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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단결.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통상적인 건물식 생활관이 아닌, 야영지에 임시로 세워진 무수히 많은 게르들.

그중 3연대 본부중대 게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제일 북쪽에 세워진 한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 앞에는 팻말이 하나 걸려 있었다.



― 순회순찰대 서부군단 1사단 3연대 본부중대장 대위 마리안느.



연대장을 비롯해 행정부사관들 모두가 다 근육이 빵빵한 헬창들이었기 때문에 우리 중대장 역시 건장한 사내가 아닐까 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과 달리, 묘령의 매혹적인 누님 스타일의 여군 한 명이 작은 의자에 앉아 게르 중앙의 화톳불에서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어, 왔니?”

마치 늦깎이 동생을 대하는 누나 같은 말투로 말을 거는 중대장.

능숙한 손놀림으로 국자를 사용해 국물 떠서 음미하는 모습이 왠지 야릇하게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중대장은 군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드라지는 굴곡의 몸매를 가지신 글래머였다.

얼굴에는 군인답지 않게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군복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흉부가 진짜 컸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다 붙여도 과함이 없다 느껴질 정도로 컸다.

솔직히 말하면 얼굴에 대한 것도 그냥 예쁘다라는 인상만 남게 할 정도로 커다란 흉부가 가져다주는 박력이 장난 아니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잊게 만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심어 준 중대장의 흉부.

이 세계는 지구와 달리 성형이 존재하지도, 발달하지도 않았을 테니, 자연산이라는 건데…….

정말이지 중대장의 혈계 유전자가 어떤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하지만 굳은 의지로 이성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애시당초 문제를 일으켜서 군에 입대했다는 게 아멜의 설정인데, 여기서 상관을 성희롱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면…….

그러면 내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다른 이들에게 감점을 받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중대장의 커다란 가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카트린의 얼굴과 그녀가 가진 예쁜 붉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흠…….

왜 떠오른 건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흐음, 우리 아멜 소위는 소문과 조금 다른 사람인가 보네?”

아, 또 그건가?

진짜 아멜 녀석, 사회에서 뭘 어떻게 하고 살아왔기에 모든 관계를 기본적으로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거야?

“공과 사를 구분하듯, 군과 사회를 철저히 구분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을지언정 소위가 된 이상 타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중대장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우리 자기,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예?”

중대장은 고개를 돌려 스튜가 들어 있는 냄비를 휙휙 저었다.

“전입 첫날부터 사고 치는 신임 소위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우리 자기가 그 기록을 깼네?”

조근조근하게 말하지만, 상당히 뼈가 들어 있는 말투.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런지, 사실상 누나라기보다는 엄마가 조곤조곤 혼낼 때의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중대장에서부터 느껴졌다.

“사고라니… 중대장님, 제가 무슨 문제라도 저지른 겁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자기, 나 진급 기대해 봐도 될까?”

진급.

현대에서도 여군은 남자보다 진급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신분제가 존재하는 이 시대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전입 온 첫날부터 전공 세울 정도니까, 잘하면 자기 마차 타고 나도 진급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군생활의 난이도는 중대장이 진급에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게 된다.

통상적으로 자신이 속한 부대에 진급 욕심이 강한 장교가 있을수록 군생활은 어려워지는 법.

하물며 그 제물로 나를 택한다면…….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속으로만 내쉰 한숨이었다.

“항상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군인은 머리와 입, 그리고 몸, 이 세 박자가 따로 놀아야 하는 법이었다.

머리로는 싫어도 입으로는 예스를 외치고, 몸으로는 공회전을 해야 하는 게 군인이다.

중대장이 스튜를 젓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본 후, 살짝 미소를 지었다.

흠흠…….

확실히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미녀가 발사하는 미소는 매우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중대장의 미소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흐트러질 뻔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중대장의 미소에 카트린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카트린도 웃을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쩝…….

“중대장님.”

“응? 왜?”

중대장이 흐믓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정이 많은 사촌 누나랑 대화하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마치 조카를 보듯이 우쭈주하면서 명절에 만날 때마다 용돈을 주고, 뭐든 사 주는 사촌 누나.

중대장에 대한 내 첫 이미지는 그러했다.

