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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분명 장교 수첩 내 도감에는 B급 이상부터는 코어에서 마압이 조종석으로 흘러나와 그걸 견디기 위해 마갑을 입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실버하운드를 탔을 때,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살짝 답답할 정도일 뿐이라 그냥 무시하고 탄 것인데, 느껴지는 것과 달리 몸에 크나큰 위험이 되는 걸까?
방사능처럼 말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정비병에게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캐묻기로 했다.
“혹시 마갑을 입지 않은 상태로 마압에 노출되면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나?”
“예? 그건 아닙니다만… 저는 마나유저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마압을 견디기 어려우니까 마갑이 개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3소대장님, 몸이 강골이신가 봅니다.”
여자에 환장해 황녀까지 건드리려고 한 녀석의 몸이 그렇게까지 튼튼하다니.
친아버지가 제국제일검인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고 느꼈다.
아멜, 이거 완전 원석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한탄했던가.
멍청한 아멜은 이런 재능이 가득한 몸을 가지고 엉뚱한 곳에 낭비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B급 기간트 격납고를 나와 네드 분대장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소대장님, 네드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어쩌자고 2소대와의 모의전을 수락하신 겁니까?”
도착하자마자 카트린이 인상을 쓰면서 따지듯이 말을 걸었다.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는 대답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 내 본래 성격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는 게 맞았다.
한국의 소시민 대부분은 흐름에 휩쓸려 살고, 나 역시 그중 일부였으니까.
국가에서 법으로 지정한 의무 교육 과정을 밟고, 사회적으로 의무 교육인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라는 톱니바퀴의 구성원이 되어 살아 가는 무개성한 삶.
무슨 특별한 재능이 없는 한, 현대인은 이러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억지로라도 벗어나게 될 경우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나는 달랐다.
아멜 루겐바인.
후작가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지 않은가.
현재는 아멜이 저지른 일들이 있어서 그 배경에 기댈 수는 없지만, 그걸 다 수습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 시대였다.
아무튼 카트린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멜로서의 대답은 어떤 것일까 고민했기 때문이다.
과거 행적을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아멜은 황녀까지 건드릴 정도로 안하무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황가조차도 우습게 아는 아멜이 일개 중위, 그것도 기사조차 아닌 마도학자의 도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샤를 중위가 먼저 가문을 언급하며 모욕했으니, 도전을 받아들이는 게 지극히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여전히 망나니 컨셉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도 심한 모욕에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것을 어필해야 했다.
“샤를 중위가 겁도 없이 먼저 승부를 걸어왔다. 그것도 루겐바인을 모욕하면서 말이다.”
“…….”
카트린 역시 내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샤를 중위의 도전을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대장님, 이런 식으로는 더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내 입에서 ‘문제’라는 단어가 나오자, 소대원들이 움찔거리는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설마 진짜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그게…….”
답답하게도 카트린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창피해서 말을 제대로 못하는 느낌.
이걸 캐묻자니 그림이 안 좋고, 가만히 두자니 궁금하고,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아마… 소대장님도 보시면 문제가 뭔지 알게 될 겁니다.
보면 알게 될 문제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얼추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하긴 1개 분대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이니, 준비가 빠를 수밖에 없지.”
그때, 뒤쪽에서 샤를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니 2소대원들 역시 함께 오고 있었다.
“하, 문제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군.”
카트린과 나를 포함시켜야 열 명을 겨우 넘는 우리 3소대에 비해, 2소대는 대충 봐도 30명이 훌쩍 넘어 보였다.
“예에…….”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카트린.
“소대장 자리가 공석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모의전에서 이긴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부소대장님으로 임명된 이후로도 말입니다.”
확실히 카트린이 왜 2소대와의 모의전을 통해 더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니까.
거듭되는 패배로 인해 자신감이 크게 하락해 있는 소대원들.
전문 군사 교육을 받지 않은 신임 소대장.
교육은 받았으나 그게 장교 과정이 아닌 부사관 과정인 부소대장.
확실히 조건은 열악했다.
그래서 뭐?
나는 이 상황이 크게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어제 있었던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본 3소대의 팀워크 때문이었다.
비록 토파즈를 만나 처참하게 깨지기는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스틸브리드 중 하나인데, 어쩌겠어.
하지만 마수 토벌전 때는 ‘이게 바로 정예다’라는 것을 보여 주듯, 소대원들은 손발이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여 줬다.
심지어 급하게 자신이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도, 소대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척척 지시에 따라 주었다.
