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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연극 동아리에 든 뒤부터 곤과 두루는 별일이 없는 한 항상 같이 등하교를 했다. 둘은 어느새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두루는 수연보다 곤과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곤 역시 그러했다. 그렇잖아도 학교 축제에서 로맨틱 코미디 연극을 같이한 뒤로 전교생으로부터 사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아 왔는데, 매일 붙어 다니는 통에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한순간에 수많은 여학생들의 천적이 된 두루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곤은 그런 소문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누가 ‘너희 진짜 사귀냐?’는 질문을 해도 절대 확실하게 부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그런 걸 왜 묻냐?’, ‘사귀었으면 좋겠냐?’와 같은 애매한 대답을 하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가?”
“왜 애들한테 확실하게 말을 안 해 주냐고. 너 때문에 나만 곤란해지잖아.”
“네가 왜?”
“몰라서 물어? 네 그 어마어마한 팬클럽!”
“아, 미안.”
“미아안? 그게 다야?”
“근데, 너만 곤란한 건 아니야.”
“뭐?”
그날도 그런 문제로 실랑이를 하며 집에 가고 있었다. 곤은 두루와 발걸음을 맞추며 알 수 없는 웃음을 쿡쿡 흘리고 있었고 두루는 그런 곤을 보며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데 투덜거리면서도 곤을 따라 발을 맞춰 걷던 두루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아빠?”
깊은 밤. 숨 막히는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서로를 통해 짧게나마 숨을 쉬던 그때. 잔잔하게 흘러가는 나날들 속에 소소한 기쁨을 누리던 그때. 비극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그렇게 갑작스레 그녀를 찾아왔다.
“아빠!”
그녀의 집 대문 앞엔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불행히도 그는 그녀의 아버지 한우진이 맞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살인이었다. 원한 관계에 의한 명백한 살인. 우진은 올 초에 한 연쇄살인사건을 맡았었고 범인으로 잡힌 남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되자 얼마 안 가 감옥에서 자살을 했다. 이에 그의 유가족들이 우진에게 원한을 품고 협박 전화를 하거나 우편물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우진이 이사를 하자 남자의 동생은 이사한 집까지 알아내 끝내 그를 죽이고 만 것이었다.
남자의 동생은 금방 잡혔고 그 역시 법에 의거한 마땅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두루는 정말 하루아침에,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 이 세상에 가족이라곤 단 한 사람도 없는 혼자.
그녀는 혼자였기에 슬퍼할 새도 없이 우진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없는 부분들은 유 변호사와 선아가 많이 도와주었다. 하지만 상주의 몸으로 장례식장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조문객들을 맞고 장례를 관하느라 한시도 쉬지 못하고 한 번도 마음껏 울지 못했다. 곤은 장례 내내 그런 그녀의 옆에 있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며칠 뒤, 모든 장례를 마치고 우진을 납골당에 안치하고 돌아오던 날. 그 버스 안에서 두루는 처음으로 울었다. 곤의 어깨에 기대어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곤의 어깨는 그녀의 눈물로 흠뻑 젖어 들었지만 그는 말없이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아 주었다. 곤의 어깨는 무척 넓고 따뜻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는 그의 손도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가족을 모두 잃었어도, 그래도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정신없이 오랜 시간 울었다. 그리고 너무 울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 지경이 되었을 때, 온몸이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졌을 때, 하얀 백지 상태였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그림이 그려졌다.
넓고 푸른 들판이 생겼고 그 위에 나무 하나가 솟았다.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나무였다. 그 나무가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사과나무 한 그루, 사과나무 두 그루, 사과나무 세 그루…….”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슬프고도 달콤하게 간질였다. 메말라 버린 눈에서 또다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토닥토닥.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느린 박자를 타고 움직였다.
장례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을 지켜 주었던 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유곤이라는 사람이 한두루에게 있어 좋은 친구를 넘어, 멋진 남자를 넘어, 손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그는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가족이 되어 그녀의 마음에 박혔다.
“사과나무 아흔여덟 그루, 사과나무 아흔아홉 그루, 사과나무 백 그루…….”
