엄청 잘 만든 게임이라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치리공공이 잘 만든 로봇은 아니니까, 당연히 게임 쪽을 찬양해야겠지.
그때, 나무줄기 사슬이 마치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요동치며 거리를 좁혀 왔다.
[걸렸군.]
나무줄기를 후방 45도 각도로 백스텝을 밟아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쪽 공간에서 새로운 나무줄기가 솟아나며 치리공공을 휘감으려 했다.
뿌직!
스파크가 튀는 치리공공의 양 각부를 꽉 붙잡는 나무줄기.
이미 주황색 상태에 접어든 파괴율의 각부라 그런지, 압박이 가해지자마자 바로 으스러졌다.
[뭣이?!]
하지만 이 역시 상대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하, 관군답지 않게 무척이나 터프한 녀석이군! 보아 하니 비밀리에 개발 중인 신형 같은데, 그리 쉽게 파츠를 포기하다니. 하지만 각부를 버린 이상 자세를 제어하는 건 어렵겠지!]
상대는 아무래도 내가 적에게 발목을 붙잡힐 것 같자, 미련없이 파츠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냥 내구도가 다해서 파괴된 건데…….
[관군의 신형 병기를 처음으로 격추하는 영광, 내가 가져가겠다!]
마치 페어리 클로를 사용한 것마냥 상대 기간트가 나무줄기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 높이 뜬 상대 기간트가 흉수를 내뻗으며 치리공공의 콕핏을 노려왔다.
[지금입니다! 연대장님!]
[뭐?!]
내 말에 상대 기간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봐. 역시 너랑 나는 쿵짝이 잘 맞는다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상대 기간트의 몸체에 살짝 힘을 주며 밀었다.
지상에서라면 기체 간에 스펙 차이가 나서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공중이었다.
그리고 공중 밸런스는 작고 소소한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슈우우우!
쿵!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충돌해 떨어지고 마는 상대 기간트.
[이,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나를 속여! 곱게 죽을 생각 마라!]
상대가 극한으로 치닿은 분노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상대는 자신이 내 기만술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보였다.
[아, 연대장님! 지금입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것 같…….]
부우우웅―
쿵!
상대 기간트가 뒤쪽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지며 사실상 작동중지가 된 치리공공을 향해 걸어왔다.
[뭐, 뭐지?]
[순회 순찰대의 윌리엄 대령이다. 테러리스트 및 광신도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다는 순회순찰대의 방침에 따라 귀공을 여기서 척살하겠다.]
연대장이 탄 기간트인 우리넬이 흔히들 용사검술 제1초식이라고 부르는, 롱소드 검술의 플루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연대장의 기합 소리와 함께 오러 같은 것이 기간트용 대검에 깃들더니, 그 크기를 점점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강패참!]
플루크 자세에서 폼탁(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내려찍는 자세)로 변환한 연대장의 기간트가 대검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그러자 대검의 날 부분에 응집되어 있던 검기가 발사되어 그대로 적 기간트를 수직으로 베며 지나갔다.
치지지지지직!
쾅!
연대장의 기간트가 날린 검기에 의해 적성 기간트는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