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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 1화
01
“바쁜 정준서 씨가 굳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나 봐? 덕분에 얼굴 보니 나야 좋지만.”
경화대학교 캠퍼스의 한 커피 전문점.
화사한 웃음과 함께 자신을 맞아 주는 고종사촌 누나 영주에게 보답하듯, 준서도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영주를 만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1년 전 친척의 결혼식에서 본 이후 처음이지, 아마. 그 이후 쭉 연락 한 번 하지 않아 놓고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영주를 찾은 것만 같아 준서의 웃음 끝이 멋쩍어졌다.
“잘 지냈어? 우리 얼마 만이지?”
“정확하게 1년 만인가? 그런데 누나는 참 나쁘다.”
“뭐가?”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도 여전히 너무 예쁘잖아. 그거 반칙인데.”
준서의 칭찬에 영주가 손사래를 치며 싱긋 웃었다. 나도 이제 곧 사십이라고 엄살을 떨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요즘 대학교는 참 좋구나? 변해도 너무 변했어.”
경화대학교 정문을 지나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며 이곳이 정말 내가 졸업한 학교가 맞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준서는 새삼 다시 창밖을 둘러보았다.
몇 년 만에 방문한 모교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다닐 때만 해도 풋살장이었던 땅에는 건물이 들어섰다. 종종 동기들과 주저앉아 술을 마시곤 했던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분수 공원이 생겼다. 무엇보다 편의점과 커피 전문점이 브랜드별로 즐비해 있는 캠퍼스의 모습은 여기가 도심 번화가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럼. 어지간한 건 학교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어. 좋은 세상이야.”
커피가 뜨거운지 영주가 호로록 소리를 냈다. 그녀는 경화대학교 국제교류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교직원이었다.
“매형은 잘 계셔?”
준서의 형식적인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영주는 별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사람이나 나나 하루하루 같이 늙어 가는 거지 뭐.”
“애들은?”
“잘 커. 클수록 고집이 정말 대단해.”
“누나도 매형도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애들도 갈수록 더 예뻐져.”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봤던 조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준서가 칭찬하자, 영주는 “우리 준서, 사회생활 잘하네?”라는 말로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진심을 왜 그렇게 받아들여?”
장난스럽게 발끈하면서도, 준서는 영주의 결혼 생활이야말로 참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부탁을 하기 위해 카톡에서 영주의 이름을 찾아낸 준서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봤었다. 든든한 남편과 예쁜 아이들 틈에서 웃고 있는 영주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훈훈해지게 만들 만큼 매우 행복해 보였다.
오늘 직접 만나 보니 영주는 실제로도 잘 살고 있는 듯했다. 남편과 함께 늙어 간다, 아이들 고집이 세다, 그런 푸념을 할지언정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이나 고단함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방금 한 말은 100퍼센트 진심이니까 오해하지 마.”
“치, 부탁하러 온 마당에 립서비스한 거 모를 줄 알고?”
“누나 진짜 이러기야?”
다른 곳을 쳐다보며 새침을 떤 영주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고 준서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준서가 어릴 때부터 영주는 정말 이상적인 누나였다. 그가 불기 어려워하는 풍선을 한 번에 불어 주거나, 손이 무뎌 잘 까지 못하는 사탕 비닐을 곧장 벗겨 주던 영주의 모습은 항상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를 지르는 친형 준영의 모습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그래서일까? 평소 남들에게 곰살맞게 구는 법이 없는 준서였지만 영주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영주 앞에만 서면 칭찬이 후해지고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 건?”
굳이 학교까지 찾아와 일하고 있는 영주를 만난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다 준비해 왔지. 누구 부탁인데.”
애초에 영주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사실 준서는 꽤 여러 번 고민하다 그녀에게 말을 건 거였다.
고민은 무색했다. 망설이듯 꺼내 놓은 부탁을 영주는 언제나 그랬듯 흔쾌히 들어주었고, 그렇게 준서는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성이 은근히 특이해서 바로 찾았어. 1만 5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 중에 어떻게 찾나 했는데, 회계학과 채민아는 딱 한 명밖에 없더라.”
준서는 영주가 앞에 내어놓은 하늘색 파일을 곧장 열었다.
파일 속 A4 용지 가장 위에는 ‘채민아’라는 이름과 함께 준서가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여자의 얼굴이 컬러로 인쇄되어 있었다. 예전에 봤던 사진보다 훨씬 더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스무 살에 대학 입학 후 제출한 사진인 듯했다.
