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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두루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은호를 사랑하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믿지 않았다. 사랑이란, 길어야 2-3년 가는 허황된 감정일 뿐이고 감당하기 힘든 상처들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도 끝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만들어 놓고야 마는 것. 그래서 그녀에게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 자존심이 중요해졌다. 설령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아파해야 할 때 아파하지 못하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그것이 더 중요했다.
조금 덜 상처입기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었다.
- ……그래. 알았어.
한참 뒤에야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말 사이에 희미한 웃음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만 끊을게요. 내일 봬요.”
전화를 끊고 나서 두루는 낮은 한숨을 길게 뱉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느라 긴장해 있던 몸이 풀어지면서 힘이 빠졌다. 잠깐 의자에 앉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였다.
두루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발 주춤했다. 언제 왔는지 곤이 주방 벽에 몸을 기대고 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꺾인 고개와 무표정한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어, 언제 왔어?”
그러자 곤은 얼핏 웃더니 벽에서 몸을 떼고 천천히 걸어왔다. 두루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통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를 떠올렸다. 여동생 얘기 외에는 별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잘못한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곤이 발을 멈추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낸 뒤 식탁으로 가서 유리잔에 따랐다. 물을 따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곤이 물을 마시며 물었다.
“무슨 전화야?”
“어, 우리 팀장님.”
두루는 요리를 마저 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반쯤 따져 있는 참치캔을 마저 따기 위해 집어 들었다. 힘을 주었지만 뚜껑이 잘 따지지 않았다. 두루는 다시 한 번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힘을 바싹 주었다.
“팀장이었어?”
“뭐가?”
“어제 아프다는 사람.”
순간 미끄러지듯 열린 뚜껑이 끝에서 걸려 버렸다. 두루는 잠시 그 상태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줘 봐.”
어느새 곁에 다가온 곤이 그녀에게서 참치캔을 가져갔다. 휘익. 툭. 가볍게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김치볶음밥 하는 거야?”
“어, 어.”
“맛있겠네. 좀 도울까?”
“아니야. 내가 할게. 가서 쉬어.”
곤에게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잔뜩 굳어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낯익은 손길이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이듯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은 마치 으이구, 한두루,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주고 주방을 나갔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방문을 닫자마자 낮은 숨이 쏟아졌다. 곤은 살며시 눈을 감고 문에 기대어 앉았다.
어젯밤. 낯선 손길에 눈을 떠 보니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꿈인 줄만 알았다. 미약한 달빛 아래에서도 화사하게 빛나는 희고 고운 얼굴과 촉촉이 젖은 머리칼. 매일 밤 꿈에서만 보던 그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당연히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이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 곱게 파인 쇄골에 안착했다. 잔주름 하나 없는 하얗고 보드라운 목덜미와 어깨선을 보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붉은 입술로 들어가서 자라고 속삭일 때는 그만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녀의 약간 도톰한 아랫입술은 언제나 그에게 삼켜 보고 싶은, 깨물어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어. 고마워.’
아직 한 가닥이나마 이성의 끈이 남아 있음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그녀는 전혀 모를 것이었다.
두루는 침실까지 그를 데려다 주었다. 검게 타 버린 그의 속내도 모르고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싱긋 웃으며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그녀를 본 순간, 곤은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나가고 나서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던 그는 아침이 되어서야 얕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그녀가 아침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꼭 신혼이라도 된 것 같아서 그 소리 하나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런데 그녀를 얼른 보고 싶은 마음에 피곤한 것도 잊고 방을 나섰을 때, 그의 귀에 거슬리는 얘기가 들렸다.
‘네, 팀장님.’
팀장님. 그는 AK미디어 영화 제작팀의 팀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두루와 연락하지 않는 동안에도 두루가 일하는 주변 환경을 꿰고 있었다. 또한 최은호 팀장은 딱히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생긴 외모에 젠틀한 성격, 뛰어난 안목과 실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제작자였다.
‘아…… 아니에요. 아프셨으니까. 좀 괜찮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팀장님 여동생 자리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괜찮다구요. 사양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곈데, 너무 가까워지면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얼핏 들은 얘기만으로도 그들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너무 가까워지면 안 좋을 것 같다. 그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비가 오는 밤, 그녀가 황급히 만나러 갔던 사람의 정체는 친구가 아니라 회사 팀장이었다. 그녀의 감정을 좌우할 수 있는 그 대단한 사람의 정체는 최은호 팀장이었다.
