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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

1화

[Part 1. 엇갈린 짝사랑에 대하여]

1-1 그런 봄이 오다


어둑하던 방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느리게 스며들었다. 두루는 창틈으로 스며드는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빛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혀 가며 방 안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밖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벚나무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줍은 새색시처럼 고개를 들까 말까 망설이던 모양이었는데, 오늘은 연분홍빛 꽃잎을 활짝 펴고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바야흐로 벚꽃이 만개한 봄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화사한 햇빛과 흔들리는 벚꽃의 아름다운 절경을 바라보는 두루의 두 눈은 말라비틀어진 가뭄처럼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쿡. 다시 한 번 싸한 고통이 복부 전체에 퍼져 들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두루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얀 손등 위로 연한 녹색의 핏줄이 바싹 솟아올랐다. 두루는 그 가녀린 손으로 전기 찜질팩의 온도를 한층 더 올렸다.
어젯밤, 막 잠들기 전에 아랫배에 묘한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가 보니 역시나 휴지 위로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탄식도 잠시, 두루는 얼른 생리대를 하고 나와 진통제를 먹고 찜질팩을 챙겨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이제는 진통제도 면역이 생긴 상태라 효과가 없었다. 두루는 생리통이 유독 심한 편이어서 가장 세기로 유명한 진통제를 하루에 서너 알씩도 먹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고통 때문에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창밖으로 밝아오는 햇살이 그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있고 업무도 많은 날이라 결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베개에 얼굴을 묻어 보았지만 고통은 끝내 가시지 않았다. 두루는 한숨을 푹 내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날 누구라도 곁에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을 서러워할 여력도 없었고 굳이 서러워하지도 않았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제 그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꽤 큰 평수의 정원이 딸린 넓은 주택에 혼자 살았다. 혼자 산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러니 이런 외로움쯤은 익숙했다. 아플 때 혼자 끙끙 앓다가 밤을 새우는 것도, 시체 같은 몸을 이끌고 출근 준비를 하는 것도, 현관에서 거울을 보며 하나도 아프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는 것도 모두 익숙한 일이었다. 두루는 아주 능숙하게 그 모든 일을 해내고 현관문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하나, 생리통용 핫팩을 챙기는 것을 깜빡하고.
“그건 조심히 들어 주세요! 이쪽으로, 이쪽!”
아침부터 바깥이 조금 소란스럽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옆집 일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종류의 일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두루는 큰 트럭 위에 짐을 올리고 있는 여러 사람과 그것을 손수 지휘하고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큰 키와 건장한 체구가 돋보이는 준수한 외모의 중년 남자. 그는 유진혁 변호사였다. 유 변호사는 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열아홉 살이던 그때, 유 변호사가 혼자 남은 두루를 많이 보살펴 주었다.
그가 두루를 보더니 얼굴 한가득 반가운 미소를 띠어 보였다.
“어, 출근하니?”
“네. 이사 가신다더니, 오늘이셨어요?”
두루가 아쉬운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간 왕래가 부족하긴 했다지만 이삿날까지 모를 정도였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다음 주에나 갈 예정이었는데, 집이 생각보다 빨리 빠졌더라고. 어쩌다 보니 이리됐다. 이번 주말에 밥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했더니. 이거 아쉬워서 어쩌냐.”
“나중에 새집 다 정리되시면 그때 한 번 초대해 주세요. 집들이 선물로 아저씨 좋아하시는 독일산 와인 사 갖구 갈게요.”
“아이구, 좋지.”
그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두루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순간, 잠시지만 그에게서 곤의 모습이 스치는 것 같았다. 곤도 자주 이렇게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곤 했다. 물론 그것도 옆집에 살던 때의 얘기였지만.
두루가 살고 있는 곳은 일산 정발산동의 단독주택 단지였다. 다행히 회사가 집과 그리 멀지 않아 이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곤은 바쁜 연예계 활동 때문에 4년 전쯤 소속사가 있는 서울의 압구정동으로 독립을 했다. 서로 다른 곳에 살고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만날 일도 줄어들었고 사이도 소원해지게 되었다.
