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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 2화





생각보다 채민아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정말 쉬웠다. 채민아라는 여자가 제 발로 준서 앞에 먼저 걸어왔으니까.

‘원가관리회계’라는 수업이 있는 강의실 앞에 서 있는 준서의 눈에 명품 브랜드 로고가 작게 각인된 플랫 슈즈 하나가 들어왔다. 신발의 주인이 ‘정준서 씨?’라고 물은 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채민아에 대한 첫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사진이 실물보다 월등한 법인데, 이번엔 예외였다. 아니, 채민아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다는 말을 써도 될 만큼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이목구비가 갸름한 얼굴에 조화롭게 잘 자리 잡고 있었고, 인상 또한 차분하고 착해 보였다. 게다가 입고 있는 머스터드색 원피스 또한 뽀얀 피부에 썩 잘 어울려 그녀를 더욱 환해 보이게 했다.

“…….”

준서는 경계심을 바짝 세워야 했다. 실물을 보기 전까지 채민아는 그냥 ‘어린 여자’였다. 그런데 조금 전 거기에 ‘예쁜’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었다.

예쁘고 어린 여자.

즉, 어떻게든 자신이 피해 가야 할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뭐 마실래?”

두 사람은 강의실이 있는 건물 1층 커피 전문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 말 놔도 되겠지?’라는 준서의 질문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고, 그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말을 놓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낯선 이에게 말을 잘 놓지 않는 성향을 가졌음에도, 이 만남의 목적 자체가 불순해서인지 그는 그렇게 예외를 만들었다.

잔뜩 구겨진 준서의 미간을 보던 민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이스라테 샷 추가해 주시고, 캐러멜시럽 세 번 펌핑해 주세요. 우유는 조금, 얼음도 조금요. 우유는 저지방으로.”

준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채민아를 쳐다보았다.

“…….”

참한 인상과는 다르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꽤 복잡한 주문을 하는 민아의 모습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걸 지금 나한테 주문하라고?

앙칼진 말을 속으로 삼키기가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자신이 납작 엎드려 들어가야 하는 상황. 라테면 라테, 아메리카노면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니면 핫, 그런 식으로 심플하게만 커피를 마셔 온 준서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민아의 요구 사항을 성실하게 들어주기로 했다. 주문할 때 얼굴이 좀 화끈거렸으나 그 또한 기꺼이 참아 냈다.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커피를 받아 든 민아가 밝은 표정으로 준서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첫 만남이 학교에서 이루어져서일까? 업무상 만나 왔던 스물다섯 살 여자들에 비해 민아는 훨씬 더 어리게 느껴졌다.

지금껏 고생 한번 하지 않고 자란 듯한 고운 자태가 앳된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겠지. 실제로 채민아의 인생에 고생이라는 게 있었을 리가 없었다. 대한민국 최고 회계 법인 대표 이사 ‘채태호’의 딸인데, 이 여자의 삶이 뭐 얼마나 다사다난했으려고.

“미리 봐서 나쁠 건 없지.”

의미심장한 준서의 말을 곱씹어 보던 민아는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설득하러 오신 건 아니고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깽판 치라고.”

깽판? 찬물을 마시던 준서가 눈을 부릅떴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깽판이라는 말을 툭 뱉는 이 여자, 뭐지?

어찌 됐든 채민아가 눈치 빠른 여자인 건 분명했다. 준서는 기가 차다는 듯 웃어 버렸다.

“듣기로는 너는 좋다고 했다던데.”

“네, 좋아요.”

채민아가 흔쾌히 결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준서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돈을 놓고 자신을 쥐락펴락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더 의아했던 건 채민아라는 여자가 자신과의 결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어쩌면 할아버지께서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민아를 떠봤는데, ‘좋아요.’라는 시원한 대답에 준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왜지? 너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고, 그럼 앞날이 창창한데 왜 나 같은…….”

“정준서 씨도 창창하다던데요?”

말을 싹둑 잘라 내고 민아가 반문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만만치 않은 말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그래, 창창하다 치자. 그런 이유야? 앞날이 창창한 내 덕 보려는?”

“준서 씨 덕이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대한민국 최고 회계 법인의 장녀가 뭐가 아쉬워서.”

“잘 알고 계시네요. 맞아요. 정준서 씨 덕 보려는 건 아니에요.”

“그럼 왜?”

‘내 덕 볼 거 없을 만큼 풍족하게 살고 있는 네가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건데?’라고 길게 묻고자 했던 말이 ‘그럼 왜?’라는 세 글자로 축약됐다.

