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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남자가 황당한 표정을 하며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고, 남자의 어깨 위에서 몸부림치던 도희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남자의 소유인 걸로 보이는 빨간색 고급 외제 스포츠카 앞에는 낡아빠진 운동화와 싸구려 옷차림의 은후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도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후의 시선이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 꽂혔고, 그는 저도 모르게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알 수 없었던 그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번져 가고 있었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당장 내 차에서 안 비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은후의 어깨를 밀치려고 손을 뻗었지만 재빠른 몸동작으로 은후가 남자의 손목을 꺾어 버렸다. 손이 뒤로 꺾인 남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몸을 배배 꼬았고, 그 틈에 도희는 남자의 어깨에서 내려와서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은후 옆에 섰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더러운 똥파리 한 쌍을 보듯 비웃음 치며 남자는 본격적으로 싸움판을 벌이려는지 소매를 걷기 시작했다.
“아. 이런 거였어?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첩의 딸과 그런 여자 등쳐 먹고 사는 거지새끼!”
은후는 예고도 없이 날아온 남자의 주먹에 얼굴을 맞아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가지고 놀아? 야, 이 걸레 같은 년아. 이리 와!”
이번에는 남자가 도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쓰러져서 피가 터진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든 은후는 평소답지 않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성이 마비가 된 채로 일어나 남자의 허리를 발로 차 버렸다. 남자는 도희 옆으로 고꾸라져 바닥을 나뒹굴며 온갖 협박과 욕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은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뒹구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끌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끅끅거리며 피를 토해 내는 남자가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은후는 무자비하게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뒤에서 지켜보던 도희는 평소와는 많이 다른 그의 모습에 당황해하며 서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나 때문일까? 그렇다면 기쁜 일인데 도희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주먹을 휘두르는 그는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치 그에게 내가 아닌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지원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건 절대로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도희가 소리쳤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이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잡고 있던 남자의 멱살을 내려놓았다. 남자는 실신한 듯 스르륵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그가 느릿하게 일어나 고개를 들어 도희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 상한 곳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거슬렸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뒤돌아 후문 쪽으로 향했다. 은후도 손에 묻은 피를 외투에 아무렇게나 닦아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너 일부러 그랬지?”
갑자기 멈춰 서서 뒤로 돌아선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은후가 짐짓 당황했다. 일부러 그랬냐는 질문의 반은 긍정이었고 반은 충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그 표정은? 진짜 일부러 그런 거야? 나 뒷감당하기 힘들게? 어?”
“그럴 리가요.”
“근데 왜 오버하고 난리야. 그냥 겁만 줬어야지! 오늘만큼은 무사히 끝내고 집에 갔어야 했다고!”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요? 아. 그깟 오디션 볼 수 있는 기회? 차도희 씨가 애예요? 엄마랑 그딴 거래나 하게?”
“그깟 오디션? 네가 뭔데 그딴 식으로 말해? 네가 뭘 안다고!”
굳어진 표정의 도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은후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만하죠.”
이번에도 먼저 돌아선 건 은후였다. 그는 도희에게 등을 보인 채 점점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울컥해 버린 도희는 자꾸만 아려 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짜증나! 고용한 사람은 난데. 왜 매번…… 내가 왜 저 자식한테 끌려가는 거 같지?”
도희는 신경질적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재빨리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골목을 내려가고 있는 그를 간신히 지나쳤다. 룸미러로 그의 모습이 보이자 애써 시선을 돌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도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는 결국 차를 후진시켰다.
후진해서 다시 돌아오는 차를 보고도 그냥 골목을 내려가려는 은후를 본 도희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배고파.”
그가 멈춰 섰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취직도 시켜 줬는데 밥 한번 사야 하는 거 아니야?”
도희는 자신이 말하고도 참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분명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차키를 은후에게 던져 주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저 여자 이번에는 무슨 속셈인 걸까? 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차에 올라탄 그녀를 보던 은후가 한번 두고 보자는 얼굴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적당한 크기에 사람들도 적당히 있는 분식집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은후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그와 마주 보고 앉은 도희는 은후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그에게 물었다.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나 때문이라면 나가죠.”
“푸하하. 너 때문이라니? 난 그저 떡볶이가 먹고 싶었을 뿐이거든?”
