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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남산자락에 위치한 부촌가. 경비 초소나 방범 초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30여 개국의 외국 대사관과 영사관이 즐비하기 때문에 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24시간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 바로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매번 인적이 드문 부촌가 골목 끝자락 가로등 불빛이 닿을락 말락한 이곳에 차를 세우곤 했다. 뭔가 잔뜩 의심스러운 얼굴로 도희가 그에게 물었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왜 매번 차를 여기다 세워? 우리 집은 한 블록 위라고 말했잖아.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그쪽 혹시 머리가 아주 나쁜가?”
도희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지, 잠시 잠깐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미안했는지 도희는 뒷좌석 발밑에 놓인 쇼핑백을 들어 남자의 품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거나 가져가! 집에 옷이 아주 넘쳐나서 몇 개 챙겼으니까. 제발 그런 거지꼴로 나타나지 좀 말라고!”
남자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쇼핑백을 받아 쇼핑백 겉에 새겨진 로고를 확인했다.
[E. H. KANG]
그가 무심결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왜 웃어?”
도희의 물음에 남자는 옷에 달린 상표를 쇼핑백 안에서 살짝 들어 그녀에게 내보였다. 도희는 당황했지만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혹시 그걸 내가 너 주려고 직접 매장 가서 사 왔다는 거야?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데 그거 재작년에 사귀었던 애인한테 선물하려다가 못하고 방구석에 처박아 놓은 거 버리기 뭐해서 가져온 거거든? 상표 뜯는 걸 깜빡했을 뿐이야.”
주저리주저리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도희를 뚫어져라 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최근 시즌에 나온 디자인을 재작년에 어떻게 구입하죠?”
들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되겠는지 버럭 소리부터 지르기 시작하는 도희.
“무슨 소리야! 재작년에 산 거야! 그런데 잠깐! 최근 시즌인 건 어떻게 알았어?”
마지막 말의 물음표와 동시에 그녀가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입고 다니는 꼴이 하도 변변찮아서 얼마 전에 매장 가서 사 온 옷이다. 어쩔래? 하는 표정으로 체념한 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희.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대꾸했다.
“눈 없어요? 상표.”
남자가 옷에 붙은 상표를 들어 올려 그녀를 향해 보여 줬다. 불리해지자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차 안에서 내렸다.
“여기 차키 받고. 할 말이 있어요.”
황급히 말을 돌리며 도희의 손에 차키를 건네주고 차를 가리키는 남자. 도희가 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약간의 흠이 나 있는 차를 가만히 보고 있던 도희에게 남자가 말을 꺼냈다.
“오다가 접촉사고가 나서 차가 망가졌어요.”
대수롭지 않게 흠이 난 차를 보고 있던 도희가 사고라는 그의 말에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고!? 저기…….”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라는 말을 간신히 삼키고서 그녀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보상해 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는 자신의 맘도 모르고 보상 운운하는 그가 너무 야속했다.
도희는 괜히 속상한 마음에 말도 없이 그에게서 돌아서 성큼성큼 골목을 걸어 올라갔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더니 잡을 생각이 없는 듯 아무런 미련 없이 뒤를 돌아 골목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먼저 뒤를 돌아선 건 도희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한참 멀어진 뒤였다.
가로등 불빛 밑에서 도희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2. 존댓말 하는 남자


엉망으로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주변 고급 아파트마저도 압도할 만큼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초고층의 주상복합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맨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불이 켜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간발의 차이로 남자의 사촌형 강현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남자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강은후, 그 옷차림은 뭐야?”
“왜, 편하고 좋은데.”
“안 그래도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현의 서글서글한 눈이 걱정과 불안으로 어두워졌다. 불현듯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강 회장과의 약속이 딜레이되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자신을 맞선남이라고 착각한 차도희라는 여자에게 봉변을 당한 그날, 호텔 주차장에서 은후와 닮은 남자를 봤었다. 그는 당연히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직원들만 입는 이상한 문구가 적힌 파란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은후가 입고 있는 남방이나 청바지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때 그 남자가 은후가 맞지 않았을까? 하는 직감이 들었다.