“두루구나.”
어디선가 낮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루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선아. 곤의 어머니가 막 집에서 나와 유 변호사의 옆에 섰다. 그녀는 50대라곤 믿기지 않는 마르고 탄력 있는 몸매와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미스코리아 출신에 한때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모델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래서인지 두루는 그녀가 좋으면서도 조금 어려웠다. 그녀는 고급스럽고 자상했지만 왠지 다가가기 힘든 차가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안색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감춘다고 감추었는데도,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선아는 그녀의 고통을 한 번에 꿰뚫어 보았다.
“괜찮아요.”
하지만 두루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도 항상 몸조심하고.”
“네……. 아주머니도요.”
건강하라는 그녀의 말에, 진짜 이별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유 변호사도 두루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려 주었다. 순간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유일한 가족이던 아버지를 잃은 뒤 기댈 곳 하나 없던 그녀를 가족처럼 보살펴 준 사람들이었다. 곤과 멀어진 후로 자연히 왕래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엔 언제나 가족 같은 이웃으로 남아 있던 사람들. 그들마저 떠난다니 이제 정말 완전한 혼자가 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멀어졌던 곤과도 이렇게 완전히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사실 축하할 일이었다. 유 변호사의 로펌과도 가깝고 선아가 좋아하는 패션과 문화의 도시인 데다 부의 상징이기까지 한 강남의 청담동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분명 축하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 자체로도 좋은 일이었지만, 그만큼 곤이 크게 성공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식의 성공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그들은 정든 집을 떠나는 아쉬움보다 기쁨과 설렘이 더욱 커 보였다. 그래서 두루도 서운한 마음을 그만 접고 싱긋 웃어 보였다.
“꼭 뵈러 갈게요.”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어떻게 느끼면 시원하고, 또 어떻게 느끼면 차가운 그런 바람. 지금 맞는 이별도 꼭 지금 맞는 바람을 닮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봄은 그런 계절이었다. 시원한 듯하면서도 차갑고,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뜻한. 그런 봄이 그녀에게 오고 있었다.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 쉴 새 없이 펜을 돌렸다. 하지만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돌던 펜은 점점 속도가 느려지더니 이윽고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펜은 다시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이어 두 번이나 들린 마찰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쿡쿡. 두루 옆에 앉아 있던 서준이 테이블 밑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순간 잠시 잃었던 정신과 함께 수천 개의 바늘이 살갗을 찌르는 것 같은 거센 고통이 밀려왔다. 다행히 흘러내린 긴 머리 덕에 눈을 감고 있던 것을 들키진 않았지만, 중요한 회의 시간에 졸았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매사에 철저하고 꼼꼼한 두루였기에 회의 시간에 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신력만으로 버티긴 역부족인 것 같았다. 하지만 두루는 다시 펜을 집어 들고 집중해서 회의 자료를 보았다.
회사에서 나 아프다고 광고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앞에선 괜찮냐며 그녀의 몸을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혹여나 그녀로 인해 늘어날지도 모르는 자신의 업무량을 더 걱정했다. 특히 생리통의 경우는 말하기가 더 껄끄러웠다. 그래서 이렇게 아픈 날에는 그저 옷 속에 붙이는 얇은 생리통용 핫팩에 의지하며 수시로 약을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잠을 못 자서 정신이 반쯤은 가출해 있는지 핫팩을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약은 통 듣지를 않았다.
두루는 고개를 흔들며 최대한 정신을 깨우려 했지만 복부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짧은 탄식을 내쉰 두루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에서는 식은땀까지 흘러내렸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모두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두루는 의견을 말하기는커녕 입술 한 번 달싹여 보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 수많은 목소리 중에서도 단 한 사람의 목소리만 크게 들렸을 텐데, 오늘은 그 목소리조차도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들이 흐릿하게 들렸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자음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ㅎ, ㄷ, ㄹ…… 그 자음이 점점 더 구체화되더니 이윽고 한두루, 라는 이름이 정확히 들렸다.
