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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chapter 2. 아내가 변했어요


아버지인 윤 회장에게서 그의 결혼 상대가 장한그룹 한 회장의 딸로 낙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필이면 한서인인가―라는 생각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딱히 결혼하려는 여자도 없었고, 자신의 감정보다는 회사의 안위가 훨씬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그는 윤 회장의 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가 평소 만나던 여자들과는 달랐다. 오히려 그의 취향과는 정반대의 인물. 연애를 한다면 아마도 상대도 하지 않았을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연애와 결혼은 철저하게 다르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좋은 여자라고 했으니, 좋은 아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쁘면 좋기는 하지만 못생겼다고 딱히 싫지도 않았다. 윤태주에게 중요한 것은 한서인의 배경이었다.
윤태주와 한서인.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리고 태주와 서인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참 안 어울리는 한 쌍은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을 수가 있었다.
필요에 의한 결혼.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정의내릴 수 있었다.
‘같이 살다 보면 점점 정도 들고 하겠지.’
그때의 태주는 이 결혼을 사업의 일환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윤태주는 한서인이란 여자의 존재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자신이 서인을 ‘받아들이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서인이 그를 ‘싫어할’ 것이라곤 여기지 않은 것이 그의 오산일지도.
‘이혼해요.’
사건은 그들이 결혼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일어났다.
초청받은 사교모임에 다녀오는 도중 찍혀 버린 사진이 그다음 날 인터넷 뉴스에 떴다. 많은 가십거리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 중 하나인 윤태주의 비밀스러운 ‘아내’는 그렇게 세상에 드러났고, 서인은 그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해서 2주 전부터 그에게 줄기차게 이혼을 주장하고 있는 건지도.
‘미치겠군, 진짜.’
남들은 신혼이라며 부러워할 시기에, 태주의 아내 되는 서인은 그에게 이혼을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엔 참고만 지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속이 쓰렸다. 그래서 태주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제도 퇴근한 그는 자신에게 어김없이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서인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두 사람이 이혼을 하게 된다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닌 서인이었다. 만약 그녀를 사랑해 주는 다른 남자가 있었더라면 회사가 안정을 찾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혼을 해 줄 수도 있으련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서인의 아버지인 한 회장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지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무작정 저와의 이혼을 주장하는 서인이 걱정됐다.
태주는 단호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태주 씨! 내 말 좀 들어요!’
같은 지붕 아래 산 지 1년 만에 서인이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제나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하던 그녀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태주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서인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는 태주에게 말했다.
‘더 이상은…… 못 해요. 한계예요.’
‘한서인.’
‘지난 일 년 동안 ML도 정상 궤도에 올라섰잖아요. 목적은 이뤘으니 다 된 거 아닌가요?’
‘뭐?’
‘더 길어지기 전에 이혼해요. 그래야 태주 씨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한서인!’
‘태주 씨.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
‘날, 놓아줄 순 없나요?’
그녀의 촉촉한 눈가가 신경이 쓰였지만 태주는 매정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이랑 이혼할 생각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 따윈 꺼내지 마.’
‘태주 씨!’
‘얘긴 끝났어.’
비틀거리는 서인의 처절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모진 말을 내뱉어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서인이 엄청난 고심을 하며 꺼낸 말임이 틀림없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버린 것이 심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서…….
“후우.”
망설이고 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이 집 안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 꺼려진다. 태주는 차고에 차를 대고 커다란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보면 또다시 이혼을 하자며 달려들 것 같은 서인을 떠올리니 두통이 일어났다.
매일 그녀의 전화를 무의식적으로 피하며 그녀가 잠들었을 때 집에 들어갔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났지만 그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으려는 서인으로 인해 자연스레 각방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돌겠군.”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관계가 유지된 지 벌써 2주째.
