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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포인트
1화
프롤로그
쏴아아. 가을을 재촉하듯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여름이 지났나 싶더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느덧 10월도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차츰 물이 들기 시작하던 가로수 잎이 쏟아지는 비에 맥을 못 추고 하나둘 떨어져 내린다. 내일 아침이면 거리는 온통 젖은 나뭇잎으로 뒤덮여 사람들에게 적당한 쓸쓸함과 더불어 가을의 낭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밀집된 상가와 아파트 단지 사이의 왕복 6차선 도로는 퇴근 시간의 복잡함으로 시끄러웠다. 오가는 차량들과 인도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 피곤함과 활력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거리.
나른한 팝송이 흐르는 카페에 앉아 작은 수첩에 의자 디자인을 그리고 있던 이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은재를 만나기로 한 7시에서 5분쯤 지나 있었다. 늘 일찍 와 기다리던 은재가 오늘따라 늦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찻잔을 손으로 감싸 어루만지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막 도착하는 버스 한 대가 보였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에 당황한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는 걸음으로 제각각 사라져 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비닐우산을 팔고 있는 아저씨는 정류장에서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속도로 보아 우산은 금방 바닥이 날 테고 오늘 그는 분명 흐뭇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버스가 쏟아 놓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그 틈에 기다리던 은재도 섞여 있었다. 색색의 우산들 사이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의 까만 우산이 눈에 들어오자 이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늘였다. 신기했다. 시력도 안 좋은 자신이 어떻게 단번에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은재를 골라낼 수 있는 건지.
은재 역시 창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 건지 번쩍 손을 들어 보였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줄까. 자신이 손을 흔들면 은재는 저녁내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곁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냥 의미 없는 손짓에도 늘 웃어 왔던 은재였으니까. 그래. 인심 한번 쓰자. 손 한번 흔들어 주는 것이 뭐 대수라고.
“…….”
찻잔에서 손을 떼고 막 들어 올리려던 순간 이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은재의 우산 속으로 불쑥 한 여자가 뛰어들었다. 우산 없이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비를 피하며 길을 건너던 여자는 언뜻 보기에도 젊고 예뻤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저 여자는 왜 은재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혹시 은재가 아는 여자일까…….
두 사람이 뭐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은재의 우산이 슬쩍 여자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이수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 흔들려던 손을 내려 애꿎은 머그잔만 힘껏 움켜쥐었다.
지끈. 또다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며칠 전에도 그랬고, 그 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다. 분명 건강상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받았던 건강검진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증상은 오로지 황은재란 남자와 있을 때만 나타나는 증상이니까. 심장 근처가 후비는 것처럼 뻐근하게 아파 왔다.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숨을 참는 동안 이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가슴에 이어 머릿속까지 느껴지는 불안함과 불쾌함이 화라는 사실. 자신은 지금 화가 난 거다.
그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을 봤을 뿐인데 화가 났다? 선뜻 수긍할 수 없는 감정에 이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은재에게 화가 났다고? 그럴 이유가 없잖아. 고개를 흔들어 복잡해진 머릿속을 털어 내려는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느껴지는 이 감정이 대체 뭘까. 깜빡거리는 파란 신호등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며칠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마 회사 구내식당이었을 것이다. 같은 팀 직원들과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고 있던 은재가 사선으로 보이는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그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나타난 줄도 모르고 다른 여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웃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톡 쏘아 주고 싶었다.
설마……. 내가 질투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수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은재가 빗방울이 묻은 어깨를 손으로 털며 다가왔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수의 앞 테이블을 노크하듯 두드리자 느리게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 왔다. 그가 그녀를 보고 웃는다. 늘 그래왔듯 숱이 풍성한 까만 속눈썹과 오뚝한 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예쁜 입술을 확인하듯 쳐다보며 은재는 맞은편으로 앉았다.
“오래 기다렸어?”
성우를 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젠가 자신 대신 전화를 받았던 여자가 목소리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은재의 잘생긴 얼굴까지 봤더라면 아마 분명 그녀는 은재에게 빠졌을 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데?”
나직하게 묻는 은재의 머리카락에 묻은 물방울이 조명에 빛나 보석처럼 반짝였다.
“네 생각.”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사실을 고했을 뿐인데 은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불쑥 손을 뻗어와 뺨을 감싸는 그에게서 희미한 스킨향이 맡아졌다. 빗속을 걸어와서인지 그의 손은 차가웠고 늘 맡아 오던 체취는 오늘따라 유난히 아련했다.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으려니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뛴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정말, 왜 이러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달갑지 않아 이수는 순간 불편해졌다.
“별일이네. 송이수가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고. 어디 아픈 거 아냐?”
장난스럽게 이마를 어루만지는 은재의 손목을 잡아 테이블로 내린 이수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차츰 약해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아까 그 여자는 누구야?”