죽을 때까지 잃고 싶지 않은 사람. 영원히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잘 자, 한두루.”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행히 대학까지는 그와 같이 가게 되었다. 학교는 총 세 군데를 지원할 수 있었는데, 두루는 그중 두 군데에 경영학과를 쓰고 한 군데에 연극영화학과를 썼다. 가고 싶은 곳은 연극영화학과였지만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서 한 개만 쓰고 무난한 학교의 경영학과를 두 개 쓴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무난할 것이라 생각했던 두 학교를 떨어지고 A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곤은 두루가 썼던 A대를 포함해서 세 군데 모두 연극영화과를 썼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하다는 경쟁률을 뚫고 세 대학 모두 합격했다. 세 대학 중 가장 유명한 대학은 S대였지만 곤은 주저 없이 A대를 선택했다. 두루는 혹시 자신 때문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도끼병 좀 고치라고 웃어넘기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반대했을 게 뻔한데 그는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당당했으며, 오히려 전보다 더 밝아 보였다.
두루는 곤과 대학교까지 같이 가게 되었으니 앞으로도 쭉 함께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뻤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고 머지않아 그와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두루에게 생애 첫 남자 친구가 생겼다. 상대는 그녀보다 세 살 많은 같은 과 선배 조희준이었다. 두루는 생전 처음 해 보는 연애와 사랑이라는 것에 완전히 푹 빠져 버렸다. 그녀는 희준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부터 곤에게 상담을 했다. 그녀가 처음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라고 수줍게 말했을 때, 곤은 아주 낯익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그게 낯이 익다고만 생각했지 언제 어디서 보았던 표정인지 기억하지 못했는데, 아주 나중에야 그것이 언제 봤던 표정인지 기억이 났다.
그것은 그를 처음 제대로 마주했던 열아홉 봄, 베란다에서 봤던 표정이었다. 그녀가 싱긋 웃어 보이자 흔들리던 눈빛을 완전히 굳혀 버렸던, 그때 그 표정.
그러나 그는 곧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축하한다’ 말해 주었고, 그녀는 따라 웃으며 ‘고맙다’ 말했다. 그녀는 몰랐다. 그가 그녀의 곁에 머무는 일이, 그때부터 부쩍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을.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남자 친구가 생기면 친구와 멀어져야 하는지. 그녀에게 남자 친구와 친구는 별개였다. 특히 곤은 더욱 별개였다. 남자 친구가 생긴다고 해서 멀어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관계라는 것은 두루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두루는 더 이상 곤과 같이 등교하고 하교할 수 없었다. 희준이 늘 그녀를 데리러 왔고 데려다 주었다. 좋은 연극이나 영화가 나와도 곤과 함께 보러 갈 수 없었다. 언제나 희준과 함께 봐야 했으니까. 자연히 두루는 곤과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희준의 눈치가 보여서 연락도 많이 하지 못했다.
그들이 단둘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두 사람 다 귀가를 한 뒤인 늦은 밤이었다. 두루는 베란다에 나가 난간에 양팔을 대고 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이 소리치곤 했다.
“유곤 나와라, 오바!”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땐 거의 창문이 열렸다. 간혹 불이 꺼져 있을 때도 열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엔 불이 꺼져 있을 때도 희망을 가지고 그를 부르곤 했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두루의 입가엔 자연히 미소가 걸렸다. 곤은 그 미소를 보고 따라 웃으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항상 똑같은 말로 그녀를 맞았다.
“왜 불러?”
두루는 싱긋 웃으며 항상 같은 말로 대답했다.
“보고 싶으니까 부르지.”