“하아…….”
쓰린 가슴 위로 다시 한 번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무미건조한 하루가 흘러갔다. 두루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장을 보고, 밀린 빨래를 하고 집안 청소를 했다. 곤은 밥을 먹고 나서 간만에 집 뒤에 있는 하천으로 운동을 갔고, 갔다 와서 그녀의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함께 영화 <클래식>을 보았다. 개봉 당시엔 못 보고 십 년 전 곤의 집에 놀러갔다가 비디오로 빌려 처음 보았었다. 그 후 <클래식>은 곤과 두루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고, 두루는 DVD를 소장해서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은호를 짝사랑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클래식>을 무한 반복해서 보곤 했다.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도 날 짝사랑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영화를 보다 말고 혼잣말하듯 말했을 때, 곤은 그저 피식 웃으며 그러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곤이 저녁 준비를 했다. 메뉴는 두루가 좋아하는 낙지볶음이었다. 매콤한 향기가 주방 가득 퍼졌다. 그냥 밥만 먹을 생각으로 상을 차리고 있는데, 곤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왔다.
장을 볼 때 산 기억이 없는데. 두루가 의아해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운동을 갔다 오는 길에 사 온 모양이었다. 황당한 듯 웃으며 냉장고를 열어 보자 소주가 세 병이나 더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내 거야. 넌 먹지 마.”
곤이 개구지게 웃으며 소주잔을 하나만 가져다 놓았다. 두루가 그를 찌릿 한 번 쏘아본 뒤 한 잔 더 가져왔다.
“잘됐다. 안 그래도 되게 술 댕겼는데.”
“주량 좀 늘었나 보다. 너 술 엄청 못했잖아.”
“그러는 넌? 남자가 소주 한 병도 못 하면서.”
“세 잔만 먹어도 인사불성되는 누구 챙기느라 못 먹는 척한 거지.”
“얼씨구.”
“안 믿기면 오늘 한번 봐. 얼마나 먹는지.”
그의 붉은 입술 끝이 위로 휘었다. 두루는 그제야 정말인가 싶어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물론 같이 술을 마시는 일이 있으면 항상 그녀가 먼저 취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주량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시는 일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정말 언제든 멀쩡한 상태로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었다.
“그래. 오늘 한번 먹어 보자.”
두루는 결심한 듯 투명한 소주가 찰랑이는 잔을 허공으로 들었다. 곤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잔을 부딪쳤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 웃음을 안주 삼아 두루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낙지볶음의 매콤하고 칼칼한 맛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순간이었다.
“다섯 잔. 그래도 늘긴 늘었네.”
곤이 짧게 웃으며 한 잔 더 들이켜려는 그녀에게서 잔을 빼앗았다.
“뭐야, 왜?”
“그만 마셔, 이제.”
“싫어. 이리 줘. 아직 멀었어.”
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잔에 있던 술을 물처럼 가볍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잔을 달라고 떼를 쓰는 두루의 양 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홍조 띤 그녀의 얼굴에서는 부드럽고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봐. 뜨겁잖아. 그만 가서 자. 너 주사 나오면 골치 아파.”
“골치 아프다고? 내가? 너 어떻게…… 네가 어떻게…… 그래서 연락 안 한 거야?”
그녀가 서운한 듯 입술을 살짝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붉고 촉촉한 입술이 술이 묻어 더욱 반짝거렸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니까.”
못 했다.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할 수 없던 거였다. 곤에겐 그랬다. 그녀를 잊어야만 했으니까. 어떻게든 잊고 싶었으니까.
“일어나. 가서 자.”
곤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강제로 일으켰다. 그녀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부축하듯 그녀를 방으로 이끌었다. 두루는 아직 멀쩡하다며 더 먹겠다고 아이처럼 떼를 썼다. 그는 두루의 허리를 끌어안듯 더욱 바싹 당겨 잡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하면 안아 버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루가 뚝 하고 말을 멈추었다. 두루가 훨씬 많이 취하긴 했지만 곤도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그녀의 속도에 맞추느라고 그녀가 한 잔을 먹을 때 혼자 두 잔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좀 천천히 먹으라니까.”