뒷장으로 넘기자 거기엔 자신이 영주에게 부탁했던 채민아의 시간표가 있었다. 보자, 오늘이 월요일 오후 2시니까…….
내가 운이 좋았네.
큰마음 먹고 학교에 방문한 오늘은 다행히 채민아가 듣는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준서는 파일을 덮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
그러다 영주가 넌지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만나 보기라도 하지 그래?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데, 아무나 소개했을 리가 없잖아.”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준서는 걱정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만나려고 이렇게 왔잖아?”
“만나지 않기 위해 만나는 거잖아.”
역시 두루두루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사람답게 영주가 준서의 생각을 제대로 꿰뚫었다.
“말 되네.”
정곡을 찔린 준서는 무심하게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고, 영주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관찰했다.
“그만 봐, 누나. 눈치챘으면 적당히 넘어가 주면 안 돼?”
“눈치를 챘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 네가 이 일을 엎어 버리면 나도 공모자가 되는 거잖아. 너 할아버지 성격 몰라? 걸리면 괜히 나까지 혼난다고.”
“내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야?”
“네가 허술한 사람이 아닌 건 아는데, 할아버지가 대단한 분인 것도 난 너무 잘 알거든.”
그랬다. 준서는 채민아라는 여자를 만나지 않기 위해, 그녀를 몰래 만나러 경화대학교로 왔다.
토요일에 있을 상견례 자리에 제발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그 여자를 설득해야만 하는데 과연 일이 잘 풀릴지…….
고민을 거듭하는 준서를 은근히 올려다보며 영주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걸려?”
“모든 게 다 걸려.”
진심 담긴 대답을 한 준서는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건 많았다.
일단 채민아의 나이가 걸렸다. 서른두 살인 자신에 비해 스물다섯 살인 채민아는 어려도 너무 어렸다. 일곱 살 차이가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늘 연상을 사귀었던 준서에게 민아의 나이는 넘지 못할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주선인 것도 마음에 걸렸다. 채민아의 할아버지와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돈을 담보로 결혼을 추진하려는 할아버지의 배짱이 못마땅했다. 사랑만 채워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돈을 이유로 하는 결혼이라니. 안 될 일이었다.
자본을 대 줄 테니 운영하는 <소운>의 새 사무실을 지어 보라고 먼저 제안한 건 할아버지였다. 그야말로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회사가 커지면서 직원들의 숫자는 늘어났고, 조금 더 큰 사무실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으니까.
세가 저렴하다면 물불 안 가리고 사무실 계약을 하려던 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설계한 건물을 지어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된 준서는, 할아버지께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열심히 도면을 그렸고, 공들인 설계를 기반으로 준공식을 했다. 그런데 한참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공사 초반에 할아버지께서 공사 대금을 걸고 준서를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해. 결혼만 하면 공사 자금 넉넉하게 바로 쏴 줄 테니까.’
돈을 쥐고 당당하게 버티는 할아버지를 보며 준서는 그제야 자신의 아둔함을 한탄하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우리 할아버지께서 쉽게 돈을 주실 분이 아닌데 나는 왜 아무 의심 없이 일을 진행시켰을까?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뭐라고 잔소리할 생각 하지 마, 누나. 특히나 누나는 나에게 그러면 안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는 매형 사랑해서 결혼했잖아. 누나랑 매형이 연애한 것도, 또 결혼한 것도, 다 결국 사랑이 전제된 거 아니었어?”
당연하다는 듯 묻는 준서에게 영주도 당연하게 대답했다.
“맞아, 사랑.”
“부럽네.”
다 마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준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부러웠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그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한다는 게.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 현실에서 쉽지 않다는 걸 준서도 알고 있었다.
준서의 쓴웃음을 지켜보던 영주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물었다.
“뭐가 부러워?”
“결말이 부러워. 해피 엔딩.”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서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제길, 벌써 2년이 지난 일인데 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얼굴이 떠오르는지.
준서는 수천 번 수만 번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을 또 해야만 했다.
그건 사랑이었을까? 너와 내가 지금까지 함께였다면 우리는 지금, 결혼을 바라봤을까? 과연 그 결혼은 행복했을까?
목이 탔다. 조금 전 다 마신 커피가 새삼 아쉬워졌다.
“준서야. 넌 결혼이 엔딩이라 생각해? 그것도 해피 엔딩?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결혼이야말로 제대로 된 시작이야.”
“시작?”
“차라리 사랑 타령 하며 연애만 할 때가 좋았다 싶을 만큼, 한집에 함께 살다 보면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생겨. 그 모든 걸 사랑만 가지고 극복 가능할 것 같아? 천만에. 결국 다 노력이야.”