“전투 결과에 대해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 했습니다만.”

“흐음…….”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안 될 건 없지. 자기가 이번 전투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피날레를 장식한 건 연대장님이시긴 하지만, 자기의 활약이 없었다면 큰 피해로 이어졌을 거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대원들의 기간트가 전부 작동불능이 되었을 때, 적이 확인사살을 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봤다.

너무나도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대장의 말대로 내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늑대교단은 워낙에 유명하니까, 따로 말 안 할게.”

그런 중대장의 말에 나는 장교수첩을 꺼내 늑대교단을 검색했다.



― 늑대교단.

└ 제국 서부 지역을 세력권으로 해 세력을 전국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는 사교도 집단. 세계의 재창조를 교리로 내세워 하층민들의 지지도가 매우 높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스틸 브리드도 알 거고.”

이번에는 스틸 브리드를 검색해 봤다.



― 스틸 브리드.

└ 늑대 교단의 최정예 전투 부대이자, 선전부대. 옵시디언, 토파즈, 아쿠아, 엠버, 다이아, 총 다섯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네.”

“이번에 우리를 공격해 온 건 스틸 브리드의 넘버 투인 토파즈였어.”

“…그런 거물이었습니까?”

그렇게 강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거물이라는 표현에 중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물이라… 토파즈는 거물이라고 하기에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흐음… 뭐, 그거야 우리 자기도 군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토파즈는 스틸 브리드 넘버 투기는 하지만, 거물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그렇거든.”

“예?”

중대장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국 서부 지역을 혼란으로 빠트리고 있는 사교도 집단의 에이스 파일럿 중 하나인데 거물이 아니라니.

중대장 말대로 좀 더 겪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토파즈는 생포하는 데 실패했어. 놈이 도망쳤거든.”

“그렇습니까…….”

“대신에 토파즈가 이번에 끌고 온 신형 기간트는 노획에 성공했지. 지금 정보과에서 분석중이니 조만간 그 결과가 나올 거야.”

“결과가 빨리 나오면 좋겠네요.”

“뭐, 그렇지. 적의 신형 기간트니까. 현재 우리 서부 순회 순찰대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역시 늑대교단이야. 적의 신형 기간트를 빨리 파악하면 향후 토벌 작전에 있어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연대장님이 자기한테 조만간 포상을 주실 거야. 그래서 말인데…….”

“네.”

“연대장님이 자기한테 물어보라더라. 포상으로 받고 싶은 거 있어? 훈장까지는 무리더라도, 최대한 줄 수 있는 선에서 주시겠대.”

“포상 말입니까…….”

전입 온 첫날에 포상이라니.

잠시 계산을 해 봤다.

하지만 계산을 하면 할수록 이제 갓 전입 온 소위가 나대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짬이 좀 차면 몰라도, 지금은 조금 겸손할 필요가 있었다.

“딱히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희 소대원들이 오늘 엄청 고생했는데, 그쪽을 챙겨 주실 수는 없습니까?”

내 요청에 중대장이 흐뭇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연대장님한테 그렇게 말씀드릴께. 아, 그리고 연대장님이 주시는 것과는 별개로 나도 위로외박증 한두 장을 줄게. 그리고 우리 자기, 오늘 첫날인데 고생 많았지? 누나가 맛있게 끓인 스튜 한번 먹어 볼래?”

중대장이 스튜를 한 스푼 떠서 입김을 호호 불어 식힌 후, 나를 향해 조심스레 내밀었다.

원래대로라면 상관이 주는 것은 거절하는 게 아니지만…….

“네,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서둘러 중대장의 행동을 못 본 척, 옆에 놓인 스푼으로 직접 스튜를 떠서 먹었다.

“아, 엄청 맛있습니다, 중대장님.”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대장.

갈 곳 잃은 스푼이 허공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끄, 끄흐응… 우리 자기, 굳이 누나가 떠 주는 거 마다하고 직접 떠먹을 필요가 있었을까?”

역시 안 통하나.

그래도 아직 변명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럼요. 중대장님께서 진급을 희망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모든 걸 조심해야 합니다. 저 역시 중대장님께서 떠 주시는 스프를 그대로 먹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도 있고, 자칫 성군기 관련해서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습니다.”

