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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새 삶을 얻자마자 난 부모님의 죽음을 막았다.
원래대로라면 아빠가 ‘태영 아저씨’에게서 의문의 전화를 받고 엄마와 함께 급히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렇게 차를 운전하며 도로를 달리던 도중 사망해 뉴스에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쯤 엄마와 아빠의 사진을 붙든 채 엉엉 울고 있었겠지.
하지만 난 지금 내 방 창틀에 기대서 창으로 불어오는 겨울밤의 쌀쌀한 바람을 만끽하는 중이다.
태영 아저씨는 아빠의 과거 친구였다고 들었다. 엄청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연락하지 않고,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며 사는 중이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난 관심 없고, 난 아빠의 휴대폰에서 태영 아저씨의 번호를 수신 차단시켰다. 저장된 번호도 지워 버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상호 무소식이 서로에게 희소식이 되길.
솔직히 태영 아저씨 입장에서도 친구의 장례 소식보다는 무소식이 달갑지 않겠는가.
눈보라 치는 겨울, 해가 기울던 저녁. 아빠의 휴대폰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나의 서연고등학교 입학 축하 파티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목표를 이뤘다.’
부모님의 죽음을 막았다는 건, 앞으로의 내 인생 자체가 달라질 거라는 뜻이다.
부모님과 계속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데, 서연고등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을 거고, 기자가 되어 엄마의 소원도 이루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내가 기자가 될 수 있는 걸까.’
가슴속에 꽁꽁 묻어 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 봐도 되는 걸까.
나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따뜻한 방 안 공기에 취해 잠들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대신 나는 책상 앞으로 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책꽂이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어릴 적 내가 기자의 꿈을 키우며 만든 다이어리였다.
나는 이걸 ‘민아 타임즈’라고 불렀다. 미치게 오글거린다는 거 나도 알지만 습관처럼 이 이름을 스물여섯 살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때는 기사 쓰는 연습을 하는 노트에 그 이름을 붙였다. 사회에 흥미로운 이슈가 있을 때마다 내 손으로 기사를 써 보는 연습을 하는 용도였다.
이 연습으로 인해 지난 10년간의 내 인생보다 10년간의 사회 이슈가 내 머릿속에서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빨간색 표지를 넘기고 그 안의 내용을 찬찬히 훑어봤다. 열여섯살의 민아 타임즈는 스크랩북에 더 가까웠다. 사회 관련 글보다는 영화, 책 리뷰부터 맛집, 과자, 여행지에 대한 감상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예전의 내가 쓴 글들을 보며 잠시 웃고, 펜을 들었다. 새 페이지에 날짜를 먼저 적은 뒤 오늘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을 적었다.
‘이민아, 다시 태어나다.’
그 아래에 같은 크기로 서연고 합격을 자축하는 글도 함께 적었다.
예전부터 펜을 잡으면 안 돌아가던 머리도 돌아가곤 했다. 나는 나의 새 인생을 위한 멋들어진 새 목표를 생각해 냈다.
이왕 다시 태어난 거,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께 효도까지 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나는 다음 장을 넘겨 글씨를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목표: 서연고등학교 장학금!’
하지만 난 바로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 때문에 펜을 던지고 이 글을 수정액으로 덮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탄식했다.
‘서연고등학교’ 하면 당연하게 떠올렸어야 했던 사건이 있는데 잊고 있었다.
합격의 기쁨이었는지, 재회의 환희였는지, 난 무엇인가에 홀려 내 세대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떠올렸어야 했던 것을 놓쳐 버린 것이다!
장학금은 포기다. 불가능하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다시 펜을 집어 들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마른 수정액 위에서 펜촉이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연하은.’
3년 내내 전액 장학금의 주인. 그리고 10년 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달굴 사건 사고들의 주역.
나는 그 이름 옆에 두 사람의 이름을 더 써 내렸다.
‘강무열. 민시우.’
스물여섯 살의 나는 민아 타임즈에 이들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런 제목을 붙였었다.
‘서연고 출신 엘리트들의 삼각관계 스캔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은 그해 최대의 이슈.
그 모든 사건의 시작은 올해 서연고등학교였다.
