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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너 무지 유치한 거 아니?”
지훈에게 0점을 준 진서를 바라보며 혜연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진서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지 유치하고, 쪼잔하단 사실을.
하지만 아까 낮부터 진서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버스에서 윤지훈 옆에 앉아 있던 민영을 보는 순간, 그녀와 함께 MT를 간다며 설레어했던 기분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웃고 떠드는 지훈과 민영을 힐끗 훔쳐보면서 온몸을 휘감는 질투에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장 그들에게 뛰어가, 갈라놓고 싶었다. 하지만 교수 체면에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분노를 꼭 억누르며 진서는 힘겹게 그 시간을 참아 냈다. 그렇게 인내의 시간을 보냈건만!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은 MT에 와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자신도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말 듣고 있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진서를 향해 혜연이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듣고 있어.”
“너 그러다 큰일 나겠어. 티 좀 내지 마.”
혜연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조절이 안 되다니. 사실 지훈에게 좋은 점수를 주려고 했다. 민영이 힘들게 설거지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훈의 얼굴을 직접 매만지며 분장해 주는 민영의 손길에 그 생각은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심사지에 ‘0’이라는 점수를 매기고 있었으니까.
“진짜, 너답지 않게 왜 이래?”
“그러게 말이다. 안 되겠다.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진서는 마시고 있던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혜연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강당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진서, 정말 뭐하는 거냐?”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 진서는 씁쓸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 ♣

설거지 산의 공포를 맛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말을 말자. 100여 명 분량의 설거지는 정말 엄청났다. 산처럼 쌓여 있는 설거지는 장장 한 시간이 걸쳐서 끝이 났다. 이미 집안일의 달인이 된 민영에게 또한 끔찍할 지경이었다.
“마무리는 내가 할게요.”
엄청난 설거지의 고통을 맛보고 비틀거리는 자신의 조원들을 향해 민영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며 주방에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사실 열 명이서 해야 하는 일이건만, 예쁘장한 모습으로 교수님들에게 사로잡힌 지훈은 우리와 함께 이 일을 하지 못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교수님들에게 열심히 재롱을 부려야만 했던 것이다.
고생하고 있을 지훈을 대신해 민영은 마지막 정리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창 술판이 벌어지고 있을 강당 쪽을 바라보다가 다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술자리보다는 한적한 오솔길을 걷고 싶어졌기에.
산 중턱에 위치한 학교이다 보니, 주변 풍경 또한 예술이었다. 그중에서 민영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이었다. 3월이라 날씨가 제법 추웠지만, 그 추위를 잊게 할 만큼 그 길은 아름다웠다.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밝은 달과 귓가에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들, 그리고 우거진 나무에서 풍겨져 나오는 자연의 향기가 민영의 마음을 너무나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내비치는 손전등 불빛이 보였다. 깜짝 놀란 민영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손전등 불빛의 역광으로 인해 그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긴장된 목소리로 민영은 그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천천히 손전등 불빛이 그 사람 쪽으로 옮겨 갔다.
“선생님?”
불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한진서, 그 남자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겁도 참 없군. 어두운 밤에 손전등도 없이 산길을 걸을 생각을 하고.”
천천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며 하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언제부터 뒤쫓아 온 거예요?”
진서의 발소리조차 듣지 못한 민영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네가 학교를 벗어났을 때부터?”
“그런데 왜?”
바로 인기척을 내지 않았던 것일까?
“네 발걸음이 무척이나 경쾌해 보여서 말이지. 이렇게 여유롭게 풍경을 감상하는 거 오랜만인 건가?”
진서의 물음에 민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속으로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여행이란 거 다닐 생각도 하지 못하면서 각박하게 살아왔다. 사는 게 바쁜 자신에게 여행이란 여유조차 사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속내를 한진서 저 사람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널 따라 걷다 보니 좋더군. 낮에 보면 더 예뻤을 거 같아, 이곳.”
아무 대답 없는 민영을 향해 진서가 말했다.
“그러게요. 하지만 밤 풍경도 꽤나 매력적이에요.”
“그렇지.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 없고.”