사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희는 은후와 한 번쯤은 같이 밥을 먹고 싶었다. 굳이 이유를 붙여 보자면 가난한 저 남자가 끼니는 거르지 않을까 걱정도 됐었고, 겉으로는 틱틱거리고 정 없게 굴어도 도희에겐 측은지심이라는 게 있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여자. 그건 어렸을 적 불우하게 자란 가정형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과거사를 은후는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오만과 허영심에 찌들어 있는 건방진 여자라고만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도희는 그를 마주 보지 못한 채 메뉴판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은후는 대략 난감했다. 사실 도희와는 다르게 뼛속부터 로열 패밀리였던 그는 분식집은 난생처음이었다. 특히나 매운 것은 질색을 하는 편인데. 도희는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뭐하고 있어? 난 떡볶이. 어서 주문해.”
도희의 재촉에 은후가 익숙한 것처럼 아주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바쁘게 달려와 그와 그녀가 어색하게 앉아 있는 테이블에 물과 컵을 내려놓았다.
“주문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떡볶이 주세요.”
은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을 한 모금 마시던 도희가 그를 흘기며 재빨리 외쳤다.
“저기 순대두요! 오뎅도! 김밥도!”
“1인분씩 드릴까요?”
아주머니의 물음에 은후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두 명인데 2인분씩 주세요.”
은후의 대답에 도희는 저 남자가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말렸다.
“먹다 죽을 일 있어? 1인분씩 주세요!”
은후는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도희를 보았고. 도희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를 흘겨보았다.
저 남자 혹시? 밥을 굶고 다니는 건가? 도희의 눈길이 안쓰럽게 변했다.
“왜 그렇게 봅니까? 그나저나 직업이 모델이라면서 스케줄 같은 거 없어요?”
“응. 없어.”
도희 모의 뇌물사건 때문에 스케줄이 몽땅 날아가 버린 도희는 사실 속이 말이 아니게 쓰렸다. 이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은후에게 보이는 것도 사실 쪽팔려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떡볶이가 나오고 도희가 먼저 한입 먹으며 그에게 물었다.
“근데 나한테 왜 자꾸 존댓말 하는 거야?”
“이게 편합니다.”
“하긴. 나도 이게 편하니까 계속 반말할게.”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 맛있게 먹는 도희를 은후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왜요?”
은후는 얼른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무심한 척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가 잠시 머뭇대더니 입을 열었다.
“호텔에서도 일용직이라 이름은 모른다고 하고.”
“내 뒷조사했습니까?”
은후가 화난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자 도희는 짐짓 당황했는지 얼버무리다가 오히려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그쪽 뭘 믿고 차를 맡기고 옆에 둬? 근데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이름, 나이, 사는 곳, 뭐 하나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
“나에 대해 왜 알고 싶은데요?”
“말했잖아. 고용주로서 알 권리는 당연히 있으니까.”
“그건 고용하기 전에 미리 알아봤어야죠.”
“뭐?”
“정말 그거 때문입니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민망했는지 도희가 굳은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고 급기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 가게를 나가 버렸다.
또 시작됐군. 귀찮은 표정으로 은후도 천천히 일어나서 계산대로 향했다. 지갑을 꺼내려는데, 그때 다시 가게로 들어온 도희가 지폐 몇 장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가게를 다시 나가 버렸다.
그녀를 따라 가게를 나온 은후가 달려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갑니까?”
“알고 싶어? 왜? 아. 오늘 일당 때문에? 넌 내가 돈으로밖에 안 보이지?”
“이봐요, 차도희 씨.”
은후가 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애써 웃으며 답했다.
“오늘 내 술 시중들면 일당 두 배로 줄게. 어때?”
독한 술을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정도로 많이 마신 도희는 취했는지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맞은편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은후는 그녀의 주정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패션 감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옷 살 돈이 없는 거야? 아하. 둘 다 없나?”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패션 감각을 지적하는 도희. 그가 평소에 자신이 그렇게 존경하고 만나보고 싶어 하던 은후 강인 줄도 모른 채 도희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 준 구두는 어쩌고? 어떻게 한 번을 신고 나온 적이 없냐고. 다 팔아 버린 거야?”
“아마도. 저랑 어울리지 않거든요.”
“그래…… 맘대로 해.”
도희는 속상했다. 구두 하나를 고를 때 적어도 반나절의 시간을 투자해 가며 얼마나 신경 써서 샀던 구두였는데.
“너도 내가 우습지?”
“아니요.”
진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하는 그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희가 쓰게 웃으며 양주를 입 안에 털어 버렸다. 알싸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내뱉어 버렸다.
“내 꿈 말이야…… 이뤄질 수 있을까?”
“차도희 씨 꿈이 뭔데요?”
“은후 강 패션쇼 메인 모델이 되는 거.”
뜻밖의 대답에 은후가 놀란 눈을 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희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그녀의 몸이 점점 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급기야 탁자 위에 머리를 박고 엎어져 버렸다.