“끄흐응… 그, 그래. 잘했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중대장.

그래도 이게 맞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고를 쳐서 그거 무마시키려고 입대한 아멜인 만큼 꼬투리 잡힐 거 하나라도 내주면 안 되었다.

“더 하실 이야기는 없으십니까?”

“어? 어… 없어.”

“그럼 이만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그래…….”

“단결.”

경례를 마친 후, 그대로 중대장의 개인 게르에서 나와 나에게 배정된 1인용 게르로 향했다.



***



“푸하하하하!”

아멜에게 철벽을 당한 마리안느 대위가 속상함을 미처 지우기도 전에 게르 뒤쪽에 있던 짐꾸러미에서 남자 하나가 슬며시 기어나와 폭소를 터트렸다.

“야, 벨퍼트!”

아멜에게 계속해서 보여 주던 상냥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악귀와 같은 무서운 표정으로 무장을 한 마리안느가 벨퍼트를 향해 국자를 집어 던졌다.

“아! 이거 구타 행위입니다, 중대장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벨퍼트는 여유롭게 국자를 쳐낸 후 조롱하는 눈빛으로 마리안느를 보며 약 올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너, 뒤질래 진짜?”

“키킥! 푸하하하! 세상에 살다 살다 아멜 루겐바인이 거리를 둔 여자는 처음 봅니다! 푸하하하!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난봉꾼인 아멜 루겐바인이 거절한 여자! 이거, 진짜 희귀한 타이틀인 거 아닙니까? 푸하하하!”

“야! 벨퍼트! 너도 오늘 아멜 처음 본 거잖아! 그러면서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소문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아멜 루겐바인에 대한 소문을 못 들었다면 제국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아! 알았습니다. 혹시 중대장님의 나이가 서른을 넘겨서 아멜이 여자로 취급 안 한 거 아닙니까? 키킥!”

“너, 진짜 뒤진다!”

살기 어린 눈빛의 마리안느를 보고 벨퍼트는 태도를 수그리기는커녕 오히려 얄밉게 머리통을 흔들며 볼을 살짝 내밀었다.

“한번 해 보시던지요?”

“이씨. 아무튼 야, 네가 보기에는 아멜 소위 어떤 것 같냐?”

“어떻기는요. 완전 가식 덩어리던데요.”

“가식? 소대원들 생각하는 모습이 난 보기 좋던데.”

“에이, 중대장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납니다. 애시당초 아멜이 무슨 죄를 저질러서 여기에 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자그마치 황실모독죄입니다.”

“끄으응… 그게 진짜일까?”

“중대장님, 우리 제국의 황권이 약한데다가, 하필이면 그놈의 아버지가 검성 진 루겐바인 후작이라 처벌을 면한 거지, 룬드래곤 왕국이었으면 즉결 처형감이었어요.”

“그건 맞지…….”

“검성은 황제파 최측근인데, 그 관계를 완전 박살낼 뻔한 놈입니다. 녀석이 뭘 해 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다고 봅니다. 중대장님, 그냥 장기 포기하고 고향 내려갑시다.”

“야! 고향 안 내려간다고! 그 촌동네에 가서 뭐해!”

“뭐하긴요. 결혼해서 자식 낳고, 영지민들과 오순도순 농사 짓고, 얼마나 좋습니까?”

“난 싫어. 그리고 그 촌동네에 누가 장가 오겠냐?”

“그야…….”

“아무튼 난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을 바에는 차라리 아멜의 첩이 되더라도 대귀족가에 들어가고 싶어.”

“그러니까 아멜을 믿지 마시라니까요.”

“아, 됐어! 나 피곤해! 잘 거야! 나가!”

벨퍼트가 역린을 건드려서인지, 마리안느가 잔뜩 짜증을 냈다.

화가 잔뜩 난 마리안느의 말투에 벨퍼트가 허겁지겁 게르 밖으로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알고 지낸 누나동생 사이인 만큼 벨퍼트는 마리안느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벨퍼트는 게르를 나가기 전에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한마디 하기로 했다.

“저어, 중대장님. 중대장님 나이도 있고 하니까, 그냥 자면 안 되는 거 아시지 말입니다? 자기 전에 화장수…….”

