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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렇게 다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두루의 짝사랑은 더욱 깊어졌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었고 곤의 사랑은 위기에 봉착한 듯 하루가 멀다 하고 불화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곤의 인기는 그의 사랑과 반비례라도 하듯 점점 치솟았고 두루는 그런 ‘톱스타’ 유곤을 캐스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었다. 그 미소. 그녀가 불안해 할 때마다 ‘나 어디 안 가’ 하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던 그 미소.
“한두루.”
두루는 멍한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너, 네가 여기 어떻게.”
“여기 내 집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언제나처럼 당당했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사 간 거 아니었어? 아까 아침에…….”
“갔지. 우리 부모님.”
어째서 집을 내놓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부모님께 강남구 청담동에 그 좋은 집을 마련해 주고, 그가 이 집에 들어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독립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미 서울에서 하고 있었고 그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더 좋은 집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는 이 집에 다시 들어온 것일까.
“왜 넌…….”
왜 넌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려던 그녀의 말이 도중에 잘렸다.
“있고 싶어서.”
“……뭐?”
그는 두 번은 들려주지 않으니 잘 들으라는 것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아주 정확하게 발음하며 말했다.
“네 옆에 있고 싶어서.”
이상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이상하게도.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
그에게 하려 했던 영화 출연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나 좋으려고 온 거니까.”
수천 개의 바늘이 배를 찌르는 것 같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1-3 달라진 향기
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꿈이었을 것이다. 두루는 꿈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유곤을 캐스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그런 꿈을 꾼 것이라고.
거짓말처럼 환한 빛이 스며들고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돌아봤을 땐 눈이 너무 부셔서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그는 꼭 십 년 전 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가 늘 바라고 그리던 그의 모습이 꿈속에 그대로 나타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꿈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몹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녀의 잠을 깨웠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북적거리는 소리. 고래고래 누군가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 무언가 질문들을 쏟아 붓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어마어마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두루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눌러 빗으며 거실로 나가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커튼을 열어젖혔던 두루는 1초도 안 돼서 반사적으로 다시 커튼을 쳤다. 게슴츠레하게 반쯤 떠져 있던 두루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두루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들었다. 역시나 열자마자 수많은 메시지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제작 1팀 단체 대화방에도 실시간으로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유곤 가짜 연애 뭐야? 진짜야? -이수아]
[한 대리님, 유곤이랑 연락 닿았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래요? -신서준]
[진짜 사건이야 어쨌건 중요한 건 대외용 시나리오지. 유곤이랑 이하연이 어떻게 나오냐, 기사가 어떻게 나냐,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냐, 그게 중요한 거지. -김명섭 차장님]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유곤 캐스팅해도 되는 거예요? -홍은채]
다들 속사포로 이야기를 쏟아 내는데 은호만 아직 말이 없었다. 두루는 일단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을 켜서 기사를 살펴보았다.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기사였다. 두루는 떨리는 손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꼭두새벽부터 곤의 집 앞에 엄청난 수의 기자들이 몰려 있고 인터넷이 난리법석인 이유는 하나였다. 이하연의 임신. 현재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은 소문이었지만 요약하자면 내용은 이러했다.
유곤과 연애 중이라고 알려졌던 이하연이 임신을 했는데 그것이 곤의 아이가 아니라 재벌가 김성준의 아이라는 것이었다. 김성준은 대기업 ‘강성’의 차남으로 5년 전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그런데 사실 김성준과 이하연의 불륜설은, 이하연이 곤과 열애를 발표했던 2년 전에도 증권가 정보지에 실렸던 얘기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곤과의 열애 발표로 인해 단순한 루머로 묻혔었는데, 올해 들어 그들의 불화설이 계속 나오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임신설까지 터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곤과 하연의 ‘가짜 연애’였다. 하연이 김성준과의 관계를 감추기 위해 곤을 이용해서 거짓 연애 발표를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곤과 하연이 같은 소속사이고, 열애 발표를 어느 날 갑자기 하연 혼자 터뜨렸고, 이후 둘의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들에서부터 더욱 힘을 얻고 있었다.
헌데 이 가짜 연애가 사실로 판명된다면 곤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중을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뭐야, 이 자식 대체…….”
두루는 속상한 마음에 베란다 쪽을 흘겨보며 혼잣말을 했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살고 있던 것인지 걱정이 되어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두루!”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두루는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 쪽이었다. 그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서둘러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야, 유…….”
유곤! 하고 소리치려던 두루는 그가 재빨리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아차 하며 입을 막았다. 그런데 급하게 검지부터 입에 댔던 곤이 일순 표정을 굳히며 그녀를 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훑어보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의 시선이 약간 느릿하게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을 내려다본 두루는 이윽고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제 몸을 가렸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그것도 흰색의 실크 슬립 원피스. 다행히 속옷은 입고 있었지만 민소매인 데다 목 부근이 많이 파여 있어서 그녀의 하얀 속살과 가슴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곤은 모른 척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귀가 약간 달아오른 것도 같았다.
“보지 마!”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소리치곤 홱 뒤를 돌았다. 얼른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왜!”
