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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런웨이

1화

0. 20년 전


[뉴스속보입니다. KW그룹의 강태준 회장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강태준 회장은 최근 불법 비자금 조성 수사에 대한 심리적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얼마 전 이혼한 부인에게 남긴 유서가 발견되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평소 애처가로 소문난 강 회장의 이혼은 주위를 놀라게 했었는데요…….]
TV에서는 젊은 여성 앵커의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자료화면으로 온몸에 흰 천이 덮여 응급실로 이송되는 누군가의 변사체가 보여지고 있었다. TV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거실 소파 위에는 블랙의 짧은 실크 잠옷을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고급 대리석 바닥에는 빈 술병과 오늘 날짜의 신문이 널브러져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뉴스를 보던 여자는 리모컨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덕분에 TV 전원이 꺼지며 소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적막이 흘렀다. 여자는 술기운 때문인지 비틀거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한참 동안 거실 한가운데 넋을 잃고 서 있던 여자는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거실 구석 창고로 달려 들어가 낑낑대며 무거운 박스 한 상자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리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박스를 거칠게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마구 파헤치며 급기야 거실 바닥에 전부 쏟아부었다.
뭔지도 모를 문서들이 사방에서 흩날리고 무언가 간신히 참고 또 참아왔던 여자는 끝내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틀 전만 해도 모질었던 자신에게 이해한다며 행복하라고 웃어 주었던 남편 강태준 회장이 떠올랐다.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던 여자의 눈에는 신문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리고 인터폰 속에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보였다. 여자는 울음을 멈추고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남자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거실 바닥 가득 널브러져 있는 문서들을 한 움큼 들어 올려 남자의 얼굴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이것만 없으면 그 사람도! 그 사람 회사도! 안전하다고 당신이 그랬잖아!”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여자의 태도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남자는 거실을 훑어보며 한심하다는 표정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여자에게 말했다.
“그건 쓰레기일 뿐이야. 중요한 자료였다면 벌써 예전에 폐기됐겠지? 명색이 그룹 회장 전 부인이라는 사람이 비자금 문서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나?”
“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자가 되물었지만 남자는 대꾸도 없이 허리를 숙여 묵묵히 바닥에 수북이 쌓인 문서들을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당신이 꾸민 짓이지?”
남자가 화가 난 듯 줍던 종이를 다시 바닥에 내던지며 허리를 폈다. 굳어 있던 표정에는 어느새 비열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도 그 소리야? 뉴스도 안 봤어? 비자금 폭로는 강 회장 최측근 김 모 씨라고, 그자가 우리 관계도 폭로하려는 거 내가 간신히 막았다고 수십 번 말했잖아. 그나저나 전남편이 오늘 죽었다는데 꽤 태연하네?”
남자의 말에 여자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 번 콱 깨물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태연하다고? 남편을 죽인 장본인 차준식이 내 앞에 있고, 그 장본인과 놀아난 여자가 지금 여기 서 있는데, 내가 태연하다고?”
“헛소리 그만해. 기분 안 좋을까 봐 생각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남자의 말에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거실 가운데 탁자 위에 놓인 라이터를 손에 들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 당신 참 잘 왔어. 기다렸으니까.”
“뭐?”
“기다렸다고.”
여자의 말에 의아해하던 남자가 불길한 눈으로 여자가 손에 든 라이터를 바라보는 순간, 라이터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라이터가 떨어졌다.
거실 전체에 널브러진 문서들 덕분에 순식간에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현관문 쪽으로 몸을 피했던 남자는 불기둥 너머로 보이는 여자에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정신 차리고! 잡아!”
“필요 없어.”
여자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 콜록콜록! ……엄마!”
여자 뒤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며 여섯 살 난 남자아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면서 거실로 나와 여자에게 안겼다. 이제야 방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여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살려 줘! 아이가 있어!”
남자는 여자의 품에 안겨 엉엉 울며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사랑하는 여자가 불 속에 갇혀 아이를 안고 살려 달라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그냥 지켜만 보겠는가.
하지만 그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자 가슴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몸담고 있던 회사의 회장 전 부인과의 불륜 관계와 사랑에 눈이 멀어 강 회장의 최측근 김 모 씨를 매수해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거짓 폭로를 유도한 사실, 또한 그로 인해 회장의 자살에도 일조하였다는 불명예까지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그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린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때마침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제발! 아이라도 데려가 줘! 제발!”
