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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다원은 도희의 아킬레스건인 얼마 전 대회 이야기를 꺼냈다. 선글라스 속 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타고난 포커페이스인 도희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뭐가 쪽팔려? 내가 그 상 받았니? 아니잖아. 그깟 대회 깨끗하게 엎었잖아, 내가. 왜? 너야말로 네 말대로 비리로 얼룩진 그 대회 2등 날아간 게 그렇게 억울하니?”
“그깟 대회?”
사다원의 표정이 살벌하게 구겨졌다. 도희가 말하는 그깟 대회가 무산되는 바람에 간절하게 바라고 꿈꾸던 대회의 2등 자리가 날아갔고, 아픈 엄마의 수술비로 쓸 계획이었던 상금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딸의 우승 소식을 기다리던 엄마도 그 대회가 무산되던 그날 돌아가셨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모르는 도희가 자신이 상처 받기 싫어 오히려 물고 뜯어 주겠다고 다짐이라도 했는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너 설마 내가 버린 1등이 너한테라도 갔으면 했니? 너 말이야 운 같은 거 믿지 말고 네 능력으로 정정당당하게 날 이기…….”
쫘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그녀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희의 뺨을 날린 사다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도희는 지금 뺨을 맞았다는 사실보다 사다원의 눈빛이 상당히 거슬렸다.
증오…….
자신을 바라보는 사다원의 눈빛 속에서 증오가 보였다.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방에게 이렇게까지 증오를 이끌어 낼 정도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믿고 싶었다.
“능력? 돈도 네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아니 그것만 능력이겠니? 네 엄마 창녀 짓도 능력이지.”
쫘악.
이번엔 사다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도희가 얼어붙은 눈동자로 사다원을 바라보았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남자에게 웃음을 팔던 엄마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에게 버림받아 차디찬 방구석에서 죽어 버린, 그녀를 다시 잡을 용기도 능력도 없었던 아빠뿐이라고 생각했다. 싸늘하게 굳어 버린 도희의 눈동자와는 달리 어느새 벌겋게 충혈된 사다원의 눈에서 급기야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가 발악했다.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었어!”
사다원의 느닷없는 소리침에 도희는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는 그깟 대회가 무산되는 바람에 우리 엄마 수술도 못 받고 죽었다고!”
당황스러웠다. 나 때문에 그러니까 내 행동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도희는 갑자기 알게 된 이 엄청난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애초에 네가 나한테 진 거 인정하고 쓸데없는 루머 퍼뜨리지만 않았어도 대회는 무산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넌 최소한 2등 타이틀이라도 가져갔겠지. 그러니까 네 탓이야.”
“닥쳐!”
분하고 원통함에 사다원이 미친 듯이 도희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단번에 움켜잡아 버렸다. 도희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잡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은 채 덤덤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호텔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도희는 수치스러움을 느낄 만한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 가운데 사다원이 악에 받친 눈빛으로 울며 발악했다.
“네가 만약 다시 런웨이에 선다면 그때는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죽여 버릴 거야! 런웨이는 내 꿈이고 우리 엄마의 마지막 희망이었어. 너 따위가 호기심에 심심풀이로 올라오는 곳이 아니라고!”
도희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내게도 런웨이는 꿈이고 희망이고 유일한 비상구였으며 삶의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겉모습만으로 나를 판단하고 그런 편견으로 날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일까. 그 사실이 난 미치도록 싫었다.
소란을 피우며 대성통곡을 하는 사다원을 호텔 직원이 끌고 나가면서 상황은 마무리가 되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이 엉망인 채 정리가 되지 않은 도희는 복도 한가운데 홀로 남았다. 잔뜩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호텔 프런트 복도 장식용 거울을 통해 보게 된 도희의 입가에서 실소가 터졌다.
피식.
더 이상 이런 꼴로 여기 있을 순 없었다.