부대 전체가 얼마나 통제가 잘 되느냐가 전투력을 크게 좌우하는 법이었다.
하다 못해 게임에서도 그런데, 이런 냉병기의 시대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사, 아까 자네는 이번 모의전으로 내가 더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네?”
“난 어제 우리 대원들을 보면서 큰 기대를 가질 수 있었네. 지금까지 지휘관이 없었던 부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팀워크를 보여 줬지.”
“…….”
확실히 카트린도 그 부분은 인정하는지 반박하지 않았다.
“인원수가 부족한 부분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래도 결원이었던 지휘관이 생기지 않았나. 나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네.”
“그러니까, 소대장님에게 저만한 병력의 차이를 뒤집을 만한 전략이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뒷내용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듣는 카트린.
하여간 유능하다니까.
첫인상이 개판이어서 그렇지, 그녀가 소대원들을 통솔하는 모습이나 여타 보여 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에이스’라는 느낌이 강했다.
“뭐,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네. 나 같아도 소문이 자자한 망나니가 지휘를 하겠다는데, 불안하겠지. 그것도 압도적인 상대를 둔 전투에서 말이야.”
“…….”
카트린뿐만 아니라 소대원들도 아픈 곳을 찔린 듯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말로 나를 따르라고 더 말해 봐야 의미가 없다.
굳이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행동으로 보이면 자연스럽게 소대원들도 따라 줄 것이었다.
“먼저 머리를 제압한다.”
“머리… 샤를 중위를 먼저 치겠다는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내가 파악한 2소대는 굉장히 어설픈 조직이다. 오로지 샤를 중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대지.”
소환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분대장도 있고 다른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일절 무시한 채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야말로 원맨팀.
“하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샤를 중위도 스스로를 보호하려 뭔가 수를 쓸 게 분명합니다.”
“그래. 그래서 적의 머리를 치기 위해서는 단단한 갑옷마저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필요하지. 대원들 중에 그런 전투력을 가진 병사가 있나?”
“…없습니다.”
“병력의 수로도 열세, 적의 우두머리를 노릴 수 있는 공격력도 부재. 이 조건만으로도 대원들에게 윈 플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
모두가 내 말에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직 네드 분대장만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 하여간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다니까.
“그 공격력을 소대장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까?”
네드 분대장이 말하자, 알렉스 병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소대장님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해?”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병장이라 그런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토파즈를 상대할 때…….”
“아니, 부소대장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확실히… 그때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았지만, 저는 2소대 병력을 뚫고 샤를 중위님을 치는 그림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때, 네드 분대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가능할 겁니다.”
“이봐, 네드.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거야?”
“보라색으로 변했어.”
“뭐?”
“소대장님이 파일럿 테스트를 받으실 때 마력 감응 슬라임이 보라색으로 변했다고.”
“뭐!?”
네드 분대장의 말에 알렉스는 물론, 다른 소대원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무슨 이유 때문에 보라색으로 변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동일 기체로 싸운다면 힘 싸움에서는 무조건 이기실 거야. 게다가 소대장님이 보여 준 그 조종술까지 더한다면…….”
그제야 모든 소대원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지휘관이 그래도 조금 믿을 만해졌기에 의욕이 조금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소대장님.”
“물론이지.”
카트린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대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더 이상 나를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아직 확신이 부족할 뿐.
“작전을 말해 주십시오.”
그때, 임벨 병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첫인상은 잔뜩 요령이나 부릴 것 같은 말년 병장이었다.
괜히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그런 이상이었는데, 그런 그가 말하자 다른 소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수군거렸다.
“임벨이 걸었다는 건 할 만하다는 소리인가?”
“발터 형, 아무리 임벨이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고는 하지만, 그걸 마냥 믿기는 조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왕고 발터 병장과 정비병이자 투고인 루퍼스 병장이 이야기를 나눴다.
“작전은 간단하다.”
나는 소대원들을 앞에 두고 바닥에 긴 직사각형 하나와 그 뒤편에 원을 그렸다.
“이 네모가 2소대원들이고 이 원이 샤를 중위다.”
그러고는 박스 정면에 화살표를 하나 그린 후, 그 옆으로 원에 도달하는 곡선을 그렸다.
“전열이 상대를 묶어 두는 동안 내가 우회해 돌아가 샤를 중위를 친다.”
작전은 별다른 게 없었다.
가장 기본 중의 기본.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전면전을 하고 기동력이 뛰어난 내가 별동대 역할을 맡는 거였다.