“……아, 안 볼 테니까 가지 마.”
“뭐?”
“나 좀 도와줘.”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 곤은 방 안에서 커다란 백팩을 꺼내더니 두루를 향해 던졌다. 휘익. 거절할 새도 없이 날아든 백팩이 두루의 양팔에 안겼다. 두루는 가방의 무게에 뒤로 한 발 주춤한 뒤 이게 뭐냐는 듯 미간을 좁히고 그를 쳐다보았다.
“거기서 하나 꺼내 입어. 아무거나.”
두루는 갑작스레 닥친 이 상황이 무엇인지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곤란해 보이는 그를 도와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가방을 열어 보니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몇 벌의 평상복이 보였다. 속옷도 두어 개 있는 것 같았다. 두루가 움찔하는 게 보였는지 그가 난감한 듯 외쳤다.
“너무 자세히 보진 말고!”
“……어, 어.”
두루는 가방에서 얇은 회색 카디건 하나를 꺼내 걸쳐 입고 다시 곤을 보았다. 곤은 기다렸다는 듯 두루를 향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멀리 보면서 크게 외치는 거야.”
“……응?”
“유곤이다!”
곤이 몸소 시범까지 보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 언뜻 짐작은 갔지만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두루는 조금 긴장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골목 끝을 바라보다 양 손을 입가에 모았다. 그리고 간만에 발성 연습을 한다 생각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배에 힘을 딱 주고 있는 힘껏 외쳤다.
“유곤이다!”
그와 동시에 모든 기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가 이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먼 골목으로 쏠렸다. 양치기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휘익. 탁!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강한 마찰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야!”
두루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 그는 가끔 ‘뛰어내리면 닿을 것 같은데. 뛰어 볼까?’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정말 뛰어내린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지만 어쩜 이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이렇게 무모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두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곤이 이를 악물고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두루는 그제야 그가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자들은 골목 어디에도 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에 정신이 번뜩 든 그녀는 기자들이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힘껏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으앗!”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숨이 멎는 것 또한 순간이었다.
그가 베란다 안으로 떨어지면서 두루도 함께 밀려 쓰러졌다. 낯선 무게가 몸을 덮쳐 오는 것이 느껴졌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얼결에 두루는 그의 밑에 깔려 버렸고 곤은 그녀를 덮치듯이 올라타 있는 애매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놀란 두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밀어내려 하자 곤이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아 내리며 상체를 더욱 숙여왔다.
‘뭐 하는 거야!’
눈빛으로 묻자 그 역시 눈빛으로 대답했다.
‘조금만.’
간절한 그의 눈빛이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곤이 두루의 집으로 들어올 때 났던 마찰 소리를 들은 듯 기자들이 술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루의 베란다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베란다에 있는 많은 꽃과 화분들이 두루와 곤을 가려 주고 있었다.
“방금 저쪽에 뭐 지나가지 않았어?”
“무슨 소리 났던 것 같은데.”
그 소리가 들리자 닿을 듯 말 듯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곤의 몸이 그녀의 몸에 완전히 닿았다. 닿았다. 닿아 버렸다. 얇은 실크 잠옷 위로 그의 단단한 가슴이 그대로 느껴졌다. 너무 낯설었다. 낯선 온기와 낯선 향기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십 년을 봐 온 친구였는데 그 순간엔 그저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그에게도 그녀의 가슴이 느껴질 생각을 하니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된 그녀는 이러다 정말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위협을 느꼈다. 쿵, 쿵, 쿵. 가슴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서 곤에게 들릴까 봐 염려가 됐다.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이 꽃향기를 싣고 날아오는 것처럼, 향기로운 꽃 내음이 은은하게 풍겨 왔다. 그런데 그 꽃 내음은 평소와 달랐다. 전에 없던 다른 향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두루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짙었다. 마치 그의 첫인상처럼. 그는 향기마저도 짙었다. 옛날의 그에게서는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면 지금의 그에게서는 짙은 남자의 향기가 난다. 그 향기가 싫지 않았다.
민망할 법도 한데, 그는 두루를 바로 보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이 언젠가 한 번은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곤은 그녀와 달리 침착해 보였다. 반면 그녀는 그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완벽한 남자가 되어 버린 것만 같은 그를 이런 자세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저 느낌뿐일지 모르지만, 그의 짙은 눈동자가 왠지 그녀의 입술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잔잔하던 그 눈빛이 점점 그윽해지더니 이내 강렬해졌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다. 두루는 뭔지 모를 그 뜨거움이 자신의 입술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아, 입술이 바싹 메말라 있는데도 침 한 번 바르지 못했다.
“……이제 된 것 같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조금 잠잠해진 것을 느낀 두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곤이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경직돼 있던 몸이 풀리면서 숨통이 트였다. 허나 뜻 모를 허전함도 언뜻 살갗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두루는 얼른 따라 일어나 그의 뒤에 섰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나름대로 곤을 가려 주려는 것이었다. 두루는 열린 문틈 사이로 그를 밀어 넣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뒤 가방을 들고 따라 들어갔다. 베란다 문을 닫은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쉰 그녀가 그를 찌릿 쏘아보며 소리쳤다.