하지만 두루는 뭐가 그리 속상한지 빈속에 술을 벌컥 벌컥 들이켰고, 생각보다 빨리 취해 버렸다.
곤은 두루를 침대에 눕혀 놓고 이불을 잘 덮어 준 뒤 흘러내린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녀가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지독하게 유혹적이었지만, 그 눈가가 그녀의 입술처럼 붉고 촉촉하게 변해 가고 있어서,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그녀의 주사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면 가끔 별것 아닌 이유로 울었고,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토닥토닥 달래 주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눈물이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굵게 맺힌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그는 등을 돌렸다.
“……자라.”
그때, 그의 손끝에 뜨거운 손길이 와 닿았다. 그녀가 작은 손을 들어 그의 손끝을 살짝 붙잡았다.
“곤아.”
“…….”
“가지 마. 여기 있어.”
두루가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실없이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는 차마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작은 숨을 토하며 침대맡에 앉았다. 그리고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예상대로 그녀의 입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곤은 가슴이 너무 쓰려서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숨소리만큼이나 작았던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대성통곡 수준이 되었다.
“곤아. 나 어떡하지?”
“…….”
“내 맘이 내 맘대로 안 돼. 그래서 너무 힘들어.”
곤은 말없이 그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사랑 같은 거 싫은데, 정말 싫은데…… 다시는 안 하려고 했는데…….”
“…….”
“4년이라니…… 하. 벌써 4년이 넘었는데, 이 지긋지긋한 감정이 안 사라져. 그 사람이 안 잊혀져서 미칠 것 같아.”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4년. 그건 몰랐다. 그녀가 4년 동안이나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었을 줄은.
“그 사람이 나빠. 진짜 나빠. 그만두려고만 하면 희망고문하는 거 있지?”
“…….”
“다가올 것 같으면서 멀어지고, 멀어진 것 같으면 다시 다가와. 그럼 난 또, 다가갈 용기도 없으면서 히죽거리고 웃어. 나 정말 바보 같지?”
“…….”
“너 왜 가만있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 나 바보 같잖아. 그런 짓을 왜 하냐고 욕이라도 좀 해 주란 말이야.”
두루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곤은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볼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떨어지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 주었다. 엄지손가락에 그녀의 미지근한 눈물이 닿았다. 미지근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도 점점 이렇게 식어 갔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네가 말하는 그 바보 같은 짓이란 걸 나는 벌써 10년이나 해 왔고, 네가 말하는 그 희망고문이라는 걸 너 역시 벌써 10년이나 해 왔다고. 그러니 나는 너에게 조언을 해 줄 수도, 그 남자를 욕할 수도 없다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Part 2. 네 오랜 간극의 의미]
2-1 좋아하지 마
[이하연 측, 김성준과의 스캔들 부인]
[이하연 소속사, 루머 유포자 강경 대응할 것]
[이하연 유곤, 연애전선 이상 무]
[이하연 심적 고통 컸나 몸살로 입원 중]
갑자기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사 때문에 회의실은 술렁거렸지만 두루는 그에 동조하지 않고 멍하니 기사들을 읽고 있었다.
오늘 오전 열 시경 하연의 소속사 ESP엔터테인먼트가 드디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항간에 떠돌고 있는 불미스러운 스캔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하연과 곤은 여전히 잘 만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산부인과를 몇 번 간 적은 있지만 그것은 하연의 유달리 심한 생리통과 자궁경부암 예방 접종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소속사는 하연이 이번 일로 심적 고통을 크게 받았고 현재 입원 중이라며 하연의 불륜과 임신에 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린 사람들을 추적해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러한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소문을 더 신뢰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소속사가 생각보다 강하게 나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악성 루머 해프닝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 정도면 별문제 없겠는데요? 어차피 며칠 지나면 다 수그러질 거고.”
수아가 스마트폰 화면을 슥슥 넘기며 은호를 향해 말했다. 은호는 말없이 기사만 읽고 있었다. 그러자 은채가 끼어들며 미심쩍다는 듯 말을 흘렸다.
“근데 이하연이 직접 말한 건 아무것도 없네요. 다 소속사 측 얘기고.”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제 입으로 거짓말은 못 하겠나 보지.”
