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유정상회 1권(22화)
제8장 운남의 상인(商人)(2)


상인…….
되보고 싶고, 흥미도 있다.
하지만 유기준의 제자가 된다면 함께 떠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되면 공보하나 을유랑과는 헤어져야 할 텐데. 굳이 지금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지도 고민이 된다.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소? 운남에서 유명한 보이차가 좋으십니까?”
“아뇨,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딸린 식구가 많아서 말입니다. 용건부터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흐음, 그건 그렇겠군요.”
금 점주는 유기준과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금 점주는 유기준의 말대로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가타부타 묻지 않고 품 안에서 주판과 손바닥만 한 닥종이들을 하나로 묶어 둔 종이첩(牒)을 꺼내 들었다.
“풍서야.”
“네?”
“잘 봐 둬라. 주판과 종이첩. 저 두 개가 상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도구야.”
“아, 네…….”
풍서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두 가지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사이, 유기준도 품 안에서 종이첩을 꺼내 들었다.
‘어? 왜 아저씨는 주판을 쓰지 않는 걸까?’
상인의 기본 도구라고 하면서 왜 자신은 꺼내지 않는 건지 풍서는 궁금해졌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인지 유기준이 빙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난 주판이 필요없거든.”
“네? 왜요?”
이번엔 금 전주가 웃으며 말해 주었다.
“허허, 여기 계신 유 상주는 계산이 빠르기로 유명하단다. 아마 만 단위가 넘는 것도 척척 계산한다지요?”
“만 단위?!”
풍서는 깜짝 놀라 유기준을 쳐다봤다. 유기준은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었다.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입니다.”
“허허, 그것참 부럽소. 나는 나이가 들수록 주판을 써도 종종 틀려서 말입니다.”
“계산이 중요한 게 아니지요. 중요한 건 사람을 대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건 그렇소.”
딱, 그만큼 서로 이야기를 나눈 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아, 분위기가 변했어.’
차분하고 차갑다.
마치 전장의 맨 앞줄에 서 있는 첨병들이 적군에게 창으로 겨누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유 상주, 이주를 원할 거라 생각되는데, 맞소?”
“그렇습니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상회의 이익은?”
“없습니다.”
금 점주와 유기준은 서로를 지그시 응시했다.
“상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오. 상회에 이익이 없는 자선사업 제안을 본관에 올렸다간, 내 평판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오만.”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돈의 이익만이 상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흑임촌에서 빠져나온 이백팔십여 명의 사람들을 상회의 사람으로 끌어안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될 것입니다.”
“장기적이라니, 그건 너무 막연한 것 아니오? 좀 더 현실적인 계산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제가 계산을 하길 원하십니까?”
“물론이오.”
“금 점주님, 운남의 지점장 이상의 자리로 오르려면 때로는 모험을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역대 최연소 상주다운 고마운 충고이오만, 나도 상인으로서 사십 년간 살아온 사람이니 그 충고는 마음만 받겠소.”
두 사람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설전을 벌였다.
그 모습에 풍서의 통통한 볼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 살벌하다.’
방금 전까지 서로 덕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원하시니 계산을 해 보지요. 운남의 이갑이 엉망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백운상회가 소유한 사유지(私有地)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거기까지의 이동 비용, 식비, 초반 정착에 드는 비용을 합하면 일인당 은자 다섯 냥은 든다고 봐야 할 겁니다.”
금 점주의 안색이 바뀌었다.
“사유지라니, 사람을 함부로 이주시켰다가 관에서 시비라도 걸면 어쩌려고……!”
“운남 포정사사인 왕 대인과 친분이 있습니다. 삼백 명도 안 되는 인원 정도는 이주시켜 주실 겁니다.”
“과연…….”
포정사사의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자 금 점주는 감탄했다.
“백운상회에서 가장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더니, 명불허전이오.”
“그건 과장된 소문입니다.”