도희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푸욱.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내려앉았다. 구두굽이 부러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콧대 높은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굽이 부러진 구두로 절뚝이며 걷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서를 시켜 새 구두를 가져오게 할 심산으로 그녀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외투 주머니와 핸드백을 뒤적거렸지만 하필이면 오늘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항상 맞선 중간중간에 문자로 상황을 보고하라던 엄마의 협박성 문자가 도착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 도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가만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비켜요!”
무거운 박스들을 품 안에 가득 안은 누군가가 짐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옆으로 비켜 가는 게 어려웠는지 도희에게 비키라며 시비조로 청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최악인 도희가 시비조의 청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짐 더미에 얼굴이 가려진 남자는 비켜 줄 생각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도희를 밀쳐 버리고 앞으로 직진했다. 덕분에 도희는 또 한 번 바닥으로 넘어져 버렸다. 자신을 밀치고 사과도 없이 바쁘게 가 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소리쳤다.
“야! 거기! 남자! 파란 티! 뭐야, 저 자식은?”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뒤도 안 보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 버린 그 남자. 그의 등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또다시 울컥! 무언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네까짓 게 뭘 도와줄 수 있는데?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굽이 부러진 구두를 손에 든 채 일어나 맨발로 호텔 인사팀으로 향했다.
“차그룹 막내딸이 프런트에서 진상 부렸다면서요? 무슨 재벌가 딸이 그렇게 격이 떨어지는지. 역시 그 소문이 맞나? 그 막내딸 차 회장 친딸이 아니라던데?”
순간 인사팀 사무실 앞에 서 있던 도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급기야 그녀는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하찮게 여기며 씹어 대던 인사팀 직원들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차그룹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수군거림으로 전해 들은 순서대로 화들짝 놀라며 두더지처럼 하나둘씩 벌떡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로…….”
선뜻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자 부장이 총대를 메고 도희 앞에 섰다.
“우리 집에 전화 좀 걸어 줘요. 보시다시피 내 꼴이 이래서.”
도희가 들고 왔던 구두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직원들의 얼굴을 가만히 노려보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도희의 핑크빛 입술이 다시 한 번 열렸다.
“부장님.”
“네, 네!”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이 난 연세가 지긋한 부장이 얼른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막내딸보다 나이가 어릴지도 모를 도희 앞에 죄지은 사람마냥 선 부장은 자존심이 꽤 상했지만 이 호텔의 최대주주인 도희 모가 도희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제가 오늘 이 호텔에서 부장님이 관리하는 직원 두 명한테 수모를 당했어요. 한 명은 10분 전에 몸으로 날 깔아뭉갰고, 한 명은 2분 전 말로 깔아뭉갰죠. 제가 지금 곱게 집으로 돌아가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잘 것 같거든요? 어떡하죠?”
“제,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부장의 대답과 동시에 아까 전 입을 놀리던 여직원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의 기분을 감지라도 한 듯 다른 직원들은 서둘러 그 여직원을 끌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또다시 순식간에 이 넓은 사무실에서도 혼자가 되어 버린 도희가 쓰게 웃어 버렸다.
그렇게 20분 후 도희는 비서가 가져다 준 새 구두를 신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풀리지 않고 점점 더 엉망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체면 때문에 엄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건 아닌지 미안함이 들기 시작했다. 발길을 돌려 다시 인사팀으로 향하려던 그녀는 꾹 참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이 아닌 내일 즈음에 호텔에 전화를 걸어 내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면 해고를 취소해 줄 의향이 있다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이 말하는 재벌가의 격을 갖추게 되는 거 아닐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봐!”
누군가가 차에 올라타려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뒤돌아 자신의 팔을 낚아챈 남자를 바라보는 도희.
“방금 나 해고하신 분?”
