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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본능 5화
2. 진강우(5)
……나는 능숙하게 맥주캔을 계산하던 진강우를 눈에 담았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 에스퍼로 각성한지는 몰랐으나,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그의 각성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서 생생하여 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떠한 계기가 그를 힘들게 했을지조차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
진강우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짐승처럼 울부짖었을까.
“여기요.”
그가 계산한 맥주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또 오세요. 돈도 꼭 갚으시고.”
“아, 네. 알겠어요, 와서 꼭 갚을게요.”
계산된 물건을 받아 들며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시원했던 맥주캔은 손가락 사이를 차갑게 만들었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참에 나는 끝끝내 약간의 용기를 더 내 보기로 했다.
“저기, 혹시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네? 제 번호 말인가요. 이렇게 갑자기?”
고개를 까딱이며 픽 웃어 보이는 행동에 얼굴이 화하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한 거지? 절대 해 본 적도 없는 연락처 따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쭈물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서긴 싫었다.
“심차연 씨는 몇 살이세요?”
그는 남겨 둔 쪽지에 자기 이름과 더불어 핸드폰 번호를 적어 내려가며 물었다.
“저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스물일곱이라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가만 보자. 지금 내가 몇 살이더라. 3년 전으로 회귀했으니…… 아.
“스물넷이요.”
“스물넷? 저보다 한참 어릴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단 나이가 있네.”
“아, 네.”
내가 예전부터 동안이라는 소리는 많이 듣긴 했었다. 처음 진강우를 기관에서 마주치고 파트너 가이딩 테스트를 받았을 때도 그는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었다.
‘이런 핏덩이를 데리고 지금 뭘 하라고요? 미쳤습니까?’
아아, 맞아. 그랬었어. 나중에 돼서야 우리가 고작 한 살 차이라는 걸 알고선 놀라워했던 그의 표정도 또렷이 떠올랐다. 우린 나름대로 행복했었다. 아주 많이.
“자요. 남자한테 번호 주기는 처음이네.”
“그래요? 영광이에요.”
픽 웃으며 그의 말을 맞받아치자 그가 미간을 구겨 왔다.
“내가 그쪽한테 번호를 줬다고 해서 허튼수작 부리진 말아요. 돈 갚고 신분증 챙겨 오라고 주는 겁니다.”
“알겠어요. 어디 속고만 사셨나 봐.”
긴장이 풀리자 나는 예전 습관대로 투덜거렸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투라 너무 놀라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얼굴은 무섭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꼭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을 한 채로 나를 위에서 내리깔 듯 쳐다보는 모습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쪽이 너무 안일하게 사는 거라는 자각은 없습니까. 그나마 저 같은 놈 만나서 운 좋은 줄 아세요.”
“…….”
냉정한 말투에 억울함이 밀려왔지만,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나와 진강우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니까. 그걸 망각하고 예전 버릇대로 행동해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은 이미 씁쓸함만 가득했다.
다시 조금씩 친해지자. 그가 에스퍼로 각성하기 전에 마음을 열게 하자.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자.
욕심을 부리면 되는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늘 신중히 옆에서 엇나가지 않게 또 다른 진강우라는 사람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3년 후 그가 바랐던 것이 이런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그의 말대로 그저 내가 행복하면 되는 법이니까.
“꼭 연락할게요. 저기, 그러니까…….”
“심차연 씨가 편한 대로 부르세요. 전 뭐든 괜찮으니까.”
“네, 강우 씨.”
그의 이름을 부르자 진강우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 미래에 두고 온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켜 줄게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수많은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지만, 더는 뱉어 내지 못하고 조용히 그를 따라 웃을 뿐이었다.
***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주일 내내 진강우와 만나기 위해서 그가 일하는 편의점을 들락거렸다.
오늘도 그랬다.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어서 자잘한 영양제와 핸드폰에 부착하는 그립톡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다시 그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아.”
내가 찾아올 때마다 난감해하는 얼굴이 이제는 꽤 익숙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강우와 친분을 늘리기 위해서 나는 회귀 전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먼저 다가가려 애를 썼다. 이게 서서히 먹혀들어 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시기상조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에게 날을 세우고 벽을 치는 그의 행동은 여전했으니까.