수아는 하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유곤이랑 처음 열애설 났을 때부터 수상하다 했어. 김성준이랑 불륜설 나자마자 터뜨렸잖아. 죄 없는 유곤만 불쌍하게 됐지. 누구 방패막이하느라고 연애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냐. 까딱하다 거짓 연애 들통나기라도 하면 대중들을 상대로 연기나 한 파렴치한 배신자로 낙인찍힐 테고. 대체 그 잘난 유곤이 왜 이런 불여우 같은 이하연을 도운 거냐고!”
“이 대리님, 이하연 만나 본 적 있어요? 엄청 싫어하시네.”
서준이 풋 웃으며 묻자 수아가 몹시 언짢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꼭 만나 봐야만 알아? 재벌가 상대로 불륜이나 저지르는 여자를 누가 좋아해? 넌 좋니? 왜, 예뻐서? 하여간 남자들은 별수 없다니까. 예쁘기만 하면 살인을 저질러도 용서해 줄 거야. 아주.”
“에이, 누가 그렇대요? 그리고 사실은 모르는 거잖아요.”
“모르긴 뭘 몰라.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그걸 대리님이 어떻게 알아요?”
“자자, 쓸데없는 얘기들은 그만하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하연 불륜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입장 발표가 이렇게 났고 여론이 꽤 호의적이고 조만간 단순 해프닝으로 묻힐 것 같으니, 이 대리 말대로 유곤을 캐스팅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김 차장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자 수아는 서준을 세게 한 번 쏘아본 뒤 분을 삭였고 서준은 그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두루는 몇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정작 유곤 캐스팅을 맡은 당사자가 넋을 놓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두루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은호를 보았다.
“어떡할까요, 팀장님?”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던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두루와 눈을 마주했다. 그윽한 듯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을 마주하자 심장이 또 눈치 없이 덜컹거렸다.
“한 대리는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곤을 캐스팅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지만 답이 쉽게 내려지지는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적인 측면에서의 장단점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두루는 곤을 캐스팅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일 때문에라도 자주 함께 있다 보면 예전처럼 편하고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때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그를, 되찾고 싶었다.
“저는…… 캐스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ESP의 공식 입장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중에 유곤과 이하연의 연애가 가짜 연애였다고 밝혀지면 저희가 입게 될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유곤만큼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데다 극중 인물의 이미지에도 잘 맞는 배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루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은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모두 동의하는 눈치였다. 은호는 잠시 서류를 넘겨 보더니 단호하고 깔끔한 어투로 말했다.
“진행해, 그럼.”
어쩐지 그에게 강한 신뢰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두루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걸렸다.
멍한 얼굴로 잠든 하연을 내려다보고 있던 곤은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근심이 드리워진 얼굴로 들어온 사람은 소속사 대표 김은표였다. 그는 발이 무거운지 몇 걸음 오지 못하고 멈추어 선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이야?”
그 말에 곤은 다시 하연을 보았다.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여리고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새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녀는 보는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 곤은 매니저 현준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왔다.
‘형님! 하연 누나가, 하연 누나가…….’
오늘 새벽, 하연의 매니저가 수소문 끝에 하연이 있는 호텔을 알아내 그녀를 찾으러 갔는데, 그녀는 시체처럼 몸이 뒤집힌 채 쓰러져 있었고 그 옆으로 수면제와 와인이 쏟아져 있었다고 했다. 그리 늦게 발견하지 않아서 살릴 수는 있었지만 소속사 사람들은 모두 심한 충격에 빠졌다. 하연이 힘들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자살을 시도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연은 4차원적인 면이 있어 그 속을 알기가 힘들었지만 기본적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많은 남자 스탭들이 무섭다는 이유로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열아홉에 청춘 드라마로 스타 반열에 오른 그녀는,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스물여섯의 김성준을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사랑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았다. 술집을 운영하던 엄마가 남자 문제로 아버지랑 이혼한 후부터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들과 어울리느라 어린 그녀를 방치하는 엄마를 보며, 하연은 사랑 따윈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날 소나기처럼 잠깐 스쳐 가는 허울뿐인 감정. 그런 감정에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중요한 시기였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식으로 만나 보자던 성준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이 다시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두루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은호를 사랑하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믿지 않았다. 사랑이란, 길어야 2-3년 가는 허황된 감정일 뿐이고 감당하기 힘든 상처들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도 끝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만들어 놓고야 마는 것. 그래서 그녀에게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 자존심이 중요해졌다. 설령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아파해야 할 때 아파하지 못하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그것이 더 중요했다.
