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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3화)
제1장 흐름을 보는 아이(3)
풍서는 가슴 위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새하얀 무명천으로 된 옷을 입고 늘씬한 체구의 소년이 종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년인지 청년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외모.
우선 키가 컸다.
종대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컸는데, 종대가 옆으로도 넓은 전형적인 ‘덩치’라면 이 소년은 어깨를 제외하곤 약간 말라 보이는 편이었다.
“보하 형!”
풍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공보하(孔保霞).
마을 외곽 쪽에 사는 소년으로, 나이는 풍서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또한 싸늘한 눈빛과 날카로운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공보하는 어머니는 없고 아버지 한 사람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술주정뱅이라서 상당히 힘든 삶을 살았고, 지금도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하겠다며 매일같이 노력을 아끼지 않는, 범상치 않은 인재였다.
공보하는 종대의 가슴을 발로 차 버린 뒤 싸늘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나운 기세에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너, 너……!”
종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풍서 때처럼 섣불리 달려들진 않았다.
흑임촌에서 무서울 게 없는 종대라지만 공보하만큼은 만만치가 않았던 탓이다.
“큭…….”
공보하는 신음을 흘리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종대에게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짓을 하면 재미있냐?”
“뭐?”
“동네 꼬마들 괴롭히고 다니지 마라. 너나 나나, 애들이랑 우르르 몰려다닐 나이는 지났어.”
공보하와 종대는 똑같은 열세 살.
광산 마을에선 한 사람의 일꾼으로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열다섯이니 열세 살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한 가정에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아이가 있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가장인 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그 아이들을 풍족하게 먹여 살릴 수가 없다.
그러니 아이들은 열 살만 넘으면 집안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가꾸는 텃밭이라든지, 광산에서 나오는 소소한 일거리라든지.
특히 열세 살이 넘어서 몸이 제법 커지면 할 일은 더욱 많아진다.
가정의 보탬이 되려면, 비록 하루에 동전 한 냥밖에 못 버는 한이 있어도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는 너는! 집에서 만날 쓸데없이 검이나 휘두르는 놈이!”
“나도 일을 하고 있다. 홍 대장님이 아직 광부로서 일을 시켜 주진 않으시지만, 소소한 일거리들을 넘겨주셨다. 난 해가 지면 일을 해.”
작업이 끝난 광부들의 도구를 정돈하고, 안쪽에서 쓰는 등갓을 만드는 일이다.
인정 많은 홍 대장이 공보하의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넘겨준 일이었다.
“큭, 나, 나도 일을 해!”
“그래? 어떤 일을 하지?”
“가게의 일을 돕고 있다! 너 같은 놈들은 꿈도 못 꾸는 큰 가게라 일이 너무 많아!”
“아, 그래?”
공보하는 무감정하게 맞장구를 쳐줬다.
“그럼 지금도 돌아가서 집안일이나 도와라. 이런 데서 쓸데없이 애들 돈이나 뺏으려 하지 말고. 애들 돈을 뺏고 다니는 거, 너희 아버지는 아시냐?”
“내, 내가 언제 돈을 뺏었다고……!”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종대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래? 내 눈엔 너희들이 풍서의 돈을 뺏으려는 것 같았는데?”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시선이 번뜩였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공보하에게는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더군다나 언제나 올곧은 행동만을 하기에 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종대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종대에게서 오기와 자존심을 빼면 시체다.
그런 탓에 그는 공보하에게 눌려 있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종대, 너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못난 놈이다. 자신을 좀 반성해라.”
“너…… 이 술주정뱅이 새끼가!”
얼굴이 시뻘개진 종대가 마침내 공격적인 단어를 내뱉었다.
일순 공보하의 얼굴이 냉랭히 굳어졌다.
술주정뱅이라는 단어는 공보하에게 있어서 금기 중의 금기다.
“이야아앗―!”
종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주먹임에도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공보하는 왼발을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주먹을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가볍게 내지른 오른 주먹이 종대의 명치 부근에 빨려 들어가듯이 꽂혔다.
“컥……?!”
순간, 종대의 움직임이 멎는다.
종대는 옆으로 풀썩 쓰러지더니, 컥컥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숨이 안 쉬어지는지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조, 종대 형!”
“괜찮아?!”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놀라서 종대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골목대장이라 해도 고작 열세 살짜리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종대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 이런…….”
한편, 공보하는 당황하며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 매일 몸을 단련하는 자신과 몸만 클 뿐, 평범한 사내아이에 불과한 종대는 천지 차이였다.
그런데 술주정뱅이라는 단어에 욱하여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말았다.
무인으로서는 큰 실태다.
육체의 힘보다 마음의 수련이 더 중요하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비켜.”
공보하는 아이들을 밀치고 다가가 종대의 등 뒤, 명문혈을 짧고 강하게 두드려 주었다.
“커허…….”
그제야 종대의 숨이 트였다.
종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허옇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다. 힘 조절을 미처 못했어.”
