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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24화)
제8장 운남의 상인(商人)(4)


유기준은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나갔다.
풍서, 공보하, 을유랑은 일위강과 함께 남았다. 일위강이 지내고 있는 곳이 이곳 운남의 인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유기준은 떠나기 직전에 풍서에게 밀랍으로 봉인 된 비단 서찰을 넘겨주었는데, 그걸 넘겨주면서 그로서는 드물게 끈질기도록 끝까지 풍서의 다짐을 받았다.

“너! 내 제자 하는 거 맞지?”
“그럼요. 약속했잖아요.”
“그래. 그러면 스승으로서의 첫 번째 명령이다. 이 서찰은 하산해서 일위강과 헤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보지 마.”
“엇? 왜요? 그전에는 보면 안 돼요?”
“안 돼. 그전에 보면 나와의 관계는 끝인 줄 알아.”
“어, 어째서요?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에요?”
“음, 중요하다면 중요하지. 어쨌든! 하산하기 전까지는 네가 배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배울 것. 그리고 종종 사람을 통해 책을 보낼 테니 그것들을 빠짐없이 읽을 것. 명심해. 평소에 노력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거야.”
“으음,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내가 준 서찰에 있는 내용은,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따르겠다고 약속해.”
“…….”
“호오, 내 제자 안 하겠다, 이거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왠지 무지하게 불안해지는데요?!”
“걱정 마. 네가 할 수 있는 일만 적혀 있으니까.”
“으음…….”
“할 거야, 말 거야?”
“휴우, 할게요.”
“완성된 문장으로 맹세해. 상인은 두루뭉술하게 말해선 안 돼.”
“넵. 저는 사부님이 주신 서찰의 내용을 무조건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
“왜 그러세요?”
“큭, 사부님이란 말이 왠지 실감이 안 나서 말이야. 왠지 감동적이랄까…….”
“으윽, 됐으니까. 그만 가세요!”

풍서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었다.
사부와 제자가 되기로 한 지 단 하루밖에 안 되었었는데, 그 짧은 새에 상당히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격의가 없어지고 원래부터 한 가족이었던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난 후에 만나게 되더라도 아마 헤어질 때와 똑같은 감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풍서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

