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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21화)
제7장 섬광의 무사(武士)(3)
푸화악―!
“……!!”
시작은 태극교 무인들의 뒤쪽에서부터였다.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체형은 호리호리했다. 팔다리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길어서, 가만히 서 있어도 이상하게 시선이 향하게 된다.
얼굴은 창백했고 양쪽 볼이 상당히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는데, 무심한 듯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뒤쪽에 있던 태극교 무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쓰러졌다.
그 근처에 있던 무인들도 미처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마치 갑자기 잠에 취해서 쓰러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게…… 뭐야?”
“무슨……?”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그를 향한다.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평범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태극교 무인들이 덤벼들 때조차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가끔 무심하게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근처에 있던 태극교 무인들은 잠이 든 것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격이 다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검의 궤적을 보기는커녕, 대체 어떻게 공격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새하얀 섬광이 무인들을 쓰러뜨린다.
태극교 무인들은 그제야 겁을 먹은 듯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으나 그런 그들도 섬광에 당해 무참하게 쓰러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 있던 단 한 명만을 남겨 둔 채 모든 태극교의 무인들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하, 역시 와 줬구나!”
유기준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서 유기준을 바라봤다.
이 괴물 같은 사내를 부른 것이 유기준이었단 말인가.
‘아, 그때…….’
풍서는 유기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차선책.
길이 가로막혀서 대리백족에 도움을 청하지는 못했지만, 차선책으로 연락을 취했다고 말했다.
‘저 사람이 차선책이구나…….’
풍서는 다시 한 번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너…….”
한편,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그런 유기준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넌 언제나 날 귀찮게 하는구나.”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상인을 친구로 사귀는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 덕분에 마을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어.”
“…….”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잠시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여전히 대단한 솜씨네. 죽인 건 아니지?”
“서찰에 죽이지 말아 달라고 했잖나.”
“그래도 숫자가 많으니까 몇 명은 죽을까 봐 조마조마했어.”
유기준은 격의없이 웃다가 이내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와 포옹을 했다.
“친구, 무사해서 다행이다.”
“…….”
그 말을 한 건 유기준이었다.
그 순간, 풍서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새하얀 사내에게 왜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묻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기준은 친구라는 사내와 인사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멀쩡하게 서 있는 태극교의 무인에게 소리쳤다.
“이봐, 상황은 다 봤지?”
“…….”
“너희들 중에 아무도 죽지 않았어! 단지 기절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태극교 무인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에게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유기준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기준의 옆에 서 있는 새하얀 옷을 입은 사내를 바라봤다.
“우린 떠날 거야. 이 마을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살 거다. 지금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계속 따라온다면 죽는 사람도 나올 거다. 너희 책임자에게 분명히 말해 둬.”
“…….”
태극교 무인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걸음을 옮기더니, 길목의 옆으로 비켜섰다.
마치 사람들에게 길을 터 준 것처럼 말이다.
“아…….”
“끝난 거야……?”
마을 사람들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자, 여러분. 가시죠! 여기 이 ‘섬광(閃光)’이 우리를 지켜 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기준은 넉살 좋게 웃으며 옆에 서 있는 친구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유기준의 친구는 ‘섬광’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잠시 유기준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려 버렸다.
“다행이다…….”
“우린 떠날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짐을 다시 등에 짊어졌다.
아이들이 울었다.
부인들은 무사히 서 있는 남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들은 이제야 무사히 태극교의 마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태극교는 그들을 죽이지 못했다.
살아남은 것이다.
제8장 운남의 상인(商人)(1)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공보하의 부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풍서를 지켜 주면서 어깨에 부상을 당한데다 그 뒤에 곧바로 태극교의 무인들과 싸우면서 무리를 한 탓에 자칫 운이 나빴다간 오른팔을 영영 못 쓸 수도 있었다고 했다.
풍서는 그 일에 대해 미안해했으나 공보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일위강(一衛强).
유기준이 부른, 흰옷을 입은 사람의 이름이다.
풍서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단지 강해 보이는 이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공보하의 반응은 남달랐다.