자신에게 한 발 더 다가오며 하는 진서의 말에 흠칫 놀란 민영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윤지훈하고는 그렇게 꼭 붙어 있더니 나한텐 꽤 견제가 심하군.”
피식 웃으며 내뱉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귀는 사이 아니라더니 너무 틈을 많이 보이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산짐승보다 더 위험한 게 남자라는 짐승들이지. 조금의 틈만 보여도 비집고 들어가거든.”
한진서, 그 남자의 말에 민영은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지훈이는 그런 애 아니에요. 그리고 나한테 그런 감정 품고 있지도 않고요.”
“그 녀석도 남자야.”
“남자라고 다 똑같지 않…….”
갑자기 손을 뻗어 자신의 팔을 붙잡는 진서의 손길에 깜짝 놀란 민영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진서의 행동에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얼굴 옆에서 바로 그 사람의 숨결이 느껴졌다.
뭐하려는 걸까?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져 오면서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다. 이 사람을 밀쳐 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민영은 정작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틈이 너무 많아, 넌.”
귓가에 진서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새 민영의 팔을 놓아주고 그녀로부터 멀어지는 그 사람이었다.
“방심은 내 앞에서만 했으면 좋겠군. 다른 사람 앞에서 방심하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특히 윤지훈 그 녀석 앞에서 방심하는 건 더 마음에 안 들어.”
진서의 말에 민영은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생님이 왜 내 일에 참견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하는 자신의 말에 한진서, 그 남자는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밝은 달빛보다 더욱 환한 그 미소에 민영의 심장은 어지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네 박자에 맞추어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심장이었다.
“소중한 제자가 올바른 길로 가길 바라는 선생님의 마음이 겉 뜻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던 진서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거두어졌다.
“음흉한 속내는 차차 밝히도록 하지. 자, 받아.”
그렇게 말한 진서가 손전등을 민영의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밤길 위험하니까 잘 비추고 다녀. 그리고 술자리엔 오지 말고 바로 가서 자. 술 취하면 음흉해지는 놈들 거기에 많으니까.”
그 말을 하고 뒤돌아서는 진서였다. 천천히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진서의 뒷모습이 손전등 불빛을 통해 보였다. 왜 이렇게 저 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를 못할까? 손전등 불빛으로 인해 길어 보이는 진서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민영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진서의 그림자처럼 그 뒤를 쫓고 있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휘둘리지 말자 마음먹어 놓고서 또 이렇게 휘둘리는 본인이 정말 싫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한진서, 그 남자가 너무나 미웠다.

♣ ♣ ♣

“이리 와요, 민영 누나.”
산책을 마치고 강당 안으로 들어서는 민영을 향해 지훈이 손을 들어 반기며 말했다. 그런 지훈에게 민영은 웃으면서 다가갔다.
“뭐하고 있었어?”
“아, 게임이요. 누나도 같이 해요.”
“그래요. 언니도 함께해요.”
지훈의 말에 동기생인 주연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나 게임 같은 거 해 본 적 없는데.”
“다 쉬운 게임이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어디 한번 해 볼까?”
지훈의 말에 민영은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민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런 결정을 후회하고 말았다. 이름만 아날로그 게임이지, 이런 게임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민영에겐 너무 낯설고, 어려웠다.
“누나, 또 걸렸다.”
“아, 언니. 언니가 여기 있는 술 다 마시겠어요.”
동기들의 구박도 서러웠지만, 가뜩이나 약한 술을 연속해서 계속 마시다 보니 속까지 안 좋은 민영이었다. 하지만 이런 민영의 속도 모르고, 동기인 남학생은 종이컵 가득 따른 술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자, 쭉 마셔요.”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남학생을 민영은 얄밉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아니, 받아 들려고 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 종이컵을 가로채는 다른 손길로 인해, 민영의 손은 허공에 맴돌았다.
“지훈아?”
민영을 대신해서 종이컵을 받아 든 사람은 다름 아닌 지훈이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며 하는 민영의 말에 지훈은 생긋 웃었다.
“흑기사 해 줄게요.”
“오!”
“이야! 멋지다!”
