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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25화)
Chapter Eleven 나약한 영주(3)


대충 루멘을 위로해야 하는 분위기란 것을 알아챘으나, 마찬가지로 이 분위기가 문제였다.
루멘이 너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그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니, 아예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로칸을 시발점으로 자신들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봇물이 터지듯 다들 한 마디, 두 마디 하다 보니 주변이 시끄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곧 사그라졌다.
루멘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영지민들을 묵묵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루멘의 시선에 다들 언제 말을 꺼냈냐는 듯 처음의 적막하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아시겠지요? 그러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그래,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다. 당신들에게 쓸데없는 희망만 잔뜩 심어 놓았다가, 그것마저도 말아먹었지.”
“…….”
루멘의 말에 로칸 또한 침묵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벌써 많은 폐를 끼쳤다. 너희들의 터전이 망가졌다. 당장 너희들은 나무 밑에서 잠을 자야 하고, 몬스터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야겠지. 같은 타밀론 후작령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백여 명이 넘는 거지들을 받아 줄 곳은 없으니까.”
“…….”
자신들을 향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거지’라고 말하는 루멘에게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준 피해는 다시 갚아 주마. 내가 너희들에게 심어 준 희망만큼은 그대로 이루어 주마. 하지만 그 이상은 내게 기대하지 말도록 해라. 나는 한심하기 그지없고, 지금 내 말을 지키려면 무능한 자식이 되어야 하니까.”
“…….”
루멘의 말에는 수많은 뜻이 담겨져 있었다. 자신에 대한 비난, 그리고 영지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비록 내 이름이 싸구려일지도 모르나, 방금 말한 것만큼은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4

긴긴 밤이 지나고 동이 트기 바로 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니만큼 매우 많은 심적 고민을 했다. 그리고 고블린 국왕에게 맞은 곳의 상처는 흔적도 없었으나, 그래도 알게 모르게 몸 이곳저곳이 쑤셔 왔다.
더군다나 배에 칼이 박히거나, 죽어도 두세 번은 더 죽을 만한 충격을 겪어도 괴물 같은 자신은 살아 있었지만, 그때마다 졸음이 몰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아마 괴물 같은 육체라도 그 상처를 치료하려면 많은 힘이 소모되는 모양.
역시나 고블린 국왕의 일격은 매우, 지나치게 아픈 공격이었는지, 루멘은 깜빡 잠이 들었다.
잠이 든 루멘은 한적한 타밀론 본성의 외곽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길을 걷고 있을 무렵, 청년 한 명이 루멘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년의 손에 들린 검이 달빛을 반사하며 은은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죽어라!
멍하니 걷고 있던 루멘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청년의 검을 피했다.
‘이크. 넌 도대체 누구야?’
루멘의 사념이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이 두 눈을 부릅뜨며 루멘을 향해 말했다.
―정녕 날 모른단 말이냐!
‘그럼 내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날 찌르려는 녀석을 알 리가 없…… 너, 넌?’
루멘은 청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채 말을 다 잇지 못하였다. 너무 놀라서일까?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기이한 기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일종의 꿈인 듯싶었다.
청년의 이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두 명의 인간을 물어뜯은 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청년의 이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는 호기로운 청년을 가볍게 제압한 뒤 그의 피를 쪽쪽쪽 빨아 마셨다.
청년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다른 인간을 발견했다. 어째 냄새가 많이 구리긴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곧장 그 인간을 향해 달려들어 목을 물었다.
아무튼 피를 뒤집어쓴 꼬마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달려든 용기가 가상한 청년 죽인 것이다. 비록 자신이 죽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죽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요즘 문득 괴물은 자신의 폭력성이 과도하게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긴 하다만.
꿈속의 꿈에서 벗어난 루멘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 었잖아?’
이곳은 루멘의 꿈속이다. 모든 것이 몽환적이고, 현실은 없는 세상.
하지만 루멘은 꿈을 꿈이라 여기지 못하고 있었다. 자각몽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루멘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이 정도의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은 루멘의 삶에서 최초의 일이었다.
―그래! 죽었다. 너 때문에 죽었다. 네가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청년의 말에 루멘이 슬쩍 청년의 발을 바라보았다.
‘없어?’
발이 없다. 발목부터 신체 부위가 존재하지도 않는 놈이 하늘에 두둥실 떠서 부유하고 있었다.
귀신?
그런 건가?
그 순간이었다. 루멘의 좌측과 우측에서 한 여인과 어린 소년이 걸어 나왔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움직이고 있으나, 발목이 없다. 걷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여인과 아이를 본 순간 또 다른 꿈을 꾸었다.
루멘은 가장 먼저 여인의 목을 물어 그녀의 피를 어느 정도 빨아 마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 뒤, 그녀의 왼쪽 가슴을 뜯어내어 그것을 억지로 그녀의 입에 박아 넣었다.
그 후 훤히 드러난 그녀의 심장에 자신의 두 송곳니를 박은 뒤, 그녀의 피로 온몸을 적셨다.
그녀가 죽었고, 루멘은 자신의 어미의 죽음을 목격한 뒤 바닥에 자빠져서 부들부들 떨며 오줌을 지린 아이에게 다가가 역시나 가장 먼저 아이의 목을 물었다.
그 후 저항하지 못하나, 명백히 의식이 있는 아이의 왼팔을 뜯어냈다. 뜯어낸 왼팔에서 흘러내린 피를 맛있다는 듯이 꼴깍꼴깍 삼켰다.
그다음은 오른팔, 그다음은 왼다리, 그다음은 오른 다리.
아이는 의식이 멀쩡한 채로 자신의 팔다리가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이미 그때 아이는 반쯤 이성을 잃어버렸다.
루멘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의 목을 강하게 물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력한 턱 힘을 이용하여 아이의 목을 분질러 버렸다.
아이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루멘이 만족스러운 듯 피가 흥건히 묻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네가 날 죽였어!
―난 겨우 일곱 살이었어!
―네가 날 죽였어!
―네가 우릴 죽였어!
어디선가 다른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 되어 루멘을 향해 자신들을 죽였다고 소리쳤다.
족히 백 명은 넘는 숫자다.
그들은 루멘을 향해 왜 자신들을 죽였냐며 소리쳤다. 루멘은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꿈속을 거닐었다.
끔직하다.
―왜 우릴 죽인 거지?
―우린 아무 잘못도 없었어!
―이 괴물!
―악마!
―살인마!
정신이 없다.
아니,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가는 것만 갔다.
‘그만, 그만해! 나도 너희를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야! 아니,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네가 죽였어!
―네가 악마야!
―악마는 너야!
―악마의 정체는 너야! 그 악마가 본래의 너야!
―너는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악마야!
―변태 같은 악마!
―살인에 환장한 귀신!
―살인귀!
―악마!
―괴물!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 이 악마야!
―죽어 버려! 죽어 버려!
귀신들이 하나 되어 루멘을 향해 욕을 했다.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루멘의 심장에 꽂혔다.
그들이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루멘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만, 그만, 그마안!’
악몽이다, 이건 악몽이야!
루멘이 절규했다.
―네가 우릴 죽였어!
―우리도 널 죽일 거야!
귀신들이 하나둘 루멘에게 다가오더니, 양팔을 내밀었다. 그들이 모두 루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밀어닥치는 귀신들을 루멘으로선 막아 낼 재간이 없었다.
‘끄, 끄으억!’
숨이 턱 막혀 온다.
―죽어라!
―죽어! 죽어!
―우리가 느낀 고통을 너도 느껴야 해!
―이 괴물!
―악마!
―살인귀!
‘사, 살려 줘…….’
루멘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죽어! 죽어!
―악마는 지옥으로 돌아가라!
―돌아가! 돌아가!
‘으, 으으으으.’
루멘은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산소, 산소가 필요하다.
이러다간 죽을 것 같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주, 죽기 싫어!’
―죽어라, 죽어!
―넌 죽어야 해, 이 악마!
―지옥으로 썩 꺼져 버려!
귀신들의 외침에 루멘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절규했다.
‘살려 줘! 살려 줘!’
―죽어! 이 살인마!
―너도 무섭지? 무섭지?
―우리도 너무 무서웠어!
―너 때문이야!
―넌 우리를 죽였어! 우리도 너를 죽일 거야!
‘시, 싫어!’
―죽어라, 이 살인마!
―이 악마 같은 살인귀!
루멘에게, 괴물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원혼이 루멘을 뒤덮었다.
자신이 죽인 원혼 앞에서 무력해진 루멘이 절규했다.