조금 덜 상처입기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었다.
- ……그래. 알았어.
한참 뒤에야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말 사이에 희미한 웃음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만 끊을게요. 내일 봬요.”
전화를 끊고 나서 두루는 낮은 한숨을 길게 뱉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느라 긴장해 있던 몸이 풀어지면서 힘이 빠졌다. 잠깐 의자에 앉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였다.
두루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발 주춤했다. 언제 왔는지 곤이 주방 벽에 몸을 기대고 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꺾인 고개와 무표정한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어, 언제 왔어?”
그러자 곤은 얼핏 웃더니 벽에서 몸을 떼고 천천히 걸어왔다. 두루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통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를 떠올렸다. 여동생 얘기 외에는 별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잘못한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곤이 발을 멈추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낸 뒤 식탁으로 가서 유리잔에 따랐다. 물을 따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곤이 물을 마시며 물었다.
“무슨 전화야?”
“어, 우리 팀장님.”
두루는 요리를 마저 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반쯤 따져 있는 참치캔을 마저 따기 위해 집어 들었다. 힘을 주었지만 뚜껑이 잘 따지지 않았다. 두루는 다시 한 번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힘을 바싹 주었다.
“팀장이었어?”
“뭐가?”
“어제 아프다는 사람.”
순간 미끄러지듯 열린 뚜껑이 끝에서 걸려 버렸다. 두루는 잠시 그 상태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줘 봐.”
어느새 곁에 다가온 곤이 그녀에게서 참치캔을 가져갔다. 휘익. 툭. 가볍게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김치볶음밥 하는 거야?”
“어, 어.”
“맛있겠네. 좀 도울까?”
“아니야. 내가 할게. 가서 쉬어.”
곤에게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잔뜩 굳어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낯익은 손길이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이듯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은 마치 으이구, 한두루,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주고 주방을 나갔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방문을 닫자마자 낮은 숨이 쏟아졌다. 곤은 살며시 눈을 감고 문에 기대어 앉았다.
어젯밤. 낯선 손길에 눈을 떠 보니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꿈인 줄만 알았다. 미약한 달빛 아래에서도 화사하게 빛나는 희고 고운 얼굴과 촉촉이 젖은 머리칼. 매일 밤 꿈에서만 보던 그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당연히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이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 곱게 파인 쇄골에 안착했다. 잔주름 하나 없는 하얗고 보드라운 목덜미와 어깨선을 보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붉은 입술로 들어가서 자라고 속삭일 때는 그만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녀의 약간 도톰한 아랫입술은 언제나 그에게 삼켜 보고 싶은, 깨물어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어. 고마워.’
아직 한 가닥이나마 이성의 끈이 남아 있음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그녀는 전혀 모를 것이었다.
두루는 침실까지 그를 데려다 주었다. 검게 타 버린 그의 속내도 모르고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싱긋 웃으며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그녀를 본 순간, 곤은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나가고 나서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던 그는 아침이 되어서야 얕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그녀가 아침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꼭 신혼이라도 된 것 같아서 그 소리 하나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런데 그녀를 얼른 보고 싶은 마음에 피곤한 것도 잊고 방을 나섰을 때, 그의 귀에 거슬리는 얘기가 들렸다.
‘네, 팀장님.’
팀장님. 그는 AK미디어 영화 제작팀의 팀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두루와 연락하지 않는 동안에도 두루가 일하는 주변 환경을 꿰고 있었다. 또한 최은호 팀장은 딱히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생긴 외모에 젠틀한 성격, 뛰어난 안목과 실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제작자였다.
‘아…… 아니에요. 아프셨으니까. 좀 괜찮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팀장님 여동생 자리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괜찮다구요. 사양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곈데, 너무 가까워지면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얼핏 들은 얘기만으로도 그들의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너무 가까워지면 안 좋을 것 같다. 그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비가 오는 밤, 그녀가 황급히 만나러 갔던 사람의 정체는 친구가 아니라 회사 팀장이었다. 그녀의 감정을 좌우할 수 있는 그 대단한 사람의 정체는 최은호 팀장이었다.
