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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아직 촉촉이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졌다.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얇은 가운을 걸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그는 어느 때보다도 섹시해서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적인 공간에서, 이렇게 사적인 그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은호는 그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은 듯, 묵묵히 그녀가 해 준 죽을 먹고 있었다. 고맙다든가 맛있다는 말은 없었지만 힘들 텐데 잘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느새 그가 죽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두루는 왠지 뿌듯한 마음에 싱긋 웃으며 약을 내밀었다. 그는 말없이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그의 목젖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 그가 약을 먹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제 얼른 옷 갈아입고 병원 가요.”
두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과 컵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몸이 불덩이라니까요?”
놀란 두루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약 먹었으니까 금방 나을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팀장님이 살아야 우리 팀도 살죠.”
그러자 그에게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말이 없었으면.”
“…….”
“네가 내 애인인 줄 알았을 거야.”
두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저 웃으면서 하는 가벼운 농담이라는 걸 아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인…… 그의 입에서 그런 단어를 들은 것이 처음이었다. 그 단어가, 이렇게 설레던 단어였던가.
“……왜.”
혼자만의 느낌일 수 있지만, 갑자기 주방의 공기가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서 다른 주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를 맞았어요?”
두루는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가서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보기보다 쑥스러움을 잘 타고 내성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줄 것만 같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한참 뒤에 나온 말이었다. 4년을 봐 왔고, 이제는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를 넘어 오빠 동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러나 두루는 그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가 보다, 체념하듯 웃어넘기려던 때였다.
“동생 기일이거든.”
“…….”
“여섯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 내가 열여덟 살 때 잃었지만.”
4월 12일. 어떤 의미를 가진 날일까 궁금했는데, 그런 날일 줄은 몰랐다. 그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것도, 그 동생이 죽었다는 것도 모두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납골당에서 나오는데 비가 오더라. 우산이 있었지만 쓸 수가 없었어. 그 애는 지금도 차가운 물속에 있을 것 같아서.”
“…….”
“나 때문에 죽었거든. 물속에서.”
물에 젖은 채 숨을 거두었던 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모습이 떠오를 때면 동생의 몸에 있던 물기가 번져 온 것처럼, 그의 눈앞도 뿌옇게 흐려지곤 했다.
은호는 고아원에 살다가 다섯 살 때 입양이 됐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 집에 친자식이 생겼다. 머지않아 여동생이 태어났고, 은호는 그녀를 친동생처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들은 행복했다. 누구보다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녀가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기온이 초여름처럼 올라갔던, 유독 따뜻했던 봄날이었다. 등산을 갔던 은호의 가족은 우연찮게 아름다운 계곡을 만났는데, 은수가 하도 보채서 계곡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부모님은 바위에 앉아 봄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었고 은수는 은호를 끌고 위쪽 계곡으로 올라갔다. 아래쪽으로 꽤 경사가 있고 유속이 빠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들어간 것은 은호였다. 물이 그리 깊지 않았기에 발만 담그고 놀기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망설이던 은수를 계곡으로 끌어당겼고 한창 물장난을 하며 놀았다.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그 끔찍한 사고는 눈 깜빡할 새, 정말 한순간에 일어났다.
은호를 피해 뒤로 도망치던 은수가 발을 헛디뎠고 그녀의 뒤에 있던 돌이 밀려나면서 빠른 유속과 함께 휩쓸리듯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외쳤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계곡 아래로 떨어진 그녀는 거침없이 물에 쓸려 갔고, 어느 순간 멈추었을 땐 머리 위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
얘기를 들은 두루는 입이 얼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그가 그런 얘기를 그녀에게 할 것이라는 것도,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팀장님 잘못이 아니에요…….”
결국 나온 말은 그런 진부한 위로뿐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그가 그런 끔찍한 죄책감 속에서 15년이 넘게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렸다.
“아까 눈을 떴을 때, 은수가 날 보고 있는 줄 알았어.”
“…….”
