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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MT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무척이나 피곤한 민영이었다. 하지만 어제 말하지 못한 소원 대신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달라는 지훈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민영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고속버스에서 내렸다.
휴게소에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산 민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훈을 향해 걸어가, 커피를 한 잔 내밀었다.
“정말 이걸로 되겠어? 다른 소원 있으면 말해 봐.”
커피를 내밀면서 하는 민영의 말에 지훈이 씩 웃었다.
“정말 말해도 되요?”
“다른 소원이 있긴 있구나?”
민영이 따뜻한 시선으로 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있긴 있죠.”
“말해 봐.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줄게.”
민영의 말에 지훈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지훈이었다.
“그럼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요.”
“사진?”
“네. 생각해 보니 누나랑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더라고요.”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동생처럼 편하게 생각하는 지훈이었으니까.
“그래. 찍자.”
“와, 진짜죠?”
흔쾌히 허락하는 민영의 말에 지훈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지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휴대폰을 가운데 놓고 지훈이 외친 후 카메라 버튼을 눌렸다. 그리고 오누이처럼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 안에 담겨졌다.
“누나 고마워요.”
“고맙긴. 아, 지훈아 내 커피 좀 가지고 먼저 버스에 타 있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럴게요.”
“응, 고마워.”
지훈에게 커피를 맡긴 민영은 총총걸음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화장실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게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고 걷던 민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는 한진서, 그 남자의 모습이 민영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분위기 좋더군.”
민영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진서가 비꼬는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뭐가요?”
“윤지훈이랑 말이야. 다정한 연인 같더군.”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진서의 검은 눈에 민영의 심장 한쪽이 저릿해져 왔다. 이 남자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걸까? 어젯밤엔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자신을 혼란에 빠트리더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비 걸 거면 그만 비켜 주시죠. 내가 좀 급해서요.”
“유민영.”
“그리고요. 다시는 그런 거짓말하지 마세요.”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요. 11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둥, 그러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선생님 첫사랑 같은 거 아니잖아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제 진서의 말에 동요했다는 걸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자신이 민영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러지 말라고요.”
민영은 스스로를 컨트롤할 자신이 없기에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 맞아. 내 첫사랑.”
그런 민영의 귓가에 나지막한 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주춤하며 걸음을 멈췄던 민영은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화장실 쪽을 향해 달렸다.
“하아.”
세면대 거울 앞에 멈춰 선 민영의 시선에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상기된 붉은 얼굴, 일렁이는 회갈색 눈동자가 여과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진서의 말에 크게 동요하고 있는 마음을, 그 말을 믿고 싶어 하는 자신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흔들리지 말자, 매번 다짐해 보아도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한진서, 그 남자의 한마디 앞에서 이성은 멀리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게 너무 두려운 민영이었다. 다시 11년 전처럼 정신없이 그에게 빠져들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제3장
유치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MT를 다녀온 다음 날, 진서는 지훈을 따로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갑작스러운 진서의 호출에 지훈은 당황한 얼굴로 교수실을 찾았다.
“저번에 세미나 준비 잘 도와줘서 고마워.”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난 일에 관해 어색한 감사를 표하며 진서는 지훈에게 말문을 열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요즘 여자들은 이런 스타일의 남자를 많이 좋아한다는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윤지훈의 곱상한 얼굴마저 얄밉게 보였다.
“뭘요. 별로 한 일도 없는데요, 뭐.”
젠장. 잘생긴 게 성격도 좋다.
자신이 여자라도 넘어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민영과 자주 못 어울리게 견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유민영하고는 많이 친한가?”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주스를 하나 꺼내 지훈에게 건네주며 진서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아, 네. 어릴 때부터 봐 와서요.”
“흐음, 그래? 어떻게 아는 사인데?”
진서의 질문에 지훈이 살짝 견제하는 눈빛을 지었다. 잘생기고, 성격 좋은 녀석이 눈치 또한 꽤나 빠른 것 같았다.
“그냥 인간적인 호기심이랄까?”
적에겐 최대한 자신에 대해서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진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지훈을 향해 물었다.
“아, 민영 누나 친동생이랑 어릴 적부터 친구였거든요.”
흐음, 친동생이랑도 아는 사이라니. 점점 더 자신이 불리해지는 기분이었다. 조만간 민영의 친동생을 직접 만나야겠다, 생각하며 진서는 계속해서 표정 관리를 하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유민영이 집안 사정이 꽤 힘들었나 보군. 이제야 대학에 오고.”