그 남자는 잘생긴 외모에 맞지 않게 싸구려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도희에게 남자는 파란 티를 펼쳐 보여 줬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티였다. 도희는 이제야 이 남자가 자신을 넘어뜨리고 사과도 없이 가 버린 직원임을 알고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그녀의 구두에 가 있었다. 그녀의 가오를 위해 비서가 가져온 새 구두에 그가 비웃음을 날리고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두가 아깝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 안에서 도희가 인사팀 사무실 바닥에 내다 버린 굽이 부러진 구두를 꺼내 도희 앞에 내던졌다.
“그게 그쪽한테 훨씬 더 잘 어울려. 당신이랑 닮았거든. 겉만 화려하면 뭐해 굽이 부러져서 쓸모가 없는데. 아마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겠지. 세상에 아름다운 구두는 많으니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까.”
쓸모가 없다고?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도희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굽이 부러진 구두를 보다가 언제나 항상 혼자인 자신의 처지가 가엽게 느껴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비난하는 눈동자로 다그치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짐짓 당황하던 남자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미안하면 사과를 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행동이야.”
흔들리는 눈동자로 가만히 남자를 응시하던 도희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엉엉 소리 내어 울며 소리쳤다.
“싫어! 왜 내가 사과를 해? 왜 미안하다고 해야 돼! 먼저 상처를 준 건 당신들이잖아!”
모델들 사이에서 도희를 따돌리는 데 앞장서며 그녀와 관련된 온갖 악성루머들을 생산해 내던 사다원,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을 진실로 만들어 버린 여직원, 호텔 직원인 주제에 비참한 심정으로 서 있던 자신을 바닥에 넘어뜨리고 사과 한마디 없이 가 버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 도희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먼저 상처를 준 건 그들이었다.
이제껏 참았던 서러움이 밀려 올라와 터졌는지 도희가 마음속 말들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한참 토해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멈추질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도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억지로 울음을 참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빠가 죽고 지난 10년간 흘리지 않았던 아니 염치가 없어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서서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섰다. 점점 사라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물에 가려진 흐릿한 시야로 바라보던 도희는 멀어지는 그 등이 왠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물론 나한테 한 행동은 괘씸했지만 괜히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화풀이로 불쌍한 남자의 일자리를 빼앗아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를 동정하였다. 처음엔 단순히 동정이었다.
그가 자꾸 신경 쓰이는 건 분명 동정이라고 믿고 싶었다.

“동정이었으면 넌 돈을 줬겠지. 일자리를 구해 주진 않았을 거야.”
하영의 말을 무시한 채 도희는 잔을 들어 술을 입속에 털어 버렸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 시내 야경을 눈에 담았다. 바텐더가 또다시 도희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채우려던 것을 하영이 손짓으로 막았다.
“차도희, 그만 마셔. 그리고 이 기집애야! 너 요즘 선 자리마다 깽판 치고 다닌다면서? 그거 다 네 손해인 거 몰라? 차 회장님이 아무리 널 봐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너 때문에 우리 아빠도 네 일 처리하느라 바쁘다 바빠!”
하영의 아버지는 차 회장의 최측근인 김 비서였다. 하지만 그런 어른들의 상하관계 속에서도 하영과 도희는 자신의 위치를 놓고 결코 서로를 깔보거나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평등하게 생각하는 정말 진실된 우정이었다.
“너 요즘 그러는 거 혹시 그 불쌍한 남자 때문이야?”
“농담은 사절이야.”
하영은 꽤 심각한 눈으로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희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하영의 시선을 마주하려고 노력했다. 행여 하영의 시선을 피하게 되면 모든 걸 인정하는 꼴이 될까 두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런 도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하영이 물었다.
“저번에 너네 집 앞으로 네 차 끌고 오던 그 남자?”
“맞아.”
“일자리를 구해 줬다는 게 설마? 너! 회장님 몰래 취직까지 시킨 거야?”
“우리 집에 취직시킨 건 아니고. 그냥 내 개인적으로 고용했지.”