“너 미쳤어? 거기서 뛰면 어떡해!”
한숨 돌린 두루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곤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가벼운 어조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무사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다칠 뻔했잖아. 혹시라도 떨어져서 다쳤음 어쩌려고!”
심각하게 따져 묻는 두루와는 달리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응? 정말 떨어지기라도 했어 봐. 다치기만 했겠어? 기자들 앞에서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본전도 못 뽑았을 거 아냐.”
그는 계속해 보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 대체 왜 그런 거야?”
“…….”
“말해 봐. 뭐가 어떻게 된 거냐니까.”
대답 없는 그가 답답해서 두루가 유곤! 하고 소리치려 했을 때였다. 아주 약간 벌어져 있던 두루의 입이 더 열리지도 못하고 닫히지도 못한 채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머리 위로 갑작스레 다가온 익숙한 손길 때문이었다.
스윽.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이라도 해주듯, 그의 자상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좋다. 네 잔소리.”
“…….”
“너무 반가워.”
그의 왼쪽 볼에 얕은 보조개가 생겼다.
어린 여동생을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 무심한 듯하면서도 자상한 말투. 어쩐지 예전보다 열 배는, 백 배는 더 깊어진 듯한 눈빛.
두루도 반가웠다. 그 모든 게.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나 배고파. 얼른 씻고 나와.”
그의 말은 상당히 일상적이고 평범했지만, 두루는 그 말이 꽤 생경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그와 그런 편한 말을 주고받는 상황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서로 안부조차 편히 묻지 못한 게 4년인데, 그는 10년은 같이 산 부부처럼 말을 건넸다. 곤은 멍해 있는 두루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든 뒤 거실로 갔다. 그러곤 제 집처럼 자연스러운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아 두루를 흘긋 돌아보았다.
“나 말려 죽일 생각 아니면 얼른 씻지.”
“……뭐?”
“얼른 씻고 옷 갈아입으라고.”
어째서 이렇게 계속 얼이 빠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두루는 화들짝 놀라며 카디건을 여몄다. 카디건은 단추를 잠그거나 잘 여미지 않는 이상 앞쪽 가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설마 계속 이 상태였던 것일까. 베란다에서부터 쭉?
갑자기 민망함이 물밀듯이 밀려와 두루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쏜살같이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 옷을 안 가져온 것을 깨닫고 다시 빛의 속도로 옷을 챙겨 들어갔다. 곤은 그런 두루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띠고서.
그런데 샤워기 아래서 쏟아지는 물에 몸을 내맡겼을 때, 문득 그가 했던 말 하나가 속에 얹힌 듯 내려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려 죽일 생각 아니면?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이하연과 김성준이 만남을 시작한 것은 3년 전이었다. 그때도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불륜설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증권가 정보지에 그들의 이야기가 실린 뒤부터였다. 이후 하연은 성준으로부터 어떻게든 소문을 무마시키라는 강요와 모진 협박을 받았고, 견디다 못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한 연예 프로그램의 인터뷰 중에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렇다’고 대답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날아든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냐?’는 질문에도 역시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유곤과 1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런 폭탄선언은 모두를 패닉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시각 영화 촬영 중이었던 곤은 백숙을 먹는 씬을 찍다가 그 소식을 듣고 닭 뼈가 목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가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되었다. 실려 가는 도중 문자 한 통이 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곤아, 날 죽여. -이하연]
죽일 수만 있다면야 그러고 싶었지만, 그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곤이 할 수 있는 일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일뿐이었다.
같은 소속사였고, 친구 사이였다. 아마 그래서 하연도 충동적으로 그의 이름을 말한 것 같았다. 하연은 눈물로 사죄를 했고 소속사 사장도 무릎을 꿇고 부탁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여러 사람들과 등을 지면서까지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결국 둘은 1, 2년 정도만 만나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당연히 하연도 그 안에 김성준과 끝을 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연은 그를 끊어 내지 못했고 설상가상 예기치 못했던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성준 측에서도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기 위해 갖은 수를 썼고 하연은 끌려가듯 산부인과로 향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산부인과에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곳곳에 노출되었고 끝내 모든 사실이 밝혀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빨리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사건을 정리해도 모자랄 이 시점에, 그녀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아이를 갖고 나서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던 하연이 아이를 잃은 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더니 결국 잠적을 한 것이었다. 하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속사 측에서는 모든 인력과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진 어떤 입장 발표도 할 수가 없었다. 가짜 연애 의혹을 받고 있는 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녀부터 찾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함께 논의해야 했다.
곤은 그전까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무작정 두루의 집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랬구나.”
“뭐야, 그 동정 어린 시선은?”
“아니야. 동정은 무슨.”
두루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라곤 했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곤이 처한 입장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해도 모자랄 판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3년이나 연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니.
그러고 보니 두루가 아는 곤은 누구와도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연락이 잘 닿지 않았던 4년 동안 비밀리에 했을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