“그렇죠, 뭐. 누나가 소녀 가장이거든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을 누나가 도맡아야 했으니까요.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집안을 돌보면서 일도 열심히 하고, 동생들 공부도 다 시키고. 그래 놓고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서른 살이 되어서 대학에 오고. 참 멋있는 사람이죠?”
진서의 머릿속에서 경계 신호가 더욱 강화되었다. 얼굴 가득 꽃미소를 지으며 하는 지훈의 말에 그가 얼마나 민영을 생각하는지 느껴졌기에.
“유민영을 꽤나 좋아하나 봐?”
애써 느긋한 말투로 진서는 지훈을 향해 물었다.
“네? 아, 네. 사실은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진서는 신세대답게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지훈을 이번만큼은 웃는 얼굴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온몸을 들끓게 만드는 질투란 감정에 당장이라도 윤지훈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민영을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기도 힘겨웠던 것이다.
“그럼 사귀는 사이인 건가?”
이미 민영을 통해 아무 사이 아니란 이야기를 듣고도 진서는 혹시나, 하는 유치한 생각에 지훈을 떠보았다.
“아니요. 아직은 누나가 마음에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서요. 기다리는 중이에요. 저도 좀 더 안정적으로 누나를 지켜 줄 입장이 되면, 그때 확실히 말하려고요. 아, 지금 제가 말한 건 누나한텐 절대 비밀입니다?”
생긋 웃으며 말을 하는 지훈의 얼굴을 진서는 한 대 쳐 주고 싶었다. 기분 나쁘게 잘생긴 녀석. 자신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성격도 서글서글한 이런 녀석과 싸운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진서는 민영이 놀라지 않게 느긋하게 하나하나 진행시키려던 자신의 계획을 머릿속에서 모조리 변경했다. 치사하지만 윤지훈을 제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민영을 휘몰아치는 것. 그 누구에게도 민영을 뺏길 생각이 없었다. 아니,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런 건 역시 서두를 필요가 없지. 느긋하게 생각해, 느긋하게. 알았지?”
대견하다는 듯이 지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진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그의 의견에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윤지훈이 천천히 행동 개시를 해 주는 것만이 자신이 살길이었으니까.
유민영 앞에선 치사고, 체면이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었다. 유민영이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 유민영이 자신의 여자가 되는 것. 그것이 진서에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 ♣
마케팅학 수업이 전공과목이라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MT로 정신없이 주말을 보내자마자 또다시 한진서, 그 남자의 수업을 들어야 했으니까. 물론 그냥 수업만 듣는 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정리한 노트를 진서에게 제출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민영의 마음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진서와 개인적으로 자꾸만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 민영에겐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니까.
하지만 교수가 내준 과제를 안 할 수가 없어, 민영은 어쩔 수 없이 강의를 정리한 노트를 들고 진서의 교수실을 찾았다. 차라리 자리에 없기를 바랐건만, 자신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아예 교수실 밖에 서 있는 진서의 모습이 민영의 눈에 들어왔다.
“과제를 무지 하기 싫었다는 표정이군.”
교수실 앞에 서 있는 진서를 보고 살짝 멈칫하는 자신을 향해 입매를 매력적으로 비틀며 그가 말했다.
“그래도 과제인데 별수 있나요.”
“그렇지. 넌 원래 숙제나 과제 이런 거 무척 열심히 했잖아.”
교수실 문을 열면서 하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쓴 미소를 지었다. 예전엔 이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가 내주는 숙제는 밤을 새워서라도 했던 민영이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자신은 그토록 순수했었다.
교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진서의 뒤를 따르며 민영은 과거를 떠올렸다. 교수실 안에 들어선 진서는 책상 앞이 아닌 소파에 가서 앉아 민영에게 맞은편에 앉으라고 살짝 손짓을 했다.
“괜찮아요. 읽어 보시고 얼른 노트 돌려주세요.”
앉으라는 진서의 손짓을 무시하며 민영은 열심히 정리한 노트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진서는 별말 없이 노트를 받아 들고는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리를 꽤 잘했네. 하지만 정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보려고 내준 과제는 아닌 거 알지?”
“네.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그래. 알면 됐고. 이제 오늘 수업은 끝난 건가?”
노트를 돌려주며 묻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에서 하는 질문이냐는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말이다.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식사나 같이 할까 해서.”
자신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런 한진서, 그 남자의 말에 민영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자신의 대답에 그는 왜냐고 묻듯 짙은 검은 눈썹 한쪽을 살짝 위로 올리며 민영을 바라보았다.
“선약이 있거든요.”
“누구랑?”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해요?”