디잉.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현이 회사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게에 들어섰다. 그리고 하필이면 은후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현은 은후와 눈이 마주쳤다. 현은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은후를 알은척하진 못하고 눈으로 그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은후는 원래부터 혼자 왔던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도희를 버려두고 가게를 나가 버렸다.
은후가 나간 뒤 현에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내 옆에 있던 여자 부탁해. 아마 아는 사람일 거야.]
문자를 확인한 현은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취해서 엎어져 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이봐요! 정신 차려 봐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도희가 고개를 돌렸다. 도희의 얼굴을 마주한 현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도희 씨?”
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고는 움찔거리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도희는 취기가 오른 눈동자로 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 이상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현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며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은후가 아니었다. 도희는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태 파악을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이미 만취 상태인 자신의 몸을 이기지 못하고 현의 품으로 엎어져 버렸다.
당황한 현은 그녀를 둘러업고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주차해 뒀던 자신의 차를 찾아 올라탔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차되어 있는 차 안에서 지켜보던 은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겁도 없이 아무 남자한테나 잘 안기네.”
그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기며 차에 시동을 걸고 도로를 질주했다. 자꾸만 현의 등에 업혀 가던 도희의 얼굴이 떠오르자 은후는 뭔가 크게 잘못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3. 변수
정신을 잃은 도희를 무작정 자신의 차에 태우긴 했지만 그녀의 집이 어딘지 심지어 그녀와 관계된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아니. 한 명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아버지인 차준식 회장.
현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차 회장 저택을 물었다. 비서는 평소 현이 개인적인 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없기에 의아해하며 차 회장 주소를 말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비서가 말해 준 차 회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은후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차림새로 도희에게 접근한 걸까? 차 회장의 딸이라는 걸 알고 접근한 걸까? 아니면 우연히 만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은후가 자신에게서 너무나도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현의 차는 벌써 차 회장 저택 앞에 도착했다.
차를 멈추고 조수석에 시체처럼 뻗어 자고 있는 도희를 바라보던 현은 그녀를 어떻게 깨워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결국 30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평소 시간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던 그가 말이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현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가 뒤척이기 시작했다.
“흐음.”
뒤척이던 도희는 눈을 번쩍 떠 버렸고 화들짝 놀란 현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 도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몸을 더듬으려고 한다고 여겼는지 심각한 얼굴로 몸을 가리며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납치? 아아악!”
“저기요! 차도희 씨! 저 기억 안 나세요?”
도희는 다급하게 해명하는 현의 모습을 보다가 이제야 그를 알아보았는지 모든 긴장이 풀어지며 납치당했다고 소리 지른 자신의 꼴이 웃겨 박장대소했다. 현은 갑자기 웃어대는 그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왜 웃어요?”
“오늘 진짜 이지원을 만났거든요.”
그녀가 피씩 웃었다. 그러자 현은 사뭇 당황한 표정으로 가짜 맞선남 행세를 했던 일을 사죄했다.
“그날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계속 놓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내 잘못이죠 뭐.”
맞선남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도희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근데. 그쪽이 왜 나를?”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현은 태어나서 몇 번 해 보지도 못한 거짓말을 횡설수설하며 늘어놓기 시작했다.
“술집에 혼자 쓰러져 있더라고요.”
“혼자요? 내 옆에 아무도 없었고요?”
“네.”
“회색 카디건에 청바지 입은 남자가 없었다고요? 키 크고…….”
“없었어요. 아무도.”
현의 말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 도희. 현은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 봐 그녀의 표정을 살피기 바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쾅! 하고 차문을 열고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도희가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 버렸다.
“들어가세요.”
현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술 취한 자신을 데려다 준 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다. 하물며 현이 가짜 이지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현의 정체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덕분에 자신이 누구냐고 물을 경우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잠깐 고민에 빠졌던 현으로선 김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한동안 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있을 동안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마당을 걷던 도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짜증나.”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술에 취해 널브러진 자신을 두고 그냥 사라진 그가 너무 미웠다. 힘없이 집으로 들어온 도희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인사도 없이 쿵쾅 발소리를 내며 2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식사를 하고 있던 차 회장이 못마땅한 듯 혀를 내차자 도희 모인 은영이 반찬을 깨작이다가 차 회장 왼쪽에 앉아 밥을 먹던 희주를 힐끔 바라봤다. 뭐라도 해 볼 것을 요구하는 은영의 눈과 마주친 희주가 애써 그녀의 눈빛을 피해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대회 일로 도희가 많이 속상한가 봐요. 아버지가 도희 좀 도와주세요.”
“신우그룹. 그게 내가 저 애한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근데 감히 지가 주제도 모르고 신우그룹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