그래, 언제나 펜을 잡으면 안 돌아가던 머리도 돌아가곤 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연하은은 우연히 카메라에 얼굴을 비쳤다가 뛰어난 외모로 단번에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스무 살에 배우로 데뷔해 정상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간 연예계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명문 자사고 수석 졸업에 명문대 휴학, 외모도 최고, 연기력도 최고, 작품 안목마저 최고.
하지만 완벽한 그녀에게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싸가지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6년간 연예계의 최정상에 있으면서 연애 구설수 한번 없었던 그녀의 공든 탑을 무너지게 만든 것은 단 한 번의 스캔들이었다.
그것도 ‘삼각관계 스캔들’.
이 스캔들은 당시 사회 이슈였던 한 의사의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단독 기사 하나만으로 덮어 버릴 만큼 파장이 거대했다.
연예면이고 사회면이고 뉴스의 타이틀을 모두 장식할 정도였으니까.
그도 그럴 게 스캔들 상대 중 하나인 강무열은 세용그룹의 젊은 후계자였고 또 다른 상대인 민시우는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이었으니 말 다 했다. 심지어 그들은 당시 촬영 중이던 연하은 단독 주연 영화의 투자자와 감독이기도 했으니까.
처음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심은 유명 온라인 신문사 소속인 한 기자의 단독 의혹 제기 기사로부터 시작됐다.
‘연하은을 데뷔 초부터 세용전자 광고 모델로 기용한 강무열과, 신인이던 연하은을 캐스팅해 천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기록하고 칸까지 보내 버린 감독 민시우. 과연 이 세 사람이 서연고 동창이라는 것이 우연일까?’라는 의혹을 담은 기사였다.
기자들은 그 후부터 세 사람과 같은 해 서연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와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세 사람은 10년 전부터 꽤나 유명했고, 서연고 동문들 사이에서는 이미 파다하게 퍼진 스캔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양파 껍질마냥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10년간의 깊은 삼각관계는 거의 한 달을 지속해서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다. 매일 새로운 내용의 기사들과 진술들이 인터넷에 올라왔으니까.
물론 나는 그 안에는 그저 루머일 뿐인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 잘나기로 유명한 두 남자, 강무열과 민시우가 10년 동안 연하은의 어장 속에 갇힌 물고기들이었다는 것.
하지만 스캔들로 뜨겁던 한 달 동안 모두의 최대 관심사가 연하은이었음에 반해 나는 이 사건의 전문가는 아니다.(실제로 당시에 이 사건에 대해 논문을 쓴 전문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은 팩트와 루머를 구분해 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첫째로, 나는 나 살기 너무 바빴다. 살인적인 알바 스케줄과 암과 돈 때문에.
둘째로, 나는 연예면보다 사회면을 더 주의 깊게 보는 타입이었다. 그 당시 내가 관심을 준 건 다른 사건이었다.
셋째로, 그 떠들썩하던 한 달의 끝을 보지 못하고 나는 한강 물에 몸을 던졌다.
이런 이유로 이 스캔들은 한 달 동안 세간의 최고 관심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아 타임즈에서 적은 분량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 알고 싶다. 세기를 장식하는 특종. 기자로서 엄청나게 구미가 당기는 사건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연하은’이라고 적힌 글씨 위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두어 번 둥글려 그렸다.
이거, 잘하면 내가 최초 기사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 * *
중학교 3학년의 남은 등교일은 졸업식 전 고작 며칠이었다.
난 대부분의 학급 친구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방학 동안 중학교 때 일기장과 휴대폰을 낱낱이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등교를 해 보니 얼핏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나는 중학교 때 절친, ‘홍윤지’와 함께 등굣길을 걸어 학교로 향했다.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모를 졸업식 예행연습을 하고,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 앉아 부모님들의 입장을 기다렸다.
엄마, 아빠는 졸업식이 시작한 뒤 조금 늦게 강당에 허겁지겁 들어왔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들은 밝게 웃으며 인사하곤 나의 사진을 찍어 줬다.
사방의 카메라 앞에서 치아를 내보이며 웃고 있던 나는 사실 나는 중학교 졸업식 내내 눈물을 참아 내야 했다.