슈우우욱!

벨퍼트는 귀의 바로 옆을 무언가가 파공성을 내며 스쳐 지나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꺼져!”

마리안느의 역정에 벨퍼트는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게르 밖으로 나왔다.

벨퍼트가 떠나 진짜로 홀로 남게 된 마리안느는 개인 침낭 안에 틀어박힌 채 서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소문과는 다르잖아. 발정난 개마냥 아무 여자한테 막 껄떡거린다더니… 실제로는 엄청 점잔 빼는데…….”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멜에 관한 프로필 파일이 있었다.

“아아! 이번에는 진짜 결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에! 일단 아멜과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루겐바인가에 쳐들어 가면 후작님도 뭐라 거부할 수 없을 거고! 그러면 차기 후작 부인이 되는 건데!”

마리안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올해도 취집은 틀린 건가… 아, 군생활은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해! 나도 이제 그만 주부로 살고 싶다아!”

30대 중반에 접어든 노처녀 여군의 절규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3소대장님.”

중대장 전용 게르에서 나와 내 전용 게르로 향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3소대장님!”

최측근인 카트린이 여군인데, 직속상관 역시 여군인 상황.

“3소대장님!”

혹자는 여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가 군대이고 문제를 일으켜 들어온 입장으로는 이건 여복이 아니라 여난으로 여겨졌다.

“아멜 소위님!”

응?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거기에는 우리 연대에 어울리지 않게 근육량이 다소 부실해 보이는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근육이 부실할 뿐이지 키가 상당히 컸다.

대충 190㎝ 정도로 보이는 큰 키에 팔 다리가 전반적으로 길쭉길쭉한 걸 보니 벌크업되어 있지만 근력 자체는 연대 내 다른 헬창 간부들에게 밀릴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올려 어깨에 붙은 계급장을 보니, 꺾인 작대기가 두 개였다.

중사라는 소리였다.

“단결.”

이름 모를 중사가 내가 그를 뒤돌아보자 경례를 했다.

“단결. 예. 무슨 일이십니까?”

부사관은 원칙적으로는 장교보다 아랫사람이지만, 그거는 어디까지나 짬이 찰 대로 찬 영관급부터 적용되는 이야기.

나 같은 위관급 장교들은 계급보다 짬이 우선이었다.

카트린은 직급상 내 아래니까 나보다 그녀가 짬이 많다 하더라도 하대를 하는 게 맞는 거고.

사실 하사나 소위나 짬이 거기서 거기지, 뭐.

“정비반장 벨퍼트 중사라고 합니다.”

“아, 예.”

“소위님, 저한테 하실 말씀 있지 않으십니까?”

정비반장의 말에 잠시 기억을 되돌려 봤다.

내 입에서 대답이 바로 안 나오자, 정비반장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치리공공을 아주 박살내셨던데.”

“아.”

그제야 루퍼스 병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비반장이 전투 중에 파손된 거냐고 물으면, 전 사실대로 말할 겁니다.’



그 말이 떠오르자, 정비반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곱게 탔어야 하는 건데, 미안합니다.”

“아니, 뭐… 괜찮습니다. 전투 중에 파손된 건데, 이해할 수는 있죠. 다만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면 최소한 저한테 찾아오기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입니다. 정비하는 데 고생 많이 하셨습니까?”

“소위님, 치리공공은 수리하지 않습니다. 워낙에 제조 단가가 싼 녀석이라 수리할 바에는 새로 만드는 게 더 싸게 먹히거든요.”

“그럼 다행이군요.”

“근데 소위님, 저희 순회순찰대인 거 아시죠? 순회순찰대에는 정비창이 없다는 것도 아실 거고요. 국토방위군이나 영방군과는 달리, 저희는 치리공공 수리합니다.”

“아, 이런…….”

하긴 방랑 부대에 고정 진지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하지.

“미안하실 것은 없으지만, 항상 물자가 부족한 순회순찰대인 만큼 기간트가 막 파손되는 건 싫지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소위님에 관련된 파일럿 데이터가 하나도 없어서 파일럿 테스트 한 번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파일럿 테스트 말입니까?”

내 질문에 정비반장이 살짝 인상을 구겼다.