여자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울던 아이와 여자의 형태는 남자의 눈 속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남자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거세진 불길을 바라보던 여자는 아이를 안고 빛이 보이는 쪽으로 무작정 달려 나갔다. 가까스로 베란다로 나가 문을 닫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파트 9층. 밑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주차장으로 도망치듯 급하게 달려가는 남자의 비겁한 뒷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표정이 절망으로 굳어져 버렸다.
“엄마…….”
베란다 뒤까지 불이 뒤덮었다.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여자를 더욱 꽉 안았다. 여자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자신의 목에 건 열쇠 모양의 목걸이를 풀어 아이의 목에 걸어 주며 애써 태연한 척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가, 눈을 감았다 뜨면 악몽에서 깨어나는 거야.”
여자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높이. 여자가 온힘을 다해 악을 쓰며 밑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아이를 받아 주세요!”
마지막으로 아이의 볼에 키스를 한 뒤 여자는 아이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 추락하던 아이의 겁에 질린 눈이 감기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베란다 문을 열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던 엄마의 목소리.
“아가야…… 엄마가 미안해…….”
[속보입니다. 강태준 회장의 전 부인이자 유명모델 최지연 씨의 자살 소식입니다. 현재 화재로 인한 자살로 추정하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 중에 있습니다. 강태준 회장과 최지연 씨는 슬하에 1남을 두고 있으며, 강현 군에 대한 친권은 강 회장의 유일한 혈육인 KW패션 강태영 전무가 갖게 될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속보입니다. 강태준 회장 전 부인 최지연 씨의 아파트 화재 현장 같은 층에서는 신원 미상의 아이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현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습니다.]

1.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왜 웃어요? 사람 기분 더럽게.”
욱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도희는 지금 이 자리가 모델 일을 죽어라 반대하던 엄마와의 거래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맞선 자리에 가죽 라이더재킷에 화장기 없는 얼굴, 이른바 쌩얼을 하고 나온 데다가, 욕만 안 했지 그보다 더 상대방의 기분을 깔아뭉개는 그녀 특유의 시비조 말투로 맞선남의 속을 박박 긁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행동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맞은편에 앉은 맞선남의 태도였다. 말끔한 회색 정장을 입은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는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서 난생처음 듣는 여자의 거친 말투에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도희는 더 열이 뻗쳐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빅 사이즈의 갈색 반 무테 선글라스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탁자 위에 휙 던져 버렸다.
툭!
그런 그녀의 태도에 맞선남의 얼굴에 자리 잡혀 있던 미소가 점차 사그라졌다.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요.”
“오해는 무슨. 차도희, 내 소개 끝나자마자 그쪽 나 비웃었잖아요. 당신 나 알죠?”
“네? 아…… 네. 그런데 그래서 웃은 건 아닌데. 비웃은 건 더더욱 아닙니다.”
뭔가 변명을 하려는 남자의 말을 도희가 얼른 가로채 버렸다.
“됐어요. 식사나 하세요.”
마침 웨이터가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남자와 도희 앞에 내려놓았다. 접시 위 스테이크의 데코레이션은 이곳 호텔 레스토랑의 수준을 말해 주듯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희는 다리를 꼬고 비스듬하게 앉아서 스테이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스테이크를 썰던 남자가 물었다.
“안 드세요?”
“나 몰라요? 안다면서?”
느닷없는 반말 세례에 놀란 남자가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지금이 몇 시죠?”
이번에는 뜬금없이 시간을 묻는 도희를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이 여자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알아야 덜 억울하지 싶어서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말했다.
“8시 5분 전이네요.”
“저는 오전 8시 5분 전이었어도 750칼로리가 넘는 이런 고깃덩어리는 안 먹어요. 아무리 얼마 전 대회에서 뇌물 먹인 혐의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모델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자신의 상처를 무슨 남 얘기하듯 말하는 도희를 보던 남자는 그녀의 상처 받아 뒤틀린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정중히 사과를 했다.
“제가 실수했네요. 그럼 샐러드라도 드시겠어요?”
앞머리 없는 긴 생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듯 도희는 흘러내려온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보통 맞선남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녀에게 쌍욕을 내뱉거나 그녀의 윗선에 전화를 걸어 거래는 끝이 났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거나.
도희는 앞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웨이터를 불러 샐러드를 주문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 진심이었다. 약자한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그녀의 습성이 발동하려고 꿈틀대기 시작했다. 도희는 자신의 그런 성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툴툴대며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가식 그만 떨고 본격적으로 거래 시작해 볼까요?”
