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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두루는 자신이 모르는 곤의 4년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멀어져야만 했던 건지 문득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가 끓여 준 김치찌개를 먹자니 더 그런 것 같았다. 곤이 해 준 김치찌개는 국물이 일품이었다. 참 진하고 맛있었다. 이 맛이 그렇게나 그리웠었는데.
괜스레 서운해져서, 말없이 김치찌개의 국물만 연신 떠먹고 있을 때였다.
“……너는.”
그가 툭 흘리듯 말을 뱉었다.
“응?”
“……너는, 있어?”
“…….”
“만나는 사람.”
곤은 시선을 내리고 젓가락으로 멸치볶음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순간, 두루는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있냐니까.”
그녀가 한참 말이 없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보지는 않았다. 그저 멸치볶음을 뒤적이다 말고 적당히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밥을 먹으면서 심드렁하게 하는 질문. 두루는 그제야 이 비슷한 장면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좋아하니까.’
그런데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곤이 잡고 있는 젓가락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몰랐는데, 수전증이 있었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없어.”
물을 마시던 곤의 손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4년간 한 번도 없었어.”
왠지 씁쓸한 얘기였지만, 두루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곤의 입가에도 언뜻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너는?”
두루도 그의 지난 시간이 궁금했다. 하연과 가짜 연애를 하는 동안 혹시 진짜 연애는 없었을까. 아마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대단했는데, 지금은 전국민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나 인기가 많은데 연애를 못 했을 리가 없었다.
곤은 어떤 사람을 사랑했을까. 그리고 어떤 연애를 했을까. 질문을 하고 보니 새삼스럽게 그런 것들이 정말 궁금해졌다.
“없어. 4년간 한 번도 없었어.”
“……뭐?”
두루가 놀라 되묻자 그가 다시 시선을 내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특유의 무심한 듯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누굴 좀 짝사랑했거든.”
짝사랑. 그 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4년 동안 하고 있는 것을, 그도 하고 있었다니. 동질감이 드는 동시에 정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곤이 짝사랑을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으며, 그 상대는 누구일까?
“근데 그 사람이 안 잊히더라.”
“…….”
“혼자 아주 안간힘을 썼는데도, 안 되더라.”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분명 쓸쓸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두루는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다음이 궁금했다.
“지금은 어떤데?”
그는 잊는 데 성공했을까, 아님 포기했을까.
곤이 밥을 뜨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턱을 괴고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그녀가 그의 눈동자 안에 비추어 보였다.
“포기.”
“…….”
“이제 그만하려고. 짝사랑 같은 거.”
순간, 그의 눈동자 안에 있던 그녀가 흔들려 보였다면 착각일까.
“고백할 거야. 그 사람한테.”
밥을 한술 떠 넣은 그의 볼에 다시금 얕은 보조개가 파였다.
“……이번엔 꼭. 반드시.”
1-4 엇갈린 짝사랑에 대하여
쏴아아아.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버금가는 시원한 물소리가 주방에 퍼졌다. 대야에 세제를 뿌린 뒤 물을 튼 두루는 풍성하게 차오르는 거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밥을 먹으면서 곤과 꽤 많은 얘기를 했지만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은 묻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곤이 먼저 다가와 주어서 다행히 영화 출연 의사를 묻는 것이 조금 수월할 것 같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 곤이 처한 상황도 문제였고 은호에게서도 아직 답이 없었다.
두루는 주방에 붙은 벽걸이 시계를 흘긋 돌아보았다. 저녁 일곱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은호는 잠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주말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했다. 4년이나 짝사랑을 하다 보니 그의 생활 패턴쯤은 접수한 지 오래였다. 평소대로라면 다른 팀원들보다 먼저 일어나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오늘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지금까지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방금 전 확인했을 때도 단체 대화방에서 그 혼자만 메시지를 읽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 더 지켜보라든가, 일단 캐스팅부터 하라든가, 어떤 지시라도 내려 주어야 그에 맞게 행동을 할 텐데. 두루는 답이 없는 그 때문에 난감하기도 했지만,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날씨 좋은 봄날, 사적인 약속 때문에 바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진 못했는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나절 이상이나 연락이 안 될 사람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전화를 걸어 볼까.