“그래, 노력. 노력도 어느 정도 토대가 탄탄한 상태여야 해 볼 마음도 생기는 거지. 토대 자체가 허술한데 무슨 노력을 해?”
제 성격 남 못 준다더니 기어코 터져 나온 준서의 삐딱함에 영주가 입을 다물었다. 예외적으로 그녀 앞에서 다정하게 굴어도, 준서는 천성이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어쭙잖은 말을 보태 봐야 지금 그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는 걸 파악했기에 그녀도 그냥 들어 주는 쪽을 택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토대가 뒤틀려 있으면 곧 무너지게 되어 있어. 집 짓는 놈이라 그런지 나는 그런 거에 집착하게 되더라.”
“집 안 지었으면 또 무슨 핑계를 댔을지 궁금하네.”
“누나!”
영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사무실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바쁜 영주의 시간을 충분히 빼앗았다 생각한 준서도 영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만나 봐. 너무 못되게 굴지 말고.”
“하는 거 봐서.”
“내가 별걱정을 다 하지. 우리 정준서 툭툭거리긴 해도 마음 엄청 고운 아이인데.”
엉덩이만 두들겨 주지 않았을 뿐, 영주는 어린아이 보듯 준서를 달랬다.
“아이라니. 내 나이가 벌써 서른둘이야.”
“서른둘도 나한텐 아이야.”
고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큰누나 노릇을 하는 영주에게 자포자기하듯 웃어 준 준서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쨌거나 고마워. 수업 땡땡이치는 불량 학생만 아니라면 오늘 만날 수 있겠네.”
시계를 보니 채민아라는 여자가 한창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 20분 뒤에 수업이 끝날 예정이니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면 어렵지 않게 만남이 성사되리라.
단, 강의가 일찍 끝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스물다섯에 4학년이면 휴학도 몇 번 한 졸업반이잖아. 어지간해서는 수업에 빠지진 않을 거야.”
“그 정도 개념은 있기를 바라. 그래야 말도 걸어 볼 만하지.”
영주와 가볍게 악수를 한 뒤 헤어진 준서는 회계학 수업이 있는 건물을 향해 차를 몰아갔다.
01
“바쁜 정준서 씨가 굳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나 봐? 덕분에 얼굴 보니 나야 좋지만.”
경화대학교 캠퍼스의 한 커피 전문점.
화사한 웃음과 함께 자신을 맞아 주는 고종사촌 누나 영주에게 보답하듯, 준서도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영주를 만난 것도 오랜만이었다. 1년 전 친척의 결혼식에서 본 이후 처음이지, 아마. 그 이후 쭉 연락 한 번 하지 않아 놓고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영주를 찾은 것만 같아 준서의 웃음 끝이 멋쩍어졌다.
“잘 지냈어? 우리 얼마 만이지?”
“정확하게 1년 만인가? 그런데 누나는 참 나쁘다.”
“뭐가?”
“아들을 둘이나 낳았는데도 여전히 너무 예쁘잖아. 그거 반칙인데.”
준서의 칭찬에 영주가 손사래를 치며 싱긋 웃었다. 나도 이제 곧 사십이라고 엄살을 떨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요즘 대학교는 참 좋구나? 변해도 너무 변했어.”
경화대학교 정문을 지나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며 이곳이 정말 내가 졸업한 학교가 맞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준서는 새삼 다시 창밖을 둘러보았다.
몇 년 만에 방문한 모교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다닐 때만 해도 풋살장이었던 땅에는 건물이 들어섰다. 종종 동기들과 주저앉아 술을 마시곤 했던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분수 공원이 생겼다. 무엇보다 편의점과 커피 전문점이 브랜드별로 즐비해 있는 캠퍼스의 모습은 여기가 도심 번화가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럼. 어지간한 건 학교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어. 좋은 세상이야.”
커피가 뜨거운지 영주가 호로록 소리를 냈다. 그녀는 경화대학교 국제교류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교직원이었다.
“매형은 잘 계셔?”
준서의 형식적인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영주는 별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사람이나 나나 하루하루 같이 늙어 가는 거지 뭐.”
“애들은?”
“잘 커. 클수록 고집이 정말 대단해.”
“누나도 매형도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애들도 갈수록 더 예뻐져.”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봤던 조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준서가 칭찬하자, 영주는 “우리 준서, 사회생활 잘하네?”라는 말로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진심을 왜 그렇게 받아들여?”