그만 보면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서인의 태도를 더 이상 묵인할 수는 없다.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야 했다. 대체 왜 그와 이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다른 여자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려는 그를 왜 이렇게도 꺼리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부부 관계를 지속시키는 방향으로 해결 방안을 잡고 난 후 다음 주에 있을 서인의 아버지, 한 회장의 회사 창립기념일에 그녀를 대동하고 나가야만 했다.
현관문 앞까지 다다라 집 안으로 들어가길 머뭇거리고 있던 태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가 오는 소리를 듣고 줄곧 대기하고 있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태주를 반겼다.
“오셨어요, 사장님.”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 그의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평소 패턴대로라면 태주의 퇴근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을 그녀가, 없었다. 태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인인 어딨습니까?”
“아. 저, 사모님께선…….”
“방에는 있는 거죠?”
머뭇거리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던 태주는 그녀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발을 옮겼다.
똑똑.
“들어간다, 한서인.”
오늘은 꼭 이 난관을 헤쳐 나가겠다, 여기며 일찍 퇴근까지 한 태주는 굳게 닫혀 있는 그녀의 방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태주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문을 열었다.
“……!”
무의식적으로 전등을 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난장판이나 다름없이 어질러진 그녀의 방이었다.
‘대, 대체 이게…….’
태주는 각종 화장품과 옷, 가방, 이불 등등 닥치는 대로 바닥을 향해 집어 던진 흔적이 난무하는 방 안에서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인을 발견했다. 도우미 아주머니의 낯빛이 어두웠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태주는 왜 이런 난동을 부린 건지 짐작이 되질 않아 얼굴을 구기며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하…… 한서인!”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 태주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서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 * *

“……인! ……서인!”
졸지에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한 사실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져 그만 눈을 뜬 채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리려 할 때,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덕분에 인영은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부여잡고 세차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흐려지려는 눈에 힘을 줄 수 있었던 인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서인!”
어느새 방 안이 환해져 있었다.
인영은 간절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낯선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쿵쿵쿵!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인영의 마음이 움직였다기보다 그녀가 들어와 있는 이 몸이 거의 반사적으로 일으키는 행동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심장으로 인해 호흡이 쉽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넋을 놓아 버렸다. 눈앞의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인영을 ‘한서인’이라 부른 남자는 무척이나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인영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화려한 외모 때문이었다.
장인영은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지내면서 한국 최고의 남배우들과 연기를 했다. 그중엔 여심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도 있었고,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도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의 소유자도 있었다. 하나같이 매력적인 남자들이었지만, 인영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연기는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 연기를 하는 동안은 상대를 사랑하더라도 연기가 끝이 나면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이 인영이 연예계 생활 7년 차에 접어들면서도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일으키지 않은 이유였다. 그녀가 지금 이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 이유는 한 번 맛 들린 연기가 예상보다 너무 재밌어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우상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딱히 남자를 만나고 싶어 연예인이 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지난 7년간 연애 한 번 해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철벽녀, 혹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여자.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남자에게 조금도 틈을 내주지 않는 인영을 이렇게 불렀다. 지훈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노발대발했으나 딱히 거짓은 아니었던지라 인영은 무심히 넘겨들었다.
그런 인영이었다. 남자란 존재에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 철의 여인.
그런데 왜, 이 이름 모를 남자를 보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걸까.
‘뭐, 뭐야…….’
인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어깨를 꽉 부여잡고 남자는 약간 성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방은 또 왜 이래? 눈은 또 왜 그렇고? 설마, 울었어?”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인영의 퉁퉁 부은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두근두근.
다시금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가슴으로 인해 인영은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남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초췌하기 짝이 없는 인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드러난 긴 속눈썹을 인영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곧 남자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가자 그녀는 죄를 지은 사람마냥 몸을 움찔거렸다. 남자는, 말했다.
“당신…… 정말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이런…… 식?
인영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아무리 이런 식으로 나와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는 미동조차 없는 차가운 눈으로 인영을 응시했다.
“난, 당신이랑 이혼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다고.”
