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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천장만 바라보던 은후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디자인 때문에 벌떡 일어나 작업실로 향하였다.
강 회장이 돌아간 뒤 그렇게 오후 내내 미친 듯이 일에만 열중하던 은후는 문득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0분.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버렸다. 오전에 강 회장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뒤늦게 저녁식사 약속이 떠오른 그는 급하게 옷을 걸치고 집을 나와 지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를 끌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은후는 급히 차를 몰았다. 그가 도로를 질주하며 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나 조금 늦을 것 같은데.”
―그래.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때였다. 쾅! 끼이익.
미처 앞을 보지 못한 은후의 차가 좌회전하는 차량과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큰 사고는 아니었다. 은후는 한숨을 내쉬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고 놓쳐 버린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무슨 일이야? 사고 난 거야? 그러니까 서두르지 말라고 했잖아. 다치진 않았고?
“별거 아니야. 일단 어머니랑 식사부터 하고 있어. 늦어질 것 같으니까.”
은후가 느긋하게 통화하고 있을 시간에 바깥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사고 난 차량의 주인이 차에서 내려 씩씩거리며 은후의 차로 달려왔고 문이 잠긴 채로 계속 통화만 하고 있는 은후를 지켜보던 차주인은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이봐요! 얼른 안 내려요? 사고 내 놓고 전화질을 해? 너 내가 여자라고 얕보는 거야? 뭐야. 야! 문 열어!”
창문을 두드리는 한 성깔 하는 그녀, 하영이었다. 도희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봐야 한다고 하영도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하영은 당장에라도 하이힐로 차 문짝을 깔 기세였다.
은후가 그제야 통화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려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하영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런데 가만있자? 이 남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하영은 이제야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분명 도희가 말한 그 남자가 분명한데. 차는 물론이고 차림새 또한 명품. 지금 그가 꺼내고 있는 지갑도 S브랜드 한정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영은 은후의 행동을 살폈다.

전통 한옥 몇 채를 룸 식으로 리모델링한 깔끔하고 멋스러운 한정식 식당의 앞마당에는 인공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서 전화통화를 끝마치고 뒤돌아선 현의 한숨 소리가 짙어졌다. 마당을 거닐며 룸으로 향하던 그는 걱정 말라는 은후의 말에도 신경이 쓰였는지 다시 한 번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강 이사 아닌가?”
현은 앞에서 들려오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했다. 현의 앞에는 차 회장이 서 있었다. 현은 별로 반가운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내가 강 회장을 좀 만났으면 했는데. 잘됐군. 강 회장도 여기서 저녁 약속이 있나 보지? 안에 있나?”
현은 행여 강 회장과 차 회장이 만나고 있는 사이 은후가 오게 될 것을 염려하여 핑계 거리를 억지로 만들어 내 차 회장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계시긴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바이어와 만찬이 있습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급한 볼일? 그렇다고 하면 강 회장을 만날 수 있는가? 지금.”
강 회장을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이는 차 회장에게 현은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며 하는 수 없이 그를 강 회장이 있는 룸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현은 조용히 나가 여닫이문을 닫았다.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차 회장과 강 회장.
공적인 자리에서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사적인 자리는 처음이었다. 먼저 차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번 KW에서 모델 콘테스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강 회장은 차 회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기 시작했다.
“이번 콘테스트 차그룹이 전폭적으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차그룹 협조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저기 차 회장님 본론만 말씀하세요. 저를 왜 찾아오신 거죠?”
“그 대회 접수가 오늘까지라고 하던데. 제 딸애가 몸이 안 좋아서 접수를 못한 모양입니다.”
“하하하. 천하의 차 회장님이 저한테 지금 청탁을 하시는 건가요?”
“제 가정의 평안을 위해 한 번 눈감아 주시죠. 허허.”
가정의 평안? 20년 전 남의 가정 풍비박산을 낸 장본인이? 강 회장이 가소롭다는 듯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물론 강 회장의 비웃음을 차 회장은 다 느끼고 있었다. 수치스러웠지만 은영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강 이사!”
그때 강 회장이 밖에 있던 현을 불렀다. 곧 현이 들어왔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강 회장이 말했다.
“차 회장님 따님 명단에 올려.”
“저기 회장님.”
당황스러운 현의 목소리에 강 회장과 차 회장이 동시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밖에서 모든 얘기를 듣고 있던 현은 접수처에 전화를 해 명단을 살펴보게 했다.
확인결과는 뜻밖이었다.
“차도희 씨 오늘 접수하신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4. 해고


“현아, 너도 차 회장 표정 봤지?”
강 회장이 아까 차 회장의 난처해하던 표정이 떠올랐는지 통쾌해 죽겠다는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현은 오래간만에 보는 고모의 웃음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감히 그 더러운 손을 어디다 뻗으려고. 아무래도 이번 대회 심사위원들 전부 갈아 치워야겠어. 차 회장 사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어.”
“믿을 만한 사람 있으세요?”
“은후, 그리고 너랑 나. 이렇게 셋이 하는 걸로 하지.”
“은후요? 고모님.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은후는 그냥 두세요.”