“앗!”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그릇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풍덩. 그릇이 물에 빠지면서 거품이 그녀의 얼굴과 옷에 튀었다.
“왜 그래?”
두루가 놀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새 곤이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섰다.
“아니야. 아무것도.”
두루가 옷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으며 말했다. 그러자 곤이 풋 하고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약간 개구진 얼굴로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웃어?”
“으이구.”
그때 곤의 따스한 손이 그녀의 볼에 와 닿았다. 살짝 따끔한 느낌. 그가 장난스레 그녀의 볼을 꼬집는 듯하더니 이내 엄지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순간 그 느낌이 너무 묘해서 두루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의 볼에서 떨어진 그의 엄지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아, 거품……. 두루는 혼자 오버한 듯한 느낌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가 있어. 내가 할게.”
이런. 도와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 잘못 나온 것 같다.
두루는 자책하듯 눈을 살짝 감았다 뜬 뒤 얼른 그릇과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민망함에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그릇을 씻는 데 집중했다. 곤은 별말 없이 웃고만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장난이라도 걸지, 자꾸 그렇게 묘한 미소만 띠고 보니까 더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간만에 보는 그는 생각보다 편해서 오늘 하루 종일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어색한 정적이 끼어들곤 했다. 마치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난 4년의 공백은 메울 수 없다는 듯.
그때 문득 옆이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갔나 싶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데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왜 다시 오는 거지?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스윽. 소리 없이 다가온 그의 손길이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앞치마는 장식용이야?”
배 위로 부드러운 천이 내려앉으면서 그의 손이 옆구리를 지나 허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옆구리를 지나 앞쪽으로 왔다. 허리춤에 매는 앞치마였는데 끈을 허리에서 한 번 엮어 주고 다시 앞으로 와서 매야 하는 형태였다. 덕분에 두루는 얼떨결에 그에게 안겨 있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의 차분한 숨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가 두루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밑을 내려다보며 끈을 묶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숨소리가 아무리 차분하다고 한들, 바로 귓가에 있었기에 크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느릿하고 일정한 그의 숨은 온기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더 뜨거웠다. 더군다나 바로 뒤에 닿아 있는 그의 몸 때문에 두루는 조금 괴로울 지경이었다. 아침에도 느꼈던 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이 이번엔 날개뼈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괘, 괜찮아. 내가 할게.”
두루는 약간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저지하며 말했다.
“거의 다 됐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두루는 그의 팔뚝에서 강한 힘을 느꼈다. 그래서 더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고 돌처럼 굳은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했다. 너무 오랜만에 봤기 때문일까. 예전에도 그는 충분히 남자답고 강인한 이미지였음에도, 오늘 느껴지는 그의 남자다운 모습들이 기묘할 정도로 낯설었다.
“도와줄까?”
끝내 앞치마를 손수 다 매 준 뒤에 곤이 말했다.
“아니야. 얼마 안 되잖아. 가서 쉬어.”
“왜 이렇게 날 쉬게 하지? 하루 종일 그 말만 들은 것 같은데.”
“그야 당연히 피곤할 테니까.”
“나 요즘 일 없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을 직접 들으니 귀가 솔깃했다.
“그래……? 차기작은? 아직이야?”
두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뒤이어 대답 대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돌아보니 곤이 어느새 식탁 앞에 앉아 한쪽 팔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처럼 그는 꽤 느긋해 보였다. 그의 짙은 눈빛이 그녀에게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루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설거지를 했지만 몸이 불편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전부터 눈치는 백단이었는데, 혹시 내 의도를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작품이야 많은데, 썩 끌리는 게 없어.”
