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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첫 번째 일정은 프로필 촬영이었다. 도착한 곳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합숙소 근처의 강.
강 위의 웅장한 다리에서 이미 앞 조의 촬영이 끝나가고 있었다. 도희가 속한 5조는 대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촬영하고 있는 사진기자 옆 보조를 서고 있는 남자가 도희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확실했다.
그 사람이 확실했다.
그 남자가 확실했다.
“스태프 맞아? 완전 연예인 같아.”
대기 중인 5조 조원들이 촬영 중인 다리 쪽으로 모여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확실히 일반인들 사이에서 튀는 기럭지와 인물이긴 했다. 갑자기 촬영장 주변이 어수선해지자 은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그런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은후가 정색을 하며 모자를 눌러쓰며 주변에 모여든 모델들을 지나쳐 촬영장 뒤쪽으로 이동했다.
“야.”
촬영 도구를 챙기던 은후의 귓가에 익숙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은후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곧 표정을 굳히고 그녀를 무시한 채 도구를 챙기고 가방을 들고 뒤로 돌아섰다. 은후의 예상대로 뒤에는 도희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화가 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
“전화는 왜 안 받아?”
“…….”
은후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처럼 안 들리는 사람처럼 도희를 지나쳐 갔다. 도희가 은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때 사다원이 나타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생각이 많은 얼굴로 도희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사다원을 본 은후가 도희의 팔을 뿌리치자 도희가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불러 세우려는데.
“5조 1번 차도희. 곧 촬영 시작이야. 의상 받아.”
사다원이 의상을 도희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그 와중에 은후는 사라지고 도희의 눈앞엔 그녀를 비웃고 서 있는 사다원만 남아 있었다.
“남자 밝히는 건 유전인가 봐?”
사다원이 심하게 비꼬는 말투로 도희를 긁어 댔다. 솔직히 호텔 프런트 사건으로 사다원의 사정을 알게 된 도희는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 되도록이면 그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다원의 행동은 도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일말의 동정심마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도희가 정신을 차리고 특유의 건방진 말투로 답했다.
“너도 우리 집 누구처럼 매를 버는 스타일인 거 알아?”
“뭐?”
“충고 하나 해도 될까? 너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대회에 목숨 걸었다며? 근데 넌 마치 날 이기려고 목숨 건 애 같아.”
“뭐, 뭐라고?”
“너 이 드레스도 나 입으라고 제일 후진 거 가져온 거지?”
정곡을 찔렸다. 사다원이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사이 도희는 멀리서 촬영장 세팅을 하고 있는 은후의 뒷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 촬영장 쪽으로 향했다.
난간이 없는 다리 위에서 5조 촬영이 시작되었다. 하필 1번인 도희는 지금 몇 번째 감독님에게 지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차도희 씨! 표정 좀 밝게! 밝게 좀 갑시다!”
신경이 온통 카메라 뒤쪽에서 모니터를 살피고 있는 은후에게 가 있으니 도희의 표정이 좋게 나올 리가 없었다. 시선 처리도 엉망. 딴 생각에 표정도 엉망. 그녀는 아마 지금 은후가 자신의 촬영 샷을 모니터로 확인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은후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도희와 눈이 마주쳤다.
은후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여자라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내 등을 보이고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희는 하마터면 촬영이라는 것도 잊은 채 은후를 따라 달려갈 뻔했다. 네 까짓 게 뭔데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냐며 따져 물을 뻔했다. 하지만 은후의 마지막 표정에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도희는 애써 눈을 꼭 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다시 촬영에 집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순백의 드레스 자락. 청초한 그녀의 얼굴. 아무리 불러도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차도희가 죽어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을 그를 향한 원망과 상처가 뒤덮인 눈.
“좋아! 오케이! 계속.”
감독은 도희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동시에 ‘풍덩’ 소리와 함께 도희는 강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어머 쟤 왜 저래? 미쳤나 봐!”
은후 옆을 지나가던 모델 한 명이 도희가 물에 빠진 장면을 보며 경악을 했다. 자신의 뒤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은후는 애써 마음속으로 귀를 틀어막고 모퉁이 돌아가려는데 얼핏 도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말았다. 그의 발걸음이 땅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렸다.
그녀가 빠진 지점으로 예상되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물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은후의 발이 점점 강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은후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와 거침없이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의상보조를 하고 있던 은신이었다.
“차도희 씨!”
은신은 강 속을 헤엄치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후의 표정도 점점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도희가 떠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숙한 수영실력으로 강가 위로 올라오는 도희.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은후를 노려보았다.
하얀색 드레스는 젖어서 안이 다 비쳤고 덕분에 남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희에게 향했다. 도희는 사람들 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저 남자. 내가 위험한데도 나를 구하지 않은 저 남자. 도희가 맨발로 은후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며 속삭였다.
“넌 해고야.”
내 마음속에서도 영원히. 마지막 말은 꾹 삼켰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져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그리고 그다음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첫 만남에서부터 줄곧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그가 생각나고, 그와 가까이하고 싶은 자신을 돌아보며 자존심이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 이쯤에서 그만하자. 도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허리를 곧게 펴고 걸어갔다.
