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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은영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난처해하던 희주가 서둘러 답했다.
“그 결혼은 아버지를 위한 거지 도희를 위한 게 아니잖아요. 제 말은 도희가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요.”
“입 다물지 못해? 넌 네 일이나 똑바로 해.”
강압적인 차 회장의 말투에 희주는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입 안에서 밥알이 사방으로 굴러다녀 섞여지지 않았다. 억지로 꿀꺽 삼켜내는 희주를 못마땅하게 보던 은영은 안 되겠는지 표독스러운 표정을 고쳐 애처로운 눈빛으로 차 회장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여보…….”
은영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차 회장은 자신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서 죽은 듯이 밥을 먹던 희주가 조용히 일어나 부엌을 나가 버렸다. 2층으로 올라간 희주를 확인한 은영은 이제야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우리 도희 이대로 내버려 둘 거예요?”
“그게 또 무슨 소리야!”
“희주가 도희처럼 모델이니 뭐니 한다고 했어도 이렇게 가만히 있었겠냐구요.”
“도희가 원한 일이야.”
“그래서 기쁘시죠? 나눠 먹기 안 해도 되니까.”
“어허! 이 사람이!”
“부탁이 있어요. 당신 유산 우리 모녀는 관심도 없으니까 내 딸 최고로 만들어 줘요. 도희가 하고 싶은 일에서 최고가 되게 도와줘요.”
차 회장이 은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심이었다. 하긴 딸이 잘되는 일이라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여자니까. 딸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여기까지 온 여자니까.
차 회장과 은영의 대화를 2층에서 듣고 서 있던 희주는 애써 웃으며 자신의 방에서 포스터 한 장을 챙겨 들고 복도 끝 방으로 향했다.
“들어갈게.”
희주가 조심스레 도희의 방문을 열었다. 껌껌한 방 안. 벽 쪽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은 희주는 불을 켜며 도희를 불렀다.
“도희야, 얘기 좀…….”
불을 켠 희주가 화들짝 놀랐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도희가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급기야 변기통을 잡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토를 하는 것이었다. 놀란 희주가 달려가 도희의 등을 두드렸다.
“우웩! 으윽……!”
“뭐 잘못 먹었니? 생전 밤에는 먹지도 않더니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저리 치워!”
도희가 희주의 손을 뿌리치고는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그 옆에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희주. 도희가 귀찮은 표정으로 희주를 흘겼다.
“안 나가고 뭐해?”
“도희야. 뇌물 사건 얘기 들었어. 네가 얼마나 속상할지 잘 알아.”
“알긴 뭘 알아? 착한 척하지 말고 나가.”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모델 콘테스트가…….”
“왜? 이번엔 언니가 뇌물 먹여 주게?”
“너 정도면 그런 거 없이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어. 넌 런웨이 위에서 가장 빛이 나니까.”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희주를 도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희주가 말하니 불편하기만 했다. 도희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그건 언니 희망사항이겠지. 내가 런웨이에 있어야 언니 자리가 더 커지는 거잖아. 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회장님도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겉으론 나를 위해 주는 척 내 꿈을 지지하는 척…… 연기하지 마. 구역질 나니까.”
“도희야.”
“위선 그만 떨어. 확 KW패션에 차그룹 스파이 차희주 씨가 있다고 불어 버릴 테니까.”
싸늘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말하던 도희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희주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품에 안고 있던 포스터 한 장을 방문에 꽂아 놓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희주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도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괴로웠다. 가시를 세우는 것도 이제 지쳐만 갔다.
도희는 어렸을 적부터 언젠가는 이 집에서도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하루하루를 살아왔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온전히 내 것 하나 없는 이 집.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괴로운 이유는 바로 그 남자, 은후 때문이었다. 도희는 다시 한 번 핸드폰을 들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연결음만 들릴 뿐 숨소리만으로도 심장을 미친 듯 뛰게 만들던 중저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희는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 사는 곳이라도 알았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텐데 아마 이대로 그가 사라진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희는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도희는 아무래도 어제 먹은 것들이 탈이 났는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침대 위에 한참을 누워 있던 그녀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운동을 나가기 위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은영이 약과 물이 든 컵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가려는 도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을 막아섰다.
“몸도 안 좋은 애가! 운동은 무슨 운동이야! 오늘은 좀 쉬어!”