진강우와 친분을 쌓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일하던 편의점 맞은편 카페에서 늘 시간을 축내며 지내기 일쑤였다. 일하면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꼼꼼히 체크해 두었다가,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그날 필요해 보이는 물품을 쪽지와 함께 전달하기도 하고. 그 외에도 곧 다가오는 그의 생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물어보고 선물을 챙겨 주는 날이 지속되었다. 진강우는 날 만난 지 처음으로 그날 매우 기뻐하며 고마움을 내보였다. 나야 회귀 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떠한 선물을 주었을 때 가장 행복해했는지 잘 알았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파 보이면 바로 달려가 약을 사서 건넸다. 하지만 고집이 워낙 세던 사람인지라, 기껏 사 온 약도 먹지 않고 고집에 못 이겨 앓아누웠다. 결국, 열이 펄펄 끓는 그를 대신하여 편의점 대타를 뛰며 눈도장도 찍었다. 그 이후로 진강우는 내게 더 마음을 주었다. 상당히 미안해하는 눈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먼저 밥은 먹었냐는 말을 건네고 조용히 웃으며 바라봐 주기까지 해서 마음 한편이 벅찼다. 진강우와 친해지기 위해서 고생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니 조용히 미소를 짓던 그를 보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고, 간질거렸다.
“생각보다 자주 오시네요.”
“네. 저기, 그게…… 오늘은 새로운 영양제를 가져와서요. 혹시 영양제 챙겨 드세요?”
나는 작은 비닐봉지를 달랑 내밀며 쌜쭉였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서 내가 내민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저한테 관심 있으신 것도 아닐 테고, 계속 이런 거 챙겨 오지 마세요. 부담스러우니까.”
“왜요? 설마 강우 씨는 남자인 제가 이러는 게 싫으세요?”
“네?”
슬며시 용기를 내어 돌직구를 날리니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한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막상 나도 말하고 나니까 살짝 민망해서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지만, 이후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귀를 쫑긋하게 했다.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보여도 저 성향을 가리거나 그러는 편은 아닌데. 음, 뭐 하여튼 고마워요. 주신 영양제는 잘 챙겨 먹겠습니다.”
“네.”
별것도 아닌 상황인데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고 몽실거렸다. 정말로 그와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즐겁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맞다. 강우 씨! 그 비닐봉지 안에 있는 그립톡이요.”
“이거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립톡을 들어 살피던 그가 상품 디자인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금세 그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아…… 안 돼. 변명할 기회를 놓쳤어!
“저기, 그, 그거요. 맞다, 딱히 별다른 뜻은 없고요. 그, 그냥 그 디자인이 가장 괜찮길래요…….”
“음…… ‘I LOVE U’라는 말이 심차연 씨 취향인가 봐요?”
으아…… 아니야. 아니라고! 악, 쪽팔려! 더는 말하지 못한 채로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이런 행동이 징그럽다거나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싶은 나머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우물쭈물해서 두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는 별말 없이 입매를 당겨 웃었다.
“……귀엽네. 마음에 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잘 쓸 테니까. 고마워요, 심차연 씨.”
“아뇨, 그게… 네…… 별말씀을요.”
나는 진강우의 말 한마디와 표정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 회귀 전엔 이런 감정이 무엇일까 나도 확신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겠지만, 지금이라면 이 마음을 망설이지 않고 정의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했으며, 예전과 현재도 늘 지금과 같은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이 마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 바람에 회귀 전 헤어질 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강우 씨를 너무 좋아했다고 말했다면 지금보단 덜 후회했을 건데.’
멍청하게 울고불고하느라 그의 마지막 표정 또한 흐릿해서 기억나질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멋졌던 S급 에스퍼, 진강우의 파트너로 예상컨대 그는 아마도 조용히 미소 지으며 묵묵히 바라봐 줬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강제 회귀 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부끄러운 일도 늘어 갔다. 남몰래 챙겨 갔던 물건들이 커플 아이템이었다는 사실을 걸렸을 때의 심정이란 무진장 참담한 심정만 남겼다.
‘설마 이거 심차연 씨와 커플 아이템인가요.’
“하하하…….”
며칠 전 일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에는 나를 엄청 귀찮아했었지. 그러나 어느샌가 진강우는 나를 대하는 데 있어 점점 편해진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바뀐 그의 행동에 마음은 두근거렸고 욕심만 늘어 갔다.
그가 묵묵히 공부할 때 비타민 음료를 건네면서 웃으면, 뒤돌아서 살짝 짓는 미소가 늘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여러 번이나 너무 수치스럽고 밤마다 이불을 걷어찰 흑역사를 남겨서 그런지, 요즘은 기분마저 널뛰듯 오락가락거렸다.
이런 내가 그도 싫지 않았던지 곧잘 내가 준 커플 아이템을 가지고 다녔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오는 대목이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는데, 진강우는 전에 줬던 그립톡을 야무지게 지지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거 그냥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사용하는 건데. 게다가 꽤 편리하더라고요. 그뿐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심차연 씨.’