장난스럽게 발끈하면서도, 준서는 영주의 결혼 생활이야말로 참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부탁을 하기 위해 카톡에서 영주의 이름을 찾아낸 준서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봤었다. 든든한 남편과 예쁜 아이들 틈에서 웃고 있는 영주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훈훈해지게 만들 만큼 매우 행복해 보였다.
오늘 직접 만나 보니 영주는 실제로도 잘 살고 있는 듯했다. 남편과 함께 늙어 간다, 아이들 고집이 세다, 그런 푸념을 할지언정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이나 고단함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방금 한 말은 100퍼센트 진심이니까 오해하지 마.”
“치, 부탁하러 온 마당에 립서비스한 거 모를 줄 알고?”
“누나 진짜 이러기야?”
다른 곳을 쳐다보며 새침을 떤 영주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고 준서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준서가 어릴 때부터 영주는 정말 이상적인 누나였다. 그가 불기 어려워하는 풍선을 한 번에 불어 주거나, 손이 무뎌 잘 까지 못하는 사탕 비닐을 곧장 벗겨 주던 영주의 모습은 항상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를 지르는 친형 준영의 모습과 크게 대조를 이루었다.
그래서일까? 평소 남들에게 곰살맞게 구는 법이 없는 준서였지만 영주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영주 앞에만 서면 칭찬이 후해지고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 건?”
굳이 학교까지 찾아와 일하고 있는 영주를 만난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다 준비해 왔지. 누구 부탁인데.”
애초에 영주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사실 준서는 꽤 여러 번 고민하다 그녀에게 말을 건 거였다.
고민은 무색했다. 망설이듯 꺼내 놓은 부탁을 영주는 언제나 그랬듯 흔쾌히 들어주었고, 그렇게 준서는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성이 은근히 특이해서 바로 찾았어. 1만 5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 중에 어떻게 찾나 했는데, 회계학과 채민아는 딱 한 명밖에 없더라.”
준서는 영주가 앞에 내어놓은 하늘색 파일을 곧장 열었다.
파일 속 A4 용지 가장 위에는 ‘채민아’라는 이름과 함께 준서가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 여자의 얼굴이 컬러로 인쇄되어 있었다. 예전에 봤던 사진보다 훨씬 더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스무 살에 대학 입학 후 제출한 사진인 듯했다.
뒷장으로 넘기자 거기엔 자신이 영주에게 부탁했던 채민아의 시간표가 있었다. 보자, 오늘이 월요일 오후 2시니까…….
내가 운이 좋았네.
큰마음 먹고 학교에 방문한 오늘은 다행히 채민아가 듣는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준서는 파일을 덮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
그러다 영주가 넌지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만나 보기라도 하지 그래?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데, 아무나 소개했을 리가 없잖아.”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준서는 걱정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만나려고 이렇게 왔잖아?”
“만나지 않기 위해 만나는 거잖아.”
역시 두루두루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사람답게 영주가 준서의 생각을 제대로 꿰뚫었다.
“말 되네.”
정곡을 찔린 준서는 무심하게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고, 영주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관찰했다.
“그만 봐, 누나. 눈치챘으면 적당히 넘어가 주면 안 돼?”
“눈치를 챘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 네가 이 일을 엎어 버리면 나도 공모자가 되는 거잖아. 너 할아버지 성격 몰라? 걸리면 괜히 나까지 혼난다고.”
“내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야?”
“네가 허술한 사람이 아닌 건 아는데, 할아버지가 대단한 분인 것도 난 너무 잘 알거든.”
그랬다. 준서는 채민아라는 여자를 만나지 않기 위해, 그녀를 몰래 만나러 경화대학교로 왔다.
토요일에 있을 상견례 자리에 제발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그 여자를 설득해야만 하는데 과연 일이 잘 풀릴지…….
고민을 거듭하는 준서를 은근히 올려다보며 영주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걸려?”
“모든 게 다 걸려.”
진심 담긴 대답을 한 준서는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건 많았다.
일단 채민아의 나이가 걸렸다. 서른두 살인 자신에 비해 스물다섯 살인 채민아는 어려도 너무 어렸다. 일곱 살 차이가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늘 연상을 사귀었던 준서에게 민아의 나이는 넘지 못할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주선인 것도 마음에 걸렸다. 채민아의 할아버지와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돈을 담보로 결혼을 추진하려는 할아버지의 배짱이 못마땅했다. 사랑만 채워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돈을 이유로 하는 결혼이라니. 안 될 일이었다.
