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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5화)
제2장 백운(白雲)의 방문자(2)
“여긴 여전하구만.”
유기준은 반갑게 웃으며 달구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말고삐는 근처의 나무에 매어 두고 수풀 사이의 소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삼 년 전에 왔을 때 그가 알아 두었던 비밀 통로다.
한순간에 주변을 가리고 있던 수풀과 나무들이 사라져 버리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흑석봉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아, 여기도 여전하네.”
유기준은 빙긋 웃으며 그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검은색 산자락 아래로 일천 호(戶) 정도 되는 산간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집이 일천 호면 인구수로는 보통 삼천에서 오천 사이다. 외떨어진 산간 마을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인 듯했다. 일천 호의 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광산에서 일을 하던 광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아낙네들이 가져온 새참을 먹는다.
인구수가 삼천이 넘다 보니 상점 앞도 꽤나 붐볐다.
성내의 번화가처럼 세분화된 상점은 아니지만, 주로 온갖 물건을 한꺼번에 취급하는 잡화점들이 들어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각자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파는 시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느낌이랄까.
아니, 집의 숫자가 일천 호나 되는 이상 이미 작은 마을이라고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다.
마을 이상, 도시 미만.
그 정도의 규모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보고만 있어도 왠지 정겨운 풍경.
“허어?”
원래 그의 계획은 잠시 달구지를 멈추고, 그의 비밀 장소에서 일각 정도 멍하니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걸음이 멈춰졌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스런 공간.
절벽 끝 바위 위에 이미 선객이 있었던 것이다.
“어? 아저씨는 누구세요?”
작지만 맑고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아이.
나이는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짧지 않은 머리를 양쪽 옆에 둥그렇게 묶고 있었는데, 빙긋 웃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뻐서 남자아이인데도 굉장히 귀엽게 느껴졌다.
입고 있는 옷은 상당히 낡은 느낌의 무명옷이었다. 깨끗하게 빨아 입은 듯하지만,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건 아닌 듯하다.
자세히 보면 소맷자락과 바지 밑단이 뜯어져서 실밥이 튀어나와 있고 무릎 부근은 천이 해져 있었다.
만약 엄마가 있어서 보살핌을 받는 아이라면 옷을 그런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옷이란 건 빨리 수선을 하면 할수록 오래 입을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유기준은 직업 때문에 단련된 안목으로 그밖에도 몇 가지 특징을 더 잡아냈다.
“너, 흑임촌(黑荏村)에 사니?”
“흐음…….”
아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유기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햇살이 비추는 듯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저씨, 외지에서 오셨죠?”
“응, 그래.”
유기준은 별다른 감흥 없이 대답했다.
그는 상당히 특징이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척 봐도 외지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하면서 덥수룩한 머리는 이마를 덮다 못해 아슬아슬하게 눈만 살짝 내놓고 있었고, 얼핏 승복처럼 보이는 회색 천의 장삼 위로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갈색의 배자(조끼)를 입고 있었다.
보통 먼 길을 다니는 장사꾼이나 표사들이 이런 옷을 입는다. 회색의 탁한 천은 때가 묻어도 별로 표가 나지 않으니 좋고, 주머니가 많은 배자는 이런저런 필수품들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기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유기준은 당연히 눈앞의 아이도 그걸 보고 자신을 외지인이라 생각했을 거라 판단했다.
“아저씨 얼굴은 제가 흑임촌에서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응? 아, 그래.”
유기준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속으로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보통 작은 마을에선 외지 사람에게 이 지역에서 못 보던 얼굴이라는 말은 많이들 한다.
이 아이가 그런 어른들의 말을 따라 하는 거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구가 삼천 명이 넘는 꽤나 큰 마을에서도 그런 말을 쓰나?
그것도 꽤나 확신을 담아서?
“집이 어디에 있어요? 사천? 귀주?”