“누구?”
“저기서 같이 걸어오던 여자.”
심각한 이수와는 달리 은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처음 보는 여자였어. 우산을 안 가져왔다고 잠깐만 실례 좀 하자는데 밀어내기도 우습고. 신경 쓰였냐?”
“…….”
“송이수. 네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정도로 뻔뻔한 놈 아니라는 거 알잖아.”
“…….”
“제발 좀 웃어라. 사람 겁나게 왜 그래?”
“…….”
“대체 뭐가 문젠데?”
말이 없는 이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기류에 은재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이수가 한 번씩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는 늘 불안했다. 언제 다시 손에 잡히지 않는 송이수로 돌아갈지 몰라 그는 늘 조마조마 했었다. 그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이수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1-1
일기를 써야 하나…….
책상 위에 펼쳐진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며 은재는 슬쩍 이마를 찌푸렸다. 덥석 받아든 물건이 다이어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들던 고민이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써 본 것 말고는 일기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어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뭘 써야 할까. 톡톡톡. 기다란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송이수…….”
스무 살.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가는 열병을 앓게 될 나이.
그러기에 모른 척하려 했었다.
몇 달쯤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릴 줄만 알았었다. 헌데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가는 이 감정을 어찌해야 좋을까. 펜을 내려놓은 은재는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친구들을 따라 예고도 없이 나타난 이수를 조르다시피 해서 빼앗아 온 다이어리 하나. 이수에게서 받은 첫 생일선물. 이젠 어쩔 수 없다. 고백을 못할 바엔 그냥 묵묵히 있어 주는 수밖에는……. 드러내지 못할 바엔 감추는 수밖에 없다.
내려놓았던 펜을 집어 든 은재는 다이어리를 한 장 넘겼다.
[생일 축하해.]
단정하고 짤막한 이수의 글씨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페이지를 넘긴 은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손끝에 힘을 실어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200x년 3월 26일.
입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즘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새로 가입한 동아리 활동에 늦게 귀가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더불어 할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지셨다.
스무 번째 생일. 열아홉과 스물은 분명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오늘 같은 날 함께 계셨더라면 아마 기특하다고 해 주셨겠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선우가 찾아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크를 사 들고 와서는 내 얼굴에 뭉개 버리며 녀석은 신이 나 낄낄거렸다. 덕분에 나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
대학생이 되어서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술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다는 거다. 주민등록증을 꺼내 들고 친구 녀석들이 마련한 생일파티에 끌려가 생일주를 받아 마셨다. 나는 이제 어른이다…….
그 자리에 송이수가 나타난 것은 꽤 뜻밖이었다. 이수 역시 그곳에 내 생일파티인 걸 모르고 나타난 모양이었다.
며칠 만에 본 이수는 좀 말라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더니 힘이 든 걸까. 묻고 싶지만 아직 그럴 거리까지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선뜻 물을 수도 없었다. 지금 나는 송이수에게 선우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던 이수가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가는 것을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는데 출입구로 빠져나가는 이수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이수를 따라 나갔다.
“생일이라며?”
“응.”
“축하해.”
“고마워.”
무덤덤한 대화를 나누며 별 하나 뜨지 않은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이수의 긴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옅은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 냄새 같기도 했다. 와 닿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볼이, 코끝이, 가슴이 간질거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하얀 손목이 박히듯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을 뻗어 버릴 것만 같았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 하얀 손목을 쥐어 버릴 것만 같았다.
“선물 없어?”
어디서 그런 뻔뻔함이 나왔을까. 내 뻔뻔함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선물을 줘.”
“아무거나? 지금?”
“응, 지금.”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데 선물을 달라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이수의 눈빛은 밤하늘만큼이나 어둡고 차가웠다. 어쩌면 거절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가방을 뒤적인 이수가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을 때 가슴은 풍선 하나를 삼킨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너 정말 이상한 애구나.”
이수의 나직한 투덜거림도 달콤하게만 들려 왔다.
송이수!
사실 여기에 뭘 써야 좋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좋다. 생일 축하한다던 네 목소리가, 손끝에 와 닿던 네 손 끝이, 참 좋다.
* * *
“선배. 일 끝나고 뭐할 거예요?”
파티션 너머로 불쑥 고개를 내민 아라가 묻는 말에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서클렌즈 때문에 눈이 얼굴에 비해 유난히 커 보이는 아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소개팅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못 온대요. 선배 같이 안 갈래요?”
