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시골영주 1권(23화)
Chapter Ten 나약한 괴물과 나약한 인간(3)
3
아득해졌던 정신이 서서히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몸에 아무런 감각도 없다.
그렇군. 눈을 감고 있는 거구나.
하지만 곧이어 눈을 뜰 수 있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고,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붉은색의 액체였다.
이게 뭘까…….
몸을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이지 않으니, 이게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때, 후각이 돌아왔다.
킁킁!
약간 쇠 냄새가 난다. 또 약간 끈적끈적해 보였다. 쇠 냄새가 나고, 끈적끈적한 붉은색의 액체……. 하나밖에 더 없잖은가?
‘피?’
어째서 눈앞에 피가 있는 거지? 피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이 알 수 없는 현상에 의아함을 품으며, 서서히 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팔다리 모두, 사지가 멀쩡히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루멘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건물 잔해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이었다.
루시.
그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여인이 피가 철철 흐르는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고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자신은 그런 그녀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두 다리론 그녀의 양팔의 움직임을 막았고, 오른손으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었다.
‘무슨 상황이지?’
뭐지? 어떤 상황인 거지?
루멘이 머리를 굴리며 이게 어떤 상황인지 찾고 있을 때, 그녀의 목덜미에 난 두 개의 이빨 자국이 보였다.
“아, 아아…….”
루멘이 작게 신음했다.
기억이 돌아온다.
“으으, 으으으…….”
자신은, 그 어떤 생물보다 강하다 치부했던 괴물은 졌다.
일개 고블린에게. 그나마 위안인 것은 그 고블린이 마족이라는 것일까?
아니다.
어쨌거나 괴물은 고블린에게 졌다. 그리고 지고 난 괴물은 동료를 물었다.
“으아아…….”
동료의…… 그것도 하필이면 여인의 얼굴에 커다란 상처까지 남겼다.
피를 마시면서 동료라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갈증을 없애기 위해, 하찮은 포만감을 위해 동료의 피를 무식하게 빨았다.
“으으윽…….”
루멘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났다.
나약한 자신에게.
자신은 겨우 고블린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받은 괴물을 최강이라 치부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괴물을 최대한으로 억제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괴물은 매우 나약했고, 그 괴물보다도 자신이 더 나약했다.
“으아아아악!”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자신은 무얼 했는가? 겨우 그깟 고블린 하나 이기지 못하는 괴물을 이기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은 이리도 나약하단 말인가.
그때, 볼에 작은 체온이 느껴졌다.
뭐지?
루멘이 괴성을 지르는 것을 멈추고 물끄러미 루시의 손을 쳐다보았다.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우, 울지 마요, 영주님.”
“…….”
울지 말라고?
내가, 내가 지금 울고 있는 거야?
“저, 전 괜찮으니까. 헤헤.”
루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괜찮은데?”
“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전 아무렇지도 않을 걸요? 헤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뭐가 아무렇지도 않은데!”
루멘이 울분을 토하듯 소리쳤다.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나고, 꽤나 오랜 시간 피를 빨렸다.
괜찮을 리가 없다.
“괘, 괜찮다니까요. 헤헤.”
“그따위 바보 같은 웃음 좀 짓지 마!”
자신이 잘못했다. 한데 어째서 루시가 자신을 위로하는 것인가?
자신이 백 번, 천 번 사과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화가 났다.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그 화를 루시에게 냈다. 하지만 루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오히려 루멘을 위로했다.
“전 괜찮으니 그만 우시라니까요.”
루시가 루멘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지 그녀의 손이 상하 운동을 할 때마다 바르르 떨려왔다.
“으윽.”
루시를 쳐다보자 눈앞이 흐려 왔다.
왜?
어째서?
“미안…… 미안해…….”
“전 괜찮다니까요…….”
루시의 말투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루멘이 그녀의 옆에 얼굴을 파묻으며 엎드렸다.
