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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25화)
제8장 운남의 상인(商人)(5)
“풍서, 너는…….”
일위강은 풍서를 대할 때는 뭔가를 어려워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구나.”
“그 정도로 엉망인가요?!”
풍서는 절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 엉망이라기보다는…… 너는 뭔가가 다르다. 그건 확실해.”
“아, 엉망은 아닌 거예요?”
“엉망은 아니야. 하지만 넌 무(武)에 재능이 없어.”
“……!!”
풍서는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어요,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건. 저는 보하 형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도, 유랑이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도 못하는걸요.”
“그건 그렇다.”
일위강은 절대로 빈말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풍서, 너는 천재는 다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무(武)에 관한 천재라면…… 강하지 않을까요?”
“맞다, 강하지. 상식을 초월하는 속도로 무공을 습득하고, 너무나 빠르게 성장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강해지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천재들은 규격을 벗어난 존재니까. 그리고 무림강호에는 그런 천재들이 너무나 많아.”
“으윽……!”
풍서는 기가 죽었다.
공보하와 같은 천재들이 무림에 부지기수로 많다면 풍서 같은 이가 어떻게 무림인으로 살아가겠는가. 자신은 역시 상인이 될 팔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재들이 무적(無敵)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하겠다.”
“네……?”
“천재들은 호기심이 많고 탐욕스럽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익히고 습득하지. 관심을 가진 분야에선 자신이 모르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아.”
“네, 그렇죠. 그게 대단하죠. 보통 사람들은 하나 하기도 힘든데, 뭐든지 다 해내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너는 천재가 아니다.”
풍서의 어깨가 다시 축 늘어졌다.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말을 직접 들으니 꽤나 충격적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우선 그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네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라.”
“네. 저는 천재가 아니에요.”
풍서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 천재들처럼 모든 걸 다 잘해 내려는 건 포기해라.”
“어……?”
“앞으로는 네가 잘하는 단 한 가지만 파고들어라.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은 아무리 천재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법이다.”
“…….”
“너는 공보하처럼 많은 무공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도 없고, 을유랑처럼 깊은 깨달음으로 만류귀종의 무공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네가 만약 한 가지 무공만을 평생 동안 수련해서 그 극의(極意)를 숨 쉬듯이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결과는 아무도 모를 테지.”
풍서는 일위강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너에겐 특이한 재능이 있다. 예전에 철광석을 구별하는 일을 했다고 했나?”
“네? 네, 그랬어요.”
“그럼 이걸 잘 봐라.”
일위강은 풍서를 인근의 나무 밑으로 데려가더니, 갑자기 손바닥을 쫙 펼친 장타(掌打)로 나무를 후려쳤다.
후두둑―
“우왓!”
나무에 매달려 있던 갈색의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일위강은 갑자기 손을 움직여서 허공에서 낙엽들을 낚아챘다.
수십 가닥의 바람이 하나로 합쳐져 크게 휘몰아친다.
손이 잔상으로밖에 안 보일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자, 몇 개지?”
“네?”
“내가 잡은 낙엽의 숫자는 몇 개지?”
“아, 마흔일곱…… 아니, 마흔여덟 개요.”
풍서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일위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췄다.”
“헤헤.”
“너는 눈이 좋아. 그건 네가 앞으로 파고들어야 할 재능이다.”
“아…….”
“그럼 이것도 한 번 봐라.”
일위강은 손에 잡고 있던 마흔여덟 개의 낙엽을 허공에 다시 흩뿌렸다.
그리고…….
번쩍!!
“……!!”
풍서는 너무나 놀라 굳어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 환한 빛이 번쩍였을 뿐이다.
그랬는데, 한순간의 빛이 사라진 후 낙엽들은 허공에서 폭발하듯이 터져 있었다.
“봤나?”
“아…… 니요.”
“그래. 아직은 무리일 테지.”
일위강은 마치 칼처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수도(手刀)를 아래로 내렸다.
“그럼 이걸 한 번 봐라.”
일위강은 근처에 죽은 나무로 다가가더니, 아래로 내리고 있던 수도를 허리춤에서 앞으로 꼿꼿이 세웠다.
쒜에에엑―!
“……!!”
파아앙!!
엄청난 속도로 일위강의 수도가 앞으로 뻗어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공기를 찢는 듯한 폭음은 움직임이 다 끝난 뒤에야 들려왔을 정도다.
풍서는 멍청하게 굳어져 버렸다.
죽은 나무의 몸통엔 손바닥만 한 원형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사람의 몸이 그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사람의 손이 나무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는 것도.
풍서에겐 생전 처음 겪는 충격적인 경험이다.
“이건 보였겠지?”
“보긴 했는데…….”
“똑같이 움직일 자신은 없다. 그렇지?”
일위강은 다시 자세를 바로 잡고 풍서를 바라봤다.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다. 볼 수 있다는 건 느낄 수 있다는 거고, 느낄 수 있다면 너는 그 세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에…… 포함이 되어있다구요?”
“그래. 지금은 몰라도 나중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다. 방금 전에 내가 사용한 무공을 잘 기억해 두어라. 이게 앞으로 네가 추구해야 할 ‘한 가지’다.”
“아…….”
“과거 점창(點蒼)의 조사께서 오의(奧義)를 깨달으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조차 쏘아서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하여 사일(射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극쾌(極快)는 곧 극강(極强). 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끼어들 틈은 없다. 오로지 정진과 노력만이 극의를 이룰 수 있는 무공이다. 명심해라. 너는 앞으로 이 사일검법만을 익힌다.”
풍서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재가 아니다.
하지만 일위강이 말한 대로 이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익힌다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한 무공은 아직 이름이 없다. 내가 만들었지만, 아직 완성을 하지 못했지. 사일검법이 극의에 이르면 익힐 수 있을 테니, 연이 닿는다면 네가 완성해 주었으면 좋겠다.”