“미쳤구나. 불쌍해서 그랬다고? 세상에 불쌍한 사람 천지인데 사지 멀쩡한 젊은 남자가 뭐가 불쌍하다고 옆에 끼고 돌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그 사람 낡아빠진 운동화만 보면 울화가 치밀고. 내 눈앞에 안 보이면 불안하고. 그리고 또…… 아무튼 이게 동정이 아니면 도대체 뭔데?”
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몇 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호텔에서는 정직원이었던 여직원의 해고취소는 받아들이겠지만 한번 해고당한 용역직원의 재채용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불쌍한 남자를 자신의 운전기사로 고용했고, 그녀는 그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몇 번 앉아 있던 게 전부였다. 그가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자신이 먼저 대화를 걸 만큼 뻔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차 안에서 대화는 거의 없었다.
도희는 아까 전 원샷을 한 술 때문인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뜨거운 히터 바람과 함께 은은하게 차 안 가득 퍼지던 그 남자의 달콤한 샴푸 향기가 코끝에 감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그의 젖은 머리카락, 샤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뽀얀 얼굴과 쭉 뻗은 콧날, 한쪽 눈을 살짝 뒤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두 눈.
“야! 정신 안 차릴래?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하영의 다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도희가 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은 쯧쯧 혀를 내차며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사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명확한 하영의 대답에도 도희는 인정하기 싫은 눈치였다. 그런 도희를 보며 하영은 뭔가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근데 나 그저께 그 남자 봤다?”
“우리 집 앞에서 봤다며.”
“아니. KW그룹 로비에서 말이야.”
“그 사람이 거길 왜?”
“글쎄. 차림새도 평범하지 않았는데. 명품 슈트에 구두까지. 딴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잘못 본 거겠지. 그 사람이 그런 곳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솔직히 평범한 얼굴 아니잖아. 내가 한 번 보고 기억할 정도면. 뭐, 하긴 그 사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했지?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아무튼 차도희 정신 차려! 그냥 보통 남자도 아니고 지지리 가난한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래?”
복잡 미묘한 표정의 도희는 하영의 술잔을 뺏어 들어 또다시 원샷 해 버렸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마음이 그를 향해 가고 있다는 하영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내려요.”
정차한 차 안 가득 그의 음성이 울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두 눈을 뜬 도희는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거울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머리는 시크하게 먼저 그의 시선을 피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정작 현실은 남자의 그윽한 눈빛을 그대로 받아 가슴속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희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취했군.”
그의 말대로 차라리 취한 거였으면 좋겠건만. 그 독한 술을 몇 잔이나 원샷 했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취기는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 보니 분명 bar에서 나올 때 대리를 불렀는데 왜 내 앞에 저 남자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술 먹고 전화하면 안 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궁금증을 한방에 날려 버린 남자의 사무적인 말투에 약간 민망한 마음이 든 도희가 그를 흘겨보자 그는 가볍게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새벽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에 맞닿았다.
“후…….”
그녀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름 아닌 그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분명 시장 바닥에서도 이런 촌스러운 옷들은 팔지 않을 텐데 매번 어디서 저런 옷들을 사 입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마 그의 외모 덕분에 복고라고 우겨 줄 만했지, 쌍팔 년도 때나 입을 법한 요상한 체크무늬 남방에 남색 계통의 패딩 그리고 엉망으로 물이 빠진 청바지까지.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도희의 입에서는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저런 남자를? 말도 안 돼.
한참 동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옷 없어? 꼴이 그게 뭐야?”
“그쪽이야말로 옷 없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쪽이라니? 내 이름 또 까먹었어?”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도희를 시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는 남자. 그는 도희의 옷차림을 시답잖은 표정으로 훑어보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차도희 씨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파티장 가는 차림으로 나오는 거 귀찮지도 않습니까? 빨리 내려요.”
남자의 지적에 머쓱해진 도희가 못 들은 척 차창 밖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