현의 단호한 말투에 강 회장이 찻잔에서 입을 떼며 뭔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자 현이 더 단단한 말투로 말했다.
“저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은후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자유롭게 그렇게 살았으면 해요.”
“은후가 선택한 길이야.”
“고모님이 권유한 길이겠죠. 부추겼겠죠. 아무것도 모르고 잘 살고 있던 아이를 왜…….”
“내 아들이다.”
“제 동생입니다!”
현의 입에서 처음으로 큰소리가 났다. 강 회장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현을 바라보았다.
“싸우지 마세요.”
하필 그 타이밍에 은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후의 표정으로 보아 이미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강 회장과 현의 시선이 은후에게 꽂혔다.
“형. 내가 선택한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어.”
현이 실망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은후를 바라보았다. 은후는 자리에 앉으며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애썼다.
“어머니. 형한테 얘기하셨어요?”
“네가 얘기하렴.”
강 회장이 모른 척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현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은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번 콘테스트 제작 총괄을 형이 맡았다며?”
“그런데?”
“보이는 건 형이 맡아. 난 보이지 않는 쪽을 맡을 테니까.”
“무슨 소리야?”
현은 화가 난 얼굴로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결국 시작되고야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롭던 은후의 영혼이 끔찍한 쇠사슬에 묶여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낙담한 현의 표정을 들여다보던 강 회장이 말을 돌렸다.
“이번 콘테스트 막대한 예산을 들인 만큼 걱정이 많았는데 은후도 그렇고 현이 네가 있어서 내 어깨가 든든하구나. 맞다. 참고로 차 회장 딸도 참가한다고 하니까 잘 주시하고.”
“차 회장 딸?”
은후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모델 콘테스트에 참가할 차 회장 딸은 분명 차도희 그 여자다. 심상치 않은 은후의 표정을 살피던 강 회장이 현을 보았다. 현의 안색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차 회장 딸을 알아?”
“전혀요. 형은 알아?”
“어? 아, 아니…….”
거짓말도 술술 잘하는 은후와는 달리 현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상해 보이는 현을 강 회장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때 재빨리 은후가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 차 회장 딸이 참가했다면 차 회장이 무슨 짓을 꾸밀지도 몰라요. 심사위원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역시 내 아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리고 현아 넌 내일 보도 자료 뿌리고.”
“네.”
현은 불안한 눈빛으로 은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형의 눈빛을 은후는 모른 척해야만 했다. 은후가 이번 콘테스트에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한국에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패션계열사 중 KW패션을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거기에 차 회장이 미끼를 물고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것.

“당신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내가 강 회장 그 독사 같은 여자 앞에서 무슨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차 회장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영에게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은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차 회장을 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도희는 집에 있는 거 확실해? 그 대회 오늘 접수했다더군.”
“네? 아침운동 다녀와서 방 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는 애가 무슨 수로 접수를…….”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은영.
그때 현관문을 열고 희주가 들어왔다. 품 안에는 회사라도 때려치운 사람처럼 짐 박스를 안고 들어오다가 차 회장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너! 네가 기어코!”
차 회장이 희주를 향해 소리쳤다. 희주는 각오를 했는지 심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박스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못하겠어요. 동료도 적이고 상사도 적이고 온통 적인 사람들뿐이잖아요”
“내가 널 직장 동료나 사귀라고 KW패션에 보낸 거라고 생각해?”
“아버지.”
“차패션을 KW패션만큼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 말해 봐.”
“…….”
“당장 짐 도로 갖다 놔. 넌 아직 멀었어.”
“이미 사표 제출했어요.”
“이게!”
급기야 차 회장의 손이 희주의 뺨을 내리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은영이 차 회장을 만류했다.
“여보, 진정해요. 일단 들어가세요. 희주 너도 올라가 봐.”
은영이 차 회장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희주의 벌겋게 부어오른 뺨 위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긴 왜 울어?”
2층 계단에서 상황을 지켜본 도희가 희주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거 알아? 매를 버는 스타일인 거?”
도희는 말을 하고 난 뒤 희주의 부어오른 뺨을 보았다. 괜히 미안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다용도실로 간 도희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잔도 꺼내려다 말고 그냥 병째 들이마셔 버렸다. 그런 도희의 팔을 제지한 건 희주였다.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몸 관리 잘해야지”
“무슨 대회? 지금 누구 놀려?”
희주가 도희에게 참가신청서 한 장을 내밀었다. 바로 어제 희주가 말했던 KW패션모델 콘테스트 참가신청서였다. 희주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낚아채 자세히 보던 도희가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뭔데 네 맘대로 날 대회에 내보내?”
“나 회사 관뒀어. 이 대회는 누명 같은 거 쓸 일 없어. 그러니까 두려워할 거 없다고.”
“와. 누가 들으면 나 때문에 회사 그만뒀는지 알겠어? 네 양심에 찔려서 도망쳐 나온 거면서.”
“그래. 너 때문에 그만둔 건 아니야.”
사실 희주가 회사를 그만둔 건 죄책감 때문도 맞았지만 도희가 걱정되었던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희주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도희는 이런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희주가 위선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친. 착한 척하지 마. 안 속아.”