원래 과거의 나는 마지막 중학교 출석 기간 내내 병결을 내 등교를 거부했었고, 졸업식에만 참석했는데, 오늘과는 많이 달랐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학교 전체에 내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간신히 붙은 학교까지 잃었다는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나를 힐긋힐긋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 내게 말을 걸려고 하면 날을 세우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그때 나에게 다가온 애들 중에 지금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착한 친구, 홍윤지도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나는 행복에 겨워 가족들과 인사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게 견디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쓰렸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나를 건드리는 것이 마치 칼을 대는 것처럼 아파서 모두를 밀어냈다. 아마 홍윤지도 그렇게 밀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 관계의 마지막이었겠지.
그때 그녀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내 길이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난 고등학교가 달라 헤어진다고 해도, 중학교 때 친구 홍윤지와의 우정을 이어 가고 싶어졌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친구이기도 하고, 일기장에 내 중학교 시절의 전부인 양 묘사된 친구이기도 하니까.
* * *
졸업식이 끝난 뒤 나는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홍윤지와 거리로 나섰다.
교복은 이미 학교에서 예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홍윤지는 나와 오랜만에 놀러 나왔다는 것에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우리는 ‘도래길’로 나갔다. 도래길은 우리 동네 근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도래길을 중심으로 여러 동네가 모여 있기 때문에 나름 이 근처에서는 핫플레이스였다.
내가 다닌 중학교인 도래중학교와 도래고등학교가 도래길 바로 옆에 붙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연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도래길을 중심으로 반대편에는 내가 자퇴한 고등학교인 ‘장도고등학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도래길에서 양아치들과 참 많이 어울려 다니곤 했다. 그들이 한 행동 중 어떤 것도 내가 앞선 적은 없었지만, 그저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죄책감과 불쾌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런 이유로 이 도래길은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 홍윤지와 나온 덕분에 이곳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모두 씻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일단 점심부터 먹자. 진짜 배고파 나.”
홍윤지가 깡충깡충 뛰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따라갔다.
홍윤지와 걷는 도래길의 공기가 너무 상쾌하고 좋았다.
아, 주변에 흡연자들이 없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하늘도 더 밝고 파랗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이런 대낮보다는 주로 밤에 왔으니까…….
주변에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였다. 내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음, 하기야 예전에는 내 일행을 보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곤 했었다.
아무튼 나는 홍윤지 덕분에 도래길에서 처음으로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을 갖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가장 먼저 카페로 들어갔다. 핫초코 두 잔을 주문한 뒤 기다리자 얼마 뒤 음료가 나왔다.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건 나였다.
카운터에서 두 개의 핫초코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자리로 돌아가던 차였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짧게 ‘헉.’ 하고 들이마신 숨을 마지막으로 나는 호흡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심지어 손에 힘이 풀려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까는 왜 보지 못했는지, 나와 홍윤지 바로 뒷자리에 눈이 부시도록 예쁜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풍성하게 파도치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 또렷한 눈매에 조각 같은 코까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에게나 붙는 수식어들이 어울리는 그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혼자 거기에 앉아 있었다.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년 뒤와 똑같이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연하은을.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주위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천상계라든가, 오래된 궁전이라든가 뭐 그런 시적인 곳 말이다.
실제로 카페 안은 상당히 소란스러웠지만, 왠지 그녀만은 아주 고요한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여왕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주위의 많은 사람이 이미 그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발을 뗀 나는 자리로 돌아가 쟁반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숨을 골랐다.
홍윤지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너도 봤구나. 저 사람 진짜 예쁘지? 완전 연예인 같아.”
지금의 연하은은 일반인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 연하은은 진짜 연예인이었다. 그러니까, 그 연하은이 왜 여기서 나오냐고!
나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아 가슴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딱히 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명인이라고, 내 눈알이 자꾸 그쪽으로 굴러갔다.
짝. 나는 내 양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연예인도 아니고, 평범한 중학생을 계속 쳐다보는 것은 실례다. 홍윤지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나는 눈을 부릅뜨고 핫초코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민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아니, 사실 요새 계속 이상하긴 했지만.”
홍윤지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대충 둘러대기 위해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모든 사람의 말소리가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나 역시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눈으로 찾았다. 내 뒤쪽에서 난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연하은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깨진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 다수의 남학생들이 불량스럽게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새 삶을 얻자마자 난 부모님의 죽음을 막았다.