“오늘 쉬면 내일은 없어.”
“하여간 저 독종. 잠깐 이리 앉아 봐.”
비틀거리며 운동을 나가려는 도희를 끌어다 침대에 앉히는 은영. 그녀는 손에 든 포스터를 도희에게 내밀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번에 KW패션에서 모델 콘테스트가 있대. 희주 그 기집애가 얘기해 준 건데, 이 콘테스트의 1등을 유명 디자이너 메인 모델로 발탁할 거라더라!”
은영의 말에 도희가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내가 운이 아주아주 좋아서 1등 했다고 쳐보자.”
“그래그래, 내 딸은 할 수 있어!”
“언니가 그 회사 다니는 이상 1등은 의미가 없어. 또 비리 어쩌고 하겠지. 나보고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지라고?”
“하여튼 희주 고것이 어딜 가나 문제야. 그러지 말고 도희야. 이참에 네가 차그룹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
“엄마, 욕심 부리지 마. 그 욕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 보면 모르겠어?”
“도희야! 난, 이 엄마는 네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내 실력으로도 충분했어! 돈 같은 거 안 찔러 줬어도 충분했다고. 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그만둬. 나간다.”
도희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방을 나가 버렸다.
근처 공원으로 향한 도희는 달리기 시작했다. 공원 산책로를 걷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황금비율의 몸매인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스키니하게 몸에 밀착된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녀.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달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마치 화보 촬영장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도희는 그런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엔 그 남자.
그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전화는 왜 받지도 하지도 않는 걸까? 밥은 먹었을까? 또 어디선가 돈을 벌기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왜 이런 생각 때문에 미치겠는 걸까?
얼마나 달렸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심각한 갈증이 느껴졌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팽창되어 곧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괴로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제일 견디기 힘든 고통은 이 원인 모를 답답함이었다. 왜인지 어디서부터인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 올라와 미칠 것만 같았다.

“일어나! 강은후!”
현은 어제 저녁 도희를 데려다 주고 급하게 집으로 달려왔지만 은후는 이미 잠이 든 후였다. 현은 아침까지 은후가 깨어나길 기다리다가 결국 못 참고 그를 흔들어 깨웠다.
“나 어제 너한테 한마디도 못 들었어. 얼른 일어나서 설명해 봐.”
피곤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앉아 눈을 비비적거리는 은후가 현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슨 설명?”
“네가 말한 열쇠라는 게 어제 그 여자 맞지? 근데 어째서 차도희 씨야?”
“차준식 회장 딸 차도희. 설명됐지?”
현은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절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은후를 타일렀다.
“차도희 씨는 차 회장 친딸이 아니야. 근데 왜…….”
“알아. 차희주는 형이 잘 감시해. 우리 그룹 패션 쪽에서 일하고 있다며? 최근 그룹 인재들 차그룹으로 이동한 것도 그 멍청한 여자 짓일 거야. 물론 차 회장이 시킨 대로 했겠지만.”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왜 차도희 씨냐고.”
“차희주보단 차도희 쪽이 훨씬 쉬운 게임이니까. 시간 아껴야지. 형이 목숨같이 생각하는 그 시간.”
은후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현이었다. 만약 은후가 어떤 목적을 갖고 이용할 여자라면 차희주 쪽이 훨씬 쉬울 것이다. 희주는 사람 말을 잘 믿고 잘 속는 반면에 도희는 사람에게 쉽게 정을 주지 않으며 의심이 생활인 여자였다. 현도 그녀들을 많이 만나 본 건 아니었지만 주변인들에게 익히 들어 그 둘의 상반된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아무 죄도 없는 여자를 끌어들여?”
“문만 열고 버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
싸늘했다. 공기마저 기겁을 하게 만드는 싸늘한 목소리로 은후가 말했다. 현은 무서웠다. 그런 형의 표정을 읽었는지 은후가 현의 어깨를 잡았다.
“금방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날 믿어 줘.”
현은 은후의 우수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그의 목에서 반짝이는 목걸이에 시선을 돌렸다. 열쇠 모양의 목걸이.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그 목걸이. 어쩌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는 저 목걸이.
드르륵. 드르륵.
은후와 현이 동시에 식탁 위 핸드폰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계속 울려 대는 핸드폰을 보던 현은 한 템포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는지 턱 끝으로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받아.”