“하아…….”
쓰린 가슴 위로 다시 한 번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무미건조한 하루가 흘러갔다. 두루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장을 보고, 밀린 빨래를 하고 집안 청소를 했다. 곤은 밥을 먹고 나서 간만에 집 뒤에 있는 하천으로 운동을 갔고, 갔다 와서 그녀의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함께 영화 <클래식>을 보았다. 개봉 당시엔 못 보고 십 년 전 곤의 집에 놀러갔다가 비디오로 빌려 처음 보았었다. 그 후 <클래식>은 곤과 두루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고, 두루는 DVD를 소장해서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은호를 짝사랑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클래식>을 무한 반복해서 보곤 했다.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도 날 짝사랑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가 영화를 보다 말고 혼잣말하듯 말했을 때, 곤은 그저 피식 웃으며 그러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곤이 저녁 준비를 했다. 메뉴는 두루가 좋아하는 낙지볶음이었다. 매콤한 향기가 주방 가득 퍼졌다. 그냥 밥만 먹을 생각으로 상을 차리고 있는데, 곤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왔다.
장을 볼 때 산 기억이 없는데. 두루가 의아해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운동을 갔다 오는 길에 사 온 모양이었다. 황당한 듯 웃으며 냉장고를 열어 보자 소주가 세 병이나 더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내 거야. 넌 먹지 마.”
곤이 개구지게 웃으며 소주잔을 하나만 가져다 놓았다. 두루가 그를 찌릿 한 번 쏘아본 뒤 한 잔 더 가져왔다.
“잘됐다. 안 그래도 되게 술 댕겼는데.”
“주량 좀 늘었나 보다. 너 술 엄청 못했잖아.”
“그러는 넌? 남자가 소주 한 병도 못 하면서.”
“세 잔만 먹어도 인사불성되는 누구 챙기느라 못 먹는 척한 거지.”
“얼씨구.”
“안 믿기면 오늘 한번 봐. 얼마나 먹는지.”
그의 붉은 입술 끝이 위로 휘었다. 두루는 그제야 정말인가 싶어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물론 같이 술을 마시는 일이 있으면 항상 그녀가 먼저 취했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주량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시는 일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정말 언제든 멀쩡한 상태로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었다.
“그래. 오늘 한번 먹어 보자.”
두루는 결심한 듯 투명한 소주가 찰랑이는 잔을 허공으로 들었다. 곤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잔을 부딪쳤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 웃음을 안주 삼아 두루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낙지볶음의 매콤하고 칼칼한 맛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순간이었다.
“다섯 잔. 그래도 늘긴 늘었네.”
곤이 짧게 웃으며 한 잔 더 들이켜려는 그녀에게서 잔을 빼앗았다.
“뭐야, 왜?”
“그만 마셔, 이제.”
“싫어. 이리 줘. 아직 멀었어.”
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잔에 있던 술을 물처럼 가볍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잔을 달라고 떼를 쓰는 두루의 양 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홍조 띤 그녀의 얼굴에서는 부드럽고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봐. 뜨겁잖아. 그만 가서 자. 너 주사 나오면 골치 아파.”
“골치 아프다고? 내가? 너 어떻게…… 네가 어떻게…… 그래서 연락 안 한 거야?”
그녀가 서운한 듯 입술을 살짝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붉고 촉촉한 입술이 술이 묻어 더욱 반짝거렸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니까.”
못 했다.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할 수 없던 거였다. 곤에겐 그랬다. 그녀를 잊어야만 했으니까. 어떻게든 잊고 싶었으니까.
“일어나. 가서 자.”
곤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강제로 일으켰다. 그녀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부축하듯 그녀를 방으로 이끌었다. 두루는 아직 멀쩡하다며 더 먹겠다고 아이처럼 떼를 썼다. 그는 두루의 허리를 끌어안듯 더욱 바싹 당겨 잡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하면 안아 버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루가 뚝 하고 말을 멈추었다. 두루가 훨씬 많이 취하긴 했지만 곤도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그녀의 속도에 맞추느라고 그녀가 한 잔을 먹을 때 혼자 두 잔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좀 천천히 먹으라니까.”