원래대로라면 아빠가 ‘태영 아저씨’에게서 의문의 전화를 받고 엄마와 함께 급히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렇게 차를 운전하며 도로를 달리던 도중 사망해 뉴스에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쯤 엄마와 아빠의 사진을 붙든 채 엉엉 울고 있었겠지.
하지만 난 지금 내 방 창틀에 기대서 창으로 불어오는 겨울밤의 쌀쌀한 바람을 만끽하는 중이다.
태영 아저씨는 아빠의 과거 친구였다고 들었다. 엄청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연락하지 않고,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며 사는 중이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난 관심 없고, 난 아빠의 휴대폰에서 태영 아저씨의 번호를 수신 차단시켰다. 저장된 번호도 지워 버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상호 무소식이 서로에게 희소식이 되길.
솔직히 태영 아저씨 입장에서도 친구의 장례 소식보다는 무소식이 달갑지 않겠는가.
눈보라 치는 겨울, 해가 기울던 저녁. 아빠의 휴대폰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나의 서연고등학교 입학 축하 파티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목표를 이뤘다.’
부모님의 죽음을 막았다는 건, 앞으로의 내 인생 자체가 달라질 거라는 뜻이다.
부모님과 계속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는데, 서연고등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을 거고, 기자가 되어 엄마의 소원도 이루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내가 기자가 될 수 있는 걸까.’
가슴속에 꽁꽁 묻어 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 봐도 되는 걸까.
나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따뜻한 방 안 공기에 취해 잠들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대신 나는 책상 앞으로 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책꽂이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어릴 적 내가 기자의 꿈을 키우며 만든 다이어리였다.
나는 이걸 ‘민아 타임즈’라고 불렀다. 미치게 오글거린다는 거 나도 알지만 습관처럼 이 이름을 스물여섯 살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때는 기사 쓰는 연습을 하는 노트에 그 이름을 붙였다. 사회에 흥미로운 이슈가 있을 때마다 내 손으로 기사를 써 보는 연습을 하는 용도였다.
이 연습으로 인해 지난 10년간의 내 인생보다 10년간의 사회 이슈가 내 머릿속에서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빨간색 표지를 넘기고 그 안의 내용을 찬찬히 훑어봤다. 열여섯살의 민아 타임즈는 스크랩북에 더 가까웠다. 사회 관련 글보다는 영화, 책 리뷰부터 맛집, 과자, 여행지에 대한 감상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예전의 내가 쓴 글들을 보며 잠시 웃고, 펜을 들었다. 새 페이지에 날짜를 먼저 적은 뒤 오늘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을 적었다.
‘이민아, 다시 태어나다.’
그 아래에 같은 크기로 서연고 합격을 자축하는 글도 함께 적었다.
예전부터 펜을 잡으면 안 돌아가던 머리도 돌아가곤 했다. 나는 나의 새 인생을 위한 멋들어진 새 목표를 생각해 냈다.
이왕 다시 태어난 거,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께 효도까지 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나는 다음 장을 넘겨 글씨를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목표: 서연고등학교 장학금!’
하지만 난 바로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 때문에 펜을 던지고 이 글을 수정액으로 덮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탄식했다.
‘서연고등학교’ 하면 당연하게 떠올렸어야 했던 사건이 있는데 잊고 있었다.
합격의 기쁨이었는지, 재회의 환희였는지, 난 무엇인가에 홀려 내 세대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떠올렸어야 했던 것을 놓쳐 버린 것이다!
장학금은 포기다. 불가능하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다시 펜을 집어 들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마른 수정액 위에서 펜촉이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연하은.’
3년 내내 전액 장학금의 주인. 그리고 10년 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달굴 사건 사고들의 주역.
나는 그 이름 옆에 두 사람의 이름을 더 써 내렸다.
‘강무열. 민시우.’
스물여섯 살의 나는 민아 타임즈에 이들에 대한 기사를 쓰며 이런 제목을 붙였었다.
‘서연고 출신 엘리트들의 삼각관계 스캔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은 그해 최대의 이슈.
그 모든 사건의 시작은 올해 서연고등학교였다.