자본을 대 줄 테니 운영하는 <소운>의 새 사무실을 지어 보라고 먼저 제안한 건 할아버지였다. 그야말로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회사가 커지면서 직원들의 숫자는 늘어났고, 조금 더 큰 사무실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으니까.
세가 저렴하다면 물불 안 가리고 사무실 계약을 하려던 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설계한 건물을 지어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된 준서는, 할아버지께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열심히 도면을 그렸고, 공들인 설계를 기반으로 준공식을 했다. 그런데 한참 돈이 들어가야 하는 공사 초반에 할아버지께서 공사 대금을 걸고 준서를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해. 결혼만 하면 공사 자금 넉넉하게 바로 쏴 줄 테니까.’
돈을 쥐고 당당하게 버티는 할아버지를 보며 준서는 그제야 자신의 아둔함을 한탄하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우리 할아버지께서 쉽게 돈을 주실 분이 아닌데 나는 왜 아무 의심 없이 일을 진행시켰을까?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뭐라고 잔소리할 생각 하지 마, 누나. 특히나 누나는 나에게 그러면 안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는 매형 사랑해서 결혼했잖아. 누나랑 매형이 연애한 것도, 또 결혼한 것도, 다 결국 사랑이 전제된 거 아니었어?”
당연하다는 듯 묻는 준서에게 영주도 당연하게 대답했다.
“맞아, 사랑.”
“부럽네.”
다 마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준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부러웠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그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한다는 게.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 현실에서 쉽지 않다는 걸 준서도 알고 있었다.
준서의 쓴웃음을 지켜보던 영주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물었다.
“뭐가 부러워?”
“결말이 부러워. 해피 엔딩.”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서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제길, 벌써 2년이 지난 일인데 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얼굴이 떠오르는지.
준서는 수천 번 수만 번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을 또 해야만 했다.
그건 사랑이었을까? 너와 내가 지금까지 함께였다면 우리는 지금, 결혼을 바라봤을까? 과연 그 결혼은 행복했을까?
목이 탔다. 조금 전 다 마신 커피가 새삼 아쉬워졌다.
“준서야. 넌 결혼이 엔딩이라 생각해? 그것도 해피 엔딩?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결혼이야말로 제대로 된 시작이야.”
“시작?”
“차라리 사랑 타령 하며 연애만 할 때가 좋았다 싶을 만큼, 한집에 함께 살다 보면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생겨. 그 모든 걸 사랑만 가지고 극복 가능할 것 같아? 천만에. 결국 다 노력이야.”
“그래, 노력. 노력도 어느 정도 토대가 탄탄한 상태여야 해 볼 마음도 생기는 거지. 토대 자체가 허술한데 무슨 노력을 해?”
제 성격 남 못 준다더니 기어코 터져 나온 준서의 삐딱함에 영주가 입을 다물었다. 예외적으로 그녀 앞에서 다정하게 굴어도, 준서는 천성이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어쭙잖은 말을 보태 봐야 지금 그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는 걸 파악했기에 그녀도 그냥 들어 주는 쪽을 택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토대가 뒤틀려 있으면 곧 무너지게 되어 있어. 집 짓는 놈이라 그런지 나는 그런 거에 집착하게 되더라.”
“집 안 지었으면 또 무슨 핑계를 댔을지 궁금하네.”
“누나!”
영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사무실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바쁜 영주의 시간을 충분히 빼앗았다 생각한 준서도 영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만나 봐. 너무 못되게 굴지 말고.”
“하는 거 봐서.”
“내가 별걱정을 다 하지. 우리 정준서 툭툭거리긴 해도 마음 엄청 고운 아이인데.”
엉덩이만 두들겨 주지 않았을 뿐, 영주는 어린아이 보듯 준서를 달랬다.
“아이라니. 내 나이가 벌써 서른둘이야.”
“서른둘도 나한텐 아이야.”
고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큰누나 노릇을 하는 영주에게 자포자기하듯 웃어 준 준서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쨌거나 고마워. 수업 땡땡이치는 불량 학생만 아니라면 오늘 만날 수 있겠네.”
시계를 보니 채민아라는 여자가 한창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 20분 뒤에 수업이 끝날 예정이니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면 어렵지 않게 만남이 성사되리라.
단, 강의가 일찍 끝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스물다섯에 4학년이면 휴학도 몇 번 한 졸업반이잖아. 어지간해서는 수업에 빠지진 않을 거야.”
“그 정도 개념은 있기를 바라. 그래야 말도 걸어 볼 만하지.”
영주와 가볍게 악수를 한 뒤 헤어진 준서는 회계학 수업이 있는 건물을 향해 차를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