“오늘은 하나만 물어. 나도 하나만 대답할 테니까.”
은후가 겉옷을 벗으며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도희에게 받은 것이었다. 은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에 들은 옷을 한번 들쳐 보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만든 옷을 선물로 받다니…….”
그가 지금 이 상황이 우스운 듯 피씩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쇼핑백을 소파 위로 던져 버렸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현은 무슨 질문을 해야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답변을 얻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강현은 오늘 안에 질문 못 한다, 에 한 표.”
은후는 현을 지나쳐 자연스럽게 웃으며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서 한강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속에 강 건너편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차그룹 본사빌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은후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보지 못한 현은 훈계를 시작했다.
“너 휴가가 왜 이렇게 길어? 뉴욕으로 언제 돌아갈 건데?”
“그게 질문이야? 답변은 한 번뿐이라고 했을 텐데?”
“대답은 필요 없고 그냥 들어. 질문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하니까.”
“역시! KW그룹 차기 회장답네.”
현의 행동이 일관성이 있어서 좋았는지 은후는 오래간만에 마음 놓고 웃어 버렸다.
“근데 너 한국에 있는 거 회장님은 알아? 고모 말이야. 네 어머니는 아느냐고.”
“형이 입 꾹 닫고 있으면 아마 평생 모르겠지?”
“얌마. 너!”
은후는 귀를 틀어막고 소파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런 은후의 뒤통수에 대고 현은 조잘조잘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탁자 위에 놓인 영어신문을 펼쳐 기사를 읊어 대기 시작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천재 디자이너 은후 강의 얼굴이 공개되는 약혼식 당일, 그가 사라졌다.”
욕실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현은 시시하다는 듯 신문을 내려놓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뉴욕에서는 지금 난리가 났다고. 그리고 네 약혼녀도 안타깝고……. 난 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돌아온 거야? 이제 겨우 성공했잖아.”
현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은후가 뉴욕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말을 아꼈다. 그런 행동을 봤을 때 분명 최근에 은후에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거라고 현은 추측했다.
은후 때문에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후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욕실에서 나와 주스를 마시며 인상을 찌푸린 채 현에게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봐요. 강 이사님! 나한테 애정 그만 쏟으시고. 애인 좀 만드시지? 저번에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던 여자는? 연락해 봤어?”
“그 여자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현은 얼마 전 만났던 도희를 떠올렸다. 현은 도희를 만나기 전부터 차그룹에 골칫덩어리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도 패션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다. 맞선남으로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녀와 시간을 보낸 건 아무래도 태어나서 현이 했던 일들 중에 가장 큰 실수였던 것 같다.
현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힘들지 않느냐는 자신의 물음에 처연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 그 안에 가득 담긴 고통과 외로움을 현은 느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그룹 사람이었다. 현은 애써 머릿속에서 그녀를 지우며 은후를 바라보았다.
“지금 여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적이던 현의 얼굴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은후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뭘까? 자신의 고모이자 은후의 양어머니 강 회장은 이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을까? 아니면 알고도 묵인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설마…….
현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지자 힐끔 보던 은후가 먼저 선수 쳤다.
“우리 한잔 할까?”
하지만 현은 끝까지 대화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조만간 외신들이 널 찾아낼 거야. 네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확인됐더군. 그리고 네 약혼녀 지하나…… 루머이긴 하지만 자살 소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된 게 형이 나보다 내 일을 더 잘 알아?”
“너 약한 여자를 그렇게 만들고 웃음이 나오냐?”
사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은후의 마음도 좀처럼 편하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쯤에서 그녀를 끊어 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물론 자신까지도 망가질 것 같았으니까.