‘뭐? 이……혼? 아니 잠깐. 그럼, 눈앞의 이 남자가 이 몸 주인의 남편이란 이야기야?’
인영은 예상치 못했던 그의 일격에 충격을 먹었다. 남자는 인영이 놀라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이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당신 역시 알고 있었잖아. 무의미한 투쟁은 그만두고 차라리 뭐가 불만인지 이야기해. 그걸 해결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
“…….”
“자, 한서인. 이제 말해 봐. 당신은 대체 왜 나와 이혼을 하려고 하는 거지?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라도 있…….”
“자…… 잠깐만요!”
인영은 기다렸다는 듯 몰아치는 남자의 말을 손을 들어 겨우 저지했다. 남자는 갑작스런 인영의 행동에 하던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영은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내뱉었다.
“말씀을 끊어서 너무 죄송한데…….”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오늘 인영에겐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잠을 자고 있다 타인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고, 자신의 육체는 생사를 오가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으며, 그녀가 들어온 몸의 주인이 뚱뚱한 걸로도 모자라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제 몸을 빼앗기고 남의 몸을 빼앗은 상황을 겨우 몇 시간 전에 완벽하게 자각하게 되었건만, 적응도 하기 전에 빼앗은 몸의 남편이라는 작자를 만나게 되었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정리한 것이 없어 머리가 터져 버릴 지경이었던지라 일단은 남자의 말을 멈추게 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나는 당신이 알고 있던 당신 아내가 아니에요!’라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지만, 그랬다가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일단은 제 몸을 찾을 방법을 모색할 때까지만 좋든 싫든 이 여자의 몸에서 지내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몸의 주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한서인과 장인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아무리 인영이 뛰어난 연기자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한서인인 척을 할 수는 없는 노릇.
특히 그녀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이 남자에겐, 더더욱.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인영이 취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인영이 본래의 몸을 되찾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이 몸의 주인이 되돌아올 때까지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것.
“……뭐?”
그녀의 말을 기다리던 남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인영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누군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눈앞의 남자가 이 몸의 남편이라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니 인영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결정타를 날렸다.
“당신은…… 누구죠?”
남자의 고운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던 인영의 가슴은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다른 이에게 주눅이 들었던 적은 많지 않았는데, 그 많지 않은 순간에 바로 지금이 속했다.
커다란 심장 소리가 귀를 울렸다. 흔들림 없는 남자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호흡이 가빠졌다. 인영은 자신이 기가 죽었다기보다 이 몸의 본능적인 반응이라 여기려 애썼다. 인영은 잡아먹을 듯 저를 응시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한서인.”
몸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화가 나 보였다.
‘뭐…… 뭐야…….’
인영은 너무도 차가운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남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으로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장난은 그만해.”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 요구도 모자라…… 뭐? 내가 누구냐고?”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이 꽤나 무섭게 느껴졌다.
“정도껏 해. 2주면, 많이 참았어. 그것보다…….”
슥.
“후, 도저히 안 되겠군.”
남자는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영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정신이 사나워서 여기는 더 이상 못 있겠어.”
‘……뭐?’
“당신이 직접 정리하든 아님 아주머니한테 맡기든, 처리하고 나와. 그리고 제정신인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얘기하지.”
“아, 저기……!”
남자는 인영이 그를 붙잡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에 휙 사라졌다. 쾅, 소리를 내며 닫혀 버린 방문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던 인영은 바닥에 널브러진 화장품들을 흘깃거리며 인상을 썼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쳐다보곤 중얼거렸다.
“보통 놈이 아니네.”
역시 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고 하더니, 이 몸의 남편이라는 남자는 생긴 것만큼이나 까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이 여자와 결혼을 한 건지는 대충 집의 분위기나 남자가 하는 말 등으로 쉽게 짐작이 간다.
실제로 인영은 이 같은 케이스로 결혼한 재벌 관계자들을 보아 왔으니까. 아마 저 남자와 이 몸 주인은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엮인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
“골치 아프게 됐어.”
