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유정상회 1권
운남의 상인
유정상회 1권(1화)
프롤로그
돈[錢]을 쫓으면 돈은 달아난다.
인정(人情)을 쫓으면 사람을 얻는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상왕(商王) 유금도(劉金道).
영락(永樂) 이십이년.
철혈의 황제이자 희대의 군주가 북로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승하하자 장자였던 주고치(朱高熾)가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홍희(洪熙)라고 했다.
홍희제는 영락제 시절의 잔인했던 업보를 보상하려는 듯 역사에 길이 남을 덕치(德治)를 베풀지만, 제위에 오른 지 불과 일 년 만에 의문의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되니 온 백성이 슬퍼했다.
홍희제의 사망에는 여러 가지 의혹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정난의 변으로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를 아비로서 보고 자란 홍희제의 형제들이 다들 한 번씩은 야망에 불타며 황위를 노렸기 때문이다.
삼형제 중 막내인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邃)는 영락제를 독살하고 그 범행을 형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으며, 둘째인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는 낙양에 봉지되었음에도 계속해서 남경에 머물며 공공연히 황위를 노렸다.
그리하여 홍희제의 급작스런 사망 후 명 황실은 뿌리부터 크게 흔들리는 듯했다. 그때 당당하게 황위에 올라 제국의 기틀을 바로 잡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이다.
주첨기는 어렸을 때부터 영민하여 조부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영락제가 심성이 유약했던 홍희제를 다음 대 황제로 지목한 것은 손자인 주첨기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락제는 주첨기를 항상 옆에 데리고 다니며 제왕학을 가르쳤기에, 영락제가 사망했던 원정에도 주첨기는 함께하고 있었다.
사가(史家)들은 주첨기에 대해 기록할 때 대부분 칭찬을 한다.
강인하고 과감한 성정으로 황족들의 야망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권력을 황제 독재 체제로 집중시켰으며, 문장(文章)과 회화(繪畵)를 즐겨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덕을 베푸니, 훗날 이러한 홍희제와 선덕제의 시대를 가리켜 인선의 치[仁宣之治]라 부르며 이상적인 군주로서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몇몇 의문점도 있다.
주첨기가 막 제위에 오르던 시절, 아무런 기반도 없던 그가 어떻게 무사히 제위에 올랐는가.
또한 제위에 오른 뒤에도 분명히 세력상 열세에 있었던 한왕의 반란을 어떻게 진압할 수 있었는가.
그 당시 황실의 재정이 모종의 이유로 거의 고갈되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주첨기의 곁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원자는 홀로 일군(一軍)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재력과 강남의 유력 가문을 아우를 수 있는 인덕(人德)을 모두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희대의 거상이라고 하면 진시황 시절의 여불위(呂不韋)를 꼽는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대국의 재상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덕제의 후원자가 누군지 밝혀진다면, 그는 사가들에게 여불위와 같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을 황제의 위에 올릴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황위는 천명(天命)에 따른다지만 그 당시에 세력상 열세였던 선덕제 주첨기가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1장 흐름을 보는 아이(1)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오왕 말이야. 몇 년 전에 난을 일으켰던 그…….”
“쉿! 자, 자네 미쳤나? 그 이야기를 꺼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동창에서 잡아간다고!”
“에이,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영락 십칠년 때 있었던 일 아닌가. 게다가 여기는 아무도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크흠, 아무튼 그 오왕 중에 딱 한 명만 살아남았잖아? 기억해?”
“으음, 그랬지. 다섯 명 중 두 명이 무쌍귀한테 당했고, 황산파는 남궁세가에, 사혈방은 황실이 보낸 특별 부대에 당했잖아. 녹림왕인 광살부마(狂殺斧魔)는 간신히 도망쳤고.”
“그 광살부마가 말이야…… 운남으로 도망쳤대.”
“뭐? 운남? 거긴 왜?”
“몰라. 숨겨 둔 아들이 있대나 뭐래나. 그래서 추격 부대가 만들어지는 중이라더라. 상금이 어마어마해.”
“상금이 얼만데?”
“은자 오천 냥.”
“헛?!”
“놀랍지? 끌리지?”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초절정고수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무 무모한 거 아냐?”
“안심하라고. 거기에 또 하나의 기회가 있어.”
“기회라니……?”
“황실 포고문엔 이렇게 적혀 있었어. 굳이 직접 잡을 필요는 없다. 단지 행방을 알려 주고 그걸로 광살부마를 잡을 수만 있다면 상금의 십분의 일을 하사한다.”
“십분의 일이면…… 오백 냥?”
“그것만 해도 거금이라고. 게다가 황실에서 말한 거니 떼먹을 리도 없고.”
“그, 그렇지. 평범한 농가가 한 달에 버는 돈이 은자 두세 냥인데, 오백 냥이면…….”
“어때? 해 볼 생각이 있어?”
“……좋아.”
“그럼 가 보자고. 얼른 준비 안 하면 딴 놈들이 먼저 낚아챌 거야.”
“알았다고. 그나저나 그 광살부마의 숨겨 둔 자식이란 놈은 어떤 놈이야? 그놈도 참, 인생이 뒤틀린 놈이구만.”
“그렇지. 평생 제대로 된 삶은 못 살지 않을까?”
“무림공적에다가 황실에선 역적 취급인가. 태어나자마자 구족을 멸하고도 모자랄 역적의 운명이라니…… 어떻게 보면 안됐어.”