타이밍이라면 지금이 딱이었다. ‘그럼 우리 회사 것도 한번 볼래?’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두루는 간지러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참 기회주의적인 인간이 되는 기분이긴 했지만, 일이라는 게 그랬다. 혹시라도 곤에게 오케이를 받아 냈는데 여론이 악화되어 곤의 이미지가 실추되면 회사에선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럴 경우 곤을 다시 잘라 내야 하는 것도 두루의 몫이었다. 한때 절친했던 친구 사이로서, 그만큼 난처한 일이 없을 것이었다. 지금도 어색한데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곤과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 불가능해질 것만 같았다.
결국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호의 연락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루는 결연한 표정으로 설거지에 속도를 붙였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먼저 연락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설거지를 마친 두루가 고무장갑을 털어서 싱크대에 걸쳐 놓고 앞치마를 벗어 벽에 걸어 놓은 뒤 거실로 향하려다가 깜빡한 것을 챙기듯 옆을 보았다. 곤이 의아한 표정으로 두루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급해? 화장실?”
“아, 아니거든? 할 일이 생각났어. 너도 얼른 쉬어.”
“한두루.”
얼른 방에 가서 은호에게 전화를 걸 생각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그에게서 다소 무거운 톤의 말이 날아들었다.
“내가 불편해?”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목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안 불편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정곡을 찔린 기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미안한 감정에 가까웠다. 그의 질문이 ‘난 네가 불편하지 않은데, 넌 왜 날 불편해하는 거야?’라고 서운한 감정을 담아 묻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는 끝을 올려 대답하며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그냥 오랜만에 봐서, 좀 어색한 거겠지.”
“왜 연락 안 했어?”
그냥 웃고 넘기려던 그녀는 예상치 못했던 기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 질문을 지금 네가, 나한테 하는 거야?”
그제야 돌아본 그녀가 답지 않게 필터링도 거치지 않고 말을 뱉었다. 먼저 연락을 하기는커녕 전화하면 촬영 중이라고 금방 끊거나 안 받고, 문자는 하루 뒤에 답장하고, 그렇게 슬슬 연락을 피해 갔던 게 누구더라?
“처음에 몇 번 하더니 그 후로 뚝 끊었잖아, 너.”
“네가 연락을 잘 안 받았잖아.”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란 걸 알 텐데.”
그가 데뷔 초에 얼마나 바빴는지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관계를 이어 나갈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했을 것이라는 게 두루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곤은 아니었다. 왠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난 못 했어.”
그는 말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못 했다’라고.
“못 받았고, 못 했어.”
두루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을 수가 없었다. 물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어쩐지, 그의 짙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네가 감당 못 할 말을 할 건데, 그래도 괜찮냐고.
“지금이라도 다시 만났으니 됐지.”
그래서 그녀는 속에 없던 웃음을 꺼내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들어가 쉬어.”
그러곤 바보처럼, 도망치듯 주망을 빠져나와 제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방문을 닫자마자 얕은 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그는 다시 온 뒤부터 계속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게 달라졌고,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이상하다는 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뭐야, 진짜…….”
유곤. 언제 이렇게 달라져 버린 거야?
띵동. 띵동.
초인종을 누르는 두루의 손이 다급했다. 그러나 그녀를 반기는 것은 야속한 정적뿐이었다. 두루는 몇 번 더 초인종을 누르다가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팀장님!”
몇 번을 불러 보아도 묵묵부답이었다. 아까 전화를 받을 때도 비몽사몽 상태더니, 끊자마자 기절한 모양이었다. 두루는 습관적으로 손톱 끝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두루는 작년에도 은호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일 때문에 근처를 지나고 있었는데, 은호가 중요한 서류를 집에 놓고 왔다며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하다지만 회사 후배일 뿐인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혼자 그의 집에 들어가 괜히 숨을 죽이고 서류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041…… 뭐였는데…….”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041 세 자리였다. 하필 마지막 자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좀 수고스럽더라도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모두 대입해서 눌러 보는 수밖에. 그런데 2까지 눌렀을 때였다.
‘0412…….’