그때, 은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차도희]
핸드폰 액정을 무표정으로 잠시 동안 내려다보던 은후가 핸드폰을 뒤집어 버리자 벨소리가 멈췄다. 현이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더니 와인셀러에서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내 은후 앞 탁자에 놓고 마주 보고 앉았다.
“한잔 하자며?”
현이 은후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 때문이지? 한국에 온 이유.”
“내가? 여자 때문에?”
“그렇지? 하긴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알면서 왜 물어?”
“은후야…… 지금 하려는 거 하지 마라.”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현의 표정을 마주한 은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은후는 와인 잔에 있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 웃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뭘 하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너!”
“어머니한테 다 들었어. 어머니도 그리고 형도 미친 듯이 일만 했던 이유. 얼마 전에야 알았다고. 그동안 나만 몰랐어. 모르고 나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았다고. 형…… 앞으론 형 자신을 위해 살아. 이제부턴 내가 할 테니까. 그게 뭐든지.”
결국 은후가 모든 사실을 알아 버렸다니. 현은 안타까움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역시 은후가 돌아온 이유는 과거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어디로 총을 겨누고 있는지도.
두 사람은 그 후로 말없이 와인 잔을 몇 번이고 더 기울였다.

띠리링띠리링.
어제 과음을 한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난 은후가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 대는 벨소리에 온갖 짜증이 실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전화를 이제야 받아!
“무슨 일입니까?”
―오늘 저녁 6시. 차호텔.
아침부터 사람을 깨워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는 도희의 태도에 은후는 화를 꾸역꾸역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지만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또 맞선인 건가? 도대체 일주일에 몇 번을 몇 명의 남자와 만나고 다니는 건지. 정말 대책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전화길래 네가 존댓말까지 써 가면서 받아?”
출근 준비를 하던 현이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은후에게 물었다.
“있어. 내 열쇠.”
“열쇠? 그나저나 빨래 통에 너랑 어울리지 않는 옷들은 뭐야? 신발장에 가득 찬 구두는 뭐고.”
“형은 출근 안 해?”
은후는 대답을 회피한 채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현은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젯밤 은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 앞으론 형 자신을 위해 살아. 이제부턴 내가 할 테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은후가 이 일에 더 깊이 관여하기 전에 그를 뉴욕으로 보내야 한다고. 현은 그게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곤 욕실 안의 은후에게 인사도 남기지 않고 집을 나서면서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 번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그가 능숙한 영어로 말했다.
“지하나 씨 부탁드립니다.”
현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은후가 세계적인 무대에 서는 걸 얼마나 꿈꿔왔고 바랐는지 현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꿈을 포기 하지 않는 거. 그거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더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어젯밤 술에 취해 먼저 잠이 들었던 은후는 자신도 모르게 속 안에 있던 말들을 내뱉었었다. 현은 안쓰러웠던 은후의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나 다시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꼭…… 런웨이에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현의 표정에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가득했다.

“여기서 세워 주세요.”
차호텔 정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은후는 잔돈이 없는지 택시기사 손바닥에 십만 원짜리 수표를 아무렇지 않게 얹어 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압도하는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호텔을 올려다보던 은후의 시선이 잠시 잠깐 차호텔 로고에 머물렀다. 그는 애써 불편한 심정을 뒤로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무섭게 굳어 있는 그의 표정에 호텔 안을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마저 그를 피해 갔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전화도 안 받고. 도대체 어디로 오라는 거야.”
그는 벌써 이 넓은 호텔을 4바퀴째 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지하로 내려갔다. 은후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구겨졌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띵!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지하 5층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중년 남성 두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먼저 회색 정장을 입은 남성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검은 정장의 남성을 보필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상하관계가 분명했다.
은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이 열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침 은후의 시선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의 시선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검은 정장의 남성과는 달리 은후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이 경직되어 버렸다. 심지어 버튼을 누른 후 거두던 은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런 은후를 수상하게 바라보던 회색 정장을 입은 남성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비서. 도희한테 말해 뒀지?”