도희는 맞선 자리에서 남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들을 특별히 엄선하여 읊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으며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남자를 보던 도희는 일이 뭔가 잘못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서둘러 얘기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차그룹 지분은 빵. 차그룹 유산이 목적이라면 차그룹 첫째 딸도 아직 결혼 못 하고 빌빌대고 있으니까 그쪽을 공략하는 게 빠를 거예요. 난 무늬만 차그룹 사람이니까. 이미 다 조사해 봐서 알죠?”
“저기, 차도희 씨?”
이제야 식사를 끝냈는지 남자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요?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힘들지 않아요?”
도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정다감한 남자의 말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버렸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물이 채워진 유리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울컥 올라오려던 무언가를 물과 함께 간신히 삼키며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선한 눈매로,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타이르듯 말했다.
“스스로 가시를 세우는 일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이에요.”
“더 이상 그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을 때는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죠.”
“그렇다면 도희 씨는 상대방이 관계를 지속해야 할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닌가요?”
더는 듣기 힘들었는지 도희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길고 짧은 게 어디 있어요? 1분 1초라도 상대방을 겪어 보고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잠깐. 제 소개는 듣지 않으실 건가요? 저는 강…….”
남자가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소개하려던 것을 막은 건 도희였다.
“듣기보다 순진하시네? 그쪽이 내가 누군지 알고 나왔듯이 나도 다 알고 나왔어요. 신우그룹 이지원. 소문에는 술, 여자, 도박에 환장한다죠? 그러니까 나랑 엮였겠지만.”
“그렇군요. 신우그룹 이지원 씨는 그런 사람이군요.”
남자는 마치 남 얘기하듯 말했다. 도희는 신우그룹 이지원에 대해 읊어 대다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소문 속 이지원과는 이미지가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문과 달리 남자는 도희가 이제껏 봐 왔던 남자들과는 격이 달랐다. 상대방을 대하는 방법이나 모든 면에 배려가 묻어났고, 말하는 어투도 투박하지 않고 타고난 달변가 같았다.
도희는 지금 이 남자가 쓰고 있는 게 가면이고 연기였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의 연기는 퍼펙트했기 때문이다.
“컨셉 잘못 잡으셨네요. 차라리 경영이니 유산이니 얘기하시지. 그랬다면 애프터는 받아 줬을 텐데. 전 재미없는 사람은 딱 질색이거든요. 그럼 이만 일어나죠.”
그렇게 벌떡 일어선 도희는 실소를 터뜨리는 남자를 앙칼지게 노려보다가 벗어 놓았던 선글라스를 다시 쓴 후, 또각또각 자신감 넘치는 구두 소리를 내며 레스토랑을 빠져나가 프런트로 향했다.
하지만 당당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힘들지 않아요? 라는 남자의 물음에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능력한 아빠를 버리고 엄마를 선택했을 때도. 영화에나 나올 법한 궁전 같은 집에서 생일파티를 열어 주던 새아빠가 가지고 싶은 건 다 사 줄 수 있어도 차그룹에 네 것 따위는 없다는 걸 명심하라고 말했을 때도. 전기가 끊어진 쪽방촌에서 생일날 딸에게 먹일 미역국을 끓이다 가스 폭발로 죽은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참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요즘 들어 시답잖은 일에도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게 뒤늦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온 것만 같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반짝였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든 도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삐딱하게 서서 입을 앙다문 채 도희를 흘겨보고 있었다. 도희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빨간색 짧은 원피스를 입어 육감적인 몸매가 더욱 도드라진, 사납게 생긴 인상을 가진 사다원이 도희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긴 다리로 단숨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앙칼진 목소리로 험한 욕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미친년. 너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괜히 엄한 데 화풀이하지 말라고 나도 경고했을 텐데?”
“뭐, 엄한 데?”
“남 탓하지 말고 나 같은 거한테 진 네 실력을 탓해.”
아무렇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평온해 보이는 도희와 달리 사다원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미치겠는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도희를 향해 칼날 같은 말들을 휘둘렀다.
“너 톱 먹었던 대회 말이야. 네 잘난 엄마가 주최 측에 돈 먹인 거 봤다는 사람들 후기가 웹상에 아직도 널려 있더라? 그건 돈으로 못 막나? 그나저나 얼마나 쪽팔릴까? 그래도 이렇게 고개 내밀고 다니는 거 보면 너도 참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