“이상하게 너를 보면 은수 생각이 나.”
순간, 두루는 가슴을 훑고 지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설렘 같기도 하고 고통 같기도 한, 애매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어.”
그녀를 보며, 그의 소중한 동생을 생각해 준다는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자꾸만 가슴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였던 걸까. 그가 유독 두루에게만 잘해 주고 친절했던 것이. 그것도 모르고 혼자 그 오랜 시간 착각을 해 왔던 걸까.
두루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쓸쓸한 웃음이 샜다.
“……한두루.”
드륵. 의자가 뒤로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싱크대에 기대 있던 그녀는 약간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그런 그녀에게 끌리듯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향기가 다가왔다. 시원하고 향긋한 남자의 향기. 그 향기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온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향기에 포박당한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녀의 뺨 위에 그의 손이 닿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의 그윽한 눈빛 때문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의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녀의 쇄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시선을 내리자 그의 넓은 어깨와 반듯한 목선이 보였다. 어디로 시선을 두어도 괴로워서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너무도 따가운 말을 뱉었다.
“내 동생 할까?”
그녀의 쇄골에 맺혔던 물방울이 옷 속으로 들어갔다. 가슴골을 타고 흐르는 그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온몸을 시리게 만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두루는 짧은 숨과 함께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니요, 라는 말을 뱉고 싶었지만 씁쓸한 웃음만 나왔다.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눈물샘에 가득 들어찬 눈물이 터지기 전에 그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죄송해요.”
아직도 볼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스한 손을 거두어 내며, 그녀는 도망치듯 그의 품 안에서 나왔다.
“전 이만 가 볼게요.”
“…….”
“몸 관리 잘하시고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머리가 백지 상태였다. 그저 무의식중에 형식적으로 뱉을 수 있는 말은 다 뱉고 나서는,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에 빠른 속도로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서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다가오는 듯하면서도 다가오지 않는. 붙잡는 듯하면서도 붙잡지 않는.
두루는 언뜻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집을 나갔다. 쿵. 현관문을 닫는 동시에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눈물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제발, 그로 인한 눈물은 이게 끝이었으면 좋겠다고.
띠리리-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기대 있던 싱크대에는 공허한 정적만이 남았다. 그녀가 두고 간 향기가 언제나처럼 그의 마음속에 느리게 스며들었다. 그는 힘없이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끝도 없이 타락하는구나. 최은호.’
그는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부디, 이렇게 가슴이 뛰는 일은,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늘 그랬듯이,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5 내가 몰랐던 너의 마음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채 긴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기계적으로 TV 채널을 돌리던 곤이 이내 신경질적으로 TV를 뚝 끄더니 리모컨을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하아.”
미온의 숨이 쏟아졌다. 곤은 테이블 위에서 다리를 떼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그대로 잠이나 청하고 싶었는데 말똥말똥한 눈은 저절로 한 곳을 향했다. 아까부터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TV 위쪽에 자리한 벽걸이 시계.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어.
곤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 말을 떨쳐 내고자 고개를 흔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아무리 늦더라도 사실상 그가 관여할 이유나 권리는 조금도 없었다. 그는 지금, 갑자기 신세 좀 지자며 찾아온, 꽤 오래전 친했던 친구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아픈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말하는 표정이나 말투를 봐서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친구, 그것도 아픈 친구를 만나러 갔으니 설령 자고 온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어, 아프대서. 친구가.’
하지만 곤은 약간 더듬거리는 듯하던 그녀의 말투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곤은 두루의 그 표정을 알았다. 그녀는 공적인 연기는 참 잘했지만 사적인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게 되면 눈을 슬쩍 내렸다 뜨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목소리 톤도 평소보다 아주 약간 올라갔다. 말끝이 떨리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친구가 어떤 친군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그녀는 쪼르르 집을 나가 버렸다. 그때부터 시계의 시침이 한 칸씩 움직일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만일 그녀가 정말 거짓말을 한 거라면, 왜 굳이 거짓말을 했는지도 궁금하지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만나러 간 사람이 누구일지가 더 궁금했다.