뚱뚱한 데다 못생긴 걸로도 모자라 결혼까지 했는데, 하필이면 남편과의 관계도 신통찮아 보인다. 병원에 있을 제 몸을 되찾을 때까진 어쩔 수 없이 이 몸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에서 가급적 다른 이들과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인영으로선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아아.”
남편이란 작자와의 일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저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밖으로 나가 버린 상황에서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가기는 힘들 것이라 여겼다. 인영은 그를 따라 나가려다 말고 주섬주섬 화장품을 집어 들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보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생겼네.”
장인영의 머리 회전속도는 빠르다.
아름답고 빼어난 외모에 연기 실력도 받쳐 줘서 한국 최고의 여배우란 칭호를 얻었지만, 연예계에서 손에 꼽을 만큼 깨끗하게 살아온 것은 그녀의 뛰어난 적응력과 더불어 한 발 앞서 나가는 사리 분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신이 어떻게 이 몸으로 들어왔는지, 그리고 이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하는 것은 위험했다. 얼마나 머무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몸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지, 한서인?”
이 몸의 주인인 한서인이란 여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 *

‘실례지만…… 누구시죠?’
결코 거짓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더욱 충격으로 다가오는 서인의 말에 태주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좋든 싫든 1년간 얼굴을 맞대고 살아왔던 제 아내의 말투가 기묘하게 변했다는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 낯설어 뭐라 말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달까.
‘당신은…… 누구죠?’
처음엔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도망치듯 서인의 방을 나오던 태주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젠장!”
서인의 방을 나와 거실로 향하던 도중 태주는 분을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주먹으로 옆에 있던 벽을 세게 치자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의 욱신거림이 방금 전 일어났던 일이 꿈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태주는 좁아졌던 미간을 펼 생각을 하지 않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설마…….’
그녀의 말투, 행동, 눈빛 등을 떠올려 보던 태주는 제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혼, 이혼을 그렇게 주장하던 여자가 이젠 기억상실이라니.
‘아닐 거다.’
태주는 재수 없는 생각이 머리를 장악하기 전에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리고 그는 서인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는 부엌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머니.”
태주와 서인이 결혼을 한 이래로 줄곧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입주 도우미 아주머니는 요 근래 들어 더욱 냉랭해진 부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태주가 자신을 부르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태주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의 그녀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술을 움직였다.
“서인이…… 말입니다.”
“예, 사장님.”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정말로 기억상실은 아니겠지. 태주는 조금씩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자 도우미 아주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태주는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어요.”
“예?”
“사장님도 아시죠? 장인영이라는 여배우요.”
“장인영? 그게 누…… 아.”
태주는 오늘 아침부터 뉴스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여배우의 이름이라는 걸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 여자는 왜……?”
사업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연예계에 신경도 쓰지 않는 태주도 익히 들었던 이름이다. CF를 찍기만 하면 완판은 기본이라는 법칙이 생길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국민 여배우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의 회사 홍보팀에서도 무척 관심이 있어 하는 여자라는 사실도.
그런 여자가 오늘 아침에 어찌 된 영문인지 돌연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업에 무척 도움이 될 만한 여자였는데 그런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 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 것이 다였던 태주는, 서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사모님께서 장인영 씨를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서인이가?”
그녀가 연예인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된 태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일종의…… 동경이랄까? 장인영 씨를 보면서 자기는 꼭 저런 여자로 태어나고 싶었다면서…… 저렇게 사는 인생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중얼거리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인영 씨를 만나려고 몇 번 시도해 보셨는데, 모두 실패로 돌아가서 꽤 상심하셨던 적도 있었구요.”
“……그렇군.”
“어쨌든, 그렇게 좋아하셨던 장인영 씨의 소식을 접하시고 난 후에 낯빛이 많이 어두워 보이시더라구요.”
“…….”
“아!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행동이 더욱 이상하시긴 했어요.”
“어디가 이상했다는 거죠?”