“미안, 미안해……. 미안……. 흐윽. 흐으윽…….”
루멘이 작게 흐느끼자, 루시가 루멘을 꼭 끌어안았다.
Chapter Eleven 나약한 영주(1)
0
“우와…….”
루멘이 입을 떡 벌렸다.
그의 아버지는 강했다. 아니, 괴물 같은 인간이란 말이 옳을 것이다.
한데 그의 할아버지는 더 강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농락하고 있었다. 다른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가지고 놀고 있단 말이다!
“허허. 이눔 자식아, 누가 검 가지고 장난치래? 검을 베고, 찌르라고 있는 거지 칼 장난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루멘의 할아버지, 자신의 아버지인 다니엘 폰 타밀론의 말에 다비드가 검을 꽉 말아 쥐었다.
“아버지가 괴물인 겁니다.”
“허어! 이 자식이 어디서 애비한테 괴물이라는 망발을 해?”
“칠십이 다 되어 가는 노인네가 그렇게 움직이는데, 괴물이 아니면 또 뭡니까?”
“이 자식이 말 꼬라지 하고는.”
다니엘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비드에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확실히 무인으로선 뛰어날지 몰라도 검사로선 자격 미달이다. 네가 아무리 날아다니고, 다른 사람들 앞에 군림한다고 해도 검을 그따위로 놀려선 절대 뛰어난 검사가 될 수 없다. 하긴, 칠십 먹은 노인네도 어쩌지 못하는데. 뭘 바라겠냐.”
“아직 칠십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딱히 뛰어난 검사가 아니라도 됩니다. 무인으로서 뛰어나면 충분하지요.”
다비드가 그렇게 말하다니, 순식간에 자신의 영역을 넓혔다. 뛰어난 무인으로서 가지는 영역이 아니라, 마스터로서의 권능.
필드(Field)인 것이다.
순간 자신의 몸을 간질이는 더러운 기운에 다니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좀생이 같은 자식.”
그러는 사이, 다비드는 어느새 다니엘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필드는 그야말로 사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순간이동 따위의 마법 같은 일은 불가능하지만 바람의 저항을 없애 오히려 자신의 움직임에 도움을 주고, 디디기 좋은 흙만을 밟으며 달리면 적게는 1할에서 많게는 3할 정도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다비드가 한 일이 그런 것이다.
다니엘이 다급히 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그러자 다비드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흩어졌고, 다니엘은 재깍 옆으로 물러났다.
샤악!
다니엘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다비드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니엘은 곧장 치사한 아들놈을 향해 검을 연속으로 휘둘렀다.
샤아악! 샤악! 등의 무시무시한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으, 우와아아!”
루멘이 작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당연히 루멘의 눈에는 저 두 괴물의 움직임 따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가 들린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역시 자신의 아빠였다.
극악무도하고, 웃으면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할아버지와 저렇게 대등하게 싸우다니!
수많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영지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그의 아버지는 자신 하나로도 충분히 강했다.
“멋지다!”
루멘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최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루멘에게 있어 다비드는 멋진 아버지였으며, 훌륭한 영주였으며, 강한 인간이었다.
아주 잘난 인간이란 소리다.
루멘. 꽃다운(?) 방년 4세.
아버지와 할아버지라는 이름의 탈을 쓴 괴물 두 명의 대련을 보며 마냥 행복하던 시절,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다짐을 했다.
“나도 나중에 아빠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절대 되지 말고.
1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피터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두 시간 가까이 됐다. 그런데 아직 루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루멘은 두말할 것도 없고.
스사삭!
그때, 피터의 귓가에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움직임이 가볍다. 그냥 동물인가?
아니면 몬스터?
피터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곧장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섬광의 빛이여, 모습을 가린 내 눈앞의 적을 드러내소서.”
그의 말과 함께 동시에 소리가 난 곳의 바로 위에 작은 구체가 떠올랐다. 그 구체는 딱히 뜨거운 열기는 뿜지 않았으나, 빛을 발산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밝아졌다.