혹시 남자라면…….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을 뿐,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진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이 저절로 튕겨 올라갔다. 곤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약간 불안정한 걸음으로 거실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들추어 보던 곤은 소파 쿠션 아래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휴대폰을 아무 데나 던져두는 습관이 있었다. 4년 전 두루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던 때부터였다.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올지도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느라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자신이 싫어서 아무 데나 툭툭 던져두곤 했던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멀어지면, 언젠가는, 어떻게든,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결국 또다시 그녀의 옆에 와 있었다.
‘유곤은 한두루한테서 벗어나지 못할걸.’
언젠가 그녀가 장난스레 웃으며 뱉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기억도 못 할 그 말은, 언제나 그의 곁을 따라다니며 보이지 않게 그를 구속해 왔다.
지이잉. 지이잉.
전원을 켜자마자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이 쉴 틈 없이 날아왔다. 그러나 그중에 그가 기다리는 이름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전화가 오지 않았으니 그도 차마 걸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당당히 전화번호부에서 두루를 찾았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띠리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터덜터덜. 힘없는 발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멀뚱히 서서 그녀를 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소파에 앉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
“왔어?”
“……어.”
그런데 그녀는 그에게 짧은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방으로 향했다. 축 처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왜 그렇게 힘이 없냐 묻기도 전에 그녀의 방문이 닫혔다. 필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지만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닫혀 있는 방문이 왠지 그녀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용기를 내겠다고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는 아직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조금 열린 베란다 문틈 사이로 늦은 밤의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내내 느끼지 못했던 그 바람이 새삼 거슬릴 정도로 차갑게 느껴져서 문을 닫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오른팔을 들어 눈을 가리자 시커먼 어둠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어둠의 속도만큼 빠르게 잠이 들면 좋으련만, 오늘은 절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가 방 안에 있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명색이 톱스타와 한 지붕 아래 단둘이 잠들게 생겼음에도 그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그녀가, 방 안에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긴장이 되고 가슴이 떨려서 그는 결코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방문을 열지 못하는 데에는 이러한 남자로서의 본능적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지 몰랐다.
서운, 걱정, 불안, 초조, 설렘 등 모든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예나 지금이나 한두루에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능력.
그녀는,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두루는 창틈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빛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오늘 아침 메뉴는 곤이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이었다. 김치통과 참치, 햄, 마요네즈를 꺼내고 문을 닫다가 아차 계란, 하고 다시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계란이 세 개뿐이었다. 두루는 계란 한 개를 집어 들며 혼잣말로 읊조렸다.
“장 봐야겠네.”
곤은 입맛이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햄, 계란, 치즈 같은 것들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계란을 가장 좋아했다. 계란을 많이 사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연이어 그가 이 집에 얼마 동안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루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젯밤, 그가 잠들어 있던 거실 소파가 보였다.
집에 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힌 채 은호로 인해 잔뜩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던 두루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씻으러 나왔다. 욕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몰랐는데 씻고 나와 보니 소파 위에서 이불도 없이 잠들어 있는 곤이 보였다. 그리 작지 않은 소파였지만 그의 기다란 몸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게 잠들어 있는 곤을 보니, 너무 늦지 말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기다렸을지도 모르는데, 제 감정에 휩싸여 그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됐다.
두루는 곤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운 뒤 방에 가서 자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잠에 취한 듯 붉은 눈으로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옅은 달빛 아래,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는 듯한 그의 눈빛은 너무 고혹적이라 오래 마주할 수가 없었다. 두루가 먼저 시선을 피하자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 고마워.’
약간 갈라진 듯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에는 굵은 울림이 있었다.
두루는 그를 아버지가 썼던 안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십 년 전 이후로 한 번도 누군가의 온기로 채워진 적 없던 방이 곤의 온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좋았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자, 곤아.’