도희가 참가신청서를 구겨 집어 던지며 와인 병을 손에 든 채 희주를 지나쳐 다용도실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희주가 너무나도 태연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후 강. 이번 대회에 올지도 몰라.”
희주의 말에 도희가 뒤돌아섰다.
“누구?”
“네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디자이너 은후 강.”
도희가 들고 있던 와인 병을 손에서 놓쳐 버렸다. 희주의 입에서 나왔다면 100% 신뢰할 수 있는 정보였다. 그리고 희주가 그런 일로 거짓을 말할 리도 없었다. 도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대회 도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네가 날 얼마나 원망하겠니. 그게 두려웠을 뿐이야. 난 네가 무섭거든. 착한 척하는 거 아니야. 난 겁쟁이일 뿐이니까.”
희주가 축 처진 어깨로 기운 없이 도희를 지나쳐 다용도실을 나가 버렸다. 도희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얼마 전 외국 언론을 통해 그가 한국에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성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도희는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진짜? 은후 강이 한국에?
다음 날, KW패션모델 콘테스트의 우승자는 은후 강 패션쇼의 메인 모델로 발탁되어 활동한다는 보도 자료를 확인한 도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살면서 이렇게 간절하게 우승이 탐났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도희는 대회가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한 가지가 계속 그녀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바로 그 남자. 연락이라도 되면 당장 만나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당신 때문에 내 일에 몰두할 수가 없어, 라고 속 시원하게 내뱉고 그딴 놈 깨끗하게 잊어버릴 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를 향한 그리움만 더욱 커져 갔다.
운동을 하다가도 그와 닮은 뒷모습을 발견해 미친 듯이 헤매고, 밥을 먹다가도 행여 그가 끼니를 거르진 않을까? 생각하다 문득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깟 남자 때문에 내 인생에서 최대로 중요한 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정신 차려 차도희!
그녀는 자신을 끊임없이 어르고 달래며 그렇게 지옥 같았던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대회 당일이 되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운전석에 앉은 낯선 남자가 뒷좌석에 앉은 도희에게 물었다.
“너 때문에.”
“네?”
“합숙소까지만 동행하는 거 맞지? 우리 엄마랑 헛수작 부리는 거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네.”
한눈에도 딱 어수룩하게 보이는 20대 초반의 남자가 느닷없는 그녀의 반말세례에 잔뜩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남자는 은영이 보낸 경호원이었다. 말이 경호지 짐꾼이나 다름없었다.
“사모님이 아가씨 가시는 길 편안하게 모시라고. 그러니까 눈 좀 붙이세요.”
“이름이 뭐야?”
“서은신이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 나보고 댁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편히 자라고?”
“제가 이래봬도 공채거든요. 믿어 보세요!”
이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나불대는 게 심상치가 않다고 느낀 도희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근데 차 앞에 흠집이 나 있던데 수리 안 하세요? 제가 해 드릴까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놔둬. 그거 수리해 줄 사람 따로 있으니까.”
“제가 이래봬도 웬만한 자격증 다 있…….”
“닥쳐! 조용히 좀 가자.”
“네.”
은신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룸미러로 도희의 행동을 살피던 중 거울 속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은신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죽을 맛이었다. 은신은 앞으로의 고난을 어떻게 이겨 낼지 막막했다. 사실 은신은 은영이 보낸 24시간 경호원이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은신도 은후와 같이 스태프로 위장하여 도희를 감시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어제 운동을 무리하게 한 탓일까? 도희의 정신이 아늑해졌다.
한참이 지난 후 합숙소에 도착한 도희는 은신에게 짐을 넘겨받고 강당 안으로 향했다.
1차와 2차 예선을 거쳐서 선발된 80여 명의 모델이 오늘부터 서바이벌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행사는 간단한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다.
“이번 대회만큼은 더러운 비리와 청탁이 없는 깨끗한 대회가 되길 바랍니다.”
라고 말한 여자는 바로 얼마 전 도희와 호텔 프런트에서 육탄전을 벌인 사다원이었다. 사다원은 자기소개를 끝내고 내려와 도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넌 내 말이 우습니?”
사다원의 물음에 도희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변명 같겠지만. 나도 너만큼 절실했어. 매 대회마다. 그리고 그 엎어진 대회도.”
“닥쳐!”
역시 사다원의 귀에는 변명으로 들렸는지 간신히 누르고 있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입에서 큰소리가 터졌다. 주변 동료들이 힐끔거리며 도희 쪽을 비난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대회 네 발로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난 이번 대회에도 목숨을 걸었어. 이것마저 네가 망치는 꼴 못 보겠거든?”
사다원은 도희의 어깨를 무겁게 치며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도희는 착잡한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앉아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사다원이 이 대회에 목숨을 걸었다면 도희는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영혼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기소개가 끝날 때마다 예의상 쳐 주던 박수 소리가 도희의 차례에서만 들리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이동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계속되었다. 얼마 전 뇌물 사건 때문에 도희의 평판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희는 자존심이 상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대회만큼은 런웨이에 당당히 서고 싶었는데. 순간 불안이 엄습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