“어쩔 수 없지.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황실에선 광살부마의 아들도 면밀히 조사하는 모양이던데, 뭐, 어쨌든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야.”
“쯧, 그건 그렇지.”
“자, 그럼 가는 거다, 운남으로.”
“아아, 그래. 한몫 벌어 보자고.”
***
영락 육년.
영락제가 제위에 오른 지 육 년 남짓 되었을 때, 당시 운남은 관의 힘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명 태조인 홍무제가 운남을 명 제국의 영토로 포함시키긴 했으나 토착 부족들이 으레 그렇듯이 배타적인 성향이 워낙 강한 탓에 운남 땅을 한족의 지배하에 두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몇 년 전, 영락제가 친정을 다녀가며 대리백족의 땅에 운남 포정사를 설치하긴 했지만, 토착 부족들은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기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또한 운남은 자원의 보고라 불릴 만큼 여러 가지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서쪽의 경사지에서는 목축을, 동쪽의 평야와 한랭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특히 운남에서 나는 금채홍과 보이차는 특상품으로 여겨져 수도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과도 바꿀 만큼 비싸게 팔렸다. 대리백족의 구역에선 실제로 찻잎을 기르는 거대한 농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운남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따로 있다.
광산.
특히 주석과 철의 질이 대단히 좋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산을 고갈시킬 듯한 기세로 산을 허물고 있었다. 광산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오리였다. 광산의 주인도,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도, 모두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어두운 광도 속을 헤맨다.
운남에서 손꼽히는 광산 마을인 흑임촌(黑任村)도 그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음, 이건…… 이급(二級)이요.”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통통한 손이 거무튀튀한 돌멩이를 구석에 놓인 몇 개의 자루들 중 하나로 분류했다.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표정이라거나, 왼손을 오른쪽 팔꿈치에 대고 살펴보는 모습 등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삼급.”
휙―하니 던져진 돌멩이가 커다란 자루 속에 쏙 들어간다.
“이건 삼급, 이건 이급, 이건…… 으음, 삼급.”
소년의 손이 점점 빨라지며 대나무 바구니에 담겨 있던 돌멩이의 숫자는 맹렬하게 줄어들었다.
소년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
돌멩이를 들고 한쪽 눈으로 지그시 살펴보고, 곧바로 망설임없이 판결을 내려 자루 속에 던져 넣는 모습.
그 일련의 동작들이 신속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저럴 수가 있나!”
얼마 전, 외부에서 온 인부가 소년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탄식했다.
“저거, 장난 아니오? 아니, 제발 장난이라고 해 주슈. 어린애가 광석의 등급을 매긴다니, 저게 말이나 되오?”
“허허허.”
인부의 말에 껄껄 웃는 것은 흑임촌의 촌장 자리를 맡고 있는 중년의 건장한 사내였다. 그는 선한 인상이지만 눈썹이 까맣고 짙어서 고집스러운 느낌을 안겨 주었다.
광산 사람들은 모두 그를 가리켜 홍 대장이라고 불렀다.
촌장의 자리쯤 되면 안전한 곳에서 가만히 인부들을 관리하기만 해도 되지만, 그는 굳이 직접 곡괭이를 잡고 최전선에서 인부들과 함께하는 열혈의 사나이였다.
“나도 처음엔 그랬는데 말이지, 나중에 보니까 저 아이가 분류한 게 내가 한 것보다 낫더라고. 훨씬 빠르기도 하고 말이야.”
“끄응, 그래도…….”
“왜? 안 믿기나? 정 그러면 나중에 제련소에 들어갈 때 어차피 등급을 다시 확인하니까 그때 세어 보게. 아마 깜짝 놀랄 거야.”
홍 대장은 그때의 결과가 이미 짐작이 된다는 듯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휴우, 다 끝났어요.”
때마침 작업을 다 마친 소년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옆에 있던 대나무 바구니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이급이 열한 개, 삼급이 서른세 개였어요.”
“뭣! 잠깐, 꼬마야. 내가 아까 가져올 때 보니까 이급이 최소한 열세 개가 넘었어!”
“아, 그거요?”
열 살쯤 되었을까.
유난히 똘망똘망한 눈을 지닌 소년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삼급 자루에 분류한 돌멩이 중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여기 이건 순도는 좋지만 중간에 색이 옅어요. 속은 비었다는 소리니까 나오는 철의 양도 적죠. 그래서 삼급이에요.”
“엇?”
“그리고 이건 자세히 보면 다른 종류의 금속이 섞였어요. 아마 황동인 것 같은데, 제련소에선 두 개가 섞인 건 한 등급 아래로 쳐줘요. 그러니까 삼급. 그리고 이건 겉은 멀쩡한데…….”
소년이 근처에 있는 돌멩이로 들고 있던 철광석을 때리자 끝부분이 후두둑 부서지며 속에 누런 흙이 차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보이시죠? 속이 다른 걸로 차 있으니 삼급. 자세히 보면 바깥쪽에서도 황색 점이 보여요.”
“어어……?”
소년이 이제 됐느냐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처음에 이의를 제기했던 사내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놓인 세 개의 철광석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홍 대장님, 이제 다 됐는데…… 가 봐도 돼요?”
“아, 그래. 수고했다. 오늘도 유랑이네 집에 가는 거냐?”
“네!”
“그래. 가다가 이걸로 맛있는 것 사 먹고.”
“헤헤, 감사합니다!”
소년은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한 뒤 손에 놓인 동전 두 개를 받아 들고 다람쥐처럼 쪼르륵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