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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15화)
제5장 흑임참사(黑任慘死)(2)


쿵! 쿵! 쿵!
“유랑아! 선생님!”
아마 다급한 풍서의 목소리에 놀랐을 것이다.
안쪽에서 을유랑이 놀라서 뛰쳐나오고, 을유랑의 아버지인 을진환도 굳은 얼굴로 나왔다.
“풍서?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을유랑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풍서는 을진환에게로 뛰어갔다.
“아버님, 급한 일이 있어요. 홍 대장님의 전언이에요.”
“……안채로 들어오거라.”
을진환은 두말하지 않고 풍서를 방 안으로 들였다. 을유랑과 부엌에 있던 을유랑의 어머니도 함께 들어왔다.
그런 뒤에야 풍서는 오늘 자신이 겪은 일들을 차례차례 설명하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풍서가 엿들었던 이야기와 광도가 무너졌을 때 피해자들이 모두 태극교도가 아니었던 점, 그리고 유기준에게 들은 이야기까지 합쳐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 대장에게 받은 서찰까지 건네자, 을진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버렸다.
“저기…….”
“쉿!”
초조한 풍서가 뭐라고 말을 더 건네려고 했으나, 을유랑이 막아섰다.
“아버지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실 땐 심각한 고민이 있으시다는 거야. 방해하면 안 돼.”
“으응.”
풍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기다렸다.
을진환의 생각은 반 각 가까이 계속되었다.
“알겠다. 가자.”
“네?”
“홍인후, 그 친구는 내가 회의를 개최하는 것에 참여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참석해 줘야 할 테지.”
풍서는 을진환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이 참 정갈하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여미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당신은 유랑이를 데리고 이 마을을 빠져나가시오.”
“아, 아버지?”
을진환의 난데없는 지시에 깜짝 놀라 반문한 것은 을유랑이었다. 을유랑의 어머니는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그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마을은 위험해졌다. 더 이상 살 만한 곳이 못 돼.”
“하, 하지만……!”
“가족이 위험한 곳에 있으면 나는 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유랑이 너는 내가 그랬으면 좋겠느냐?”
“아버지……!”
을유랑은 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파르르 떨었다. 평생 붓밖에 쥐어 본 적이 없는 새하얀 손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알겠…… 습니다.”
“그래, 장하다.”
을진환의 손이 을유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을유랑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분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유랑이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풍서는 그 모습이 조금 부러웠다.
“풍서야.”
“네……?”
“너도 유랑이랑 함께 가라.”
“……!!”
풍서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을진환의 손바닥이 풍서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아……!”
풍서는 얼굴이 빨개진 채 말문이 막혔다.
을진환이 풍서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런 곳에 끼는 게 아니야. 인후도 네가 유랑이와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면 하더구나.”
“그, 그렇지만…….”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찾아가는 건 내가 대신하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유랑이와 함께 가 다오. 유랑이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녀석이라, 혼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구나.”
그 말을 하는 을진환의 얼굴은 따뜻했고, 또한 단호했다.
풍서는 차마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네…… 그럴게요.”
“그래. 그럼 바로 마차를 준비하마.”
을진환이 곧장 밖으로 나가려 하자 멍하니 서 있던 풍서는 그제야 다급하게 을진환을 불렀다.
“저, 저기, 선생님!”
풍서는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다면…… 한 사람만 더 불러서 함께 가도 될까요?”
“누구를 데려오고 싶은 거지?”
“저기, 보하 형이요.”
“공씨 집안의 아들 말이구나.”
“네……. 저기, 안 될까요?”
을진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일각 안에 돌아와야 한다. 시간이 없구나.”
“네!”
풍서는 곧장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풍서야! 같이 가!”
“어? 너는…… 떠날 준비해야지?”
“괜찮아. 별로 짐이 없어. 그리고…… 아마 내가 있으면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이야기를 별로 못 나누실 거야.”
“그, 그렇겠구나.”
“응. 그러니 잠시 비켜 드려야지.”
풍서는 느티나무 앞, 골목길을 지나가며 조금 놀란 얼굴로 을유랑을 쳐다봤다.
을진환은 을유랑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풍서가 보기엔, 을유랑은 가끔 놀랄 만큼 속이 깊은 것 같았다.
“그래, 어서 보하 형을 데려오자.”
“응. 나도 보하 형은 좋아.”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떠올렸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우정만이 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

