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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대단하군, 아멜 루겐바인. 소대장으로서는 합격이야.”

승전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내가 타고 있는 기간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기사로서는 어떨까? 나하고 한번 붙어 볼 생각 없나?”

그는 키가 상당히 커 보이는,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기간트를 타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그의 키는 컸다.

제법 큰 편이라 생각했던 정비반장보다도 더 큰 키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남자는 정비반장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벌크업도 잘 되어 있는 몸이라는 것이었다.

거인, 아예 나와는 다른 인종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떡대였다.

“단결! 빅토르 중위님, 언제 복귀하셨습니까?”

그때, 이쪽으로 다가온 카트린이 기간트에서 내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한두 시간쯤 됐나? 우리 애들이 어디에 게르를 쳤나 영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모의전하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 그리고 나 이제 중위 아니야, 대위라고.”

“아직 진급 안 하셨잖습니까.”

나 역시 기간트에서 내리며 빅토르의 계급장을 확인했다.

은색으로 빛나는 다이아가 두 개, 그리고 안이 텅 비어 있는 무색 다이아가 하나 달려 있었다.

이런 계급장은 처음 봤다.

아, 혹시 그건가?

한국에서는 대위(진)이라고 불리는 그것.

내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빅토르가 먼저 나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순서가 뒤죽박죽이군. 이해하게. 순찰대 본부에 가서 교육받고 이제 막 복귀해서 정신이 없거든. 내 소개 먼저 하지. 순회순찰대 서부군단 1사단 3연대 본부중대 기간트 1소대에서 소대장을 맡고 있는 빅토르 대위라고 하네.”

“대위가 아니라 중위이지 않습니까…….”

“쓰읍. 어허, 자꾸 말꼬리를 물지 마라, 카트린.”

빅토르가 장난스럽게 혼을 냈고, 카트린도 슬쩍 미소 짓는 게 둘이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빅트로 중위는 어깨를 들썩인 뒤 자신의 계급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쉽군. 3소대장 자리가 공석만 아니었어도 자네가 내 후임으로 1소대장이 되고 나는 대위로 진급하는 건데 말이야.”

엄청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한탄을 내뱉은 빅토르 중위.

“원래 제가 1소대장이 되기로 되어 있었습니까?”

“뭐, 그렇지. 제국 서부 지역에서는 나는 새도 말 한마디로 떨어트린다는 위세를 가진 루겐바인가의 장남인데, 한직에 둘 리가 없지 않은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전면전이 잘 발발하지 않는 현대와는 달리, 여기는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는 세계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투 결과에 따라 사상자가 나올 것이고, 그에 따라 수시로 부대가 재편될 것 역시 당연한 이야기였다.

보통 그렇게 재편이 된다고 하면 앞 번호보다는 뒷 번호를 정리하는 게 상식.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 3소대 인원이 다른 소대에 비해 ⅓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입대 동기가 불순한 이유라고는 해도, 아멜은 엄연히 대귀족의 자식이다.

관군이라 할지라도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대귀족의 자식인 만큼 선전 효과와 사기 진증에는 탁월할 테니, 상부가 가만히 놔둘 리는 없겠지.

아니, 그래도 이렇게까지 소문이 안 좋은데 선전이나 사기 증진이 되기는 할까?

아무튼 내가 후임 1소대장으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는 빅토르 중위의 말이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아직 진급은 안 하셨으니 중위지 말입니다.”

대위(진)이 된 그를 감탄하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과 달리, 카트린이 내뱉는 말은 차가웠다.

“그래도 중대장 교육까지 받고 왔는데, 언제까지고 대기시키지는 않겠지. 1년 안에는 중대장으로 보직 변경을 하지 않을까? 마침 마리안느도 전역 신청서를 냈는데 말이야.”

우리 중대장의 이름을 막 말하는 그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여기에 본인이 없고, 곧 자신이 대위가 된다고는 하지만, 중대장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아멜 소위. 아직 열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이제야 몸이 풀린 게 아닌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도발을 하고 있는 빅토르 중위.