하지만 두루는 뭐가 그리 속상한지 빈속에 술을 벌컥 벌컥 들이켰고, 생각보다 빨리 취해 버렸다.
곤은 두루를 침대에 눕혀 놓고 이불을 잘 덮어 준 뒤 흘러내린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녀가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지독하게 유혹적이었지만, 그 눈가가 그녀의 입술처럼 붉고 촉촉하게 변해 가고 있어서,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그녀의 주사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면 가끔 별것 아닌 이유로 울었고,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토닥토닥 달래 주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눈물이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굵게 맺힌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그는 등을 돌렸다.
“……자라.”
그때, 그의 손끝에 뜨거운 손길이 와 닿았다. 그녀가 작은 손을 들어 그의 손끝을 살짝 붙잡았다.
“곤아.”
“…….”
“가지 마. 여기 있어.”
두루가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실없이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는 차마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작은 숨을 토하며 침대맡에 앉았다. 그리고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예상대로 그녀의 입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곤은 가슴이 너무 쓰려서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숨소리만큼이나 작았던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대성통곡 수준이 되었다.
“곤아. 나 어떡하지?”
“…….”
“내 맘이 내 맘대로 안 돼. 그래서 너무 힘들어.”
곤은 말없이 그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사랑 같은 거 싫은데, 정말 싫은데…… 다시는 안 하려고 했는데…….”
“…….”
“4년이라니…… 하. 벌써 4년이 넘었는데, 이 지긋지긋한 감정이 안 사라져. 그 사람이 안 잊혀져서 미칠 것 같아.”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4년. 그건 몰랐다. 그녀가 4년 동안이나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었을 줄은.
“그 사람이 나빠. 진짜 나빠. 그만두려고만 하면 희망고문하는 거 있지?”
“…….”
“다가올 것 같으면서 멀어지고, 멀어진 것 같으면 다시 다가와. 그럼 난 또, 다가갈 용기도 없으면서 히죽거리고 웃어. 나 정말 바보 같지?”
“…….”
“너 왜 가만있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 나 바보 같잖아. 그런 짓을 왜 하냐고 욕이라도 좀 해 주란 말이야.”
두루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곤은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볼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떨어지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 주었다. 엄지손가락에 그녀의 미지근한 눈물이 닿았다. 미지근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도 점점 이렇게 식어 갔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네가 말하는 그 바보 같은 짓이란 걸 나는 벌써 10년이나 해 왔고, 네가 말하는 그 희망고문이라는 걸 너 역시 벌써 10년이나 해 왔다고. 그러니 나는 너에게 조언을 해 줄 수도, 그 남자를 욕할 수도 없다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Part 2. 네 오랜 간극의 의미]
2-1 좋아하지 마
[이하연 측, 김성준과의 스캔들 부인]
[이하연 소속사, 루머 유포자 강경 대응할 것]
[이하연 유곤, 연애전선 이상 무]
[이하연 심적 고통 컸나 몸살로 입원 중]
갑자기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사 때문에 회의실은 술렁거렸지만 두루는 그에 동조하지 않고 멍하니 기사들을 읽고 있었다.
오늘 오전 열 시경 하연의 소속사 ESP엔터테인먼트가 드디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항간에 떠돌고 있는 불미스러운 스캔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하연과 곤은 여전히 잘 만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산부인과를 몇 번 간 적은 있지만 그것은 하연의 유달리 심한 생리통과 자궁경부암 예방 접종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소속사는 하연이 이번 일로 심적 고통을 크게 받았고 현재 입원 중이라며 하연의 불륜과 임신에 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린 사람들을 추적해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러한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소문을 더 신뢰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소속사가 생각보다 강하게 나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악성 루머 해프닝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 정도면 별문제 없겠는데요? 어차피 며칠 지나면 다 수그러질 거고.”
수아가 스마트폰 화면을 슥슥 넘기며 은호를 향해 말했다. 은호는 말없이 기사만 읽고 있었다. 그러자 은채가 끼어들며 미심쩍다는 듯 말을 흘렸다.
“근데 이하연이 직접 말한 건 아무것도 없네요. 다 소속사 측 얘기고.”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제 입으로 거짓말은 못 하겠나 보지.”