그래, 언제나 펜을 잡으면 안 돌아가던 머리도 돌아가곤 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연하은은 우연히 카메라에 얼굴을 비쳤다가 뛰어난 외모로 단번에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스무 살에 배우로 데뷔해 정상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간 연예계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명문 자사고 수석 졸업에 명문대 휴학, 외모도 최고, 연기력도 최고, 작품 안목마저 최고.
하지만 완벽한 그녀에게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싸가지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6년간 연예계의 최정상에 있으면서 연애 구설수 한번 없었던 그녀의 공든 탑을 무너지게 만든 것은 단 한 번의 스캔들이었다.
그것도 ‘삼각관계 스캔들’.
이 스캔들은 당시 사회 이슈였던 한 의사의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단독 기사 하나만으로 덮어 버릴 만큼 파장이 거대했다.
연예면이고 사회면이고 뉴스의 타이틀을 모두 장식할 정도였으니까.
그도 그럴 게 스캔들 상대 중 하나인 강무열은 세용그룹의 젊은 후계자였고 또 다른 상대인 민시우는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이었으니 말 다 했다. 심지어 그들은 당시 촬영 중이던 연하은 단독 주연 영화의 투자자와 감독이기도 했으니까.
처음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심은 유명 온라인 신문사 소속인 한 기자의 단독 의혹 제기 기사로부터 시작됐다.
‘연하은을 데뷔 초부터 세용전자 광고 모델로 기용한 강무열과, 신인이던 연하은을 캐스팅해 천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기록하고 칸까지 보내 버린 감독 민시우. 과연 이 세 사람이 서연고 동창이라는 것이 우연일까?’라는 의혹을 담은 기사였다.
기자들은 그 후부터 세 사람과 같은 해 서연고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와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세 사람은 10년 전부터 꽤나 유명했고, 서연고 동문들 사이에서는 이미 파다하게 퍼진 스캔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 양파 껍질마냥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10년간의 깊은 삼각관계는 거의 한 달을 지속해서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다. 매일 새로운 내용의 기사들과 진술들이 인터넷에 올라왔으니까.
물론 나는 그 안에는 그저 루머일 뿐인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 잘나기로 유명한 두 남자, 강무열과 민시우가 10년 동안 연하은의 어장 속에 갇힌 물고기들이었다는 것.
하지만 스캔들로 뜨겁던 한 달 동안 모두의 최대 관심사가 연하은이었음에 반해 나는 이 사건의 전문가는 아니다.(실제로 당시에 이 사건에 대해 논문을 쓴 전문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은 팩트와 루머를 구분해 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첫째로, 나는 나 살기 너무 바빴다. 살인적인 알바 스케줄과 암과 돈 때문에.
둘째로, 나는 연예면보다 사회면을 더 주의 깊게 보는 타입이었다. 그 당시 내가 관심을 준 건 다른 사건이었다.
셋째로, 그 떠들썩하던 한 달의 끝을 보지 못하고 나는 한강 물에 몸을 던졌다.
이런 이유로 이 스캔들은 한 달 동안 세간의 최고 관심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아 타임즈에서 적은 분량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 알고 싶다. 세기를 장식하는 특종. 기자로서 엄청나게 구미가 당기는 사건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연하은’이라고 적힌 글씨 위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두어 번 둥글려 그렸다.
이거, 잘하면 내가 최초 기사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 * *
중학교 3학년의 남은 등교일은 졸업식 전 고작 며칠이었다.
난 대부분의 학급 친구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방학 동안 중학교 때 일기장과 휴대폰을 낱낱이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등교를 해 보니 얼핏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나는 중학교 때 절친, ‘홍윤지’와 함께 등굣길을 걸어 학교로 향했다.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모를 졸업식 예행연습을 하고,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 앉아 부모님들의 입장을 기다렸다.
엄마, 아빠는 졸업식이 시작한 뒤 조금 늦게 강당에 허겁지겁 들어왔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들은 밝게 웃으며 인사하곤 나의 사진을 찍어 줬다.
사방의 카메라 앞에서 치아를 내보이며 웃고 있던 나는 사실 나는 중학교 졸업식 내내 눈물을 참아 내야 했다.
