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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17화)
제6장 절망의 밤[夜](2)


을유랑의 집은 쉽게 불에 탔다.
애초에 나무로 만든 집인데다, 안에는 쉽게 불이 붙는 서책들로 가득했기에 불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세 사람이 집에 돌아왔을 때, 다행히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보하가 먼저 들어가서 을유랑의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고, 새로운 의복을 입혀 드린 뒤엔 을유랑에게도 보여 주었다.
다행히 목 윗부분에는 상처가 없었다.
의외로 을유랑은 울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차갑게 식은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뭔가를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때의 을유랑의 눈빛은…… 열 살짜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 냉철하게 식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풍서와 공보하는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끝낸 을유랑이 자신의 포부를 말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나, 칠성태극교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복수심.
차갑게 식은 을유랑의 얼굴에선 비장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을유랑의 손에는 책이 딱 한 권만 들려 있었는데, 그건 바로 손자병법(孫子兵法)이었다.
“손무(孫武)의 병법…… 복수인가…….”
의외로 공보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도 좋아. 열심히 살아갈 의지가 될 수도 있을 거다.”
“빈말이 아니에요. 절대로 칠성태극교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칠성태극교는 제가 없앨 거예요.”
“그래, 좋아. 그럼 나도 도우마.”
“예……?”
“난 내년에 황실에서 열리는 무관 시험을 칠 거다. 거기서 합격하면 황실 금의위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 힘이 모이는 순간, 네가 하려는 일을 돕겠어.”
“고, 고마워요, 보하 형.”
을유랑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같은 상황에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아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재산일까.
“그럼 이제 마차를 구하러 가 볼까?”
풍서와 을유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보하를 따라나섰다.
을유랑도 어딘가 개운해 보였다.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복수를 다짐하며 마음의 정리를 한 것이다.
“엇……!”
“어? 어어?”
하지만 그런 세 명은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다그닥― 다그닥―
히히힝―!
경쾌한 말발굽 소리인데, 두 사람이 듣기엔 마치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커다란 말과 짐마차가 눈앞에 있었다.
지금쯤 대리백족에 가 있어야 할 상인도 마차에 함께 실려서 타박타박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아저씨?!”
풍서는 놀라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여어, 풍서 아니냐?”
유기준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손을 흔들었다.
마침 잘됐다.
마차를 구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도대체 유기준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아저씨, 도대체…….”
“아, 풍서야, 잠깐만.”
유기준은 풍서에게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한 뒤, 활활 불에 타오르고 있는 을유랑의 집을 지그시 응시했다.
“강 점주님, 잠깐 나와 보시죠?”
“뭔가? 벌써부터 이 늙은이를 부려먹을 셈인가?”
마차 안쪽으로부터 카랑카랑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서, 을유랑, 공보하.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을에 몇 개 없던 상회의 주인인 강환조가 짐마차 안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그보다 을 선생님의 댁이 불타고 있습니다.”
“뭣……!!”
순간, 강환조가 뛰어나올 때 보여 준 모습은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더욱 민첩해 보였다.
“이 무슨 개 같은……!”
강환조는 버럭 욕부터 내뱉었다.
풍서를 포함한 세 사람은 그 기세에 놀라 움찔하면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창 백운상회가 인기가 많았던 시절. 장난을 치고 가게일을 방해하는 아이들에게 강환조는 저런 식으로 버럭 욕을 내뱉고는 했다.
그 당시의 나이도 적지 않았는데, 정말로 괄괄한 노인이었다.
“아, 을 선생네 아들이 있구나!”
강환조는 활활 불타는 집을 멍하니 노려보다가 세 사람 중 을유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선생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그게…….”
을유랑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 가셨어요.”
“뭣……!”
“돌아가셨어요. 팔극상회의 종각이랑 방앗간의 강씨,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집을 습격했어요.”
마지막 말에는 아직 정제되지 못한 분노가 가득 섞여 있었다.
“그런 쳐 죽일……!”
강환조가 분노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안에 귀신 같은 살기가 떠올랐다.
“그 말종 놈이 언젠가 일을 치를 거라 생각은 했지만, 하필 을 선생을……! 을 선생을……!!”
두 눈을 무섭게 치켜뜬 강환조에게는 을진환과의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을유랑은 속으로 조금 의아해했다.
강환조와 을진환은 겉으로는 그리 친한 것처럼 굴지 않았다.
내외도 별로 없었고, 대화가 있다면 가끔 마을 총회 같은 곳에서 이야기가 나올 때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강환조는 이렇게나 을진환의 죽음에 분노하는 것일까?
“강 점주님, 일단 좀 진정하세요. 흥분해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끄응…….”
“풍서야, 아까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니?”