하지만 이런 도발에 순순히 넘어가 줄 내가 맞다.

까짓것 어디 한번 해보자고.

본부중대 소속 소대장들끼리 서열 정리 좀 해 보자고.

“할 거지?”

빅토르 중위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의전을 뛰고 왔기 때문에 피로가 어느 정도 쌓여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원래 사람 성격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빅토르 중위는 내 태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형, 복귀하자마자 바로 대련할 거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비반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준비된 거 없냐?”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어, 있기는 한데… 누나한테 복귀 신고부터 하는 게 먼저지 않아?”

그러고 보니 정비반장과 중대장이 동향사람이라고 했던가.

“야, 여동생한테 가서 복귀 신고를 하는 오빠가 세상에 어디 있냐?”

“아니 그래도 마리안느 누나가 더 상급자인데…….”

“걔가 내 상관으로 있던 시기보다 내가 오빠로 지낸 기간이 더 길어. 군대에서나 상관이지, 걔 집에서는 나한테 말도 못 걸어.”

“근데 여기 군대잖아.”

“아아, 어쩌라고.”

정말로 둘이 남매라고?

빅토르 중위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리안느가 선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둘 다 약간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남매인 것 같기도 하고…….

“어휴, 알았어. 지금 애들한테 준비시킬게.”

정비반장이 투덜대며 다시금 C급 기간트 격납고로 갔다.



이윽고 모의전에 사용되는 C급 기간트를 운전해 가지고 오는 정비반장.

그러고 보니 아직 이 기간트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트린,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C급 기간트의 정식 명칭이 어떻게 되지?”

“T—2 그렘린입니다. 보통 티투라고 줄여 부르는 편입니다.”

“그렘린이 아니라, 티투라 부른단 말인가?”

“그렘린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정이 있기에 앞의 번호만을 부르는 겁니다.”

“부를 수 없는 사정?”

“소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제국의 기간트 제조 기술의 근본은 마깅 법국 놈들 거를 훔쳐 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켁!

뭐야? 무슨 문익점이야?

방산 기술의 핵심이 되는 걸 훔쳐서 확보하다니…….

“마깅 법국이 우릴 엄청 싫어하겠군.”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놈들이 계속 국지도발을 하는 것도 다 그 이유 아닙니까. 이러다가 전쟁 한번 크게 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서부지대라 동북부에 위치한 국경과는 관련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말입니다.”



이렇게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다 보니 빅토르 중위가 대련 준비가 다 끝났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나 역시 다시금 티투에 올라탔다.

삑—

응?

대련이 시작하기에 앞서 디스플레이 좌측 상단에 커다란 네모 박스가 나타났다.

해당 박스가 비춰 주고 있는 것은 티투에 타고 있는 빅토르 중위의 콕핏.

혹시 이것도 장교수첩만의 고유능력인가 싶었으나,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 연결됐다. 그러면 준비는 다 됐나, 소위.]

[예. 다 되었습니다.]

치리공공과 달리 티투는 무언가 바이크에 탑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조종간을 잡고 있는 빅토르 중위를 보니 딱 그 모양새였다.

다만,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빅토르 중위답게 타고 있는 모습이 흡사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레슬러 언더테이커 옹을 떠올리게 했다.

역시 남자는 떡대가 좋고 봐야 하는 건가.

기왕지사 군대에 입대한 겸 진지하게 벌크 업을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벨퍼트, 신호 줘!]

빅토르 중위의 요청에 정비반장이 고개를 끄덕인 후 턱으로 정비병 한 명에게 신호를 줬다.

해당 정비병은 붉은 기가 매달린, 자기보다 더 큰 깃대를 들고 있었다.

이윽고 정비병이 붉은 기를 X자로 교차해서 두 번 흔들었다.

긴장감이 콕핏 내부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1소대장님.]

[왜? 설마 몇 수 양보해 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설마 검술명가인 루겐바인가 출신의 귀족이 나 같은 일반 귀족에게 그런 부탁을 하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계속 이렇게 서로 간 통신을 연결해 놓고 대련해야 하는 겁니까?]