슬며시 인상을 쓰며 묻는 민영의 말에도 진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딘가 느긋해 보이는 얼굴로 민영에게 대답을 요구하듯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지훈이랑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어요. 교수님 말씀대로 늦게 대학 왔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시큰둥한 민영의 대답에 진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MT 때 지훈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 태연한 그 남자의 모습에 민영은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 정말 한진서, 이 남자는 속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거 좋은 자세군.”
“네, 저도 알아요.”
“그래. 그럼 가 봐. 공부 열심히 하고.”
너무나 선선히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는 진서의 대답에 민영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역시 이 남자는 변한 게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 쉽게 물러나질 않았을 텐데. 이 사람에겐 흥미라는 감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무엇이 되었건-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특별한 집착도 보이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게 바로 한진서라는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 연애는 어떻게 한 걸까? 분명 그 이 교수란 여자도 이 남자 때문에 꽤나 속을 썩었을 것이다. 애인이란 남자가 질투도 안 하고, 살짝이라도 보여 줘야 하는 집착도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지금은 헤어진 걸까? 그냥 좋은 친구로 남기로 한 건가? 아니면 그걸 다 참아 내면서 지금까지 사귀고 있는 걸까? 아니, 도대체 자신은 또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지훈의 대한 질투를 내비치지 않아 서운해서? 그 여자한테 질투가 나서?
“유민영.”
이런저런 참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교수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진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네?”
진서의 부름에 살짝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민영은 대답했다.
“윤지훈이랑 연애는 하지 않는다고 했지?”
도대체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그런데요?”
“그럼 앞으로도 계속 하지 마.”
“네?”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자신의 말에 그는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공부나 열심히 해. 괜히 연애질 같은 걸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런 의미로 한 말이었구나. 민영의 마음에 깃들었던 이상한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여튼 정말 바보 같은 자신이었다. 스스로 이 남자에게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왜 이 사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흔들리는 걸까?
마인드 컨트롤쯤은 충분히 가능한 나이인데, 왜 이 남자 앞에만 서면 감정 조절에 서툰 십 대처럼 되어 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요. 어차피 그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 실컷 하고, 그런 다음에 연애하고 싶어지면 그땐 나한테 와.”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던 민영의 말을 끊고 진서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는 말들이 자신의 귓가에 들려왔다. 정말로, 정말로 믿기지 않는 말들이.
“농담이 꽤 지나치네요.”
이런 민영의 말에 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농담이었구나. 하긴 저런 말이 진담일 리가 없었다.
“그런 농담 받아 줄 만큼 나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이만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교수님.”
민영은 서둘러 진서를 향해 차갑게 말하고는 교수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농담일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농담일 거라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이 침범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진담이라면, 이라는…….
“정신 차려, 유민영. 지금 네 처지에 무슨.”
민영은 스스로를 향해 낮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연애, 그런 걸 할 형편이 아니었으니까. 연애라는 것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였다. 자신 같은 사람에게 연애란 그저 사치일 뿐이었다.
사고 싶지만 감히 입을 수 없는 비싼 옷처럼 유혹적이지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사치품. 단지 그런 것일 뿐이었다.
취업을 하자마자 자신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있는 민희와 찬혁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허튼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학업에 열중하는 게 나았다. 그게 동생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일이었으니까.
♣ ♣ ♣
진서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방금 민영이 사라진 교수실 문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힘겹게 내뱉은 고백의 말을 너무나 쉽게 농담으로 치부해 버리는 민영의 말에 기운이 빠져 대꾸조자 하지 못했다.
“유민영.”
이를 악물며 잇새로 진서는 민영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하여튼 정말 잔인한 여자였다. 그 고백을 내뱉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망설였는데. 이렇게 깨끗하게 무시를 하다니.
이대로 참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진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둘러 민영을 뒤쫓아 교수실 밖으로 나갔다.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며 민영을 찾아 나서는데, 얼마 가지 않아 진서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영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진서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자신에겐 차갑기 그지없던 민영이 지훈과 다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유민영. 너 정말…….”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진서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자신이 질투에 눈이 멀어서 미치는 모습을 보려고 말이다. 지훈을 향해 민영이 생글거리며 웃을 때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진서의 손이 점점 더 하얗게 변해 갔다.
“하아.”
진서는 크게 심호흡을 내뱉으며, 추악한 질투로 들끓는 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뒤돌아서는 그였다. 내일부터 민영에게 당장 보여 줄 생각이었다. 남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남자가 삐치면 얼마나 유치해지는지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저 야속한 여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