공보하는 그 이름을 듣자 무표정했던 얼굴을 붉힐 만큼 흥분하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몇 년 전, 사천 땅에 섬광검(閃光劍)이라 불린 젊은 검사가 있었다고 했다. 우수로 내찌르는 섬격(閃擊)은 일품이고, 해를 쏘아 맞출 수 있다는 사일검법(射日劍法)은 사천 땅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절공이라고 했다.
섬광검의 행적에 따라 쓰러져 간 무인들의 숫자만 해도 수백.
그 이름은 사천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며, 가장 젊은 나이에 무림십대고수의 자리에 오를 재원으로 주목받았다고 했다.
다만, 삼 년 전에 일위강이 속해 있던 문파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당하는 바람에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다들 섬광검은 그 후에 복수를 하다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공보하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풍서의 입장에선 공보하가 무림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지만.
어쨌든, 그 날 이후로 공보하는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공보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유기준이나 일위강이 있었다.
“풍서야. 잠깐 나 좀 보자.”
대리백족의 마을에서 유기준은 풍서를 불렀다. 언제나처럼 느긋하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풍서는 유기준이 겉모습처럼 만사를 귀찮아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는……?”
“내가 소속된 백운상회의 지부란다.”
대리백족의 도시에 있는 꽤 큰 목조 건물의 앞에서 유기준은 그렇게 말했다.
“어? 백운상회에 소속되어 계셨어요?”
“몰랐니? 강 점주님이랑 항상 같이 다니니까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행상이라고 하셔서 딱히 소속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그랬구나.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큰 상회에 소속된 행상들도 굉장히 많아.”
유기준은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시동(侍童)에게 점주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
유기준의 얼굴을 아는 것인지, 시동은 그 이상 묻지도 않고 곧장 안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아저씨, 그런데 저를 왜 데려오신 거예요?”
“흐음, 그건 말이지.”
유기준은 웃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다?”
“네……?”
“나도 잘 모르겠어.”
“에……?”
“뭐, 그냥 좀 보여 주고 싶었달까.”
풍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보여 주고 싶으셨는데요?”
“그냥 이것저것.”
풍서는 왠지 유기준이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해져서 다시 한 번 물으려고 했지만, 안쪽으로 들어간 시동이 점주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조금 빨랐다.
“아니, 유 상주 아니시오?”
인사를 하며 나온 사람은 살집이 좀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인심이 많아 보이는 좋은 인상이다.
“금 점주님, 생각보다 금방 다시 뵙게 되었군요.”
“그러게 말이오. 허허, 이럴 게 아니라 들어오십시오. 소아(小兒)야, 가서 차를 좀 끓여 오너라.”
금 점주는 유기준을 안쪽의 방으로 안내하면서 풍서를 쳐다봤다.
“이 똘망똘망한 아이는 누굽니까?”
“흑임촌에서 만난 아이입니다.”
“흐음, 시동으로 삼으시려고 하십니까?”
“아뇨, 저 아이가 관심만 있다면 제자로 받을까 합니다.”
“예?”
금 점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
하지만 정작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풍서다.
“저, 저를 제자로요?”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 네게 관심만 있다면 말이지만.”
“그, 그게…….”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아직 결정할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풍서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금 점주라는 사람이 풍서를 지그시 응시한다. 풍서는 난감하게 웃다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붙임성이 있는 아이군요.”
금 점주는 풍서가 마음에 든 듯 밝게 웃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삽니다.”
“호오, 그건 참 좋은 재능입니다. 그래서 키워 보실 마음을……?”
“아직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이런, 귀하신 몸이군요. 천하의 유 상주가 제자로 삼겠다는데 고민을 하다니.”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의외로 어려운 녀석이에요.”
유기준이 풍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풍서는 난감한 심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풍서가 아무런 말도 안 해도 대화는 저절로 진행되고 있었다.
‘저, 정신이 없어.’
대체 언제부터 풍서가 유기준의 제자 후보가 된 것인지.
아니, 아예 권유조차 처음 받는 것이기에 풍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