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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회의 때의 서운함도 잊고 또다시 그에게 반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밥을 다 먹고 가게를 나왔을 때였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줄 알았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팀장님은요?’
‘아까 담배 피운다고 나가셨잖아. 원래 한 번 피우면 오래 피우시잖아. 이따 오시겠지.’
평소에도 간혹 있는 일이라 팀원들은 별생각 없이 먼저 회사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다들 걸음을 떼는데 두루만 따라가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왠지 곧 올 것 같은 생각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팀원들은 이미 저만치 간 상태였다. 수아가 뒤를 돌아서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발을 내딛자 수아도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그때였다.
‘한두루!’
익숙한 목소리에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뒤를 돌아보자 뛰어왔는지 약간 거친 숨을 고르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훌쩍 다가온 그가 숨을 뱉다 말고 피식 웃었다.
왜 또 웃는 거지?
그는 가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뱉곤 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왜’라는 질문을 선물해 주었지만, 답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에게,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그가 주는 것을 받았다. 그의 손에서 작지만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몸살기 있는 것 같아서.’
그는 무심하고 덤덤한 척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하얀 애가 밀가루가 됐는데, 모를 리가 있어?’
일반적으로 누가 감기 몸살이라고 하면 감기약이 아니라 핫팩을 떠올렸던가? 그것도 벚꽃이 만개한 봄의 절정에?
그는 모를 리가 있냐고 말했지만, 무언가를 모르는 척해 주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어설픈 연기가 그녀를 더욱 떨리게 만들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제 손 위에 놓인 핫팩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외계인임에 틀림없다. 유치하게도 고민 끝에 그런 답을 내렸다. 그런 답이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아닌 척하면서 사람을 다 꿰뚫어 보고, 능수능란하게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움직이는 그의 신적인 능력을. 한참 동안 그의 생각을 하다 보니 배가 아픈 것도 잊게 되었다.
그가 그녀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고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것처럼, 그녀도 그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를 웃게 하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잊고 있던 중대한 일이 떠올랐다.
‘정말 가능하겠어?’
‘네. 되든 안 되든 일단 설득은 해 볼게요.’
미쳤다, 한두루!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무모함이 떠오르자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갔다. 일단 일은 쳤으니 해결은 봐야 했다. 벌써 열 시가 넘었으니 오늘을 제외하면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명절 때 가끔 얼굴을 보긴 했지만, 따로 연락을 한 지는 일 년도 넘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연락을 해서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부탁을 한단 말인가. 평소엔 연락도 안 하다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방 안을 서성이던 두루는 답답한 마음에 베란다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어서 나온 것이었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욱신,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곤과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그녀는 곤의 생각을 할 때 저도 모르게 베란다를 찾곤 했다.
그녀의 집 베란다에서는 곤의 방 창문이 보였다. 그의 방 창문은 그녀의 베란다보다 아주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마주 보기는 애매하고, 고개를 살짝 들면 시선이 맞았다. 그와 한창 가깝게 지낼 때, 그는 자주 제 방 창문을 열고 두루를 내려다보곤 했다. 잘 뛰어내리면 넘어올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꽤 가까운 거리였다. 두루는 베란다 난간에 팔을 대고 서서 곤을 올려다보았고 곤은 제 방 창틀에 기대앉아 두루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 적이 많았다.
두루는 그때처럼 베란다 난간에 팔을 대고 서서 곤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가끔 이렇게 보다가 ‘유곤 나와라, 오바!’ 하고 외치면 불이 탁 켜지고 창문이 열리곤 했는데……. 이제 여기서 그를 마주할 일이 다시는 없다고 생각하니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역시 봄이었다. 시원한 듯 차가운 바람이 부는 봄.
휴대폰 속 ‘유곤’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통화 버튼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시간도 늦었고 아무래도 내일 연락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두루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었다. 싸늘한 바람을 맞았더니 양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두루는 팔을 문지르며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둑한 베란다에 빛이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거짓말처럼 탁!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윽고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 그것은 분명 창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두루는 천천히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 것도 같았다.
“……!”
눈이 부셨다. 아주 잠깐, 눈이 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주 오랜 시간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곳에 갑작스레 빛이 생겼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따가울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곳엔, 그가 있었다.
어쩌면 다시 만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여느 때처럼 창틀에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 그들이 누구보다 가까웠던 옛날처럼. 꼭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오랜만이네.”
