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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4화)
제1장 흐름을 보는 아이(4)
을유랑(乙流浪)은 마을에 단 하나뿐인 글선생네 집의 외아들이었다.
나이는 풍서와 동갑.
누가 봐도 얼굴이 허옇고 귀티가 나는 탓에, 동네의 꼬마 여자아이들은 다들 을유랑만 보면 꺅꺅거리며 좋아한다.
을유랑에게 듣기로는, 을유랑의 아버지는 북경에 있는 을(乙) 씨 집안의 차남으로, 한때는 장남인 형을 제치고 과거에 합격하여 유명한 관직에 올랐다고 했다.
그런 관직에 올랐던 사람이 왜 굳이 이런 벽촌에 온 건지 궁금했으나, 을유랑도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을씨 집안 사람들을 어려워했다.
천성적으로 귀티가 흐르고 학식이 있으니, 다들 선생님으로 대우하며 아이들의 글공부를 부탁했다. 그 대가로 항상 곡식이라든가 생필품들을 넉넉하게 갖다주니, 을유랑의 집은 언제나 풍족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들인 을유랑도 마찬가지라서, 아이들은 항상 을유랑에게 잘해 주었다. 따르는 아이들도 몇 있었고, 특히 여아들은 을유랑을 졸졸 따라다닐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유랑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결코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그것은 부모가 없는, 자그마한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풍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을유랑은 유난히 풍서를 좋아했다.
풍서가 찾아가면 언제나 열일을 제쳐 두고 만나러 나올 정도였다.
“풍서야!”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군자는 뛰지 않는다는 법칙에 따라 장중한 발걸음으로 다가오지만, 얼굴에는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유랑아!”
풍서도 손을 크게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쪽에서 밥을 짓다가 나오신 을유랑의 어머니도 풍서를 보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머, 풍서 왔구나. 방에 들어가 있으렴. 간식을 좀 가져다주마.”
“저기, 어머님, 괜찮아요. 저도 밥을 먹고 와서…….”
“그러니까 간식을 주는 것 아니겠니? 오늘은 방앗간에서 떡을 좀 찧어 왔단다. 차랑 함께 줄게.”
“아, 감사합니다.”
풍서는 양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을유랑의 어머니는 그 모습이 귀엽다면서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풍서는 을유랑의 집에 놀러 오는 것이 좋았다.
첫째로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있어서 좋고, 그다음으로는 읽을 만한 책이 많아서 좋았다.
그리고……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뜻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가정 속에 잠시나마 함께한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풍서는 을유랑의 안내를 받아 이미 자신의 방처럼 익숙해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풍서도 우리 집에서 함께 살면 좋을 텐데…….”
“아뇨, 괜찮아요.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에서 지내는 게 좋아서요.”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을유랑의 어머니는 아쉬운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방 안에 떡과 차를 놓아 두고 나갔다.
을유랑의 어머니는 항상 풍서가 올 때마다 이렇게 정갈한 간식을 차려 주신다.
풍서는 기뻐하며 차를 마시고 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풍서야, 오늘은 어디를 볼래?”
풍서가 차와 떡을 먹는 사이, 을유랑은 안쪽에서 두꺼운 마지를 덧댄 큰 종이를 가지고 왔다.
그 종이에는 커다랗고 동그란 원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 좌측 하단부에는 여러 가지 도형과 글씨로 빼곡이 채워져 있었다.
지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그게 명 제국 전체를 나타낸 지도라는 것을 알 터였다.
아직 그 지도는 전체적으로는 텅 비어 있었지만, 풍서와 을유랑이 살고 있는 흑임촌과 운남 지역의 지리는 상당히 정교하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음음, 놀라지 마. 오늘은…… 드디어 곤명시(昆明市)야!”
“드디어!!”
을유랑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럼 이제 운남은 다 채우는 거네?”
“응. 어제 마침 곤명시에서 온 상인 아저씨가 홍 대장님네에 들렀어. 하여 내가 캐물어서 자세한 걸 들어 뒀지!”
풍서는 항상 저녁을 홍 대장의 집에 가서 함께 먹는다.
풍서는 사양하려고 했지만, 함께 저녁을 먹지 않으면 홍 대장이 화를 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밥도 맛있고, 홍 대장의 집에는 항상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오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즐겁기도 했다.
홍 대장에게 신세를 너무 지는 것 같아 미안한 점만 빼면 풍서에겐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자, 이거.”
풍서는 살짝 뽐내듯이 웃으며 품속에 갖고 있던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을 내밀었다.
“우와!”
을유랑은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 들더니, 곧바로 세필을 집어 지도에 그것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을유랑의 세필은 정교했다.
사서삼경을 여섯 살 때에 뗐다고 하는 기재답게 글씨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깊이가 있었다.
거기다가 그림도 잘 그린다.
처음에는 그저 기호로 나타냈을 뿐이지만, 최근엔 산은 산처럼, 강은 강처럼 지도에 그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도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춰 가는 중이었다.
“이야, 역시 유랑이 너는 붓을 정말 잘다룬다.”
“으응, 그런가?”
을유랑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씩 웃었다.
“나도 유랑이 아버님께 필법을 배우고는 있는데, 글씨를 쓸 때마다 조금 답답해. 뭐랄까, 마음은 급한데 붓이 못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야.”