“……네?”
두루가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그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중에 그녀가 가장 귀담아 듣는 목소리의 주인공, 최은호 팀장이었다.
그는 두루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몇 초간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침묵을 ‘얼른 대답하라’는 것으로 이해한 서준이 그녀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유곤이요. 잘 아냐고…….”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었으면 그의 얘기가 거론되는 것도 몰랐을까.
“아, 네. 잘…… 안다기보단…….”
무어라 말해야 할까. 한때 절친했으나 지금은 멀어진 친구? 아니면 그저 옆집 살았던 사람? 두루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동창입니다.”
동창.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곤은 그녀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었으니까.
“연락은, 잘 닿고?”
은호가 한 템포 늦게 되물었다. 두루는 잠시 말을 삼켰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그뿐만이 아닌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감독과, 다른 팀원들 모두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두루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AK미디어였다. AK미디어는 영화 사업부, 공연 사업부, 방송 사업부 등 문화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회사로서 업계에서는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이었다. 두루는 그중에서도 영화 사업부에 속해 있었다. AK미디어의 영화 사업부는 ‘AK PICTURES’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처음엔 투자와 배급만 하던 회사였지만 약 십 년 전부터는 기획과 제작도 함께하면서 대형 영화 스튜디오로 그 규모를 키웠다. 기획개발팀, 제작팀, 유통배급팀, 해외영업팀 등 세분화되어 있는 팀 중에서 두루는 제작팀, 그것도 1팀 소속이었다. 올해로 입사 4년차였고 한 달 전 대리로 승진한 상태였다.
오늘은 그녀가 대리를 달고 처음으로 맡은 영화의 캐스팅 회의 날이었다. 그동안 기획개발팀에서 넘겨받은 시나리오를 토대로 능력 있는 신인 감독을 구하고 전반적인 영화의 제작 방향을 논의하고 스탭들을 모집하느라 정신없이 달렸다. 영화가 잘될 조짐인지 그 모든 것이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캐스팅이 문제였다.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모두 신인인 만큼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스타 시스템을 도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금 언급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배우 유곤이었다.
영화 <스틸Steal>은 한 명의 남자 배우를 원 톱으로 하는 감성 느와르였다. 물론 여주인공도 있었고 비중 있는 조연도 많았지만 구도 자체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남자 주인공이 그 누구보다 중요했다.
많은 톱 배우들이 언급되었지만 유곤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런 와중에 두루의 동기인 수아가 ‘한 대리가 유곤이랑 잘 안다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었고, 그 믿을 수 없는 희망적인 소식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두루는 멍하니 자료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에 은호가 ‘한 대리’, ‘한두루’, ‘한두루 대리’ 하고 세 번이나 그녀를 불렀던 것이다.
‘연락은, 잘 닿고?’
그러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가 봐도, 당연히 ‘예스’여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상은 ‘노’였다. 두루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인 수아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흘겨보았다. 그러자 수아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 헛기침을 해 댔다.
두루는 입사 후 한 번도 유곤과 사적으로 안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괜히 그를 통해 관심을 받고 싶지도 않았고, 혹시나 그녀의 사소한 말이 그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며칠 전 수아가 그녀의 휴대폰을 빌려 쓰다가 전화번호부에서 ‘유곤’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고 ‘설마 그 유곤은 아니지?’라고 물어서, 일에 집중하고 있다가 무심코 맞다고 대답해 버렸다. 이후 수아는 그녀의 메신저 친구 목록에서 사진까지 확인해 보며 그가 진짜 유곤임을 알아냈고, 두루에게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꼬치꼬치 캐물어 댔다. 결국 두루는 그저 동창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연락은 잘…….”
“표정 보니까 아닌데? 그냥 동창인데 어떻게 연락이 닿겠어.”
그때 맞은편에 앉은 김 차장이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락은 잘 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려던 두루의 입술이 순간 꾹 닫혔다.
“맞아요. 엄청 친한 사이 아니면 모르죠. 다들 뜨고 나면 번호 바꾼다던데.”