그의 입가에 그때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한두루.”
유곤이었다.

1-2 나에게 넌


고등학교 3학년 봄. 두루는 십 년 넘게 살았던 서울을 떠나 일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리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늘 바라왔고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두루의 아버지 한우진은 유능한 검사였지만 대부분의 법조계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쩔 수 없는 원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바쁜 우진 때문에 큰 집에 혼자 있는 일이 많았던 두루는 가끔씩 오는 협박성 전화나 이상한 우편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곤 했다. 열아홉이 되던 해에는 유독 그런 일이 잦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집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 댔다. 도대체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두루는 떨리는 손으로 보조키까지 걸어 잠그고 방에 들어가 몸을 웅크린 채로 귀를 틀어막고 그 시간을 버텼다.
“사과나무 한 그루, 사과나무 두 그루, 사과나무 세 그루…….”
두루가 사과를 너무 좋아해서 우진이 그녀를 재울 때마다 양 대신 세 주던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두루는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주문처럼 사과나무를 세곤 했다. 그러면 우진이 팔베개를 해 주고 토닥토닥 재워 줄 때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주문에 기대며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두루는 집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를 알게 된 우진은 최후의 방도로 결국 이사를 결정했다.
이사를 간 집은 두루의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정원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가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아 버렸다. 벚나무는 옆집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바람이 불면 벚꽃이 그리로 떨어지기도 했다. 흩날리는 벚꽃을 따라가던 두루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마침 옆집에서 문이 열리고 우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그는 우진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네가 두루구나.”
두루는 한눈에 그가 유진혁 변호사임을 알았다. 우진은 말수가 별로 없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했었다. 유 변호사는 우진의 법대, 연수원 동기인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다. 유명한 패션모델과 결혼을 했고 두루와 같은 나이의 아들도 있다고 했다. 두루는 그 아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될 것이라고. 문득 그 아들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지만 옆집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유 변호사는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사를 돕기 시작했다. 두루의 시선이 옆집에 닿아 있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은 좀 도우라니까 또 나가서 쳐 논다지 뭐야. 하여간 뭐가 될는지. 쯧쯧.”
잘은 모르지만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남학생인 것 같다. 그의 첫 느낌은 그랬다.
두루는 이내 그에 대한 생각을 접고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한창 짐을 나르고 있을 때 얼핏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정신이 없어서 돌아볼 생각도 못 했다. 뒤이어 유곤! 이라고 소리치는 유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유곤이구나,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두루는 자신을 부르는 우진의 목소리에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그녀를 보았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찌 됐건 그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잠시나마 공존했던.

며칠 뒤, 두루는 학교에 갔다. 혹시라도 친구들에게 괜한 미움을 사서 왕따를 당하진 않을까 긴장이 되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좋은 친구들을 만나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싶었다. 낯선 곳에 가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의지를 하게 된다더니,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곤을 떠올렸다. 혹시 그가 같은 반은 아닐까 작은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그 기대는 금방 무너져 내렸다.
“야, 오늘 축구 3반이랑 하지?”
자기소개를 한 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뒤쪽에서 남자 아이들의 잡담 소리가 들렸다.
“어. 3반. 왜?”
“에이 씨, 망했네. 거기 유곤 있잖아.”
곤은 3반, 두루는 4반이었다. 얼굴도 모르는데 친한 사람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반가운 한편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그는 축구도 무척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두루는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주로 혼자 있는 두루에게 꽃은 좋은 말동무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베란다가 훨씬 커서 화분을 더 많이 둘 수 있었다. 그렇게 꾸며 놓고 나니 온전한 제 공간이 된 것 같아서 더 자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카랑코에의 잎을 만지며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낯선 소리가 그녀의 공간을 침범했다. 잠시 그 자세로 굳어 있던 두루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섰다. 그리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낯선 소리만큼이나 낯선 시선이었다. 문을 연 것은 분명 그였는데, 그가 오히려 더 당황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예상치 못했던 것을 본 것처럼. 그는 무표정했지만, 표 나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긴.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열었다가 모르는 사람과 마주친다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조금도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다니. 낮에도 언뜻 보긴 했지만 그땐 멀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기에 이제야 그를 제대로 만난 느낌이었다.
짙었다.