과묵하고 평생 사과할 줄을 모르는 것 같던 공보하가 하는 말에 주변의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편, 종대의 눈에서는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공보하가 사과를 하자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보지 말도록 하자. 풍서도 괴롭히지 마라.”
공보하는 짧고 강하게 말한 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는 풍서를 데리고 흑임촌으로 돌아갔다.
광산의 입구에 남은 것은 이제 종대와 그를 따르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뿐이다.
“크윽……!”
종대는 핏기가 가셔서 귀신 같은 얼굴로 일어섰다.
사과를 하다니.
지금의 종대에겐 그게 더 굴욕이었다.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하는 종대의 살벌한 목소리에 주변의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지금 종대의 얼굴에선 말 그대로 살기마저 느껴졌다.
“큭, 가자!”
아이들은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종대의 뒤를 어쩔 줄 몰라 하며 따라갔다. 아이들은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 공터에는 황량한 흙먼지만이 남았다.
***
풍서는 공보하의 얼굴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공보하는 무표정했다.
마치 조금 전에 있던 일이 다 꿈인 것처럼 태연한 기색이다.
“저기…… 보하 형.”
“왜?”
“고마워요, 도와줘서.”
공보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스스로를 단련해야 돼.”
“으음, 저도 알긴 하는데요…….”
“오늘부터라도 낮에 일 끝나면 우리 집으로 와라. 기초 정도는 내가 훈련시켜 주지.”
“으악, 일 끝나고 나서요?”
“그래, 일 끝나고 나서.”
공보하가 마치 다짐을 받듯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풍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으윽, 보하 형을 따라가려다간 죽을 거야.’
풍서는 예전에 무예를 수련하는 공보하가 멋있어 보여서 따라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하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공보하의 살인적인 훈련량은 보통 사람이 감히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쉬엄쉬엄 할 수라도 있으면 하겠는데, 공보하는 의외로 세심하고 성실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항상 풍서를 챙겨 주고 훈련을 도왔다.
즉, 딴청을 피우거나 쉴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알겠냐? 내일부터다. 내일부터 우리 집으로 와.”
“으윽, 그게…….”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 남자는 마땅히 스스로 강해야 하는 법이다. 이젠 너 스스로도 종대 같은 놈들을 뿌리칠 줄 알아야지. 당장 내년부터는…… 나도 너를 지켜 줄 수 없을지 몰라.”
진지한 목소리에 풍서의 시선이 다시금 공보하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멀리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공보하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보하 형, 아버님이…… 많이 안 좋으세요?”
“그래. 아무래도 회복되기 힘드실 것 같다.”
“만약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이 마을을 떠날 거예요?”
공보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무과에 응시하려면 좀 더 발달된 대도(大都)에 가야 하니까.”
“으윽, 흑임촌에 보하 형이 없으면 쓸쓸하겠는데요.”
“…….”
“하지만 괜찮아요. 저도 남자니까.”
풍서는 방긋 웃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큰 꿈을 안고 떠나려 하는 공보하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
풍서는 아직 어리지만, 어리광을 부리지 않아야 할 때가 언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넌 잘 지낼 거다.”
공보하가 풍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 항상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공보하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하아, 그나저나 아버님이 건강하시면 좋겠는데요……. 도대체 왜 그렇게나 술을 드시는 걸까요?”
공보하의 아버지는 예전에 상당히 뛰어난 무관이었다고 했는데, 남들에겐 자상한 사람이었다. 풍서에게도 항상 간식거리를 건네주며 친절히 대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보하와 둘이 있을 때는 신경질적이고 술을 많이 마신다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 건강이 점점 안 좋아져서, 이제는 얼굴이 검게 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러게 말이다.”
공보하는 조금 씁쓸한 듯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풍서야.”
“네?”
“술이라는 건 말이지, 사람이 예전의 안 좋은 기억을 없애기 위해 마시는 거라고 들었다.”
“안 좋은…… 기억이요?”
“그래. 아무리 괴로운 기억도 술을 마시는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으니까.”
“으음, 어떤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신 걸까요?”
“그걸 알면 차라리 좋겠다.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나랑 관계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절대로 말씀을 안 하시니.”
공보하는 콱, 하고 풍서의 머리를 붙잡았다.
“너는 다른 걱정 따윈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정진해라.”
“으윽, 알았어요!”
“자, 가 봐. 유랑이네 집에 가는 걸 테지?”
공보하는 낡았지만 튼튼한 목조 건물 앞에 멈춰 선 채 풍서에게서 손을 뗐다.
꽤 넓은 뒷마당과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집.
이 집이 바로 공보하의 집이었다.
“잊지 마라. 내일은 일이 끝나자마자 우리 집으로 오는 거다.”
“으윽. 알았어요, 보하 형.”
풍서는 내일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떠올리며 잠시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공보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풍서가 방향이 꺾이는 길목 너머로 갈 때까지, 공보하는 집 앞에서 풍서를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