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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2화)
제1장 흐름을 보는 아이(2)
소년이 나간 뒤 홍 대장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종이에 몇 가지 숫자를 적어 넣은 뒤, 아직까지도 멍하니 서 있는 사내에게 건네줬다.
“자, 오늘치 일당일세.”
“아, 예…….”
사내는 멍하니 그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는 이급 열한 개. 삼급 서른세 개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광부들이 그날그날 등급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광부에게는 기본급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그러니 따로 성과급을 받아야 하는데, 그 성과급을 주는 기준이 바로 하루에 얼마나 높은 등급의 철광석을 많이 캤느냐는 것이다.
성과급은 이급 철광석 하나에 동전 두 개, 삼급 철광석 하나에 동전 한 개.
일급 철광석을 캐게 되면 동전 열 개를 받을 수 있지만, 그건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으니 정말로 운이 좋은 날만 볼 수 있는 물건인 것이다.
“도대체…… 저 꼬마는 누구요?”
“어때? 대단하지?”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저런 게 가능이나 한 거요? 혹시 신사에서 내려온 도깨비 같은 거 아닌가?”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하, 예전에 그런 말을 한 녀석들도 있었지. 안심하라고. 내가 태어날 때부터 쭉 지켜본 아이니까. 절대 도깨비일 리가 없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홍 대장은 열 살 남짓한 애가 무슨 수십 년 제련소 일을 한 장인처럼 구는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수?”
“원체 신기한 아이라서 말이지. 특히 눈이 아주 좋아.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거든.”
“볼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좀 전의 그 철광석 말이야, 중간에 색이 옅다느니 자세히 보면 황색 점이 보인다느니 하는 것 말이지.”
“아…….”
“나도 보려면 볼 수는 있지만, 저렇게 빨리 알아채지를 못해. 감으로 대충 짐작하는 정도? 사실 제대로 알아보려면 밝은 곳에서 반 각 정도 붙잡고 살펴보거나, 아니면 제련소에서 직접 녹여 봐야 하지. 그런데 저 아이는 한눈에 그걸 알아보거든.”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참, 그런 재능도 있는 거요?”
“하늘이 내려 주신 게지. 저 아이 덕분에 우리 흑임촌 광부들은 일이 상당히 줄었어.”
“……저 아이에게 일당은 주고 있소?”
“당연하지. 성인 광부만큼 주고 있네.”
홍 대장은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행한 일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 그게 우리 흑임촌의 가장 큰 규칙이야. 거기에 남녀노소의 구별은 없네. 자네도 기억해 둬.”
“으음, 명심하겠수.”
“좋아. 이제야 우리 마을 사람 같구만.”
홍 대장은 격의없이 껄껄 웃었다.
생김새만큼이나 호탕한 웃음이었다.
외지에서 온 사내는 잠시 자신의 손에 남은 세 개의 철광석을 내려다보다가 근처의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그 자루엔 삼급(三級)이라고 적혀 있었다.
***
풍서(風鼠)는 광산에서 나와 아래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이의 몸은 아직 크지 않았다.
훤칠하다거나 특별히 발달된 부분도 없다.
평범한 열 살 아이들의 몸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풍서의 몸놀림은 어딘가 경쾌한 면이 있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마다 마치 풍악에 맞춰 춤을 추듯 입고 있는 옷소매가 펄럭인다.
풍서는 방긋방긋 웃으며 산을 내려오다가 중간에 잠시 멈춰 서기도 했다.
하늘을 한 번 쳐다본 뒤, 주변의 나무를 쳐다본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은 보통 사람의 시야에 비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오늘도 바람이 많이 부네.”
풍서는 싱긋 웃으면서 뛰어 내려갔다.
아이가 내려간 뒤. 한 박자 정도 늦게 그제야 불어온 바람이 근처의 나뭇가지를 뒤흔들었다.
아직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아이가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오던 풍서는 통나무 두 개로 경계를 만들어 둔 흑임촌의 입구 부근에서 움찔하며 멈춰 섰다.
산문(山門) 앞에는 한 떼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풍서에게 있어서는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이다.
“으음…….”
고민은 잠깐이다.
풍서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길로 가려고 했으나, 그보다는 산문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풍서를 발견하는 것이 빨랐다.
“야! 쥐새끼!”
“거기 서!”
“잡아라―!”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의 기세는 사뭇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 탓에 풍서는 당황하고 말았다.
소년의 신체 능력은 뛰어나지 않다.
꽤나 유연한 편이지만, 근력으로 따지면 그저 평범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슷한 정도에 불과했다.
달리기도 마찬가지.
차라리 나무 밑이었으면 나무를 타고 위로 도망치기라도 했을 텐데, 광산의 아래쪽은 하나의 길만 쭉 만들어져 있었기에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잡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풍서의 뒷덜미를 잡은 것은 아이들의 우두머리격인 종대다.
풍서보다는 세 살이 많은 열세 살.
아직 소년이라 불러야 할 나이지만, 덩치가 큰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종대는 벌써 웬만한 어른들과 비슷할 정도로 몸이 컸다.
평범한 열 살짜리 꼬마가 도망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 왜 이러는 거야?”