식탁으로 향한 은후는 받을 생각이 없는지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는 식탁 위 차려진 아침 밥상에 앉으며 토스트를 먹으려다가 핸드폰을 보더니 밥맛이 떨어진 모양인지 도로 내려놓았다. 그런 은후를 보고 있던 현이 은후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너 그러다가 차도희 씨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면 어떡할래?”
“무슨 소리야?”
“모든 일에는 항상 변수라는 게 존재하는 거야. 차도희 씨가 네 뜻대로만 움직여 줄 것 같아? 그리고 너도 네 뜻대로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냐고.”
“아침부터 초치는 소리 그만하고 출근이나 하시죠? 강 이사.”
은후는 짜증이 가득 실린 얼굴로 현을 식탁에서 끌어내 재킷을 입히고 밖으로 내보냈다. 출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은후 때문에 집을 나서지 못하고 있던 현에 대한 나름의 배려도 있었다.
그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은후는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의 전원 배터리를 아예 분리시켜 버렸다.

한편 현이 출근한 뒤 고급 세단 한 대가 현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차 안에서는 40대 후반의 기품이 철철 넘치는 화이트 투피스를 입은 강 회장이 내렸다.
금세 다시 현관문이 열리자 은후는 당연히 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봐요, 강 이사. 진짜 출근 안 할 거……야?”
은후가 말끝을 흐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현이 아니라 자신을 길러 준 양어머니 강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그래. 돌아온 건 이미 알고 있었고.”
강 회장이 힘 있는 말투로 대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돌아온 이유는? 결정을 내린 거겠지?”
강 회장의 물음에 은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전에 먼저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요.”
“무슨 물건?”
“돌아가신 어머니가 저한테 남기신 유품이 하나 있어요. 이 목걸이에요.”
은후의 말에 강 회장은 기억을 더듬다가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바로 은후의 친모가 목에 걸고 있던 열쇠 모양의 목걸이였다. 지금 은후가 목에 건 목걸이와 같은 거였다. 강 회장은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은후가 입을 열었다.
“뉴욕에서 우연히 차 회장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그 사람의 집에서 이 열쇠로 열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죽기 직전 저한테 이걸 넘겨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전 그것부터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 그 집엔 무슨 수로 들어가겠다는 거니? 도둑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강 회장은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모든 자초지종을 은후에게 말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먼저 물어온 건 은후였다. 때문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은후야, 잘 듣거라. 다음 달에 KW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열 거야.”
50주년이라는 말에 은후가 놀란 얼굴로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20년 전 차 회장에 의해 KW가 차그룹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강 회장은 패션사업을 기반으로 새로운 KW를 만들어 성장시켰다. 때문에 현재의 KW 창립기념 행사를 한다면 마땅히 20주년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창립 50주년이라니, 그 속에는 현재의 차그룹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날 네 취임식도 할 거야. 그리고 다음 주부터 큰 프로젝트가 진행될 거다. 모델 콘테스트를 네 이름을 걸고 할 거야. 이 프로젝트로 대한민국 그 어떤 기업도 패션 사업에선 우릴 넘어설 수 없게 되겠지. 우리에겐 세계적인 디자이너 은후 강이 있으니까.”
“어머니.”
“그 콘테스트 우승자를 네 쇼의 메인 모델로 발탁해서 키울 생각이야. 한국에서의 네 첫 번째 런웨이는 취임식에서 열리게 될 거고.”
“그다음은요? 우리가 패션 쪽을 키우는 거. 그리고 차그룹을 다시 찾아오는 거. 그게 무슨 관련이 있어요?”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다.”
강 회장이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차 회장이 KW그룹이 잘되는 꼴을 그냥 두고만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콘테스트로 KW패션이 한국시장은 물론 세계시장에서도 선두 주자가 된다면 차 회장은 무리를 해서라도 차패션을 정상에 올리려고 혈안이 될 것이 뻔했다. 강 회장은 그걸 노린 것이었다. 강 회장은 강 회장대로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워 나갈 때 은후도 곧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제 모델을 뽑는 콘테스트라고 하셨죠? 그럼 저한테 다 맡겨 주세요.”
“물론.”
강 회장은 대환영이었다. 은후가 회사 일을 배워 보고 싶다는 말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제 신분은 비밀로 한 채 콘테스트 스태프로 참가해서 돕고 싶어요. 무대, 조명, 촬영, 제작에 전반적으로 참여해서 제대로 된 쇼를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허락해 주세요.”