“아니, 나는 항상 돌아다녀서 딱히 그런 건 없지만, 이번 여정을 시작한 곳으로 따지면…… 상해(上海)일까?”
“어? 우오오오―! 상해요? 진짜? 진짜로?!”
아이는 기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상해면 동쪽 끝에 붙어 있는 곳이잖아요? 흑임촌에서 가려면 사천, 호북, 안휘를 거쳐서 강서성까지도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단하다―! 대륙을 거의 횡단하셨네요?”
범상치 않은 주제로 기뻐하는 아이에게 유기준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너…… 지리를 아니?”
“지리요? 그게 뭐예요?”
“네가 방금 말한 거. 대륙 어디에 어떤 곳이 붙어 있고, 어떻게 하면 갈 수 있고 하는…… 그런 것 말이야.”
“아, 그런 거라면 조금 알아요. 흑임촌에 종종 오는 행상분들한테 배웠거든요.”
자랑스럽게 씩 웃는 아이에게선 그 나이 또래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그래? 도시 이름은 몇 개나 알고 있니?”
“에…… 운남 쪽부터 출발하면 대리(大理), 곤명(昆明), 곡정(曲靖), 옥계(玉溪)…….”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지는 지명(地名)의 나열에 유기준이 황급히 말을 끊었다.
“잠깐, 잠깐. 내가 잘못 물어봤다. 가장 먼 곳은 어디까지 아니?”
“하회(河回), 천진(天津), 북경(北京)까지요.”
아이는 거기서 조금 풀이 죽었다.
“북경 위쪽은 잘 몰라요. 바다가 아니니까 분명히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행상분들이 항상 안 가르쳐 주셨거든요.”
“…….”
“아저씨?”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를 앞에 두고 유기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특이한 아이다.’
이곳 운남에서 시작하여 사천, 호북, 안휘, 강서, 산동을 넘어 북경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다 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건 중원을 관통하는 상로와 일치한다.
실제로 아이가 말한 지명의 대부분이 유기준이 직접 지나온 경로와 일치했다.
‘보통 아이들은 이런 쪽에 관심을 갖지 않겠지.’
외우려면 외울 수는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뭐든 금세 배우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더 배우려고 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전에 흑임촌에 왔다는 행상들은 이 아이에게 북경 위쪽에 뭐가 있는지 일부러 안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행상이라고 해 봤자 보통 많아야 두 주(州)나 세 주를 넘나들면서 장사를 하는 존재.
아마 그들도 운남에 비해 아득히 위쪽에 있는 북경 위에는 뭐가 있는지 몰랐을 게 분명했다.
가르쳐 줄 만한 게 없으니 못 가르쳐 준 것이다.
“아저씨, 혹시 아저씨는 북경 위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알지.”
“저기, 그럼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우물쭈물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부탁해 오는 꼬마 아이.
똘망똘망한 눈에 열정을 가득 담아 올려다보니, 평소에 ‘유유자적(悠悠自適)’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유기준으로서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안 돼!”
“어어? 왜, 왜요?”
“난 상인이거든, 꼬마야.”
아이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그래서요?’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명심해 둬. 상인은 절대로 받은 것 이상 베풀지 않는다. 물론 함부로 대가없는 도움을 받지도 않지. 보이지 않는 빚이야말로 정말로 무섭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거든.”
“에……?”
아마 열 살짜리 꼬마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총명한 꼬마는 그 뜻까지는 이해하지 못해도 적어도 핵심만큼은 확실하게 짚어 냈다.
“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는 대신 저도 뭔가를 해 드려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 바로 맞췄다.”
“그거라면 좋은 게 있어요.”
자신이 있다는 듯 방긋 웃음 짓는 꼬마 아이.
유기준은 호기심을 느끼며 마주 씩 웃어 주었다.
‘열매나 도토리 같은 거면 거절해야겠지. 세상을 우습게 보는 아이의 버릇을 고쳐 주는 것도 어른의 의무니까.’