그러면 곤의 왼쪽 볼엔 작은 보조개가 들어갔다. 두루는 그의 보조개를 정말 좋아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베란다에 나와 그를 불렀을 때 창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쩌나, 그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게 되었는데 그 미소를 보면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대로 그의 창문이 열리지 않는 날이 와 버렸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그가 군대를 가게 된 것이었다. 그가 군대를 간 날, 두루는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대신 쓰고 돌아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눈이 아닌 얼굴이 부을 정도로 펑펑 울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그를 잃은 상실감과 후유증이 한 달이 넘게 갔고, 그 시간 동안 희준과 두 번 헤어질 뻔했다. 하지만 두루는 곤이 제대할 때까지 희준과 헤어지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두루는 점점 그에 대한 마음이 희미해져 갔지만 그가 두루를 놓아주지 않아서였다.
곤이 군대를 갔던 스물한 살, 두루도 1년 동안 휴학을 했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래도록 남기고 싶어서 대학 등록금과 집을 유지하는 비용에만 썼고, 생활비는 늘 스스로 벌어서 썼다. 그래서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대외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보냈다.
스물세 살에 복학한 곤은 2학년이 되었고, 두루는 3학년이 되었다. 두루는 곤과 2년이나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이상했다. 제대를 한 곤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두루를 보면 웃어 주고 장난을 치고 말을 걸었지만 어쩐지 전보다 훨씬 멀어진 느낌이었다. 그녀가 베란다에서 그를 불러도, 그는 잘 나오지 않았다. 가끔가다 우연히 마주칠 때가 아니고서야, 그를 보기는 힘들었다.
두루는 연출 전공이었고 곤은 연기 전공이었다. 곤은 빠르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고 아주 금방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연극판에서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으며 배우로서 자리를 잡았고, 그로부터 얼굴을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렇게 곤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함께하지 못한 3학년이 끝나갈 무렵, 두루는 결국 희준과 헤어지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희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였다.
그녀가 그토록 헤어지고 싶을 땐 꼭 붙들고 놓지 않더니, 다른 여자가 생기자 고맙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4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무의미하고 허무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랬다. 그런 거였다. 무서울 정도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아무리 마음이 식었다지만 힘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를 잃어서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곤과 잠시나마 다시 가까워졌다는 것이었다. 희준이 여자가 생겨 두루와 헤어졌다는 소문을 들은 곤이 다짜고짜 희준을 찾아가 주먹을 날리는 사고를 쳤고, 이 일로 두루는 아주 오랜만에 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곤은 어색해했지만, 두루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그가 여전히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게 고마웠고, 간만에 보는 그의 뿔난 표정도 반가웠다. 그래서 다친 그를 치료해 주다 말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처음엔 실소만 흘리던 그도 나중엔 그녀를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 이후 두루는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1년을 곤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영화계에서까지 러브콜을 받아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시간을 두루와 함께해 주었다. 두루는 그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이 관계가 다시는 끊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길 바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뀌었다. 두루는 스물다섯이 되었고 졸업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축하한다, 두루야.”
“축하해.”
다들 가족들 틈에서 사진을 찍는데 혼자만 꽃 한 다발 없이 친구 몇 명과 사진을 찍다가 무안한 마음에 학사모와 옷을 반납하러 가려고 했을 때였다.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 변호사와 선아, 그리고 곤이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하게 달아오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괜찮은 척했지만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그녀는 외로웠고 가족이라는 품이 그리웠다. 그래서인지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진짜 가족처럼 느껴졌다.
곤이 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친하지 않던 사람들까지 두루의 주변에 몰려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바탕 어지러운 포토타임이 끝나고 유 변호사와 선아는 일 때문에 먼저 돌아갔다. 하는 수 없이 두루는 곤과 단둘이 밥을 먹기로 했다.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내가 다 사 줄게.”
두루가 말하자 곤이 픽 웃으며 말했다.
“집 밥.”
“응?”
“네가 해 주는 집 밥 먹고 싶어.”
그날은 하늘도 그녀의 졸업을 축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함박눈이 내렸다. 하얀 눈송이들이 벚나무에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두루는 식탁 위에 턱을 괴고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쌓일 듯 쌓이지 않는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잔잔하게 아려 오는 것 같았다.
“안 먹어?”
곤이 밥을 한 수저 크게 뜨다 말고 두루를 향해 물었다. 두루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보았다. 쌓일 듯 쌓이지 않는 눈이, 닿을 듯 닿지 않는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저 눈처럼 언젠가 그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너 먹는 것만 봐도 좋아.”