“스태프? 그건 안 된다. 왜 디자이너인 네가 허드렛일까지 한다는 거야?”
“제 모델을 선발한다면 그 콘테스트도 제 쇼예요. 제 쇼를 만드는 일을 허드렛일로 치부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세요.”
세계적인 디자이너답게 쇼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이는 은후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 회장이 웃어 버렸다.
“하하하. 그래 너도 다 생각이 있었을 텐데 내가 괜한 우려를 했구나. 이번 콘테스트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참가자 모집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죠?”
은후의 물음에 강 회장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마감되었겠구나. 자. 이제 사업 얘기는 그만하시죠 아드님.”
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업가 모드에서 자상한 어머니 모드로 변한 강 회장이 그에게 물었다.
“약혼자는 언제 보여 줄 거야? 할리우드 배우라니 우리 아들 대단한 걸?”
“평생 보여 드릴 일 없을 겁니다. 제 존재를 드러내는 건 상관없지만 가장 걱정인 게 지하나예요. 그 사람이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은후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을 상상하고 말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뉴욕 시내에 위치한 병원 VVIP병실.
이곳이 호텔인지 병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인테리어나 장식품들이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 특히 창가에 서면 뉴욕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경치가 인상 깊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와는 달리 병실 안은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창가 옆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여자의 가녀린 팔목에 꽂힌 주삿바늘 속으로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링거 바늘이 꽂힌 오른쪽 팔목이 아닌 여자의 왼쪽 팔목엔 칼로 새긴 듯한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끔찍한 상처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자는 긴 생머리에 티 하나 없이 곱고 흰 얼굴로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 여자가 바로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동양인 최초로 미국 드라마의 주연을 맡아 활약하며 신인상까지 받은 지하나였다.
쾅!
그때 침묵을 깨고 누군가가 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그는 동양인인데도 불구하고 서양인에게 밀리지 않는 남다른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조직의 보스이자 지하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키워 낸 장본인 허진. 진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영어로 소리쳤다.
“당장 들어와!”
진의 굵직한 목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금발의 덩치 큰 조직원들이 의사를 끌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진은 마치 지금 당장 살인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한 눈빛으로 의사를 제압했다.
“경고했을 텐데? 내일 촬영 스케줄 있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여자 눈뜨게 만들라고.”
백발의 늙은 의사가 두려움이 가득 찬 눈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 분명 바이탈은 정상인데. 환자 본인이 지금 아무래도…… 깨어나는 걸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만…….”
의사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진은 조직원들에게 눈빛으로 의사를 끌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조직원들에 의해 의사가 밖으로 쫓겨나고 진은 터벅터벅 지하나가 누워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지하나의 팔에 꽂힌 주사를 뽑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쨍그랑!
덕분에 링거액이 든 병이 바닥으로 넘어져 깨져 버렸고,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지하나의 팔목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흰 침대 시트를 적셨다. 하지만 지하나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반응에 진은 더욱더 화가 나 날뛰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진은 익숙한 한국말로 소리쳤다.
“일어나. 쇼는 끝났어. 네가 죽는다고 해도 강은후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넌 버림받은 거라고!”
이번에도 역시 지하나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진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화보 촬영에 걸린 계약금이 얼만지 알지? 그 계약 깨지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도 잘 알 텐데?”
진의 얼굴에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진은 갑자기 돌변해 무섭게 구겨진 얼굴로 지하나의 목을 조르며 소리쳤다.
“일어나! 당장!”
점점 핏기가 없어지는 지하나의 얼굴과 마주하자 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진은 그녀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 지하나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지금 당장 눈을 뜨지 않으면, 이번엔 정말로 강은후 그 새끼 찾아서 죽여 버린다.”
이쯤 되면 벌떡 일어나서 발악이라도 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지하나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은 정말 그녀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의료진을 부르기 위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조직원 한 명이 급하게 들어왔다.
“보스! 한국에서 강현이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었답니다. 강은후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지하나 씨를 연결해…… 읍!”
진은 서둘러 조직원의 입을 틀어막고 지하나 쪽을 의식하며 조직원을 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이 쾅 닫히고 얼마 있지 않아 지하나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하나의 긴 속눈썹이 들어 올려지며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는 그녀의 마른 입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