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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24화)
Chapter Eleven 나약한 영주(2)
다른 평범한 조각상이라면 괜찮지만, 그 조각상은 안 된다. 왜냐면 그 조각상은 그로서도 보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자신이 만든 작품들 중 매우 뛰어난 편에 속하는 조각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따로 염색까지 했던 것이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괜찮은 모양이구나.”
“네, 네?”
보통 정반대이건만.
피터의 말에 당황한 아론이 말을 더듬거렸다.
“분명 지금 ‘네’라고 했다.”
“…….”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래 이런 인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이럴 때마다 당황스럽게 그지없다.
아론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론에게서 나름 합법적(?)으로 쌍방 동의하에 조각상을 갈취한 피터가 알프레드에게 다가갔다.
알프레드는 피터가 다가오자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위협하다, 피터가 손바닥에 올려놓은 새 조각상을 보더니 곧장 고개를 푹 숙이며 날갯짓을 멈추었다.
그 모습에 피터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성공이다, 성공이야!
‘역시, 넌 결국 미개한 새일 뿐이다. 예전에 네놈이 이 조각상을 보고 몸을 움찔하는 걸 기억해 두길 잘했지.’
“흠흠. 알프레드?”
피터가 나름 위엄 있는 말투로 알프레드를 불렀다. 알프레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지 고개를 숙인 채 날개를 살짝살짝 움직이기만 할 뿐.
그런 알프레드의 앞에 새 조각상을 들이민 피터는 알프레드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도 무게 중심을 앞으로 내미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의 목에 걸린 금팔찌를 빼내었다.
파드드득―!
순간, 알프레드가 격하게 반응했다.
감히 자신의 멋의 상징을 건드리다니! 이것은 자신의 조권(?)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알프레드의 격한 날갯짓에 피터는 새 조각상을 오른손에, 금팔찌를 왼손에 얹은 뒤 둘을 여러 번 교차시켰다.
나름대로 똑똑하며, 몸짓 발짓까지 다 쓰면 대화가 가능한 것이 알프레드였다.
알프레드는 피터의 행동에 잠시 고민하는 듯 몸을 움찔거리다 고개를 까딱였다.
“훌륭한 선택이옵니다.”
알프레드에게 극존칭을 사용하며 알프레드의 옆에 아론에게 강탈한 조각상을 놔둔 뒤, 금팔찌를 자세하게 살폈다.
“후우우!”
금팔찌에 가볍게 입김을 불은 뒤 옷으로 슥슥 닦았다. 흙들이 닦였고, 나름 더러운 것들도 옷에 닦여 나갔다.
모닥불 근처에서 빛의 반사도 등등을 테스트해 본 결과, 피터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50골드는 족히 하겠는데? 주인만 잘 만나면 60골드도 가능하겠어.”
금팔찌에는 기이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잘 보이진 않았지만 썩 훌륭한 문양이었다.
“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본 듯한 문양에 피터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봤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내 기억에 있었던 문양 같으니까, 골동품점에 가면 더 비싸게 팔 수 있겠는데?’
피터가 히죽 웃으며 금팔찌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곧장 본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알렌, 따라와.”
피터가 모닥불 옆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알렌을 불렀다. 알렌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피터를 쳐다보았다.
“뭔 일인데요?”
“따라오라면 따라와.”
“흐아암. 저 말고 아론 데려 가세요.”
“아론은 일하잖아. 여기서 노는 건 너 하나밖에 없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나 말고 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알렌이 말한 이들은 대부분이 영지민들이었다. 체력이 조금 부족하여 뻗어 버린 사람들이나, 아녀자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영지민들 중에서도 일하는 이는 상당히 많았다.
“그럼 노는 사람 중에 아는 이름 있나?”
“에후. 미리미리 외워 두는 건데. 쩝.”
피터의 물음에 알렌이 한숨을 내쉬며 작게 투덜거렸다.
2
“미안하다.”
방금 전까지 하던 사과와는 다른 의미였다.
자신이 추태를 보여 미안하단 뜻이었다. 루시가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이제 안…… 쓰라려?”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제 얼굴 괜찮아요?”
“어…… 그게…….”
루멘이 재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괜찮다고, 예쁘다고 말해 주길 원하는 듯한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못했다.
그 모든 이유는 전적으로 루멘에게 있었지만.
“……많이 이상해요?”
“응? 아냐. 그렇게 심하진 않아.”
“이상하긴 하다는 거네요.”
“……미안.”
“괜찮다니까요.”
그녀의 얼굴 오른편에 난 다섯 개의 손톱자국은 그녀의 외모를 심각하리만치 못나게 만들었다.
부풀어 오른 상처는 외모를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이에겐 혐오감까지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마 평생이 가도록 낫지 않을 것이며, 지워지지 않으리라.
“…….”
한순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루멘이 이렇게 진중하게 루시에게 사과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루시에게 사과를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더군다나 루시로선 자신에게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루멘은 아예 딴사람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대화를 진척하긴 어려워 보였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그때,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멘이 스윽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알렌을 데리고 온 피터가 눈에 들어왔다.
“……왔어?”
“왔어? 왔냐고요? 네! 왔습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보아하니 고블린들한테 진창 깨지기만 한 것 같은데, 뭘 이렇게 앉아서 노는 겁니까? 그리고 루시! 넌 내가 빨리 영주님 데려오라고 했어, 안 했어?”
피터는 상당히 화가 났는지 속사포처럼 설교를 했다. 루시가 침울한 표정으로 피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피터의 눈에 루시의 얼굴이 들어왔다.
흠칫!
피터가 살짝 몸을 움찔거렸다.