그 이후로도 나는 각자의 전투 스타일을 고려해 소대원들의 배치를 짜 주었다.
게임하면서 늘 상대를 관찰해 미세한 실수를 찾아내던 것이 습관이라 어제의 전투로 소대원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오…….”
그 모습을 소대원들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카트린 같은 경우에는 아예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하지만 그런 와중에 표정이 굳어 있는 소대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계급장을 보니 이등병이었다.
“거기 이등병.”
“네! 이병 잭스입니다.”
“표정이 안 좋은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게…….”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봐라.”
“소대장님이 내세운 전술 말입니다… 저라면 이거 안 씁니다.”
잭스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싸늘해졌다.
특히나 고참병들이 쏘아보는 눈초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잭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시무시한 선임들의 눈빛에도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잭스, 내가 나대지 말라고 했지?”
“아, 죄송합니다.”
군기반장인 쉐인 상병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잭스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괜찮다. 생각과 시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놓친 부분을 잭스가 보고 있을지도 모는 법이지.”
내 말에 잭스가 고개를 퍼뜩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것도 군대에서 이등병의 말을 들어 주는 소대장이란 신기할 법도 하지.
“너희도 마찬가지다. 다른 생각이 있으면 신분, 계급, 나이, 이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말하도록.”
“네에…….”
놀란 것은 잭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여럿 놀래키네.
고작 이런 걸로 놀라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그러나.
“그럼 잭스, 네 생각을 편하게 이야기해 봐. 네가 소대장이라 생각하고.”
“아, 넵. 아니, 그럴까? 그러면 말 편하게 할게?”
와.
정말 감탄사밖에 안 나온다.
잭스, 얘 그거네.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애.
“너 인마, 내가 선 넘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소대장님!”
쉐인 상병이 대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소대장님 말씀은 어디까지나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거지, 버릇없게 굴라는 게 아니잖아!”
“아, 그런 거였습니까?”
쉐인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한 손으로 쿵쿵 두들겼다.
“괜찮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해 봐.”
“사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소대장님이 말씀하신 전략은 말 그대로 사자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뭐?”
모두가 당연히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 믿는 잭스.
그의 눈빛은 거짓 한 점 없이 순수해 보였다.
분명 장교 수첩 내 도감에는 B급 이상부터는 코어에서 마압이 조종석으로 흘러나와 그걸 견디기 위해 마갑을 입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실버하운드를 탔을 때,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살짝 답답할 정도일 뿐이라 그냥 무시하고 탄 것인데, 느껴지는 것과 달리 몸에 크나큰 위험이 되는 걸까?
방사능처럼 말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정비병에게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캐묻기로 했다.
“혹시 마갑을 입지 않은 상태로 마압에 노출되면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나?”
“예? 그건 아닙니다만… 저는 마나유저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마압을 견디기 어려우니까 마갑이 개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3소대장님, 몸이 강골이신가 봅니다.”
여자에 환장해 황녀까지 건드리려고 한 녀석의 몸이 그렇게까지 튼튼하다니.
친아버지가 제국제일검인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고 느꼈다.
아멜, 이거 완전 원석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한탄했던가.
멍청한 아멜은 이런 재능이 가득한 몸을 가지고 엉뚱한 곳에 낭비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B급 기간트 격납고를 나와 네드 분대장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소대장님, 네드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어쩌자고 2소대와의 모의전을 수락하신 겁니까?”
도착하자마자 카트린이 인상을 쓰면서 따지듯이 말을 걸었다.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는 대답을 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 내 본래 성격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는 게 맞았다.
한국의 소시민 대부분은 흐름에 휩쓸려 살고, 나 역시 그중 일부였으니까.
국가에서 법으로 지정한 의무 교육 과정을 밟고, 사회적으로 의무 교육인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라는 톱니바퀴의 구성원이 되어 살아 가는 무개성한 삶.
무슨 특별한 재능이 없는 한, 현대인은 이러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억지로라도 벗어나게 될 경우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나는 달랐다.
아멜 루겐바인.
후작가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지 않은가.
현재는 아멜이 저지른 일들이 있어서 그 배경에 기댈 수는 없지만, 그걸 다 수습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 시대였다.
아무튼 카트린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멜로서의 대답은 어떤 것일까 고민했기 때문이다.
과거 행적을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아멜은 황녀까지 건드릴 정도로 안하무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황가조차도 우습게 아는 아멜이 일개 중위, 그것도 기사조차 아닌 마도학자의 도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샤를 중위가 먼저 가문을 언급하며 모욕했으니, 도전을 받아들이는 게 지극히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여전히 망나니 컨셉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도 심한 모욕에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것을 어필해야 했다.
