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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23화)
제8장 운남의 상인(商人)(3)
유기준은 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일까.
아까는 분명 풍서의 재능이 쓸모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또 굉장히 귀중한 재능처럼 이야기하지 않는가.
‘뭔가 속뜻이 있을 것 같은데…….’
골똘히 생각해 봐도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럼 왜 저를 제자로 삼으시려는 거예요?”
“네 재능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지.”
“사, 사로잡아요?”
“아,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려나? 음, 그럼 다시 말하지. 너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야. 제자로서 함께해도 좋을 것 같은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거든. 참고로, 나는 의외로 속이 냉정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기는 쉽지 않아.”
“아, 가, 감사합니다.”
풍서는 얼굴이 붉어진 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칭찬을 받은 것 같긴 한데, 왠지 부끄러웠다.
“내 말을 이해했어?”
“네? 아, 네.”
“이해 못한 것 같은데……. 거짓말하면 혼난다, 이 녀석!”
유기준이 빙긋 웃으면서 풍서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으왓!”
“이 녀석, 이 녀석.”
“자, 잠깐만요.”
버둥거리는 풍서였지만, 유기준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머리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삐쭉삐쭉하게 변해 버렸다.
“으으…….”
유기준은 얼얼한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는 풍서를 보며 부드러운 눈빛이 되었다.
‘아…….’
풍서는 그 눈빛에서 아버지와 같은, 형과도 같은, 그런 가족의 정을 느꼈다.
“네 재능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고작 동전 세 문짜리가 될 수도 있고, 나라를 움직일 만한 인맥을 가진 대상(大商)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그건 네가 앞으로 얼마나 좋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될 거야.”
“나라를 움직이다니…… 저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응? 그건 왜 그렇지?”
“과욕은 금물이에요. 정도 이상의 것을 담으면 넘치는 법이라구요. 돈이 많으면 뭐 해요? 길바닥에 황금을 깔고 다니면서 살아 봤자 전혀 즐겁지 않아요.”
“뭐? 길바닥에 황금?”
“돈을 침상으로 만들어서 그 위에 자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하하, 맞다, 맞아! 그걸 벌써 알다니, 나보다 이십 년은 빠르구나.”
유기준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겉보기엔 아직 이십대 같은데, 이십 년 운운 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듯했다.
“풍서야.”
“네?”
“상인은 돈을 쫓는 직업이다. 그리고 돈을 쫓다 보면…… 때때로 마치 귀신에 씌인 것처럼 맹목적으로 변할 때가 많아. 상인들 사이에서 가장 드문 게 뭔지 아니?”
“모르…… 겠어요.”
“인정(人情)이란다.”
유기준은 웃으면서 풍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남에게 베풀 여유가 있다면 동전 한 푼의 이득을 더 올려라. 이런 게 상인들의 금언(金言)으로 취급되고 있어.”
“아, 그건…… 너무, 차갑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상인이 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만약 상인이 된다면 항상 인정을 지키는 상인이 되도록 해.”
“상인들은…… 보통 인정이 없어요?”
“대게 그렇지.”
“……그치만 아저씨는 인정이 있는 상인이죠?”
“나? 글쎄, 어떨까?”
유기준이 먼 하늘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나도 최근에는 조금 인정이 마모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어. 뭘 봐도 새롭지가 않고……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런 거겠지.”
“젊은 분이 그런 말 하면 어르신들한테 혼나요.”
“하하, 그 말을 너한테 들으니 신선하구나.”
유기준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한 번 풍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유기준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풍서는 어쩐지 유기준의 눈이 조금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응?”
풍서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 따라갈게요.”
“어디를?”
“지금부터 아저씨의 제자가 돼서 따라갈게요.”
유기준이 굳었다. 그는 놀란 듯 눈을 끔뻑이며 풍서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따라오지 마.”
“에?!”
“누가 따라오래? 넌 그냥 여기에 있어.”
“에에?!”
풍서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아까는 제자로 삼겠다면서요?!”
“응. 너 제자로 삼고 싶어.”
“그런데요? 왜 따라가면 안 되는데요?”
“난 지금 할 일이 많아서 바쁘거든.”
풍서는 당황했다.
바쁘다니.
그럼 제자가 되라는 건 그냥 해 본 소리였단 말인가? 바쁘니까 실제로 제자 삼아 가르칠 시간은 없고?