무어간 날카로운 것에 얼굴이 베였는데, 루멘의 덕을 살짝 봐서 회복력도 좋은 터라 금방 상처가 낫긴 했으나 완치는 무리고, 아마 상당히 부풀어 오른 것이리라.
루시의 모습에 놀란 것은 비단 피터뿐만이 아니었다. 피터의 뒤에 서 있는 알렌 또한 적잖게 놀랐다. 하지만 걱정 어린 말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다.
잘 알고 있었다. 저 정도 흉터면 여자로서의 매력은 대부분 손실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때에 오히려 위로를 한다면 여자가 스스럼없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긴 하겠으나, 마냥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차라리 스스로 무뎌질 때까지 놔두는 것이 좋았다. 피터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나중에 물어보면 되지.’
물론 루시가 아니라 루멘에게다.
뭐, 왠지 딱히 묻지 않아도 잘 알 것만 같았다. 99퍼센트의 확률로 저 바보 같은 인간이 사고를 친 것일 터다.
피터는 루시의 상처에 대해 애써 무시하려는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뭐해? 빨리 안 일어나고. 그리고 영주님도 빨리 가시지요. 영지민들이 영주님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애타게는 개뿔이.”
억지로 끌려온 알렌이 날 선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딱히 들켜도 상관없는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거짓말이 뽀록나면 민망한 것은 매한가지.
피터가 매서운 눈빛으로 알렌을 쏘아봤다.
3
주변 환경이 너무 시끄러우면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물론 그것에 대한 개인차는 극명하게 있겠지만, 루멘은 시끄러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활기찬 것이라면 몰라도, 와글와글, 웅성웅성, 시끌시끌 등의 묘사가 자연스러워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럴 때마다 곁에 있던 스카가 나서서 ‘네 이놈들! 어느 분의 앞이라고 떠드느냐!’라고 대신 외쳐 주었지만.
또, 피터나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음울하거나, 루시 혼자 떠들면 떠들었지 시끄러운 적은 없었다.
그래, 아무튼 루멘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조용한 상황에 사색에 잠기는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지나치게 조용해도 자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
“…….”
조용하다 못해 적막이 흘렀다.
대충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디선가 소음이라도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이라도 상당히 모여 있다면,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아주 작은 소음이라도 들리기 마련이다.
없다.
소리가 없다.
유일하게 나는 소리는 화르륵! 하고 모닥불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였다.
밤이 늦어 가고 있었다. 밤에는 소리가 더욱 잘 들린다. 하지만 소리가 없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말인가.
루멘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스윽 훑어보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들 침묵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미동도 없다.
단지 힐끗힐끗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몸에 상처는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마을로 안 돌아가는 거지? 혹시 그냥 도망친 건가? 아니, 혹시가 아니야. 분명히 쫄아서 도망친 게 분명해. 암암. 그렇고말고.’
사실무근이다.
피 떡이 될 때까지 얻어맞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다 보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침묵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자신이 먼저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멘이 충분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입을 열었다.
“……나는.”
“…….”
적막은 여전하다. 다만 다른 것은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겨우― 고블린 따위에게 져 버린 자신이었으나, 감각은 매우 예리했으니까.
“너희들을 지켜 줄 힘이 없다.”
자신은 나약하다.
“내 안엔 괴물이 있다. 하지만 이 괴물도 알고 보니 매우 약해서 너희들을 지키지 못한다.”
아무도 이기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의 사념 깊은 곳에 잠을 청하고 있을 괴물 또한 나약하다.
“오히려 너희를 파멸로 몰고 갈 인간이지.”
“…….”
피터 등을 제외한 모든 영지민들과 스카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걸까.’ 딱 이 표정이었다.
개의치 않았다.
이들이 알아듣기를 원한 것이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었다.
“너희들의 터전을 내가 말아먹었다. 너희들이 노력했던 1년간의 시간도 헛되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너희에게 결코 득이 될 수 없다.”
자신은 영주다.
미러 영지의 주인.
하나 쓸모가 없다.
패왕(覇王)으로서 가져야 할 강력한 힘이 없다.
현왕(賢王)으로서 가져야 할 뛰어난 지혜가 없다.
성왕(聖王)으로서 가져야 할 높은 덕목이 없다.
심지어 폭군(暴君)보다도 못해, 아예 영지일은 뒷전이었다.
모든 영지의 대소사는 피터에게 맡겼다.
속으로는 영지를 살짝 일으켜서 훗날 카온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까먹어 버렸다.
군주로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자신이었다.
“너희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주었고, 이제 모두들 희망이 산산이 깨졌을 것이다.”
“……그렇게 자책하실 거 없습니데이.”
모두가 루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침묵하고 있을 때, 촌장인 로칸이 말했다.
“어차피 오우거가 마을로 왔을 때, 전 이미 마을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더. 영주님이 아니었으믄 우리들 모두 그때 죽었을 겁니더. 더군다나 우리들 모두 멀쩡히 살아 있지 않습니꺼? 안 그렇습니껴, 여러분?”
로칸의 말에 몇몇 영지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영주님이 계셨으니 그나마 이때까지 살아남았지!”
“영주님이 안 오셨으면 아마 살아 있는 사람이 지금의 절반도 안 됐을 겁니다.”
“고블린들이 그렇게 떼거지로 몰려왔는데, 아무리 강해도 별수 있겠습니까?”
영지민들이 한 번에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루멘이 하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다 파악하지 못했다. 배움이 일천하니까. 매우 간단한 말이나, 수의 계산도 로칸이나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곤 십 자리가 넘어가면 간단한 계산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 파악은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