오랜만에 굿나잇 인사를 하면서 싱긋 웃자 그도 어렴풋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좋은 밤이었다. 그와 한 지붕 아래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긴 했지만 왠지 든든하고 좋았다. 그녀는 혼자인 게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아주 간만에 혼자가 아닌 것의 기쁨을 느꼈다. 이 기분이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곤은 하연만 찾으면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러 돌아가야 했다.
약간 아쉬운 마음에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루는 김치를 먹기 좋게 썰어 놓고 손을 씻은 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둘렀다. 참치캔의 뚜껑을 따고 있는데 앞치마에서 휴대폰이 길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든 두루는 흠칫 놀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최은호 팀장님]
어제 그렇게 집에 온 뒤로도 아무 연락이 없던 그였다. 아침 열 시. 그리 이른 시각은 아니었지만 그가 아침에 연락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한 걸까? 두루는 괜스레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아서 앞치마에 손바닥을 두어 번 문지르고 깊은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나야.
그가 한 박자 늦게 뱉은 말은 겨우 그것이었다. 나야. 당연히 알고 있는 얘기. 어쩐지 그도 이 통화를 어색하게 여긴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달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두루는 온 신경을 전화 건너편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네, 팀장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루는 그 짧은 정적 사이에, 몸은 괜찮냐는 말과 무슨 일이냐는 말 사이에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먼저 떠오른 것은 몸은 괜찮냐는 말이었다.
- 이제 알았어. 유곤 얘기.
“아…….”
- 미안해. 답이 늦어서.
“아니에요. 어제 아프셨으니까……. 좀 괜찮으세요?”
- 응. 덕분에.
“…….”
- 캐스팅은 공식 입장 발표가 나올 때까지 미루는 게 좋겠다.
“네. 그렇게 할게요.”
- 그래.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오늘 아침은 먹었는지, 병원은 갔는지, 약은 먹었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한두루…… 내 동생 할까?’
어젯밤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그 한마디가 여전히 귓가에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녀에게 있는 그대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나는 너를 지금까지 쭉 동생으로만 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그러니 우리 딱 거기까지만 선을 긋고 지내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안 들키고 잘 지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아프다고 한걸음에 그의 집까지 달려간 것이 문제였을까? 그는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그래서 그 마음을 딱 잘라 내고 싶었던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길어져서 나중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속이 뜨거워지고 울컥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저.”
- 한두루.
그만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는데, 그도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그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 어젠…… 고마웠어.
“…….”
- 그리고…… 어제 내가 한 말은…….
“아, 저, 괜찮아요.”
두루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왠지 불안해서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 괜찮다니, 뭐가?
“팀장님 여동생 자리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괜찮다구요. 사양할게요.”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두루는 여유로운 척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곈데, 너무 가까워지면 안 좋을 것 같아서요.”
그에게선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최은호. 그를 안 지가 벌써 4년. 혼자 좋아한 지도 벌써 4년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백하지 못한 데에는 분명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빌어먹을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만 유달리 친절한 은호 때문에 매일매일을 착각과 혼란 속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일정 선을 넘으며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당연히 고백하는 일도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짝사랑의 특권인 도끼병에 시달린대도 4년이 넘도록 한 번도 남자로 다가오지 않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먼저 고백을 할 수도 없었다. 고백했다가 거절당했을 때 자신이 겪을 상처도 두려웠고, 이후 회사 생활도 걱정이 됐다.
사실 그녀가 사랑에 있어 이렇게 겁이 많아지고 자존심 따위를 세우게 된 것에는 희준의 여파가 컸다. 4년을 만났지만 그 끝은 너무도 허무했다. 배신과 상처, 분노로 얼룩진 그 시간을 두루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별 후에 두루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금방 털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마음이 희미해진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녀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존심뿐이었으니까. 더욱이 캠퍼스 커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라도 자신을 존중하고 지켜 내지 않으면 빠르게 확산되고 과장되는 소문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동정 어린 눈길 속에서 버텨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