2. 진강우(5)
……나는 능숙하게 맥주캔을 계산하던 진강우를 눈에 담았다. 그가 무슨 이유에서 에스퍼로 각성한지는 몰랐으나,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그의 각성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서 생생하여 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떠한 계기가 그를 힘들게 했을지조차도 가늠이 가질 않았다.
진강우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짐승처럼 울부짖었을까.
“여기요.”
그가 계산한 맥주캔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또 오세요. 돈도 꼭 갚으시고.”
“아, 네. 알겠어요, 와서 꼭 갚을게요.”
계산된 물건을 받아 들며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시원했던 맥주캔은 손가락 사이를 차갑게 만들었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참에 나는 끝끝내 약간의 용기를 더 내 보기로 했다.
“저기, 혹시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네? 제 번호 말인가요. 이렇게 갑자기?”
고개를 까딱이며 픽 웃어 보이는 행동에 얼굴이 화하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한 거지? 절대 해 본 적도 없는 연락처 따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쭈물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서긴 싫었다.
“심차연 씨는 몇 살이세요?”
그는 남겨 둔 쪽지에 자기 이름과 더불어 핸드폰 번호를 적어 내려가며 물었다.
“저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스물일곱이라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가만 보자. 지금 내가 몇 살이더라. 3년 전으로 회귀했으니…… 아.
“스물넷이요.”
“스물넷? 저보다 한참 어릴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단 나이가 있네.”
“아, 네.”
내가 예전부터 동안이라는 소리는 많이 듣긴 했었다. 처음 진강우를 기관에서 마주치고 파트너 가이딩 테스트를 받았을 때도 그는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인상을 썼었다.
‘이런 핏덩이를 데리고 지금 뭘 하라고요? 미쳤습니까?’
아아, 맞아. 그랬었어. 나중에 돼서야 우리가 고작 한 살 차이라는 걸 알고선 놀라워했던 그의 표정도 또렷이 떠올랐다. 우린 나름대로 행복했었다. 아주 많이.
“자요. 남자한테 번호 주기는 처음이네.”
“그래요? 영광이에요.”
픽 웃으며 그의 말을 맞받아치자 그가 미간을 구겨 왔다.
“내가 그쪽한테 번호를 줬다고 해서 허튼수작 부리진 말아요. 돈 갚고 신분증 챙겨 오라고 주는 겁니다.”
“알겠어요. 어디 속고만 사셨나 봐.”
긴장이 풀리자 나는 예전 습관대로 투덜거렸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투라 너무 놀라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얼굴은 무섭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꼭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을 한 채로 나를 위에서 내리깔 듯 쳐다보는 모습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쪽이 너무 안일하게 사는 거라는 자각은 없습니까. 그나마 저 같은 놈 만나서 운 좋은 줄 아세요.”
“…….”
냉정한 말투에 억울함이 밀려왔지만,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나와 진강우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니까. 그걸 망각하고 예전 버릇대로 행동해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은 이미 씁쓸함만 가득했다.
다시 조금씩 친해지자. 그가 에스퍼로 각성하기 전에 마음을 열게 하자.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자.
욕심을 부리면 되는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늘 신중히 옆에서 엇나가지 않게 또 다른 진강우라는 사람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3년 후 그가 바랐던 것이 이런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그의 말대로 그저 내가 행복하면 되는 법이니까.
“꼭 연락할게요. 저기, 그러니까…….”
“심차연 씨가 편한 대로 부르세요. 전 뭐든 괜찮으니까.”
“네, 강우 씨.”
그의 이름을 부르자 진강우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 미래에 두고 온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켜 줄게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수많은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지만, 더는 뱉어 내지 못하고 조용히 그를 따라 웃을 뿐이었다.
***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주일 내내 진강우와 만나기 위해서 그가 일하는 편의점을 들락거렸다.
오늘도 그랬다.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어서 자잘한 영양제와 핸드폰에 부착하는 그립톡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다시 그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아.”
내가 찾아올 때마다 난감해하는 얼굴이 이제는 꽤 익숙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강우와 친분을 늘리기 위해서 나는 회귀 전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먼저 다가가려 애를 썼다. 이게 서서히 먹혀들어 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시기상조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에게 날을 세우고 벽을 치는 그의 행동은 여전했으니까.