“식상하긴.”
두루가 짧게 웃었다. 그는 형식적인 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이었다. 그녀는 가끔 곤과 밥을 먹을 때 이렇게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때가 있었다. 그는 밥을 참 복스럽게 먹었다. 누군지,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은 참 행복할 것 같았다. 이렇게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 주니까.
“곤아.”
“응.”
“……고마워.”
“뭐가.”
곤은 달걀말이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내 옆에 있어 줘서.”
그 말을 하는데, 왜인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루의 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는지 곤이 잠시 멈칫했다가 밥을 마저 먹고는 느긋하게 물을 마시며 말했다.
“멍청하긴.”
“뭐어?”
두루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서운한 듯 되묻자, 그가 가벼운 톤으로 물었다.
“내가 네 옆에 왜 있는지 몰라?”
두루는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평소에 장난을 잘 치는 그가 또 농담조의 대답을 염두에 두고 던진 질문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묻는 질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곤이 갑자기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밥을 먹는 도중에 처음으로 맞닿은 시선이었다. 그 눈빛이 꽤나 진지하고 그윽해서 두루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에 나올 그의 말이 무엇인진 모르나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좋아하니까.”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덕분에 두루는 심장이 철렁하려다 만 것 같은 애매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 말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그는 젓가락으로 반찬 하나를 집어 입에 가져갔다.
두루는 말없이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벌써 6년인데, 눈빛만 봐도 속을 알 수 있는 그런 시간인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낮은 목소리,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행동은 조금 가벼운 느낌을 주었다.
심드렁하게 밥을 먹으면서 하는 고백이라니? 아무래도 이건, 친구로서의 감정을 뜻하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그의 행동과 말들이 정말 그렇게 느껴져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고마워할 거 없어.”
그래서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나 좋으려고 네 옆에 있는 거니까.”
그의 젓가락 끝이 미미하게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그것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쌓일 듯 쌓이지 않는 눈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그리고 다음에 뱉은 그녀의 말이, 그 아무렇지도 않은 대꾸가, 그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날부터였다. 곤과 두루의 사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대박을 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아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상반기에 AK미디어 영화 사업부에 입사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데뷔를 하고 그녀는 취업을 하면서 만나는 날이 점점 적어지다가 이내 그가 압구정으로 독립하면서 따로 만나는 일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두루가 가끔 그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연락이 닿는 것도 잠시뿐, 그는 금방 촬영을 들어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곤 했다. 바쁘니까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 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괜한 자존심에 그가 먼저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그가 먼저 연락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곤은 어느새 한국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어 있었고 두루는 AK미디어의 영화 사업부에 없어서는 안 될 유능한 인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루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 말고 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세상에. 유곤이 이하연이랑 사귄다고?”
자판을 치던 두루의 손이 멈추었다.
“……어?”
“지금 기사 났어. 인정했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얘 김성준이랑 불륜이라던데 그거 덮으려고 수 쓰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루머가 억울해서 진짜 연애를 공개한 거겠지.”
잠시 멍하게 있던 두루는 이내 손을 움직여 인터넷 창을 켜 보았다. 실시간 검색어는 유곤 이하연이었다. 클릭해 보니 곧바로 기사가 떴다. 기사 제목은 ‘유곤 이하연 1년째 연애 중’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슴이 묘하게 떨려왔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질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배신감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벌써 2년째 최은호 팀장을 짝사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런 애매한 연애 감정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아프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점점 멀어지고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이유가, 혹시 연애 때문이었던 걸까.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욱 이상해졌다. 일종의 공허함과 상실감 비슷한 것이라고 하면 조금 설명이 될까. 텅 빈 마음에 가시가 돋는 듯한 기분이었다. 허전했고, 따가웠다.
그가 완전한 남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두루와 곤은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명절이나 기념일에 가끔 한 번씩 집에 오는 곤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말았다. 우리가 정말 한때 서로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친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멀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