“흐음, 아닌 것 같소만. 뭐, 좋소. 그럼 거주하는 부분은 그렇게 처리한다고 치고, 생활비는 어떻게 할 것이오? 한 사람당 은자 다섯 냥씩. 인원수가 이백팔십이니까…….”
금 점주가 주판을 튕기려는 찰나에 유기준이 먼저 대답했다.
“천사백 냥입니다.”
“으음, 역시 계산이 빠르시군.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잖소. 농사일을 한다고 치면 다음 수확이 있을 때까지 빠르면 일 년, 늦으면 이 년은 더 지원을 해 줘야 할 것 같소만.”
“물론 그렇습니다만, 첫 일 년만 지원을 하면 됩니다. 거주하는 곳이 해결된다면 한 달에 은자 한 냥이면 충분할 것이고, 나머지는 백운상회에서 일거리를 주고 그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는 걸로 처리하면 됩니다.”
“일거리라…… 그럼, 농업이 아니라 수공업 쪽으로 하는 게 좋겠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생산과 유통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면 상회에 이득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럼 최종 금액은…… 천사백 냥에, 한 달에 한 냥씩 이백팔십 명. 거기에 열두 달이니까…….”
“삼천삼백육십 냥. 천사백 냥을 더하면 사천칠백육십 냥이 됩니다.”
금 점주는 주판을 튕기려다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뗐다.
“검산해 보지 않으십니까?”
“됐소.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맞을 것 같습니다.”
금 점주는 세필 붓을 들고 종이첩에 사천칠백육십 냥이라 적었다.
“그럼 총 지원금은 사천칠백육십 냥. 그 이백팔십명이 상회에 가져다줄 이득은…….”
“그중 체력이 좋고 건장한 사내가 백이십 명가량,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이 오십 명가량, 손재주 좋은 여인이 백이십 명가량입니다.”
“과연. 그 정도면 한 해에 은자 칠백 냥은 족히 이득을 볼 수 있겠소.”
“육 년이 지난 후부터는 이득으로 돌아서는 겁니다. 앞으로도 쭉. 어쩌면 마을이 발전하면 노동력이 더 커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한 해에 칠백 냥씩.
육 년이면 사천이백 냥이니, 초반에 들어간 지원금을 거의 다 회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의외로 더 빨리 원금이 회수될 수도 있다.
원금이 회수된다는 것은, 초반에 생긴 빚을 다 갚았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그다음부터는 오로지 이득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득이 더욱 커지는 긍정적인 동향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알겠소.”
금 점주는 계산을 다 마친 뒤, 흡족한 얼굴로 손을 모았다.
“유 상주님의 말을 따르겠소. 본관에는 최선을 다해 설득을 해 볼 것이오.”
“감사합니다.”
포권을 취하는 건, 상인들 사이에선 서로 계약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기준도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사실 금 점주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백운상회 본관에 막상 기획안을 제출하면 거부당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상주인 유기준이 기획한데다, 인망이 두터운 금 점주가 사람들을 직접 관리를 하겠다고 하였으니, 본관 쪽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인 것이다.
“좋은 거래였소, 유 상주.”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 점주님.”
유기준은 그 길로 상점을 빠져나왔다. 뒤따르는 풍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붙잡고 어안이 벙벙한 채 따라나왔다.

서로 간의 만족스러운 거래를 끝내고 나오는 길. 흑임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걸어가며 유기준이 물었다.
“어땠니?”
“아, 저기…… 대단했어요.”
풍서는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상인은 그저 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거기서 돈을 남기는 직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풍서가 경험한 상담(商談)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한 마을 사람들의 터전, 일, 삶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한 마디로 규모가 다른 대화였다.
그건 흡사…… 장사라기보단 정치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풍서는 중간부터 얼이 빠져 버렸다.
너무나 큰 규모의 이야기.
상인은 단지 돈과 물품만 갖고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엔 돈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담겨 있다.