“샤를 중위가 겁도 없이 먼저 승부를 걸어왔다. 그것도 루겐바인을 모욕하면서 말이다.”
“…….”
카트린 역시 내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샤를 중위의 도전을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대장님, 이런 식으로는 더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내 입에서 ‘문제’라는 단어가 나오자, 소대원들이 움찔거리는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설마 진짜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그게…….”
답답하게도 카트린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창피해서 말을 제대로 못하는 느낌.
이걸 캐묻자니 그림이 안 좋고, 가만히 두자니 궁금하고,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아마… 소대장님도 보시면 문제가 뭔지 알게 될 겁니다.
보면 알게 될 문제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얼추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하긴 1개 분대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이니, 준비가 빠를 수밖에 없지.”
그때, 뒤쪽에서 샤를 중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니 2소대원들 역시 함께 오고 있었다.
“하, 문제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군.”
카트린과 나를 포함시켜야 열 명을 겨우 넘는 우리 3소대에 비해, 2소대는 대충 봐도 30명이 훌쩍 넘어 보였다.
“예에…….”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카트린.
“소대장 자리가 공석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모의전에서 이긴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부소대장님으로 임명된 이후로도 말입니다.”
확실히 카트린이 왜 2소대와의 모의전을 통해 더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니까.
거듭되는 패배로 인해 자신감이 크게 하락해 있는 소대원들.
전문 군사 교육을 받지 않은 신임 소대장.
교육은 받았으나 그게 장교 과정이 아닌 부사관 과정인 부소대장.
확실히 조건은 열악했다.
그래서 뭐?
나는 이 상황이 크게 불리해 보이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어제 있었던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본 3소대의 팀워크 때문이었다.
비록 토파즈를 만나 처참하게 깨지기는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스틸브리드 중 하나인데, 어쩌겠어.
하지만 마수 토벌전 때는 ‘이게 바로 정예다’라는 것을 보여 주듯, 소대원들은 손발이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여 줬다.
심지어 급하게 자신이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도, 소대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척척 지시에 따라 주었다.
부대 전체가 얼마나 통제가 잘 되느냐가 전투력을 크게 좌우하는 법이었다.
하다 못해 게임에서도 그런데, 이런 냉병기의 시대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사, 아까 자네는 이번 모의전으로 내가 더 큰 모욕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네?”
“난 어제 우리 대원들을 보면서 큰 기대를 가질 수 있었네. 지금까지 지휘관이 없었던 부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팀워크를 보여 줬지.”
“…….”
확실히 카트린도 그 부분은 인정하는지 반박하지 않았다.
“인원수가 부족한 부분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래도 결원이었던 지휘관이 생기지 않았나. 나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네.”
“그러니까, 소대장님에게 저만한 병력의 차이를 뒤집을 만한 전략이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뒷내용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듣는 카트린.
하여간 유능하다니까.
첫인상이 개판이어서 그렇지, 그녀가 소대원들을 통솔하는 모습이나 여타 보여 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에이스’라는 느낌이 강했다.
“뭐,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네. 나 같아도 소문이 자자한 망나니가 지휘를 하겠다는데, 불안하겠지. 그것도 압도적인 상대를 둔 전투에서 말이야.”
“…….”
카트린뿐만 아니라 소대원들도 아픈 곳을 찔린 듯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말로 나를 따르라고 더 말해 봐야 의미가 없다.
굳이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행동으로 보이면 자연스럽게 소대원들도 따라 줄 것이었다.
“먼저 머리를 제압한다.”
“머리… 샤를 중위를 먼저 치겠다는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내가 파악한 2소대는 굉장히 어설픈 조직이다. 오로지 샤를 중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대지.”
소환식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분대장도 있고 다른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일절 무시한 채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야말로 원맨팀.
“하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샤를 중위도 스스로를 보호하려 뭔가 수를 쓸 게 분명합니다.”
“그래. 그래서 적의 머리를 치기 위해서는 단단한 갑옷마저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가 필요하지. 대원들 중에 그런 전투력을 가진 병사가 있나?”
“…없습니다.”
“병력의 수로도 열세, 적의 우두머리를 노릴 수 있는 공격력도 부재. 이 조건만으로도 대원들에게 윈 플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
모두가 내 말에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직 네드 분대장만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 하여간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다니까.