그 숫자가 어쩐지 낯익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친 순간, 띠리리- 경쾌한 기계음이 나며 문이 열렸다. 마침내 됐다는 생각에 지금 상황도 잊고 희열감에 젖어 집에 들어선 두루는 문을 닫으면서 깨달았다. 그 숫자가 낯이 익었던 이유를.
0412, 오늘이잖아.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그가 정말 4월 12일이라는 날짜를 비밀번호로 지정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에게 오늘은 무슨 날일까. 분명 의미 있는 날일 것이다. 물론 그의 생일은 아니었다.
“팀장님…….”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두루가 조심스럽게 그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한 번 와 봤다고 그의 방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처음 들렀을 때 혹시 결벽증은 아닐까 의심을 했을 정도로 그의 집은 몹시 깔끔하고 깨끗했다. 모든 물건들이 각이 딱딱 잡혀서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말한 서류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의 방에 들어간 두루는 문 앞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검은 정장 상의와 검은 넥타이. 오늘은 출근날도 아닌데,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 잘 입지도 않는 검은색 정장을.
더군다나, 집어 든 옷에서는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젖어 있었다. 지금은 그쳤지만 정오가 지나서부터 내리던 비는 집을 나설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혹시 비를 맞은 것일까. 두루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은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불을 덮고 있어서 몰랐는데 상체를 보니 역시나 하얀 와이셔츠가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팀장님, 저 두루예요.’
그는 전화를 받긴 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귀를 기울이니 약간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여보세요?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왜.’
‘아, 전 유곤 캐스팅 땜에 연락드렸는데…… 그보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캐스팅이 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루는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그가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신경 쓰였다.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용케 자신의 상태에 관한 말들은 피해 갔다.
고름을 쥐어짜 내듯 힘겹게 말하고 있으면서. 신음도 숨기지 못하면서.
두루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지금 집이냐 물었고, 은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두루는 더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왔다. 나오는 도중 거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곤에게 붙잡혀 갑자기 어딜 가는 거며 누굴 만나는 거며 언제 오는지 등등 온갖 질문 공세를 받았지만 친구가 아프다고 간단히 둘러대고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곤은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다. 주말 저녁에, 그것도 비가 오는데, 친구도 아니고 회사 상사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는 그 ‘이상한’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고, 그녀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오랜 짝사랑까지 고백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얘기는 끝도 없이 길어질 게 뻔했다.
‘너무 늦지 마.’
한 발 물러서 준 그가, 마치 부탁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무 늦지 마. 두루는 그 말이 약간 부담스럽고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싫지 않았다. 실은 반가웠다. 내 집에 나 아닌 누군가 있다는 것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팀장님, 괜찮으세요?”
두루는 얼른 그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이마를 만지자마자 다른 생각들이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세상에. 놀라서 손을 뗄 정도로 열이 높았다. 그의 흰 피부는 핏기가 없어 더욱 하얗게 보였고, 입술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이마엔 몇 방울의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팀장님…… 일어나 보세요.”
두루가 조심스럽게 그를 흔들어 깨웠다.
“하…….”
그에게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신음을 하며 뒤척이던 그가 한참 뒤에야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도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정신 드세요? 괜찮으세요?”
두루는 침대맡에 앉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루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신이 없어서 상황 파악을 하는 거라고, 두루는 생각했다.
“많이 아프신 것 같아서…… 와 봤어요. 몸이 불덩인데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다 젖은 옷을 입고…….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 병원에 가요.”
“…….”
“네? 팀장님…….”
두루가 보채듯 말하자 그가 어렴풋이 눈으로 웃었다.
“괜찮으신 거예요?”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두루는 얼른 그의 등 뒤에 팔을 넣어 그가 좀 더 편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의 열기가 그녀의 팔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울컥할 정도로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세요.”
“…….”
“아무도 뭐라고 안 하잖아요.”
은호가 멈칫하더니 두루를 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그들을 스쳐 지나고, 그의 눈가에 다시금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