“네, 회장님. 안 그래도 오전에 전화해서 일러뒀습니다. 오늘만큼은 정말 잘해야 한다고. 신우그룹이 아니면 내년에 계획 중인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방법이 없다고.”
회색 정장의 김 비서는 말하면서도 뒤에 있던 은후를 경계하며 검은 정장의 차준식 회장에게 속삭였다. 은후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차 회장의 옆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내 김 비서가 안 되겠는지 뒤돌아서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차 회장이 내렸다. 김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차 회장을 뒤따라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점점 사라져 가는 차 회장의 뒷모습에 은후는 혼란스러웠다.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서 차 회장의 숨통을 끊어 놓고만 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도 은후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가 분노로 이성을 잃기 일보직전인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밖으로는 층수가 높아질수록 바깥 야경이 훤히 보이는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잠시 그 야경을 보며 분노를 가라앉히던 은후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바라본 후문 호수 쪽에서 낯선 남자와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있는 도희를 볼 수 있었다. 은후의 표정이 아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살벌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은후는 문득 김 비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의 의미를 되짚어 봤다. 무슨 프로젝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 진행하는 그 프로젝트에 신우그룹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고, 도희가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저 남자는 신우그룹의 아들이 분명했다. 고로 차 회장 뜻대로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계산이 되었는지 은후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1층 버튼을 눌렀다.

“손 놓으라고 이 자식아!”
인적이 드문 호텔 후문에 자리 잡은 인공 호숫가.
은후가 위에서 본 풍경과는 다르게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도희의 팔을 억지로 붙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싫다고 뿌리치려는 도희에게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잘나가는 모델도 아닌 주제에 튕기기는? 그런 거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오늘은 어른들이 마련해 준 우리 둘만의 시간이니까.”
“역시 소문이 맞았네. 그래 이래야 말이 되지. 신우그룹 이지원은 여자한테 환장한 미친놈인데. 그렇게 고분고분했을 리가.”
도희는 얼마 전에 만났던 눈이 선한 남자가 떠올랐다.
“뭐? 너야말로 소문대로군. 참 저렴해. 차 회장 핏줄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지? 하긴 그러니까 회사 경영에 널 껴 주지도 않고 네가 모델 나부랭이나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너도 날 잡아야 네 집에서 얼굴 들고 살지. 안 그래?”
그녀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져 버렸다. 엄마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나온 선 자리에서 도희는 매번 별 볼 일 없고 돈 좀 있다는 남자들에게 이렇듯 직업과 태생 때문에 싸구려 취급을 당해 왔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주특기인 막말과 인신공격으로 상대방 속을 박박 긁어 대는 건 다반사. 그나마 최근에는 전략을 바꿔서 은후를 바람잡이로 이용해 선 자리를 파토 내는 조용한 방법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참아 보려고 했다. 오전에 신우그룹과 관련해서 김 비서에게 들은 얘기도 있었고,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는 얼굴만 못생긴 것이 아니라 성격도 바닥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떨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다르게 도희의 입에선 막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날 이딴 식으로 건드렸단 말이지? 야, 돈 있으면 피부 관리나 받아. 그 분홍색 넥타이도 최악이고, 네 손에 낀 보석은 몇 백 원짜리 장난감 같아. 개 같은 새끼. 너 오늘 나 잘못 건드렸어.”
“뭐? 잘못 건드려?”
그녀의 막말에 자신의 피부와 넥타이를 더듬거리던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도희를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고 후문을 벗어나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거 놔! 놔!”
도희는 입으로 남자의 팔을 물고 뜯고 발버둥 치며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통 여자라면 울며불며 할 듯도 싶은 상황에서 그녀는 울지 않았다. 도희는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단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그리고 믿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 구해 줄 거라고.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달된 걸까?
“저 새끼는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