태주의 물음에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찌푸리던 도우미 아주머니는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저를 처음 보셨을 땐 소스라치게 놀라시더군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셔서 너무 놀랐어요.”
“……!”
“그리고 마치 이 집에 처음 온 사람마냥 행동하셨어요. 서재 위치도 모르셔서 제가 알려 드려야 했고……. 제가 사모님이라고 부르자 기겁하시더라구요. 그 말에 익숙해지실 법도 한데, 너무 놀라셔서 제가 더 놀랬다고 해야 할까…….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셔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지 걱정스러웠어요. 또…….”
“아, 이제 됐습니다.”
태주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말을 저지하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태주의 명령에 입을 다물고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서재에 있을 테니, 서인이가 날 찾으면 그리로 데려와 줘요.”
“네, 사장님.”
그는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부엌에서 빠져나왔다.
조금 더 지켜봐야 명확해지겠지만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태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 * *

“……님! 사장님!”
태주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서재에서 컴퓨터로 뭔갈 찾아보며 서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었나 보다.
서재로 들어오기 전만 해도 어두컴컴했던 방 안에 희미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침이 된 것이다. 태주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큰일 났어요!”
도우미 아주머니의 음성이 평소보다 격앙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태주는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 사모님께서…….”
“서인이가 왜요?”
“사모님께서 꽃구경을 하고 싶다고 정원에 나가셨어요!”
태주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타타타탁, 소리를 내며 뛰어가는 태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서인, 정말 제정신이야?’
어젠 기억상실증이다 뭐다 해서 태주의 맘을 심란하게 만들더니 이젠 뭐? 정원? 분명 서인이 이혼을 안 해 주는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해 작정을 한 것이라 생각하며 태주는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극심한 꽃 알레르기로 인해 평소 정원에는 나가지도 않던 그녀였다.
그런데 꽃구경이라니!
“한서인, 멈춰!”
서인이 있다는 정원으로 달려 나간 태주는 마침 얼마 남지 않은 꽃들을 발견하곤 그 향기를 맡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인을 향해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태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멈추라고!”
태주는 있는 힘껏 그녀를 향해 달려가 아름답게 핀 장미 한 송이를 꺾은 서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윽!”
서인은 갑자기 다가온 걸로도 모자라 손에 쥔 꽃송이까지 떨어뜨리는 태주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뭐하는 거예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야! 당신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나랑 끝까지 해 보자는 거야?”
화가 났다. 그녀가 자신에게 반항하듯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데 그녀는 도통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여서.
“……네?”
서인은 성난 태주의 목소리에 당황해했다. 태주는 그녀의 손을 세게 움켜쥐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자기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면서까지 날 그렇게 위협하고 싶은 건가?”
“생……명이라뇨?”
태주는 모른 척하는 서인의 태도에 더욱 화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는 꽃 알레르기가 심각한 사람이 꽃구경이라니. 그게 생명 가지고 날 위협하는 게 아니면 뭐야?”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지만 태주는 아랑곳 않았다.
“한서인, 정말 왜 이러는 거야. 그렇게 나랑 살기 싫나? 내가 태도를 안 고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겠다는데, 그래도 싫…….”
“몰랐……어요.”
“뭐?”
“몰랐다구요. ‘이 몸’에…… 꽃 알레르기가 있을 줄은…….”
이 몸?
“거기다 심각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믿어 줘요!”
“……!”
덥석!
“어, 어떡하죠? 방금 전에 저 꽃 만졌잖아요! 냄새까지 맡았다구요!”
“어?”
“괘, 괜찮겠죠? 어, 얼른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겠죠? 뭐라고 말 좀 해요!”
“……아.”
화를 내던 태주는 갑자기 돌변한 서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인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태주를 걱정스레 바라보다 소리쳤다.
“안 되겠어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겠어. 당신이 날 좀 병원으로 데려다 줘요! ‘이 몸’까지 위태로워지면…… 전 정말 큰일 난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