“끄아아아아아악!”
그 누구보다도 강했던 나약한 영주가 자신의 목을 강하게 조르며 절규했다.


제2권에서 계속


<용어 설명>



마나―차크라, 신성력, 마기, 소울, 스피릿. 이 다섯 가지 기운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말.

마법사―마력을 사용하여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힘을 발휘하는 사람.

마력―스피릿과 소울과 함께 마나의 나머지 세 가지 기운 중 하나를 포함한 것. 마력을 이용하여 마법을 발현할 수 있으나, 재능이 없는 사람은 마력을 만들어 내지 못함. 또한 네 가지를 섞으면 마법이 발휘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설들은 많으나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러―차크라를 다루는 기사들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법. 고밀도로 압축된 차크라에 스피릿의 기운이 깃들어 마법보다도 뜨거운 불길을 만들어 내기도, 얼음보다도 차가운 서릿발 같은 기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것을 펼칠 수 있는 자를 엑스퍼트의 수준에 오른 자라 말하며, 기사의 경우에는 오러 나이트라고 불리며, 이때부터 상급 기사로 인정된다.

필드―오러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실력자를 마스터라 칭하는데, 그 마스터를 증명하는 것이자, 마스터만의 전유물. 각기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며, 그 영역에서는 마음대로 오러를 생성해 낼 수 있다.

트롤―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회복력을 지닌 몬스터. 2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신장과 턱까지 내려오는 긴 송곳니,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졌다. 전체적인 외형은 두 발로 선 도마뱀이다.

마족―몬스터들은 태생적으로 마기를 몸에 품고 나는데, 그들 중 마기를 다루어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를 일컫는 말. 그들은 종족의 특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속한 종족으로 따져 방심한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