원래 과거의 나는 마지막 중학교 출석 기간 내내 병결을 내 등교를 거부했었고, 졸업식에만 참석했는데, 오늘과는 많이 달랐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학교 전체에 내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간신히 붙은 학교까지 잃었다는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나를 힐긋힐긋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 내게 말을 걸려고 하면 날을 세우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그때 나에게 다가온 애들 중에 지금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착한 친구, 홍윤지도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나는 행복에 겨워 가족들과 인사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게 견디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쓰렸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나를 건드리는 것이 마치 칼을 대는 것처럼 아파서 모두를 밀어냈다. 아마 홍윤지도 그렇게 밀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 관계의 마지막이었겠지.
그때 그녀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내 길이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난 고등학교가 달라 헤어진다고 해도, 중학교 때 친구 홍윤지와의 우정을 이어 가고 싶어졌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친구이기도 하고, 일기장에 내 중학교 시절의 전부인 양 묘사된 친구이기도 하니까.
* * *
졸업식이 끝난 뒤 나는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홍윤지와 거리로 나섰다.
교복은 이미 학교에서 예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홍윤지는 나와 오랜만에 놀러 나왔다는 것에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우리는 ‘도래길’로 나갔다. 도래길은 우리 동네 근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도래길을 중심으로 여러 동네가 모여 있기 때문에 나름 이 근처에서는 핫플레이스였다.
내가 다닌 중학교인 도래중학교와 도래고등학교가 도래길 바로 옆에 붙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연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도래길을 중심으로 반대편에는 내가 자퇴한 고등학교인 ‘장도고등학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도래길에서 양아치들과 참 많이 어울려 다니곤 했다. 그들이 한 행동 중 어떤 것도 내가 앞선 적은 없었지만, 그저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죄책감과 불쾌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런 이유로 이 도래길은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 홍윤지와 나온 덕분에 이곳에 대한 나쁜 기억들을 모두 씻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일단 점심부터 먹자. 진짜 배고파 나.”
홍윤지가 깡충깡충 뛰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따라갔다.
홍윤지와 걷는 도래길의 공기가 너무 상쾌하고 좋았다.
아, 주변에 흡연자들이 없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하늘도 더 밝고 파랗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이런 대낮보다는 주로 밤에 왔으니까…….
주변에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였다. 내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음, 하기야 예전에는 내 일행을 보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곤 했었다.
아무튼 나는 홍윤지 덕분에 도래길에서 처음으로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을 갖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가장 먼저 카페로 들어갔다. 핫초코 두 잔을 주문한 뒤 기다리자 얼마 뒤 음료가 나왔다.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건 나였다.
카운터에서 두 개의 핫초코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자리로 돌아가던 차였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짧게 ‘헉.’ 하고 들이마신 숨을 마지막으로 나는 호흡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심지어 손에 힘이 풀려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까는 왜 보지 못했는지, 나와 홍윤지 바로 뒷자리에 눈이 부시도록 예쁜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풍성하게 파도치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 또렷한 눈매에 조각 같은 코까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에게나 붙는 수식어들이 어울리는 그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혼자 거기에 앉아 있었다.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년 뒤와 똑같이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연하은을.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주위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천상계라든가, 오래된 궁전이라든가 뭐 그런 시적인 곳 말이다.
실제로 카페 안은 상당히 소란스러웠지만, 왠지 그녀만은 아주 고요한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여왕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주위의 많은 사람이 이미 그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간신히 발을 뗀 나는 자리로 돌아가 쟁반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숨을 골랐다.
홍윤지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너도 봤구나. 저 사람 진짜 예쁘지? 완전 연예인 같아.”
지금의 연하은은 일반인이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 연하은은 진짜 연예인이었다. 그러니까, 그 연하은이 왜 여기서 나오냐고!
나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아 가슴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딱히 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명인이라고, 내 눈알이 자꾸 그쪽으로 굴러갔다.
짝. 나는 내 양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연예인도 아니고, 평범한 중학생을 계속 쳐다보는 것은 실례다. 홍윤지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나는 눈을 부릅뜨고 핫초코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민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아니, 사실 요새 계속 이상하긴 했지만.”
홍윤지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대충 둘러대기 위해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모든 사람의 말소리가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나 역시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눈으로 찾았다. 내 뒤쪽에서 난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연하은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깨진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 다수의 남학생들이 불량스럽게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