지훈의 말에 술을 마시던 같은 조 학생들은 난리가 났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민망해 거절하려고 했건만, 민영이 미처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지훈은 단숨에 종이컵에 든 술을 마셨다.
“남자답다!”
“지훈 선배 멋집니다!”
“대신 마셨으니까, 이제 민영 누나가 소원 들어줘요!”
“소원! 소원!”
지훈이 술 마시는 걸 보며 조원들은 모두 한마디씩 내던졌다. 그런 조원들의 외침에 자신의 눈치를 보는 지훈을 향해 민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소원 말해 봐.”
“정말요?”
“응.”
소원을 말해 보라는 자신의 말에 무척이나 좋아하는 지훈을 향해 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뭘 빌지. 음…….”
고민을 하는 지훈을 향해 조원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그런데 그때 광고학부 회장이 지훈을 향해 다가왔다.
“지훈아, 교수님들이 너 좀 오라는데.”
“나를? 왜?”
“술 한잔하자는 거지, 뭐. 얼른 와.”
교수님들의 호출이라는 말에 지훈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원을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워 보였다. 그렇게 지훈이 술자리에서 빠지자 조원들도 모두 맥 빠져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여학생들은 대놓고 얼굴에 티를 내고 있었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어?”
그때 민영의 귀에 익숙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조원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바로 한진서, 그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기에.
“교수님! 저희랑 같이 술 한잔해요!”
평상시 진서가 이상형이라며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던 여학생 하나가 신이 난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럴까? 다들 괜찮지?”
은근슬쩍 지훈이 빠져나간 자리에 앉으며 진서가 조원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열렬하게 진서를 환영했다.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영만 빼고 말이다.
“교수님, 이왕 오신 거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나 해 주시죠?”
조장인 창석이 진서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네. 예를 들면 첫사랑 이야기라든가.”
크큭, 웃으며 창석은 진서를 향해 말했다. 그런 창석의 말에 모두들 기대에 찬 시선으로 진서를 바라보았다.
“음, 첫사랑이라.”
“궁금해요, 교수님!”
“해 주세요, 네에?”
뜸을 들이는 진서를 보채면서 조원들이 외쳤다.
“너희처럼 대학 다닐 때 만났어, 첫사랑을.”
그런 조원들의 외침에 진서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런 진서의 말에 민영의 회갈색 눈이 살짝 흐려졌다. 11년 전 혜연과 함께 서 있던 진서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혜연과 사귄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녀가 첫사랑일 것이다. 다 아는 사실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쓰라린 걸까?
술기운 때문인지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을 느끼며 민영은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들었다가 진서와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이런 감정을 그대로 들켜 버릴 것 같아 겁이 났다.
“첫눈에 반했지, 그 여자에게.”
“오!”
첫눈에 반했다는 진서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난리가 났다.
“예뻤어요?”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진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응. 무척 예뻤어. 너무 예뻐서 제대로 쳐다보기 겁이 날 만큼.”
나지막한 진서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 때마다 민영의 심장은 아프게 두근거렸다.
“그 첫사랑 분이랑은 잘되셨어요?”
“글쎄…….”
한 학생의 질문에 진서가 살짝 머뭇거렸다.
“잘 안 되셨어요?”
“아니, 아직 진행 중이라서.”
이어지는 다른 학생의 질문에 진서가 웃음기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저렇게 말했다. 그 말에 이야기를 듣던 민영의 조원들은 모두들 놀란 눈으로 진서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응. 그 첫사랑을 다시 만났거든. 11년 만에.”
11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진서의 말에 민영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깜짝 놀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허공에서 그대로 진서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자신 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그 검은 눈동자에 민영의 심장은 정신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진서 저 남자의 첫사랑이 바로 자신이란 말일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11년 전 자신에게 늘 차갑기만 하던 남자였는데. 거짓말이 분명하였다. 믿지 말자 애써 생각을 해 보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만큼은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민영은 술기운 때문인지 더욱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자리에 더 있다간 미친 듯이 뛰는 이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 너무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아. 먼저 가서 잘게요.”
민영은 다른 사람들이 붙잡을 틈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서 이 강당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신경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한진서, 그 남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