돈이란 굉장하다.
돈이 많이 있다면, 땅을 사고, 그곳에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준 뒤, 생산되는 물품을 유통시켜 판매한다.
그런 ‘장사’도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
풍서는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만약, 풍서가 유기준의 제자가 된다면…….
그리고 잘 배우고 성장해서 어엿한 상인이 된다면, 그때는 풍서도 수백 명의 목숨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질 수 있게 될까?
“아저씨.”
“응? 왜 그러니?”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
유기준은 유유자적하게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상인으로서의 재능?”
“네.”
“없어.”
“……!!”
유기준은 딱 잘라 대답했다. 솔직히 ‘재능이 있다’고 할 줄 알았던 풍서는 충격에 휩싸였다.
“으앗! 그럼 왜 저를 제자로 받으려고 하신 거예요?!”
“아까 말하지 않았냐? 넌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는 것을 타고났다고.”
“그, 그건 들었지만……. 아니, 그러면 그건 상인의 재능이 아닌 거예요?”
“재능이라면 재능이긴 한데. 예를 하나 들어 볼까? 네가 지금 소면 한 그릇을 먹고 싶다고 해 보자. 근데 네가 살고 있는 마을엔 소면을 파는 객잔이 두 개 있는 거야. 맛과 질은 똑같아. 그런데 가격이 한 곳은 동전 열 문이고, 다른 한 곳은 동전 스무 문이야. 그럼 어디로 갈래?”
“네? 그야 당연히 열 문에 파는 곳으로 가겠죠.”
“그렇지? 그럼 이렇게 해 보자. 동전 열 문에 소면을 파는 집은 종업원이나 점주가 너무 무뚝뚝해. 뭘 물어봐도 대꾸도 하지 않고, 주문하면 음식만 갖다주고 끝이야. 심지어는 식사를 끝낸 후에 물 한 잔도 주지 않아.”
“아, 그럼 별로 가고 싶지 않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말이지, 동전 스무 문에 소면을 파는 집은 점주나 종업원이나 너무 친절한 거야. 인상도 좋고, 항상 대우를 잘해 줘서 다녀오면 기분이 좋아.”
“아…….”
“그럼 너는 어디로 갈래?”
“으음…….”
풍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동전 열 문은 적지 않으니까요. 배가 고프고 소면이 먹고 싶다면 좀 불친절해도 열 문짜리 가게로 갈 거예요.”
“그래. 아마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일 거야.”
“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 같아요.”
“자, 그럼 조건을 조금 바꿔 보자. 종업원과 점주가 친절한 가게에서 파는 소면이 동전 열세 문이라면?”
“아…….”
“어디로 갈래?”
이번엔 좀 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 본다.
동전 열세 문에 친절하고 물도 주는 집.
동전 열 문에 불친절하고 물도 주지 않는 집.
‘동전 세 문이면 고작해야 당과 한 개를 사 먹을 돈. 그 정도라면…….’
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열세 문짜리 집으로 갈 것 같아요.”
“그래. 그렇지?”
유기준은 웃고 있었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풍서를 바라봤다.
“동전 세 문. 그게 친절에 대해 네가 매기는 값인 거야.”
“아…….”
“아마 동전이 다섯 문만 차이 나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었겠지?”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즉, 네 재능은 한 사람당 동전 세 개만큼의 가치를 가진다는 거야. 물론, 소수의 부자들은 친절함에 대한 가치로 은자 몇 십 냥씩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가게를 기준으로 하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지.”
풍서는 시무룩해졌다.
“그럼…… 제 재능은 별 가치가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네?”
“아까 말하지 않았나? 부자들은 너의 친절함에 대해 은자 몇 십 냥씩도 내놓을 수 있다고. 그리고 상대방에게 호의를 얻는 재능은 사람들과의 관계, 즉 인맥을 쌓는 것에 큰 도움을 주지. 그건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만큼 귀중한 거야.”
풍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