진강우와 친분을 쌓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일하던 편의점 맞은편 카페에서 늘 시간을 축내며 지내기 일쑤였다. 일하면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꼼꼼히 체크해 두었다가,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그날 필요해 보이는 물품을 쪽지와 함께 전달하기도 하고. 그 외에도 곧 다가오는 그의 생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물어보고 선물을 챙겨 주는 날이 지속되었다. 진강우는 날 만난 지 처음으로 그날 매우 기뻐하며 고마움을 내보였다. 나야 회귀 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떠한 선물을 주었을 때 가장 행복해했는지 잘 알았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파 보이면 바로 달려가 약을 사서 건넸다. 하지만 고집이 워낙 세던 사람인지라, 기껏 사 온 약도 먹지 않고 고집에 못 이겨 앓아누웠다. 결국, 열이 펄펄 끓는 그를 대신하여 편의점 대타를 뛰며 눈도장도 찍었다. 그 이후로 진강우는 내게 더 마음을 주었다. 상당히 미안해하는 눈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먼저 밥은 먹었냐는 말을 건네고 조용히 웃으며 바라봐 주기까지 해서 마음 한편이 벅찼다. 진강우와 친해지기 위해서 고생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니 조용히 미소를 짓던 그를 보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고, 간질거렸다.
“생각보다 자주 오시네요.”
“네. 저기, 그게…… 오늘은 새로운 영양제를 가져와서요. 혹시 영양제 챙겨 드세요?”
나는 작은 비닐봉지를 달랑 내밀며 쌜쭉였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서 내가 내민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저한테 관심 있으신 것도 아닐 테고, 계속 이런 거 챙겨 오지 마세요. 부담스러우니까.”
“왜요? 설마 강우 씨는 남자인 제가 이러는 게 싫으세요?”
“네?”
슬며시 용기를 내어 돌직구를 날리니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한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막상 나도 말하고 나니까 살짝 민망해서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지만, 이후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귀를 쫑긋하게 했다.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보여도 저 성향을 가리거나 그러는 편은 아닌데. 음, 뭐 하여튼 고마워요. 주신 영양제는 잘 챙겨 먹겠습니다.”
“네.”
별것도 아닌 상황인데 괜히 마음이 두근거리고 몽실거렸다. 정말로 그와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즐겁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맞다. 강우 씨! 그 비닐봉지 안에 있는 그립톡이요.”
“이거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립톡을 들어 살피던 그가 상품 디자인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금세 그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아…… 안 돼. 변명할 기회를 놓쳤어!
“저기, 그, 그거요. 맞다, 딱히 별다른 뜻은 없고요. 그, 그냥 그 디자인이 가장 괜찮길래요…….”
“음…… ‘I LOVE U’라는 말이 심차연 씨 취향인가 봐요?”
으아…… 아니야. 아니라고! 악, 쪽팔려! 더는 말하지 못한 채로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이런 행동이 징그럽다거나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싶은 나머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우물쭈물해서 두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는 별말 없이 입매를 당겨 웃었다.
“……귀엽네. 마음에 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잘 쓸 테니까. 고마워요, 심차연 씨.”
“아뇨, 그게… 네…… 별말씀을요.”
나는 진강우의 말 한마디와 표정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 회귀 전엔 이런 감정이 무엇일까 나도 확신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렸겠지만, 지금이라면 이 마음을 망설이지 않고 정의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했으며, 예전과 현재도 늘 지금과 같은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이 마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 바람에 회귀 전 헤어질 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강우 씨를 너무 좋아했다고 말했다면 지금보단 덜 후회했을 건데.’
멍청하게 울고불고하느라 그의 마지막 표정 또한 흐릿해서 기억나질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멋졌던 S급 에스퍼, 진강우의 파트너로 예상컨대 그는 아마도 조용히 미소 지으며 묵묵히 바라봐 줬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강제 회귀 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부끄러운 일도 늘어 갔다. 남몰래 챙겨 갔던 물건들이 커플 아이템이었다는 사실을 걸렸을 때의 심정이란 무진장 참담한 심정만 남겼다.
‘설마 이거 심차연 씨와 커플 아이템인가요.’
“하하하…….”
며칠 전 일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에는 나를 엄청 귀찮아했었지. 그러나 어느샌가 진강우는 나를 대하는 데 있어 점점 편해진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바뀐 그의 행동에 마음은 두근거렸고 욕심만 늘어 갔다.
그가 묵묵히 공부할 때 비타민 음료를 건네면서 웃으면, 뒤돌아서 살짝 짓는 미소가 늘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여러 번이나 너무 수치스럽고 밤마다 이불을 걷어찰 흑역사를 남겨서 그런지, 요즘은 기분마저 널뛰듯 오락가락거렸다.
이런 내가 그도 싫지 않았던지 곧잘 내가 준 커플 아이템을 가지고 다녔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오는 대목이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는데, 진강우는 전에 줬던 그립톡을 야무지게 지지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거 그냥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사용하는 건데. 게다가 꽤 편리하더라고요. 그뿐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심차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