준서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속으로 숨을 골라야만 했다.

이거 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여자잖아?

이거야말로 정략결혼인데 싫다고 울고불고해야 정상 아닌가?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부모에게 대들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얘는 왜 이렇게 초연한 거지? 드라마에서처럼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나? 아니면 집안에서 학대라도 받고 있는 건가?

갖은 가설을 세워 보던 준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듣기로는 좋은 부모님 사이에서 행복하게 자란 아이의 표본이 채민아라고 했다. 채민아의 아버지 채태호가 남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의 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꿍꿍이가 뭔지에 대해 자꾸 파헤쳐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준서 씨는 결혼이 뭐라고 생각해요?”

준서의 복잡한 속도 모른 채, 채민아가 긴 빨대로 얼음을 휘휘 저으며 느긋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질문의 내용이 직설적이라고 해야 할지, 우회적이라고 해야 할지.

준서는 채민아를 만난 뒤 대화가 조금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에 탄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가 한 질문이야말로 그가 진심으로 묻고 싶은 거였다.

“너는 결혼이 뭔 줄 아니?”

대답 대신 준서가 다시 묻자 민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그 모습을 눈에 담던 그는 슬쩍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방법까지 쓰지는 않으려 했지만, 기 싸움에서 자꾸만 자신이 밀리는 분위기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아무런 대책 없이 여기까지 왔을까? 준서는 최악의 사태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을 해 놓고도 과연 이런 말을 할 일이 생기긴 할까 했는데, 설마가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채민아에게 자신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보여 주면 학을 떼고 도망갈 거라는 판단하에, 준서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요즘 스물다섯 살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내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예 순진하지만은 않겠지?”

의미심장한 말에 민아가 물끄러미 준서를 응시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경계하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이게 아닌데……. 놀라는 척이라도 하지 그래?

준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결혼을 하면 말이야, 같이 살아야 돼. 남녀가 한집에서 살아야 된다고. 한집에서 살게 되면 한방을 쓰게 되고. 그러면…….”

“섹스해야 된다고요?”

“야!”

아무리 요즘 애들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섹스’라니. 준서는 평정심을 잃은 채 소리를 질렀고, 이내 주위를 살피며 입을 꼭 다물었다. 그 와중에도 민아는 미동 없이 커피를 마셔 사람의 당혹감을 배가시켰다.

와, 쟤 진짜 뭐지?

역시, 친구들의 예상이 옳았던 걸까? 스물다섯 살이면 순진한 아기지 않냐고, 면전에서 성과 관련된 노골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나를 변태로 보고 도망가지 않겠냐는 준서의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얀마, 네가 스물다섯 살 때를 생각해. 넌 그때 얼마나 순진했다고 그래? 하물며 요즘 애들? 턱도 없어. 도리어 정준서 씨는 하룻밤에 몇 번이나 할 수 있냐고 물을지도 몰라.’

그때만 해도 흘려듣고 말았던 친구들의 말이 왜 곧 현실이 될 것만 같은지.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는 걸, 준서는 곧바로 깨닫고 말았다.

민아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할 말을 이어 갔다.

“섹스하고, 그러다 임신하고, 애 낳고. 결혼하면 거쳐야 할 지극히 당연한 순서죠. 순리대로 풀리지 않아서 애가 안 생긴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섹스는 하지 않겠어요?”

얘가 점점…… 준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침착하자. 나는 할 수 있다. 조금 전에 버럭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다시 모든 걸 내려놓고, 내가 얼마나 별로인 인간인지를 보여 주자.

“그래. 섹스를 이야기하는 걸 보니 너도 성인이긴 하구나. 그런데 혹시, 그런 걸 기대하고 결혼하는 건 아니겠지?”

“…….”

민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센 척하긴 했지만 순진한 구석이 있긴 한 모양이군.

이제야 조금 채민아가 정상으로 보이나 싶었으나 뒤따른 대답이 다시 준서의 말문을 막았다.

“결혼 생활의 일부인데 못 할 거 없죠. 그게 뭐 별거라고.”

허어. 조금 전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던 걸 홀딱 잊은 준서가 손으로 뒷머리를 털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겠다는 마음이 쥐도 새도 모르게 달아난 게 언제인지도 모른 채, 그가 아무 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네 주변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네 또래의 젊은 애들보다 훨씬 더 지쳐 있어. 즉, 피곤한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하고 있는 일도 많아서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안 아픈 데가 없어.”

그런 내가 밤마다 섹스 같은 걸 할 여력이 있겠니?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채민아는 예측 불가의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