그는 대체적으로 그랬다. 짙은 검정색 머리카락과 눈썹. 이목구비도 마찬가지였다. 시원시원하다기보단 ‘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쌍꺼풀 없이 매끄럽게 휘어진 눈매는 끝이 약간 날카로웠다. 높은 콧대는 부드러운 곡선이 아닌 반듯하고 남자다운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조금 건조한 듯하지만 붉은색이 감도는 입술은 웃지 않아도 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한 느낌이었다. 매력적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짙은 이목구비와 그로부터 풍기는 강인한 이미지.
너는 이렇게 생겼구나. 유곤.
두루가 인사를 건네듯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일순, 계속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웃고 있는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오랜 시간 말이 없었다. 따라 웃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두루의 입에서도 미소가 거두어졌다. 그와 동시에 드르륵, 다시 창문이 닫혔다. 허. 두루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흘렀다. 인사는커녕 미소 한 번 없이 들어가 버리다니. 왠지 무시당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저 낯을 좀 가리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괜히 서로 안 좋은 감정을 가져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았다.
두루는 나머지 화분에 물을 주고 베란다를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문을 닫고 나가는 길에 한 번 더 드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어찌 됐건 그것이 둘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서로의 시선이 완전히 서로에게 닿았던.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두루는 반에서 가장 친해진 친구 수연과 함께 연극 동아리에 들게 되었다. 딱히 연기자나 연출가가 되고 싶던 것은 아니지만 두루는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 보통 이상으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친구를 따라 취미 생활을 한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웬일이야! 유곤도 들어왔나 봐!”
수연이 두루의 귀에 대고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현이가 데려왔나 보네. 둘이 친하거든. 저 자식도 쓸모가 있네.”
도현은 두루의 반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수연은 같은 반 친구는 안중에도 없고 곤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곤은 이미 학교에서 유명 인사였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잘 논다고 해서 곤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두루는 그것을 전학 온 첫날 바로 알게 되었다.
‘야, 오늘 축구 3반이랑 하지?’
‘에이 씨, 망했네. 거기 유곤 있잖아.’
점심시간이었다. 여학생들 몇 명이 창문에 바싹 붙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 반 남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별안간 여학생들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누군가 골을 넣은 모양이었다.
‘유곤 짱!’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뒤이어 교실에 있던 남학생들이 ‘너희는 의리도 없냐?’라고 불평을 하는 것을 보니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여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어째서 다른 반 아이가 골을 넣었는데 저렇게 신나하는 것일까? 그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수연이 너도 와서 보라며 그녀를 창문으로 끌고 갔다. 두루도 얼결에 밖을 내다보았다.
스탠드에 있는 여학생들은 1, 2학년 후배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흡사 아이돌 가수의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함성을 내지르며 곤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두루는 문화 충격이라도 받은 듯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다들 유곤을 좋아하는구나. 유곤은 이렇게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구나. 새삼 가까워진 적도 없는 그와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곤은 골을 넣은 기쁨을 만끽하듯 친구들과 가볍게 포옹을 하며 웃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러나 땀에 젖은 티는 그의 상체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덕분에 그의 단단한 가슴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그가 더운 듯 티를 몸에서 살짝 떼어 펄럭이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그는 그런 반응에 익숙한 듯 전혀 의식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무심한 모습이 그를 더욱 멋져 보이게 만들었다.
멋지다.
두루도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얼핏 보기에도 그는 멋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 생각은 그날 밤 베란다에서의 만남으로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지만.
“야, 인사해. 우리 반 전학생 한두루.”
도현이 곤에게 두루를 소개시켜 주었다. 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얘는 알지? 유곤.”
두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곤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또 느낌이 달랐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때문인지 어쩐지 더욱 남자다운 느낌이 들었고 약간의 위압감도 느껴졌다. 그에게서 생겨난 기다란 그림자가 두루를 덮치고 있었다. 괜히 긴장이 되는 것도 같았다.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지난번 베란다에서처럼 무시를 당할까 봐 주저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피식.
어디선가 바람이 새는 듯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귀엽네.”
두루가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름.”
그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그녀를 보고 당황한 얼굴로 굳어 있다가 미소도 받아 주지 않고 들어가 버렸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당당했고 뭔가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으며 약간 개구진 것도 같았다. 그때와는 처지가 뒤바뀐 것처럼,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그는 놀기를 좋아하고, 축구를 잘하고, 인기가 많고, 낯을 좀 가리고, 그리고 웃을 때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들어갔다.