우당탕!
뭔가가 박살 나는 듯한 소리에 가게 안쪽에서 목발을 찬 사내가 거칠게 뛰쳐나왔다.
“어떤 놈이야!”
거칠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술을 마시고 있었던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종각은 문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종대였냐?”
“아버지.”
종대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한데 잔뜩 흥분한 듯 숨을 씩씩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놈, 무슨 일이 있던 거냐?”
“풍서, 그 새끼가……!”
종대의 흥분한 모습에 종각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뭐? 풍서? 그놈이 왜?”
“내가 아버지가 데려오라 했다면서 불렀는데, 그놈이 날 무시하고 도망치잖아요.”
“널 무시하고 도망? 그놈, 그런 배짱이 있었나?”
“그러니까 말이에요. 마치 뭐에 쫓기는 것처럼……. 그 새끼, 어디서 뭘 잘못 먹었나.”
“…….”
종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거, 이상하군.”
“그렇죠?”
“그런데 그걸 왜 그냥 뒀냐? 달리기도 네가 더 빠르잖냐?”
“그때는 짐이 있었다구요. 그래도 쫓아갔는데, 그 새끼가 을 선생님 댁에 들어가는 바람에…….”
“……을 선생?”
종각의 눈에 심상치 않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놈이 왜 을 선생네 집에…… 아니, 잠깐만.”
종각은 풍서가 일하다가 뛰쳐나갔던 게 언젠지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종각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다혈질이지만 머리가 나쁘진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그 배짱없는 놈이 창고 일을 내팽개치고 간 것부터가 이상했지. 게다가 쫓기는 것처럼 을 선생네 집에 갔다고……?”
“아버지, 뭔 일 있어요?”
종각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주먹으로 쾅! 하고 옆에 있는 나무 상자를 후려쳤다.
“이 쥐새끼 같은……!”
“우왓!”
종대가 깜짝 놀라서 물러섰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 마침 교(敎)도 집합을 하고 있으니까.”
“아버지?”
“종대, 넌 방앗간에 가서 강씨를 좀 불러와라.”
“나 방금 심부름하고 왔는데…….”
“입 다물고 다녀와!”
퍽! 소리가 나게 얻어맞은 종대는 구시렁거리면서 방앗간으로 뛰어갔다.
“이거, 생각보다 계획이 빨라지겠군.”
종각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어느새 그의 입가엔 득의양양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

“이거, 홍 대장님이 지시한 거 맞냐?”
“응. 그렇다니까요!”
공보하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 풍서는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보하는 뭔가 미심쩍은 듯했지만, 평소에 풍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희를 지켜 주는 거라고?”
“응. 그거예요.”
“…….”
“유랑아, 어디로 간다고 그랬지?”
“으응, 사천으로…….”
공보하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홍 대장님의 지시라면 어쩔 수 없지.”
공보하가 납득하자, 이번엔 을유랑이 불안한 얼굴로 풍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풍서야.”
“으응, 왜?”
“정말 괜찮을까, 이렇게 해도?”
“괜찮아. 인생은 장사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값을 높게 받으려면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돼.”
풍서는 어리둥절해진 표정을 짓는 을유랑의 손목을 붙잡고 계속해서 달렸다.
공보하는 풍서를 많이 보호해 주었지만, 사실 풍서 역시 항상 반대로 공보하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공보하가 사람을 대하는 게 많이 서툴다는 걸 알고 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공보하를 별로 반기지 않는다. 뭐든지 척척 해내니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라 본인 스스로가 사람과의 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다들 냉정한 놈이라고 욕하며 공보하를 안 좋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은가.
홍 대장은 공보하를 믿고 신뢰하는 것 같았지만, 풍서는 을유랑과 함께 도망치게 하려고 하면서 공보하는 보호해 주려 하지 않았다.
‘어른 취급인 건가?’
풍서는 그게 싫었다.
공보하가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어린아이다.
그 역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고, 의지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을까?
‘보하 형은 내가 보호해야 돼.’
풍서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음?”
이상 사태가 생긴 건 느티나무가 있는 골목을 지날 때 즈음이었다.
을유랑의 집이 눈에 보이게 되었을 때, 풍서의 귀에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어떻게 이런 짓을……!”
풍서의 발이 멈췄다.
공보하가 팔을 내밀고 풍서의 가슴을 막고 있었다.
“이건…… 아버지……?”
을유랑이 숨을 쌕쌕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을유랑의 아버지 을진환은 군자(君子)다.
특히 을유랑에게는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버……!”
“쉿!”
을유랑이 의아해하며 나서려는 것을 공보하가 막아 세웠다.
풍서와 을유랑.
두 사람을 막아선 공보하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가만히 기다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진지하게 말하는 공보하에겐 범상치 않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풍서와 을유랑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