풍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거…… 선생님께서 첫 번째였어요. 나머진 대신할 테니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풍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랬다.
을진환은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부르는 일을 대신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 나는 이걸 하고, 홍 대장님은 회의를 소집하고, 유기준 아저씨는…… 어라?’
풍서의 시선이 유기준에게로 휙― 돌아갔다.
“아저씨는 왜 여기에 계세요? 대리백족은요? 도와준대요?”
“아, 그게…….”
유기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딘가 우물쭈물하고 있다는 기색.
그때, 공보하가 마차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바퀴 근처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피가 있어.”
“에……?”
“싸움이 있었습니까?”
유기준은 난감하게 웃었다.
“아아, 칠성태극교에서 한발 빨랐더라고.”
“……!!”
풍서가 입을 뻐끔거렸다.
“에…… 그러니까, 그 말은……?”
“대로변엔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태극교 쪽에 치밀한 자가 있는 모양이야.”
“그, 그럼 도망쳐서 다시 돌아온 거예요?”
“으음, 그렇지 뭐. 도망쳤어. 뭐, 다행히 차선책으로 연락은 취했지만, 그게 통했을지는 아직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는 유기준은 평소처럼 태연했다.
“길목이 막혀 있는 걸 보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돌아온 거야.”
“그건…… 그럼…….”
풍서는 낙담했다.
유기준이 이 마을을 구해 낼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가 실패하고 돌아왔다면…….
“그럼…… 우리 마을은 이제 끝인 거예요?”
풍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유기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없어.”
“……!!”
풍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상대는 거대한 문파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본단의 숫자만 해도 수만이 넘는다고 해. 지금 앞으로 나선 사람들을 막아 낸다고 해도…… 제이, 제삼의 인물들이 계속 나타날 거야. 칠성태극교는 집요하니까.”
“그런…….”
풍서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종각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
반항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마을이…… 흑임촌이…….’
풍서가 세상에 나와 지금껏 자라 온 마을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다.
장욱과 을지환을 죽인 사람들이 이 마을을 다스린다.
“싫어…….”
풍서는 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싫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풍서가 절박한 심정을 담아 공보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공보하 역시도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야기로만 들은 거지만, 상대는 너무 거대했다. 아무리 공보하라도 지금은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풍서야, 세력을 이루는 건 세 가지다.”
“네?”
“그게 뭔지 알겠니?”
“모르…… 겠어요.”
“사람, 민심, 돈.”
“아…….”
“칠성태극교는 숫자가 많아. 거기다가 그 사람들을 모두 지탱할 재력도 있지. 사람들의 민심을 휘어잡는 교리도 가지고 있어.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건 관(官)이지만, 그것도 이 운남에선 힘들지. 그러니 조만간에 이 마을은 칠성태극교의 산하에 떨어질 거야.”
“…….”
“분하니?”
유기준이 모두를 둘러본다.
풍서도, 공보하도, 을유랑도…….
모두가 분한 듯 이를 악물고 시선을 피한다.
“힘이 없다는 건 슬픈 거지. 하지만 너희는 아직 어려. 시간만 있으면 어떤 종류의 힘이든 기를 수 있다.”
“…….”
“낙담하지 마라. 그리고 마을은 구할 수 없지만, 완전히 포기하긴 일러. 우린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세 사람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뒤 유기준을 향하는 시선엔 의문이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사람들을 구해야지.”
“네……?”
“칠성태극교가 아닌 사람들. 한시라도 빨리 그들에게 알리고 대피시켜야 하지 않겠어? 이대로 두면 그 사람들도 칠성태극교에 들어가게 될 텐데.”
“아……!”
세 사람의 얼굴에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은 시련이 닥쳐왔을 때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을 때 절망한다.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 봐, 차분한 친구.”
“……모이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는 겁니까? 나가는 길을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물리쳤거든. 아마 내일 오전쯤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돼. 그럼 도망칠 수 있어.”
유기준은 등을 돌리고는 다시 짐마차 위로 올라탔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마을 입구 앞으로 모이라고 전해 줘. 태극교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니 서둘러야 돼. 나는 홍 대장님께 다녀온다.”
유기준은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뒤, 마지막으로 풍서를 바라봤다.
“힘내라. 마을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빠져나갈 수 있는지는…… 너희들에게 달렸어.”
유기준은 ‘이럇!’ 하고 외치며 말을 몰자 짐마차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길을 질주했다.
세 사람은 옆으로 비켜선 채 짐마차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도 움직이자.”
“응.”
공보하의 지시에 따라 세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단은 세 조각으로 나눠서 가졌다.
풍서는 서쪽, 을유랑은 동쪽, 공보하는 마을의 가운데.
세 사람은 명단에 있는 사람을 다 부른 뒤, 입구에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