“그건…… 으응, 잘 모르겠어. 나는 붓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기분이 좋거든.”
“역시, 천재는 다른데?”
“천재 아니야!”
을유랑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허연 얼굴에 귀여운 외모로 그렇게 해 봤자 더욱 귀엽기만 할 뿐이다.
“난 천재가 아니야. 아버님이 그러셨어. 학자에게 있어선 과한 자신감은 가장 큰 죄라고.”
“으음, 그런가? 그래도 적당한 자신감은 좋지 않아?”
“음, 자신하되 자만하지 말라. 그것도 말씀하셨어.”
“응, 그건 맞는 말 같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척척, 손발을 맞춰 가며 지도를 완성하고 있었다.
붓을 잡고 있는 것은 을유랑.
종이를 옮겨 주고 그때그때 필요한 물품들을 옆에서 챙겨 주는 것은 풍서다.
“우리, 언젠가 여길 다 가 볼 수 있을까?”
붓을 움직이는 도중에 을유랑이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하지!”
“……정말?”
“응. 우리가 다 크고 나면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을 거야. 홍 대장님도 남자는 나이가 들면 한 번쯤 밖으로 다녀와야 한다고 했어. 그때는 우리가 두 눈으로 직접 지형을 보고 그리자.”
“그 지역의 마을에도 가 보고?”
“당연하지. 네가 좋아하는 서원들도 들러 보고.”
“와아…….”
지도를 만드는 건 두 사람만의 놀이였다.
처음에는 을유랑과 함께 방 안에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그러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풍서가 외지 상인들에게 들었던 신기한 지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런 게 말이나 되느냐며 옥신각신하다가 종이에 지형을 그려 보면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흑임촌의 지형, 그다음은 주변 마을을 그렸다.
그 뒤엔 상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형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운남을 다 채웠다.
유일하게 곤명시의 지형만이 빠져 있었지만, 드디어 풍서가 그에 대한 지형도 알아 온 것이다.
“정말로…… 같이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걱정 마. 우린 여행할 수 있을 거야.”
을유랑과 풍서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지도를 그리는 것에 빠져들었다.
마치 그 속에 흐르는 무언가를 보듯이, 두 사람의 시간은 무럭무럭 흘러가고 있었다.
제2장 백운(白雲)의 방문자(1)
덜컹거리는 달구지의 바퀴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오랜 시간을 들어 왔으니 신물이 날 만도 하건만, 희한하게도 달구지의 덜컹거리는 소리만큼은 듣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단순히 기분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까지 평안해져서 지그시 눈을 감고 낮잠을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하늘은 높고 구름은 두둥실 흘러가고 있다.
은은한 햇살이 몸을 따스하게 데워 주고 남쪽에서만 볼 수 있는 잎이 넓은 나무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
천국이 따로 있을까!
세상에 이런 날씨만 계속된다면 아마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의 반은 사라질 것이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이런 날씨엔 누가 괜히 시비를 걸어도 허허 웃으며 넘길 수 있을 듯했다.
‘역마살이 낀 탓이지.’
달구지를 끌고 있던 유기준(劉奇遵)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혼자서 피식 웃었다. 예전에 우연한 계기로 글방에 틀어박혀 평생 책만 파먹고 살던 유생을 데리고 다른 주(州)까지 여행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그 유생이 어찌나 유별났던지 생전 처음으로 햇볕에 두 시진 이상 있어 봤다며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징징거렸다.
나름대로 잘 다져진 길을 통해 이동하고 풍경이 좋은 지역을 일부러 지나갔음에도 그랬다. 나중에 여행이 끝날 무렵엔 그 유생은 앞으론 평생 여행을 하지 않겠다며 절간에 틀어박혔다.
아무래도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각자 맞는 일이 있는 거였다.
어쩌면 유기준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유기준은 오늘처럼 좋은 날씨에 한적한 소로를 터벅터벅 걷고 있다는 것에 비할 바 없는 행복을 느꼈다.
“날씨 진짜 좋네. 역시 이런 게 바로 자유야. 책상 앞에 묶여서 붓질이나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황남(黃男)?”
유기준이 하하 웃으며 달구지를 끌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황남이라 불린 말은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휘둘러 그 발을 쳐 냈다.
히히힝―!
“알았다, 알았어. 이제 곧 도착하니까 조금만 더 힘내라.”
유기준이 계속해서 다독거려 주자 그제야 푸르륵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휘젓던 황남의 분노가 풀렸다.
오랫동안 여행 생활을 하다 보면 말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면 종종 인근에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을 지나게 되는데, 사람은 아무래도 사회적 동물인지라 그런 때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때 가장 좋은 길동무이자 말벗이 누구겠는가.
바로 말이다.
여행을 하는 내내 함께 먹고, 함께 자는 동료.
나중엔 허허벌판에 그저 말 한 마리만 있어도 외롭지 않게 되어 버린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진정한 여행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아아, 날씨 정말 좋다.”
유기준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이내 자신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창한 산림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새카만 산.
주변에서 흑석봉(黑石峰)이라고 불리는 봉우리가 바로 그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다. 주변의 울창한 나무 위로 새카만 산의 봉우리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