촬영장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또라이니 미친년이니. 도희에 대한 안 좋은 말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은후는 답답한 마음에 강가 쪽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근처에서 젖은 옷을 짜내며 추위에 떨던 은신이 놀라 자빠질 만한 얼굴로 은후가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저, 저……저기…….”
은신은 지금 너무 놀라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은후가 또 뭐냐며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은신을 바라보았다. 도희를 구하려고 물에 빠진 스태프. 그런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은후는 이제야 기억이 났는지 골치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면 은신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이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뉴욕에서 디자이너님 경호를 맡은 적 있었는데. 왜 있잖아요. 저한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는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 지금까지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은후 강 쇼에서 22번째 등장하는 모델이 이 패션쇼의 디자이너다! 라고. 얼굴도 이름도 출신지도 베일에 싸인 천재 디자이너 그 이미지 지키는데 저도 한몫 했다고요!”
“무슨 관계냐?”
“네?”
“차도희랑 같이 차 타고 오던데 무슨 관계냐고.”
“에?”
사실 오늘 오전에 그녀보다 그가 먼저 도희를 발견했었다. 될 수 있으면 피해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차. 도. 희.
은후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귀찮다. 그 여자가 너무 귀찮아 죽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은후가 입을 열었다.
“차도희 개인 경호원인가? 당연히 차그룹에서 보낸 사람이란 얘기고?”
“저 그게.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들키면 저 해고당한다고요.”
“일단 그건 그냥 넘어가고.”
“감사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 돌리는 은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은후가 물었다.
“너 나한테 빚 있지?”
“네! 뉴욕에서의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꼭 갚을게요.”
“당장 갚아.”
“네? 지금 당장이요? 어떻게?”
“빌어먹을!”
미칠 것만 같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드레스를 입고 도희는 자신의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가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스운 일이었다. 차도희가 남자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곧 차 창문이 내려가고 누군가의 얼굴이 드러났다. 현이었다. 도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놀란 것은 현도 마찬가지였다.
“옷이 왜 그래요? 머리카락도 다 얼었잖아요. 그리고 신발도 없이. 설마…… 물에 빠졌어요?”
“가짜 이지원?”
도희의 물음에 현이 멋쩍게 웃었다.
“네, 맞아요. 추운데 일단 어서 타세요. 감기 걸리겠어요.”
도희가 휑한 주변을 보다가 안 되겠는지 차에 올라탔다.
“E구역 주차장까지만 부탁해요.”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젖은 몸을 이제야 제대로 확인한 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귀까지 벌게진 현을 본 도희는 이제야 자신의 몸을 한번 스윽 내려다본 후. 은근슬쩍 두 손으로 몸을 가려 버렸다. 이런 도희의 행동에 미안한 건지 민망한 건지 현은 헛기침을 하며 뒷좌석에 있는 외투를 건넸다. 이번엔 그녀가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여 걸쳐 입었다.
“흠흠. 근데 주차장에는 왜? 지금 대회가 한창일 텐데.”
“대회가 한창인 건 어떻게 아세요? 맞다. 그쪽 대체 누구세요?”
도희의 물음에 현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은 은후처럼 그녀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KW패션 이사 강현입니다.”
“아. KW그룹 후계서열 1위. 그리고…….”
그리고 유명 모델이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최지연의 아들 강현. 그녀가 그 다음 말들은 삼켜버리며 그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을 그가 가엽게 느껴졌다. 매스컴에서 자신의 가족사가 잊혀질 만하면 리플레이 되고 재생산되는 기분은 어떨까? 그녀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언젠가 희주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떠들어 대던 에피소드가 떠올라 피씩 웃어 버렸다.
“왜 웃어요?”
“역시 내가 1분 1초를 봐도 사람은 잘 본단 말이야. 저번에 레스토랑에서 말했었죠? 난 재미없는 사람 딱 질색이라고. 근데 그쪽 회사 내에서 재미없는 상사 1위인 거 알아요?”
느닷없는 인신공격에 당황한 현.
“아. 그런가요?”
“네. 그러세요.”
그러세요. 마지막 한마디 끝에 그녀의 웃음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현은 뒤늦게야 그녀가 애써 농담을 건네며 웃고 있다는 사실을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보고 알았다.
“끝이네…….”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당돌하고 거침없었던 그녀를 이렇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은후일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오한이 올라오는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벅찬 건지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점점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끝이라니. 대회 말이에요?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두려우니까…….”
뜻밖의 대답이었다. 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현이 궁금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뭘 그렇게 봐요? 얘기 안 할 거거든요? 고작 세 번 본 사람한테 제 속마음을 얘기할 것 같아요?”
“앞으로 오래 두고 볼 사이면 말해도 되지 않나요? 속마음 같은 거.”
“애프터는 사양이라고 했죠?”
도희가 머쓱한지 눈을 흘기며 현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도희.
“아 맞다! 그쪽 KW 사람이라고 했죠?”