“꼭, 꼭 해낼게요!”
“그래.”
일위강은 뒤쪽에 있는 집을 돌아보았다.
그곳 마당에선 공보하가 오늘도 무공을 연마하고 있을 것이며, 방 안에선 을유랑이 내면을 참오하고 있을 것이다.
일위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비록 하늘이 내린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가 매일같이 정진하여 이 무공을 극에 달하도록 익힌다면, 그 어떤 강대한 힘도 네 앞에선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네!”
“정진하여 극의에 이르거라.”
“네, 사부님!”
풍서는 결연하게 마음을 다지며 포권을 취했다. 그때 일위강이 지은 옅은 웃음은…… 이후로도 풍서의 마음속에서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
어째서 유기준이 자신의 제자를 일위강에게 먼저 맡긴 것인지.
어째서 일위강은 공보하, 을유강, 풍서. 세 사람을 단 사 년만 가르치려고 한 것인지.
그 이유는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모두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일위강은 병이 있었다.
함께한 지 삼 년째부터는 무공을 시연하기는커녕, 집 앞을 걸어 나오는 것도 힘들어했다.
몸은 뼈만 남은 것처럼 말라 버렸고, 얼굴의 볼은 움푹 들어가서 해골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일위강은 그런 상황에서도 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라도 더 나눠 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지막 한 달째엔 붓을 쥐고 있는 것도 힘이 드는 사람이, 세 사람에게 각자 전해 줄 비급을 따로따로 세 권이나 만들었다.
그 비급을 받은 날, 세 사람은 모두 울음을 참지 못했다.
일위강은 그들을 만난 지 사 년 반째 되는 날 죽었다.
묘는 따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산 정상에서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신을 묻어 달라 하여 모든 준비를 마쳐 두었기 때문이다.
일위강이 죽고 사흘 뒤에 세 사람은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떠났다.
세 사람이 각각 마음에 품고 있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지금은 각자의 길에 정진해야 할 때.
하지만 삼 년 뒤에 다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 두었으니,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상해(上海)는 온갖 물류의 집합지이다.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배들이 들어오는 국제적인 항구였기에 명 제국 내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물품들도 손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기이한 복색을 한 사람이나, 코가 크고 피부색이 다른 서역인들도 꽤나 쉽게 볼 수 있다.
상해에는 남경으로 곧장 직행할 수 있는 대로가 만들어져 있으며, 그렇기에 이름있는 상회(商會)라면 반드시 상해에 하나쯤 거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상계(商界)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그중에서도 어느 상회가 상해에서 가장 입김이 센지 잘 알고 있었다.
대륙삼대상회 중 하나이며, 특히 온갖 물류를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상계의 거목.
백운상회(白雲商會).
푸른색 천에 흰색으로 백운(白雲)이라 쓰인 깃발은 명 제국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상해에는 그런 백운상회의 본관이 있다.
상해의 활발한 거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오층짜리 누각은, 주변의 사람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자 진정으로 상해를 지배하는 자가 누군지 상기시켜 주는 커다란 지침인 것이다.
백운상회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오인명(吳仁名)은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하게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가, 해가 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잠시 숨을 돌릴 만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일이 끝날 때쯤 상해 전체를 내리쬐는 노을의 따스한 빛을 보는 것이야말로 오인명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이다.
보통 이런 시간이 되면 상관(商館)을 찾는 손님은 없다.
그런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한 사람이 상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찢어지고 때가 탄 허름한 복색은 거지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얼굴은 젊었다. 이제 막 열대여섯 정도 되었을 소년의 얼굴이다.
복색은 누추한 데 비해 얼굴의 혈색이 좋고 건강한데다, 몸을 쓰는 일을 하는지 체구가 단단하고 늘씬해서 왠지 소년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하며 웃는 얼굴이 환한 태양처럼 빛난다.
문지기 오인명은 처음엔 소년을 경계했지만, 그 웃음을 보자 호감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이 소년은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미워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집을 나간 동생처럼도 느껴진다.
첫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것같이 친근했다.
“음, 무슨 일이니?”
소년은 구김살없는 얼굴로 밝게 말했다.
“상관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안에 유기준 상주님이 계신가요?”
“유기준 상주님?”
오인명은 깜짝 놀랐다. 유기준 상주는 최연소로 상주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오인명 같은 문지기로서는 함부로 말을 걸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물론 유기준은 격의가 없는 편이라 종종 그에게도 말을 걸지만, 직위가 직위인 탓에 오인명은 유기준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음, 무슨 일로 상주님을 뵈려는 거니?”
“아, 그게…… 뭐라고 해야 좋을까요?”
소년은 조금 고민하듯 손으로 이마를 툭툭, 두드리다가 품에서 비단 천으로 덮인 서찰을 꺼냈다.
오인명은 깜짝 놀랐다.
고위 간부들의 중요한 지령에만 쓰이는 것이 비단 서찰이다.
게다가 비단 서찰의 위에는 상주 급 이상만이 쓸 수 있는 밀랍 봉인이 되어 있었다.
“그, 그건……?”
오인명의 머릿속에서 문득, 일 년 전쯤부터 유기준이 문지기들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내용이 떠올랐다.
특정한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을 정중하게 자신에게 안내해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 무려 일 년이나 그런 사람이 안 오다 보니 잊고 있던 내용이다.
“하아, 곤란하네요, 정말. 아무리 약속을 했다지만 이름까지 바꾸라니. 그것도 하필 이런 이름으로…….”
소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결심했는지 오인명에게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기준 상주님께 안내해 주세요. 저는…….”
소년은 빙긋 웃었다.
“운남에서 온 상인, 유금도(劉金道)라고 합니다.”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