“그 공격력을 소대장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까?”
네드 분대장이 말하자, 알렉스 병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소대장님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해?”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병장이라 그런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토파즈를 상대할 때…….”
“아니, 부소대장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확실히… 그때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았지만, 저는 2소대 병력을 뚫고 샤를 중위님을 치는 그림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때, 네드 분대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가능할 겁니다.”
“이봐, 네드.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거야?”
“보라색으로 변했어.”
“뭐?”
“소대장님이 파일럿 테스트를 받으실 때 마력 감응 슬라임이 보라색으로 변했다고.”
“뭐!?”
네드 분대장의 말에 알렉스는 물론, 다른 소대원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무슨 이유 때문에 보라색으로 변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동일 기체로 싸운다면 힘 싸움에서는 무조건 이기실 거야. 게다가 소대장님이 보여 준 그 조종술까지 더한다면…….”
그제야 모든 소대원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지휘관이 그래도 조금 믿을 만해졌기에 의욕이 조금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소대장님.”
“물론이지.”
카트린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대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더 이상 나를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아직 확신이 부족할 뿐.
“작전을 말해 주십시오.”
그때, 임벨 병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첫인상은 잔뜩 요령이나 부릴 것 같은 말년 병장이었다.
괜히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그런 이상이었는데, 그런 그가 말하자 다른 소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수군거렸다.
“임벨이 걸었다는 건 할 만하다는 소리인가?”
“발터 형, 아무리 임벨이 이길 수 있는 도박만 한다고는 하지만, 그걸 마냥 믿기는 조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왕고 발터 병장과 정비병이자 투고인 루퍼스 병장이 이야기를 나눴다.
“작전은 간단하다.”
나는 소대원들을 앞에 두고 바닥에 긴 직사각형 하나와 그 뒤편에 원을 그렸다.
“이 네모가 2소대원들이고 이 원이 샤를 중위다.”
그러고는 박스 정면에 화살표를 하나 그린 후, 그 옆으로 원에 도달하는 곡선을 그렸다.
“전열이 상대를 묶어 두는 동안 내가 우회해 돌아가 샤를 중위를 친다.”
작전은 별다른 게 없었다.
가장 기본 중의 기본.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전면전을 하고 기동력이 뛰어난 내가 별동대 역할을 맡는 거였다.
그 이후로도 나는 각자의 전투 스타일을 고려해 소대원들의 배치를 짜 주었다.
게임하면서 늘 상대를 관찰해 미세한 실수를 찾아내던 것이 습관이라 어제의 전투로 소대원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오…….”
그 모습을 소대원들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카트린 같은 경우에는 아예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하지만 그런 와중에 표정이 굳어 있는 소대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계급장을 보니 이등병이었다.
“거기 이등병.”
“네! 이병 잭스입니다.”
“표정이 안 좋은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게…….”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봐라.”
“소대장님이 내세운 전술 말입니다… 저라면 이거 안 씁니다.”
잭스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싸늘해졌다.
특히나 고참병들이 쏘아보는 눈초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잭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시무시한 선임들의 눈빛에도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잭스, 내가 나대지 말라고 했지?”
“아, 죄송합니다.”
군기반장인 쉐인 상병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잭스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괜찮다. 생각과 시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놓친 부분을 잭스가 보고 있을지도 모는 법이지.”
내 말에 잭스가 고개를 퍼뜩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것도 군대에서 이등병의 말을 들어 주는 소대장이란 신기할 법도 하지.
“너희도 마찬가지다. 다른 생각이 있으면 신분, 계급, 나이, 이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말하도록.”
“네에…….”
놀란 것은 잭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여럿 놀래키네.
고작 이런 걸로 놀라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그러나.
“그럼 잭스, 네 생각을 편하게 이야기해 봐. 네가 소대장이라 생각하고.”
“아, 넵. 아니, 그럴까? 그러면 말 편하게 할게?”
와.
정말 감탄사밖에 안 나온다.
잭스, 얘 그거네.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애.
“너 인마, 내가 선 넘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소대장님!”
쉐인 상병이 대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소대장님 말씀은 어디까지나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거지, 버릇없게 굴라는 게 아니잖아!”
“아, 그런 거였습니까?”
쉐인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한 손으로 쿵쿵 두들겼다.
“괜찮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해 봐.”
“사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소대장님이 말씀하신 전략은 말 그대로 사자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뭐?”
모두가 당연히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 믿는 잭스.
그의 눈빛은 거짓 한 점 없이 순수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