열 살짜리 아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줄 수 있는 대가가 뭐 있겠는가.
당연히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건 거친 행상들을 어르고 달래서 운남에서부터 북경까지의 지명을 모조리 배워 낸 총명한 아이를 너무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흑임촌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를 공짜로 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뭣…….”
“그거면 되겠죠?”
빙긋 웃는 아이의 얼굴은 마치 한 푼도 깎아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상인에게 덤으로 웃돈을 얹어 주는 부호(富豪)의 표정과 같았다.
오랜 여행길에 지친 행상에게 현지인이 맛있는 곳으로 안내해 준다는 것보다 더 값진 도움은 없다.
유기준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졌다.
대륙을 횡단하다시피 하며 경험을 쌓아 온 유기준이지만, 결국 항복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넌 참…… 특이하구나.”
“헤헤.”
아이는 웃었다.
마치 자신도 그렇다는 걸 안다는 듯이.
***
운남(雲南).
중화 전역을 다 뒤져 봐도 운남만큼 다양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 지역은 찾기 힘들 것이다. 운남은 명 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서쪽. 대륙에서 남쪽으로 분류되는 사천성(四川城)이나 귀주(貴州)보다도 아래에 있다.
즉, 명 제국이 아닌 남쪽의 다른 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뜻으로, 서쪽으로는 적경장(迪慶藏:티베트)의 문물과 교류하고, 남쪽으로는 대월국과 무려 일만 리에 달하는 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운남은 대륙에서 가장 산림이 울창한 지역이다. 전체에 걸쳐 황량한 바위산이 많기로 유명하며, 주로 동쪽은 고원지대고 서쪽은 협곡인데, 높이에 따라 기온차가 심하게 나서 더운 날씨와 서늘한 날씨가 공존한다.
그중 흑임촌은 협곡 쪽에 위치해 있었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기온차는 그리 크게 나지 않는다. 사계절이 모두 평탄하고 시원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도 마을 입구까지의 얘기로, 흑임촌의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후끈한 열기가 얼굴로 밀려든다.
흑임촌은 광산 마을.
운남에서는 물론이고, 대륙 전역을 따져 봐도 손꼽히는 철광석 산지였다.
당연히 마을 곳곳에 용광로가 설치되어 있을뿐더러 막 캐내 온 철광석을 녹여 질 좋은 철로 만들기 위해 벌건 철을 망치로 두드리고 있는 대장간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거칠어 보이는 사내들뿐이다. 피부는 검게 그을려 있고, 얼굴엔 호탕한 웃음과 쇳덩이처럼 무뚝뚝한 표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건, 그런 사내들 대부분이 달구지의 앞좌석에 앉은 꼬마 아이를 알아본다는 사실이었다.
“여어, 꼬맹이. 왜 오늘은 안 왔냐? 홍 대장이 찾았어.”
“하하, 아까 임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오늘 좀 캐셨나 봐요?”
“캤지! 캤다마다! 여기 있는 장가 놈이 철맥을 찾아서 말이야.”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껄껄 웃으며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내의 등짝을 두들겼다.
분명히 장난인데도 퍽퍽! 소리가 나는 것이, 소리만 들어도 몸이 아파지는 듯했다.
“으하하! 내가 어제 좋은 꿈을 꿨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래, 이 부러운 놈! 철맥을 찾으면 은자 열 냥이었던가?”
“그랬지. 으하하! 그것도 상급 철맥이면 거기에 열 냥을 더 얹어서 스무 냥을 준다고 했어. 이거, 오랜만에 마누라한테 큰소리 좀 쳐 보겠구만!”
“부럽구만, 부러워.”
“그러게 너도 산신님께 기도 좀 제대로 해 보라고!”
두 사람은 시끌벅적하게 웃더니, 다시 한 번 꼬마에게 인사를 하며 성큼성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