수아는 하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유곤이랑 처음 열애설 났을 때부터 수상하다 했어. 김성준이랑 불륜설 나자마자 터뜨렸잖아. 죄 없는 유곤만 불쌍하게 됐지. 누구 방패막이하느라고 연애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냐. 까딱하다 거짓 연애 들통나기라도 하면 대중들을 상대로 연기나 한 파렴치한 배신자로 낙인찍힐 테고. 대체 그 잘난 유곤이 왜 이런 불여우 같은 이하연을 도운 거냐고!”
“이 대리님, 이하연 만나 본 적 있어요? 엄청 싫어하시네.”
서준이 풋 웃으며 묻자 수아가 몹시 언짢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꼭 만나 봐야만 알아? 재벌가 상대로 불륜이나 저지르는 여자를 누가 좋아해? 넌 좋니? 왜, 예뻐서? 하여간 남자들은 별수 없다니까. 예쁘기만 하면 살인을 저질러도 용서해 줄 거야. 아주.”
“에이, 누가 그렇대요? 그리고 사실은 모르는 거잖아요.”
“모르긴 뭘 몰라.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그걸 대리님이 어떻게 알아요?”
“자자, 쓸데없는 얘기들은 그만하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하연 불륜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입장 발표가 이렇게 났고 여론이 꽤 호의적이고 조만간 단순 해프닝으로 묻힐 것 같으니, 이 대리 말대로 유곤을 캐스팅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김 차장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자 수아는 서준을 세게 한 번 쏘아본 뒤 분을 삭였고 서준은 그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나머지는 대부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두루는 몇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정작 유곤 캐스팅을 맡은 당사자가 넋을 놓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두루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은호를 보았다.
“어떡할까요, 팀장님?”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던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두루와 눈을 마주했다. 그윽한 듯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을 마주하자 심장이 또 눈치 없이 덜컹거렸다.
“한 대리는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곤을 캐스팅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지만 답이 쉽게 내려지지는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적인 측면에서의 장단점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두루는 곤을 캐스팅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일 때문에라도 자주 함께 있다 보면 예전처럼 편하고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때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그를, 되찾고 싶었다.
“저는…… 캐스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ESP의 공식 입장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중에 유곤과 이하연의 연애가 가짜 연애였다고 밝혀지면 저희가 입게 될 타격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유곤만큼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데다 극중 인물의 이미지에도 잘 맞는 배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루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은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모두 동의하는 눈치였다. 은호는 잠시 서류를 넘겨 보더니 단호하고 깔끔한 어투로 말했다.
“진행해, 그럼.”
어쩐지 그에게 강한 신뢰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두루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걸렸다.
멍한 얼굴로 잠든 하연을 내려다보고 있던 곤은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근심이 드리워진 얼굴로 들어온 사람은 소속사 대표 김은표였다. 그는 발이 무거운지 몇 걸음 오지 못하고 멈추어 선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이야?”
그 말에 곤은 다시 하연을 보았다.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여리고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새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녀는 보는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 곤은 매니저 현준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왔다.
‘형님! 하연 누나가, 하연 누나가…….’
오늘 새벽, 하연의 매니저가 수소문 끝에 하연이 있는 호텔을 알아내 그녀를 찾으러 갔는데, 그녀는 시체처럼 몸이 뒤집힌 채 쓰러져 있었고 그 옆으로 수면제와 와인이 쏟아져 있었다고 했다. 그리 늦게 발견하지 않아서 살릴 수는 있었지만 소속사 사람들은 모두 심한 충격에 빠졌다. 하연이 힘들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자살을 시도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연은 4차원적인 면이 있어 그 속을 알기가 힘들었지만 기본적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많은 남자 스탭들이 무섭다는 이유로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열아홉에 청춘 드라마로 스타 반열에 오른 그녀는,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스물여섯의 김성준을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사랑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았다. 술집을 운영하던 엄마가 남자 문제로 아버지랑 이혼한 후부터였다.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들과 어울리느라 어린 그녀를 방치하는 엄마를 보며, 하연은 사랑 따윈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날 소나기처럼 잠깐 스쳐 가는 허울뿐인 감정. 그런 감정에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중요한 시기였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식으로 만나 보자던 성준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이 다시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