놀라서 쳐다보았지만 유기준은 태연자약, 평소처럼 나른한 얼굴로 풍서를 내려다보았다.
“그 말은……?”
“너, 내 제자 해. 다만 몇 년 뒤에.”
“으윽?”
“사람은 나이에 따라 배워야 할 게 있는 거야. 때를 놓치면 배워도 소용이 없거나 큰 기회를 놓치게 돼.”
“에? 그럼 더더욱 아저씨한테 상술에 대해 배워야죠?”
“열 살짜리가 상술 배워서 뭐 하게? 그리고 전에 나한테 맛있는 밥집 알려 줄 때 보니까 넌 상술은 타고났더라. 안 배워도 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리가 없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래.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알겠냐?”
“으윽…….”
“납득 못하는 얼굴이구만. 날 스승으로 모실 생각이면 내 말을 좀 믿어라, 이 녀석아.”
풍서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아니면?”
“기껏 아저씨랑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떨어진다고 하니까 섭섭해서 그래요.”
“…….”
풍서가 왜 대답이 없나 싶어서 고개를 들자, 유기준이 입을 쩍 벌린 채 있는 그대로 경악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 정말…… 귀여운 녀석이구나.”
“으악?! 귀엽다뇨? 다 큰 남자한테!”
“다 크긴. 하하, 너 내 제자 하는 거다. 이미 약속했으니 무르기 없어!”
“으윽, 갑자기 무르고 싶어지는데요.”
“무르기 없다니까. 이 녀석, 이 녀석.”
“으아악―!”
풍서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져야만 했다.
풍서가 녹초가 돼서 축 늘어질 때쯤, 유기준은 툭 던지듯이 말을 내뱉었다.
“잘 들어. 차분한 친구랑 똘똘한 친구랑 같이 일위강한테 무공을 배우고 있어. 이미 이야기는 다 끝냈으니 걱정 말고. 나랑 만나는 건…… 그래, 사 년. 사 년쯤 뒤다.”
풍서가 순간적으로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일위강이면…… 그, 그 친구분이요?!”
“그래, 그 친구.”
“배, 배울 수 있어요? 그 무공을?”
풍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풍서도 열 살짜리 사내아이다.
무시무시한 태극교 무인들을 픽픽 쓰러뜨리던 그 무공을 배운다니, 그 이상 가슴이 떨릴 수가 없다.
유기준에겐 미안한 이야기인지 몰라도, 일위강에게 무공을 배운다는 이야기는 유기준이 제자로 삼겠다고 했던 것만큼이나 흥미로웠다.
“특별한 기회야. 지금을 놓치면 평생 다시 얻을 수 없는 기회지.”
풍서는 조금 의아해졌다.
좋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 말을 하는 유기준의 눈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일까.
“원래는 대단한 문파의 무공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위강도 아무한테나 가르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럼 어째서 저희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다.”
유기준의 눈빛이 조금 더 슬퍼진 것 같았다.
풍서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어? 그러고 보니 아저씨도 일위강이라는 분과 같은 무공을 쓰지 않았어요?”
“호오, 그걸 알아봤어? 눈썰미가 제법 좋구나.”
“에, 뭐…….”
풍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특별한 기회를 얻었거든. 이런 일은 정말로 드무니까 제대로 배워 두도록 해. 상인이 되더라도 무공은 꼭 필요하지. 상행을 하다가 위험을 만났을 때 대처하기도 좋고, 거친 행상길을 가려면 체력도 많이 필요하고.”
“아, 그렇겠네요.”
“열심히 배워. 네가 배워서 훔칠 수 있는 건 다 배워야 돼. 공짜와 저렴한 물건은 물불을 안 가린다. 그게 상인의 자세야.”
“하하, 무공을 익힐 때도 상인으로서 익히는 거예요?”
“그럼! 그런 철학이 없으면 제대로 된 상인이 못 되는 법이다.”
풍서와 유기준은 천천히 걸어가며 그렇게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크게 의미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풍서야.”
“네?”
“내 제자가 되어 줘서 고맙다. 몇 년 후에 꼭 다시 보자.”
풍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정중한 예를 올렸다.
양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혀 포권을 취하는 것이다.
풍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려요, 사부.”
유기준은 다시 한 번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었고, 풍서는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피하고 쫓고, 웃고 떠들고.
그렇게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서 다시금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