그는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

연극 동아리를 계기로 두루는 곤과 기대 이상으로 친해지게 되었다. 보통 3학년은 동아리 활동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두루와 수연, 곤과 도현 네 명만 남게 되어 그들끼리의 끈끈함이 생겨났다. 게다가 학교 축제 때 선보일 연극을 수연이 쓰고 도현이 연출하게 되었는데, 그들로 인해 거의 반강제적으로 곤과 두루가 주연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 다 동아리 내에서 연기를 가장 잘했고 졸업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게 된 연극은 로맨틱 코미디였다. 연극 동아리에 들고 나서부터 왠지 모르게 두루와 곤을 이으려고 하던 수연의 사심이 구십 프로 이상 반영된 장르였다. 그에 반해 도현은 장르에 불만이 많았다. 그 역시 연극을 한다면 두루와 곤을 주연으로 세우고 싶어 했지만 장르는 다른 것을 원했다. 뭐든 좋으니 로맨틱 코미디만 아니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초반부터 어긋났던 수연과 도현은 연극 연습 내내 갈등을 빚었다.
“미쳤냐? 키스씬을 왜 빼?”
수연은 어떻게든 러브라인을 넣고 싶어 했고 도현은 그 반대였다.
“극의 흐름상 맞지 않아.”
“흐름 좋아하네! 네가 나보다 내 극을 더 잘 알아? 여기선 꼭 키스씬이 들어가 줘야 된다고! 안 들어가면 감정선이 안 맞거든?”
“고등학생이 키스씬은 무슨!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부담스러울 거란 생각 안 드냐?”
“누가 진짜로 하래? 정 아니다 싶음 하는 척만 해도 되잖아. 이런 것까지 내가 다 지시해 줘야 되냐? 무슨 이런 꼴통 연출이 다 있어?”
“지시가 아니라 간섭이거든?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그만 가라.”
“너 두루 좋아하냐?”
도현이 물을 마시다 말고 캑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두루는 벽에 기댄 상태로, 곤은 그녀를 가두듯 벽에 팔을 대고 선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스씬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애매한 자세로 몇 분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두루는 헛기침을 하는 도현을 보며 쿡쿡 웃었지만 곤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뭐, 뭐, 뭐라고?”
“한두루 좋아하냐고! 아니면 왜 자꾸 키스씬을 빼래?”
“그,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더듬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보네.”
“야! 아니거든?”
두루는 터무니없는 얘기로 투닥거리는 그들이 귀여웠지만, 곤은 아닌 것 같았다. 피곤한데 연습 시간이 길어지는 게 싫었던 것일까. 그는 구겨진 미간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퍽! 하는 둔탁한 마찰 소리가 연습실 안을 울렸다. 벽을 짚고 있던 곤의 주먹이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기다림이 지쳤던 건지 그가 결국 짜증스럽게 벽을 내려친 것이었다.
“그래서.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갑작스런 그의 고함에 도현과 수연은 일순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다.
“그래. 얼른 결정해.”
두루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부러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도현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 그럼. 대신 척만 하는 걸로. 오케이?”
“알았다. 그래.”
수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두루는 피식 웃으며 곤을 보았다. 어찌 됐건 결정이 났기에 곤의 심기가 조금 편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곤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쪽에 보조개가 들어가 있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잠깐 두근거렸다. 그 웃음이 왠지, 상당히, 유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 그럼 가자!”
도현의 지시가 떨어지자 곤이 그제야 두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척은 무슨.”
한참을 웃고만 있던 그가 나지막하게 뱉은 말이었다. 무슨 뜻인가 싶어 눈을 껌뻑이며 그를 보자, 그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진짜로 할 건데.”
뭐? 라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빠르게. 하마터면 정말로 입술이 닿을 뻔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그의 입술보다 그녀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놀라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악!”
“너 죽는다, 진짜!”
곤은 다리를 감싸고 격하게 고통을 호소했지만 두루는 아랑곳 않고 그를 더 때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곤은 한쪽 다리를 절며 그녀를 피해 도망갔고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필사적으로 그를 쫓았다. 연습실은 순식간에 술래잡기를 하는 놀이터로 변했고 곤의 시원한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저것들 봐라.”
수연이 피식 웃으며 도현을 향해 말했다.
“이게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고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