어둠이 걷혔고, 소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음의 주인은 고양이였다. 검은색과 흰색의 털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양이였는데, 고양이의 눈은 회색과 푸른색인 오드아이였다. 고양이의 위에는 붉은색의 털을 가진 매 한 마리가 올라타 있었다.
이상한 것은 매의 목에 금빛의 번쩍이는 팔찌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뭐야, 너희들이었냐.”
한동안 안 보여서 까먹고 있었다. 저들도 생체 실험을 거친 루멘의 동료였다.
동료라고 여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당당히 답할 수 있긴 하지만.
피터는 그들을 무시하려다가 새의 목에서 금빛이 유난히도 번쩍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흠흠. 알프레드?”
피터가 즉석으로 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때까지 매는 그냥 ‘야’ 혹은 ‘새’라고만 불릴 뿐, 딱히 이름 따윈 없었다. 고양이도 다를 건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를 지어 불러 주었다. 뭐, 예전에도 새에게 몇 번인가 ‘알렉스’ 라던가 ‘케이딕’ 등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른 기억이 얼핏 있긴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프레드라는 이름이 자신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챈 새는 고양이의 머리에서 몸통으로 내려갔다.
‘저 인간은 나빠! 내 컬렉션을 빼앗아 가!’
……라고 경험이 말해 주는 정확한 충고에 입각하여 피터를 피하는 것이었다.
피터는 그러거나 말거나 재빠르게 새, 아니 알프레드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잽싸게 알프레드를 낚아채 새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알프레드의 목에 걸려 있는 금팔찌를 빼냈다. 그러자 알프레드가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라 피터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뚝! 뚝! 뚝!
알프레드가 연속적으로 피터의 정수리를 부리로 때렸다. 연속적인 부리 짓에 피터의 머리에서 작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백억 골드……. 아니, 가치를 매기기도 어려운 소중한 머리를 다치게 하는 이 몹쓸 새 자식을 패대기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잠깐 쉴라 하면 이놈의 새가 정수리를 박살 내 뇌를 뽑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자신은 아마 만성 스트레스 질환으로 요절할 테지.
이 새는 요상하게도 기억력만큼은 새대가리가 아니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피터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알프레드의 목에 금팔찌를 걸어 주었다.
그러자 알프레드는 ‘흥!’이란 표현을 하고 싶었던 건지, 대가리를 옆으로 휙 돌렸다. 그러곤 곧장 날아올라 고양이의 머리에 올라탔다.
피터는 알프레드를, 정확히는 알프레드의 목에 걸린 금팔찌를 유심히 노려보며 아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전에 보여 주었던 새 조각상 말이다. 지금 있느냐?”
“아, 그거 말인가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피터의 말에 아론은 곧장 자신의 커다란 짐 가방을 뒤적거렸다.
족히 한 사람만 한 크기의 가방을 들고 강행군을 하는 아론을 볼 때마다 영지민들은 ‘먹고, 자고, 싸는 걸 제외하면 전부 일만 하더니, 역시 체력이 괴물이야.’라고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일쑤였다.
가방에서 아론이 나무로 된 조각 여러 개를 꺼내었다. 사람을 조각한 것, 개, 고양이, 늑대들을 조각한 것까지 다양했다. 피터는 그중 섬세하게 새를 조각하고, 염색까지 한 새 조각상을 집어 들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떻게 그 단검으로 이렇게 조각을 하는 거야?”
“희희. 하다 보면 됩니다.”
“난 해도 안 될 것 같은 말이지.”
피터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론의 조각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는데, 그 조각품들은 전문적인 조각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줄기를 자르고, 간단하게 호신으로 사용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단검으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딱히 조각칼로 만든다고 해서 아론의 조각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각칼로는 제대로 깎지도 못했다.
“내가 이걸 가져도 되겠느냐?”
“예? 그게…….”
아론이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