[당연하… 뭐야? 기간트 대련 안 해 봤어?]

검성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아멜이라면 기간트 대련을 해 봤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하르마 로얄>이라는 온라인 게임으로밖에 접해 보지 못했다.

그나마 기간트를 몰아 본 것도 어제가 처음인데, 대련을 해 본 적이 있겠냐고.

문득 망나니 난봉꾼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만큼 의외로 아멜도 기간트 대련을 안 해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아멜이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안 해 봤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멜의 성격상 자신의 치부를 굳이 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황녀까지 건드린 놈이 고작 치부가 드러나는 게 두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 태도를 유지할 게 분명했다.

[참나, 검성님도 자식 하나는 엄청 귀하게 기르셨구만. 상호 간의 비주얼 채널을 연결해 놓고 대련하는 것은 기본 룰 중의 하나야. 전투가 아니라 대련인 만큼 상호간 존중이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얼굴 보고 할 수 있는 것만 하라는 거지.]

오! 리스펙트!

그렇지.

대련은 길거리 싸움이 아닌, 격투기와 같은 스포츠로 볼 수 있으니, 선수들 간의 상호 존중이 있어야 하지.

[게다가 황선 때 대기사 대전 잘 일어나잖아? 그때 나오기로 했던 대기사와 전혀 다른 대기사가 나오는 사기극이 자주 일어나나 봐. 뭐, 그래서 본인이 직접 싸우고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한 거지.]

뭐야, 여기도 대리가 있어?

그나저나 황선?

여기 묘하게 신성 로마 제국 느낌이 난다고 했는데, 황선 같은 것도 있나 보구나.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신경 쓰지 말자.

[뭐, 그래도 이건 친선전이니까, 부담스럽다면 꺼도 돼.]

[아닙니다. 특례를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그거 마음에 드네! 그래, 그러면 특례 없이 한번 정식으로 제대로 붙어 보자고!]

빅토르 중위가 그렇게 말하며 조종간을 세게 당겼다.

타고 있던 기간트가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있던 검끝을 머리 위로 올렸다.

[흐아아아!]

갑자기 기합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빅토르 중위.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쿠구구구후!

빅토르 중위의 몸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기간트가 든 장검의 검날이 우웅 떨기 시작했다.

몇 초간 지속된 떨림.

그 진동이 끝났을 때, 빅토르 중위의 기간트가 쥔 장검의 날에는 검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검기가 둘러져 있었다.

저게… 뭐야?

[응? 뭐야? 3소대장은 오러 블레이드를 쓰지 않고 싸울 건가? 아니면 오러 블레이드를 못 꺼내는 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약간 비웃듯이 말하는 빅토르 중위.

아니, 맨몸으로는 마법을 못 쓰는 세계라면서 검기, 아니, 오러 블레이드는 존재해?

아니지.

마법처럼 이것도 마석이라는 디바이스를 사용해서 가능한 건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첫째는 당혹감.

그리고 두 번째는 오러 블레이드를 실물로 봤다는 감격.

마지막은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이었다.

검강을 두른 장검을 보자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따라하고 싶어졌다.

방패 없이 장검만을 무기로 선택한 빅토르 중위와 달리, 내가 탄 기간트의 무장은 왼손에 타지쉴드를, 오른손에는 아밍소드를 장착한 상황.

빅토르 중위가 한 것처럼 눈을 감고 정신집중을 한 뒤, 기를 끌어모은다는 느낌으로 기합을 질러 보기로 했다.

장교수첩 내 설명에서 내츄럴 마나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분명 이 몸에도 역시 내츄럴 마나가 깃들어 있을 터.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위트 있게 상황을 넘길 생각이었다.

[흐아아아아아!]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마냥 배꼽에 힘을 잔뜩 준 뒤 강하게 소리를 내뱉었다.

눈을 감고 고음을 질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등줄기를 타고 화끈한 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뭐야, 쓸 수 있잖아.]

빅토르 중위의 말.

그 말을 듣고 디스플레이를 살펴보니, 검신의 두 배 정도 되는 길이의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이 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왜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