“그, 그렇죠.”
“아우씨! 저 그냥 여기서 세워 주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또 뇌물이니 몸 로비니 골치 아프거든요.”
그녀의 거침없는 단어 선택에 현이 당황하고 있을 때 도희는 서둘러 재킷을 벗어 던지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잠깐만요! 도희 씨. 대회장으로 돌아가요.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니까. 행운을 빌게요.”
현은 도희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빨리 차를 몰며 사라졌다.
사실 현의 말대로 그녀가 두려운 이유는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은영의 뇌물 사건으로 그녀의 모델 인생은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각오로 이곳에 왔지만 막상 와 보니 두려웠다. 동료들의 비난 섞인 차가운 눈빛도 힐끔거리는 스태프들의 숨겨진 의도도. 한번 좌절해 보니 다시는 그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원하고 바라던 이 대회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그 사람에게는 더더욱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겁쟁이가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어깨 위에 따뜻한 것이 내려앉았다.
“아가씨.”
미친 듯이 달려온 은신이 숨을 헐떡이며 외투를 도희의 몸에 덮어 주었다. 고개를 들어 은신의 물에 젖어 뽀얀 얼굴을 확인한 도희가 소리쳤다.
“네가 미쳤구나? 집에 안 가?”
“제가 이곳 스태프로 이중 취업을 해서요.”
“엄마가 시켰지?”
“아니요! 저희 집 집안 사정상 하는 수 없었어요. 제가 가장이거든요. 실질적…….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요. 안 그러면 저 잘린다고요.”
가장. 집안 사정. 도희는 절대 동정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물에 젖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여운 청년 가장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일 아침 일찍 산행도 있다는데 산 오르다가 쓰러져 죽고 싶어요? 다른 건 몰라도 밥은 꼭 먹어야 돼요!”
은신은 누가 볼까 두려워 도희 뒤에서 속삭였다. 그리고는 그녀를 식당 쪽으로 잡아끌었다.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고 힘없이 누워 있던 도희에게 억지로라도 저녁을 먹이러 식당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식당에는 참가자들과 스태프들이 엉켜 밥을 먹고 있었다. 은신과 실랑이를 벌일 힘도 없는지 그녀가 웬일로 얌전히 식판에 음식을 받아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은신과 나란히 앉은 도희는 밥맛이 없는지 들었던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조금이라도 드세요 좀.”
그때였다. 도희와 은신의 맞은편에 은후가 앉았다. 도희가 힘없이 고개를 들어 은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 채 밥을 먹고 있었다.
도희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게 된 은신은 조용히 속삭였다.
“근데 저분이랑 무슨 사이예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도희의 시선이 은신에게로 무섭게 향했다.
“너 저 사람 알아?”
“네? 아, 아니요!”
“말해 어서. 너 저 사람 알지?”
“저…… 그, 그게…….”
“잘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말해라?”
“채무 관계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도희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은신을 바라보았다.
역시 속지 않는군……. 은신은 안 되겠다 싶어 사실대로 말을 하려는 순간.
“얼만데?”
“네?”
“빚이 얼마냐고.”
의외였다. 뜻밖의 대답에 은신은 차도희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어느 정도 파악해 버리고 말았다. 이 여자 겉모습과는 달리 사람한테 잘 속고 상처도 쉽게 받겠군. 은신은 왠지 그녀가 측은해졌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혼자 앉아서 밥만 잘 먹는 은후를 스윽 가자미눈을 뜨고 노려봤다.
“채무 관계면 저 사람 사는 곳 이름 나이 뭐 등등 당연히 알겠네?”
분명 4시간 전에 그를 마음속에서 해고시킨 여자가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도희는 해고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신상명세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갑자기 눈을 번쩍이며 속사포 랩처럼 은후에 대한 궁금증을 내뱉어 대는 도희를 보던 은신은 그녀가 현재 지독한 짝사랑 중이라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은신은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뉴욕에서 어머니의 수술비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마피아 집단에 들어갈 처지였던 자신을 도와줬던 은후를 배신할 수 없었다.
“아. 정확히 제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와 채무 관계라 저도 저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 맞다. 하나 있다.”
“뭔데?”
“굉장히. 그러니까 성격이. 좀…….”
은신이 은후가 있는 쪽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도희가 은신의 시선을 따라 은후를 바라보았다.
은후가 바로 앞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던 사다원의 얼굴에 물을 쏟아 부은 것이었다.
주위엔 다행스럽게도 은신과 도희 그리고 몇몇 스태프뿐이었다. 도희가 무심한 척 그를 주시했다. 평소 웃는 인상은 아니었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조성하는 인상은 아니었는데 지금 그의 표정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은후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젖은 사다원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입. 그런 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사다원. 뒤에서 지켜보던 은신은 서둘러 눈치를 보며 도희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도희는 비참한 심정으로 그와 사다원을 바라보았다.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간격은 잴 수도 없이 멀어져 버렸는데 그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있고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마저도 질투가 났다. 사이가 좋고 나쁘고는 상관이 없었다. 도희는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