이어서 들린 신입 사원 은채의 말도 귀에 거슬렸다. 두루는 간만에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한 번씩 욱하는 성격이었고, 그 욱하는 것의 발단은 언제나 자존심 문제였다. 그녀는 자존심이 센 편이었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고 힘들게 할 정도로.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두루를 빤히 응시하던 은호가 다시 회의 자료로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팀원들의 말을 듣고 그도 포기하는 듯한 말투였다.
“어차피 다 소속사나 매니저를 통해서…….”
“아니요.”
일순 모든 팀원들의 시선이 두루에게 향했다.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방금 전과는 다른 그녀의 당찬 목소리에 회의실에 짧은 탄성이 돌았다. 감독은 물론 팀원들 모두 희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감독도 신인이긴 하지만 독특한 감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력파였고 시나리오도 좋았기 때문에 유곤만 캐스팅이 된다면 영화의 성공은 거의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단 한 사람, 은호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파악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회의가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정말 가능하겠어?”
은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크게 들리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네. 되든 안 되든 일단 설득은 해 볼게요.”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지?”
“일주일 안으로 해 보겠습니다.”
회의실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퍼졌다.
“이야, 진짠가 보네. 연락할 정도로 친했던 거야?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했어?”
“한 대리가 그런 거 말하는 성격인가요, 어디. 이것도 제가 얼마 전에 휴대폰 보다가 알아낸 거예요.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래요.”
“대학교까지? 그럼 보통 사이가 아니겠는데.”
두루는 사람들의 관심에 그저 멋쩍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머리를 몇 대고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충동적이 되어 버렸을까. 어쩌다 이렇게 감당 못 할 말을 뱉어 버렸을까. 답을 모르지 않았다. 이놈의 자존심! 하지만, 어쩌면 자존심 외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 유곤은 일단 한 대리에게 맡기고 다음 인물 논의하죠.”
모두가 난리법석인 와중에도 웃음 한 번 짓지 않는 그에게, 자극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일에 절대 그 대단한 신경을 써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주 작은 자극이라도 좋으니 그를 건드려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주 미세한 자극이나마 느끼고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봐 주기를 바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녀에게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 4년이나 됐으면 익숙할 법도 한데, 그녀는 아직도 그의 냉정함이 야속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그의 눈길을 얻을 수 있을까?

집에 오자마자 씻고 쓰러진 두루는 침대 위에 엎어진 채로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손 위에 놓여 있는 일회용 핫팩 두 개를 보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밋밋한 모양의 작은 핫팩. 흔들어 쓰는 분말형의 회색 핫팩. 이상하게 그 핫팩에서 봄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두루는 그것을 코로 가져와서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핫팩의 냄새를 맡았다.
사실 그것은 봄 내음이 아니라 남자의 스킨 향이었다. 진작 날아가 없어졌어야 할 그 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그녀만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그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맡고 싶어서 핫팩에 아예 코를 묻어 버렸다.
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4년을 봐 왔지만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흡사 외계인 같았다. 미지의 대상.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점심시간이었다. 배가 아픈 거지 속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을 먹어서 속을 좀 데우고 싶었다. 아픈 배에 찜질을 못 해 주니까 그렇게라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본능적인 마음 같았다. 그런데 신입 사원 은채가 회사 앞에 새로 생긴 돈가스집을 가자고 팀원들을 부추겼다.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였지만 두루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본래 밀가루 음식이 잘 안 받는데 생리 중엔 더욱 안 받아서 돈가스는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혼자 구내식당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묵묵히 있던 은호가 돌연 말을 꺼냈다.
‘순두부찌개는 어때요? 김 차장님도 느끼한 거 싫어하시는데. 한 대리도 별로인 것 같고.’
그가 두루를 보며 언뜻 미소를 지었다. 그는 굳어 있던 두루의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다행히 팀원들은 모두 은호의 말을 따랐고, 두루는 덕분에 윤기 나는 쌀밥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순두부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딱 알아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