풍서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어린 소년답지 않게 선이 굵은 종대의 얼굴에는 가학적인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풍서는 성실하고 밝아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적이 있다면 오로지 종대와 그 패거리뿐.
그것도 딱히 풍서가 뭔가 잘못을 해서가 아니었다.
풍서가 워낙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으니 종대는 그걸 항상 못마땅해했고, 마침 날을 잡아서 한 번 괴롭힌 것이 그 패거리들 사이에선 하루 일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너, 내가 여기 일하러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종대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맞아. 너 여긴 또 왜 왔어?”
“우리가 그렇게 우스워?”
“이걸 확!”
짐짓 험악하게 소리치는 아이들은 다들 종대의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겁박에 풍서는 어깨를 움츠렸다.
겁이 난다.
상대는 비록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사정은 풍서도 마찬가지였다.
맞으면 아프다.
우르르 몰려들어서 구박하는 것도 싫다.
그렇다고 어른들에게 이를 수도 없다. 종대는 의외로 그런 쪽으로 머리가 좋아서, 어른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을 만큼만 괴롭혔다.
중요한 건 결과보단 그 과정이지만, 그런 건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어른들에게 말해 봤자 아이들이 툭탁거리며 논 걸로만 보일 것이다.
풍서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다든지,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것마냥 순수한 잔혹함이다.
말이나 논리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혹시 도망칠 틈이 없나 살펴보았지만 덩치가 큰 종대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으니 방도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풍서가 축 늘어진 채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는 왜야! 쥐새끼 같은 너를 혼 좀 내주려고 그러지!”
“홍 대장님도 이상해. 왜 이런 녀석을 꼬박꼬박 불러서 일감을 주지?”
“맞아. 엄마, 아빠도 없는 고아 녀석은 그냥 놔두면 되잖아!”
아이들은 순수한 얼굴로 잔인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풍서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무리 밝은 성격의 풍서라도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다.
“야, 너 오늘도 돈 받았지?”
종대가 한 손으로 풍서의 뒷덜미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놔.”
풍서는 그런 종대를 힐끗 올려다본 뒤 고개를 저었다.
“싫어.”
“뭣! 이 자식이!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이걸 뺏어 가려고? 그럼 넌 파락호가 되는 거야.”
“……!!”
풍서는 겁을 먹긴 했으나, 그래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순수하기에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풍서는 온순하고 밝은 성격을 가졌지만, 사리판단이 분명하기에 아닌 건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편이었다.
“이, 이 자식이……!”
종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파락호.
스스로 돈을 벌지 않고, 다른 사람을 때리고 괴롭혀서 돈을 빼앗는 나쁜 자들을 말한다.
자랑스럽게도 흑임촌엔 파락호가 없었다.
멋모르고 행패를 부리는 자들은 거친 광부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데다, 흑임촌의 촌장인 홍 대장이 혹시라도 파락호가 생겨나지 않도록 항상 마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일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파락호가 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운남에까지 와서 살게 된 부모님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파락호들은 나쁜 존재라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난 파락호가 아니야!”
종대가 빽하니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의 돈을 이유없이 뺏으면 파락호야.”
“너, 너의 돈을 뺏어도 난 파락호가 아니야!”
“왜?”
“그건…… 그건…….”
종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튼! 너는 달라! 고아인데다 쥐새끼! 너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리 돈을 뺏어도 괜찮다고!”
종대가 잡고 있던 뒷덜미를 확― 하고 뒤로 당기는 바람에 풍서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그 모습에 주변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와 달리 풍서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말은…… 너무 심하잖아.”
풍서는 지지 않고 벌떡 일어서서 종대를 노려봤다.
종대가 머리 두 개만큼 키가 더 컸지만, 풍서는 이제 주눅 들지 않았다.
“말싸움에서 지니까 억지를 부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말을 했어. 종대, 너는 소인배야.”
“뭣……?!”
소인배.
파락호 다음으로 아이들이 싫어하는 말이다.
“이익……!”
휙―!
분이 차오른 종대가 풍서의 어깨를 밀치려고 했으나 헛손질을 했다.
“엇……?”
풍서가 어깨를 살짝 옆으로 비튼 것이다. 반짝거리는 두 눈이 뚫어져라 종대의 양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덕에 공격이 피해졌고, 종대는 앞으로 꼬꾸라질 뻔한 것을 겨우 버텨 냈다.
“이 자식이……!”
퍽―!
하지만 다음번엔 피하지 못했다.
어깨를 얻어맞듯이 밀쳐진 풍서는 허둥대다 뒤로 풀썩 쓰러졌다.
종대는 그 위로 곧장 올라탔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익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풍서를 짓누른다.
“읏……!”
풍서가 어깨를 움츠리며 양팔로 얼굴을 감쌌다.
최소한 얼굴은 막아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친절한 분들이 걱정을 안 하기 때문이다. 풍서의 눈에 종대가 주먹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커다란 주먹이다.
평소에 아버지 가게 일을 돕기 때문인지, 종대는 힘도 세고 손에도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주먹이 떨어진다.
풍서는 아픔을 상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번개 같은 하얀빛이 나타났다.
퍼억!!
“억……!”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진 것은 풍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