공보하와 을유랑은 일위강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반가워했다.
태극교의 일로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공보하는 처음 그 말을 전해 줬을 때, 범상치 않게 흥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엄청난 행운이다. 너희 모두 잊지 마.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유랑이는? 반대하지 않아?”
“난 강해질 거야. 강해져서 반드시 칠성태극교를 무너뜨리겠어.”
을유랑은 예전에 비해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혼자 있을 때면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주로 병법서나 전사(戰史)에 대한 책이었다.
공보하는 틈이 날 때마다 몸을 단련했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치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 전율마저 느끼게 했다.
풍서는 두 사람이 각자의 일에 집중할 때면 그 옆에서 물끄러미 그런 둘을 지켜보곤 했다. 때로는 을유랑과 함께 책을 읽었고, 때로는 공보하의 옆에서 몸을 단련했다. 풍서는 조금 쓸쓸했다. 왠지 하산한 뒤에는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위강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유기준을 통해 처음 정식으로 소개를 받을 때에도 짧게 ‘일위강이다’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그는 그 뒤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세 사람을 데리고 이름 모를 산의 정상에까지 올라갔다.
공보하를 제외한 풍서와 을유랑은 헉헉거리면서 거친 숨을 주체하지 못했다. 일위강의 속도는 빨랐다. 야생동물만큼이나 몸이 가벼우면서도 세 사람이 그를 놓치지 않게끔 중간 중간에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그 때문에 풍서와 을유랑은 도리어 더욱 지쳐 버렸다. 쉴 시간이 잠시도 없던 탓이다. 심지어 매일 자신을 단련하고 있던 공보하조차 따라가는 것만도 벅찰 정도였다.
“여기에 이런 집이……!”
정상에 오른 세 사람은 의외로 꽤나 큰 집이 지어져 있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대체 이런 곳에 누가 집을 지은 걸까.
방만 해도 일고여덟 개는 될 법한 집이 산 정상에 지어져 있었다.
그냥 오르기도 힘든 산에 집을 짓기 위한 자재들은 어떻게 옮겼을지 신기하기만 했다.
“너희들을 제자로 받진 않겠다.”
일위강은 창백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공은 가르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럴 만한 상황도, 환경도 안 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가장 잘 맞는 무공으로 일부만 전수할 것이다. 정확히 오 년…… 아니, 사 년 정도다. 난 그 시간 동안만 너희를 가르친다.”
세 사람은 조금 당황한 채 서로를 바라봤다.
솔직히,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위강의 말투가 너무나 단호해서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히 너희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무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난 모든 문호를 개방할 거다. 너희의 재능이 허락하는 만큼만 배워 가도록.”
“아……!”
“구배지례도 받지 않는다. 너희들끼리 사형제의 예는…… 알아서 하도록 해라. 앞으로 함께 힘든 생활을 해 나갈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규율이 있는 것도 좋겠지.”
침묵이 흐른다.
일위강이 한 말은 세 사람에게 있어 너무나 의외였지만, 일위강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왠지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일위강은 어딘가 세속적으로 초탈한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언제든 하늘로 훌쩍 올라가 버릴 도인처럼.
그래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꺼려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그때, 공보하가 나섰다.
“사제지간의 연을 맺지 않는다면…… 어째서 무공을 가르치시는 겁니까? 저희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겁니까?”
일위강은 차분한 눈빛으로 공보하를 응시했다.
“과연, 차분하고 명확한 눈을 가졌구나. 네 말대로 너희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그 때문에 나는 기준이 제안한 것을 받아들였지.”
“그건…… 혹시 사문의 복수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공보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무엇입니까?”
“너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구나. 설명할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네가 설명해 주도록.”
“…….”
“너희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은 나중에 말해 주겠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복수 같은 하찮은 일에 너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럴 거였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끝냈겠지.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먼 훗날까지 전해지는, 그런 의미있는 일이다.”
그 말을 하는 일위강의 눈빛은 여러 가지 격정이 뒤섞여 있었다.
공보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모든 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이상 묻는 것도 실례일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야기가 끝났으면 곧바로 시작하지. 저기 가장 왼쪽 방부터 세 개가 너희가 앞으로 지낼 곳이다. 가지고 온 짐이 있다면 방에 두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마보(馬步)와 연신법(硏身法)으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 미리 말해 두겠다. 수련은 많이 힘들 거다. 하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끝까지 따라만 온다면 상대가 누구든 결코 쉽게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
이제 진짜로 무공을 배운다.
풍서와 을유랑은 들떠서 곧바로 달려가려 했으나, 공보하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말렸다.
“잠깐,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싶습니다.”
“좋다. 말해라.”
“구배지례는 원치 않으신다니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루를 배우더라도 스승은 스승입니다. 사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안 되겠습니까?”
풍서와 을유랑은 공보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공보하는 뜨겁고 강한 눈빛으로 일위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과연. 그것도 그렇군.”
일위강은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를 사부라 부르거라.”
“예! 사부님!”
공보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치며 포권을 취한다.
항상 공보하는 이랬다.
불과 삼 년밖에 나이 차가 안 나지만 언제나 듬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부님!”
풍서와 을유랑도 공보하를 따라 포권을 취했다.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엔 계속해서 무표정했던 일위강도 조금이나마 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수련은 정말로 힘들었다.
일위강은 결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첫날 무릎을 굽히고 허리는 곧게 세운 채 양손은 앞으로 쭉 뻗는 마보 자세를 두 시진이나 계속했다.
두 시진.
말이 쉽지, 두 시진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든 법이다.
그런데 마보를 취하고 두 시진을 지속했다. 그것도 쉬는 시간을 조금도 주지 않고!
중간 중간에 풍서와 을유랑은 몇 번이나 다리가 풀려서 넘어졌다. 허벅지가 불이 난 것처럼 아파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두 사람은 그때마다 일위강에게 호된 질책을 받으며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무공은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것처럼 배우기만 했다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장풍을 쏠 수 있는 게 아니다. 강인한 기초 체력이 있고, 매일같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만 진정한 무인이 되는 법이다. 일어나라! 움직여! 조금이라도 시간과 몸을 낭비하지 마라!”
언성을 높이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일위강의 목소리는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풍서와 을유랑은 마지막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끝까지 마보를 취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마지막엔 내가 마보를 하고 있는 건지, 마보 자세가 나를 잡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사 년이라는 시간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다 보면 눈 깜빡할 새에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
공보하는 역시나 발군의 무재(武才)를 선보였다. 일위강이 뭔가를 가르치면 공보하는 그것을 잠도 별로 자지 않고 불과 십 일 안에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마치 무공에 미쳐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는 일위강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재의 특징은 연습을 연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그런 면에 있어서 공보하는 천재다.”
일위강은 서슴없이 공보하를 천재라고 불렀다.
“다만 외공에 집착하여 내공이 좀 부실하다는 약점이 있는데, 그건 시간이 지나가면 나아질 거다. 자신의 약점을 모를 녀석이 아니니까. 그 약점을 극복하기만 하면 전혀 새로운 무공의 형태를 보여 줄 수도 있을 거다.”
일위강의 말대로, 공보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풍서는 공보하가 급격하게 강해지는 모습이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한편, 을유랑은 공보하와는 정반대였다.
사부인 일위강이 시키는 기본 수련을 제외하곤, 혼자서 하는 개인 수련을 일절 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가부좌를 틀고 열양공(熱陽功)과 현천진기(玄天振氣)를 운용하며 내공을 다졌다.
틈만 나면 진기를 도인했고, 머릿속으로는 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를 만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침식을 잊고 몸을 움직이는 공보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을유랑도 빠른 속도로 강해졌다.
일위강이 지도하는 수련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가끔 을유랑의 움직임 후에 뭔가 울렁거리는 기파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위강은 공보하처럼 눈에 띄게 강해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조금씩, 어느 순간 문득 을유랑을 보면 몰라보게 강해져 있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을유랑은 유운신법(柳雲身法)과 회풍무류사십팔검(廻風無流四十八劍)이 잘 맞을 거다. 그 아이는 자신만의 무공관을 갖고 있으니 딱히 지도할 게 없어. 무공에 대한 이해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다. 깊은 내공과 깨달음으로 조만간 자신만의 틀을 완성할 거다.”
명문세가의 피를 이었고 뛰어난 기재로 손꼽히던 을유랑다운 평가였다.
그렇게 을유랑 역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풍서는 두 사람의 강해지는 모습이 마치 자기가 강해지는 것처럼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