“아니, 그러면 앞으로도 파일럿의 움직임을 감당 못하는 기간트를 계속 타서 매 전투마다 박살내실 겁니까?”

그저 몰라서 물은 질문을 오해했는지 정비반장이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진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뭐가 좋다는 거야, 마리안느 누나는… 쯧, 그냥 나랑 같이 고향에 돌아가자니까…….”

“무슨 말 하셨습니까?”

“후우,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소위님, 앞으로 기간트 배정할 때 맞춤형으로 정비해야 하니까 시간 날 때 파일럿 테스트 받으세요.”

아, 소총 크리크 조정하는 것처럼 파일럿 테스트를 통해 기간트 정비시 나에게 맞춰 정비하겠다는 소리구나.

그러면 안 받을 이유가 없지.

괜히 걱정되네.

운동이라고는 한 번도 안 했는데, 아멜 이 녀석도 망나니라서 테스트 결과가 엉망일까 걱정이었다.

그래도 은근슬쩍 기대도 되었다.

치리공공에 올라탈 때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생각한다면 혹시…….

“나중에 시간 내서 정비반 오십시오. 그럼, 단결.”

정비반장은 그렇게 말한 후 내 반대편으로 떠났다.



하아, 오늘 하루 진짜 피곤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 전용으로 마련된 게르 안으로 들어간 순간.

“후우!”

“3소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소대장님!”

게르 안에 들어가자마자 종이 꽃가루 세례가 나를 반겼다.

얼떨떨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얼굴 한둘과 처음 보는 얼굴 여럿이 내 개인 게르 안에 서 있었다.

“자자! 오늘 주인공 오셨으니까 바아로!”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 소대원 중 하나인 루퍼스 병장이 가볍게 손목을 꺾었다.

마치 회식 전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주임급 사원의 손동작을 연상케 하는 제스처.

고개를 돌려 게르 중앙에 위치한 화톳불을 쳐다보니, 이미 그 주위에는 술통이 놓여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트린 하사를 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전 회식이지 말입니다. 중대장님께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방금 만나고 왔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으셨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껏 들뜬 기분이던 소대원들이 일제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군대 생활을 해 본 만큼 군대에서 술이 얼마나 생각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여기서는 승전 회식으로 분위기를 타 주는 게 맞는 행동이겠지.

“뭐, 들은 적은 없지만, 사기증진을 위해서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내가 책임질 테니 다들 오늘 즐겁게 한잔하도록. 단, 근무자는 열외다. 아무리 승전 회식이라도 근무는 똑바로 서야지.”

“소대장님, 저희 기갑소대는 경계근무가 없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다들 마음 놓고 취하도록.”

“와아아아아!”

소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각자 준비한 개인 잔을 든 채 술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소대회식을 하면서 한 가지 아멜과 나의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술, 엄청 잘 받네?’

현실의 나는 술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송창수의 이야기.

아멜 루겐바인 역시 술을 좋아할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술이 마치 물 마시듯 술술 들어가는 걸로 보아 아멜 역시 주당이었던 걸로 보였다.

아멜 녀석,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저, 근데 소대장님. 한 가지 질문해도 됩니까?”

한참 술을 들이키고 있을 무렵, 루퍼스 병장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지?”

“그으… 부소대장님하고는 어떤 관계십니까?”

루퍼스 병장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흐음… 그건…….”

“내가 말할게.”

내가 머뭇거리자, 취기가 살짝 오른 듯한 카트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쪽으로 다가왔다.

카트린은 술에 취해 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듯 두 눈에 힘을 꽉 준 상태였지만, 누가 봐도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어진 카트린의 다음 행동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카트린이 내 손목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내 몸통을 끌어당겨 거리를 좁혔다.

“오?”

소대원들의 동공이 커지며 우리를 집중해서 쳐다봤다.

나 역시 카트린이 이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잔뜩 긴장했다.

잠시 후, 카트린의 얼굴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 왔고, 그녀의 왼손이 내 턱을 꽉 잡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포갤 듯이 입술과 입술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카트린.

점점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게 느껴졌고, 내 심장박동수 역시 급격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입술과 입술이 부딪칠 것 같은 그 순간, 카트린이 입을 열었다.

“이게 우리 둘의 첫 만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