얼마 전 3년이나 사귀던 남자의 변심으로 실연을 당한 아라는 보란 듯이 겨울이 오기 전에 애인을 만들어야 한다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그러기 시작한 지가 아마 두 달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1화
프롤로그
쏴아아. 가을을 재촉하듯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여름이 지났나 싶더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느덧 10월도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차츰 물이 들기 시작하던 가로수 잎이 쏟아지는 비에 맥을 못 추고 하나둘 떨어져 내린다. 내일 아침이면 거리는 온통 젖은 나뭇잎으로 뒤덮여 사람들에게 적당한 쓸쓸함과 더불어 가을의 낭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밀집된 상가와 아파트 단지 사이의 왕복 6차선 도로는 퇴근 시간의 복잡함으로 시끄러웠다. 오가는 차량들과 인도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 피곤함과 활력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거리.
나른한 팝송이 흐르는 카페에 앉아 작은 수첩에 의자 디자인을 그리고 있던 이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은재를 만나기로 한 7시에서 5분쯤 지나 있었다. 늘 일찍 와 기다리던 은재가 오늘따라 늦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찻잔을 손으로 감싸 어루만지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막 도착하는 버스 한 대가 보였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에 당황한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는 걸음으로 제각각 사라져 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비닐우산을 팔고 있는 아저씨는 정류장에서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속도로 보아 우산은 금방 바닥이 날 테고 오늘 그는 분명 흐뭇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버스가 쏟아 놓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그 틈에 기다리던 은재도 섞여 있었다. 색색의 우산들 사이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의 까만 우산이 눈에 들어오자 이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늘였다. 신기했다. 시력도 안 좋은 자신이 어떻게 단번에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은재를 골라낼 수 있는 건지.
은재 역시 창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 건지 번쩍 손을 들어 보였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줄까. 자신이 손을 흔들면 은재는 저녁내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곁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냥 의미 없는 손짓에도 늘 웃어 왔던 은재였으니까. 그래. 인심 한번 쓰자. 손 한번 흔들어 주는 것이 뭐 대수라고.
“…….”
찻잔에서 손을 떼고 막 들어 올리려던 순간 이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은재의 우산 속으로 불쑥 한 여자가 뛰어들었다. 우산 없이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비를 피하며 길을 건너던 여자는 언뜻 보기에도 젊고 예뻤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저 여자는 왜 은재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혹시 은재가 아는 여자일까…….
두 사람이 뭐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은재의 우산이 슬쩍 여자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이수의 눈빛이 순간 서늘해졌다. 흔들려던 손을 내려 애꿎은 머그잔만 힘껏 움켜쥐었다.
지끈. 또다시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며칠 전에도 그랬고, 그 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다. 분명 건강상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받았던 건강검진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증상은 오로지 황은재란 남자와 있을 때만 나타나는 증상이니까. 심장 근처가 후비는 것처럼 뻐근하게 아파 왔다.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숨을 참는 동안 이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가슴에 이어 머릿속까지 느껴지는 불안함과 불쾌함이 화라는 사실. 자신은 지금 화가 난 거다.
그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을 봤을 뿐인데 화가 났다? 선뜻 수긍할 수 없는 감정에 이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은재에게 화가 났다고? 그럴 이유가 없잖아. 고개를 흔들어 복잡해진 머릿속을 털어 내려는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느껴지는 이 감정이 대체 뭘까. 깜빡거리는 파란 신호등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며칠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마 회사 구내식당이었을 것이다. 같은 팀 직원들과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고 있던 은재가 사선으로 보이는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그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나타난 줄도 모르고 다른 여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웃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톡 쏘아 주고 싶었다.
설마……. 내가 질투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수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은재가 빗방울이 묻은 어깨를 손으로 털며 다가왔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수의 앞 테이블을 노크하듯 두드리자 느리게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 왔다. 그가 그녀를 보고 웃는다. 늘 그래왔듯 숱이 풍성한 까만 속눈썹과 오뚝한 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예쁜 입술을 확인하듯 쳐다보며 은재는 맞은편으로 앉았다.
“오래 기다렸어?”
성우를 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젠가 자신 대신 전화를 받았던 여자가 목소리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은재의 잘생긴 얼굴까지 봤더라면 아마 분명 그녀는 은재에게 빠졌을 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데?”
나직하게 묻는 은재의 머리카락에 묻은 물방울이 조명에 빛나 보석처럼 반짝였다.
“네 생각.”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사실을 고했을 뿐인데 은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불쑥 손을 뻗어와 뺨을 감싸는 그에게서 희미한 스킨향이 맡아졌다. 빗속을 걸어와서인지 그의 손은 차가웠고 늘 맡아 오던 체취는 오늘따라 유난히 아련했다.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으려니 가슴이 점점 빠르게 뛴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정말, 왜 이러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달갑지 않아 이수는 순간 불편해졌다.
“별일이네. 송이수가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고. 어디 아픈 거 아냐?”
장난스럽게 이마를 어루만지는 은재의 손목을 잡아 테이블로 내린 이수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차츰 약해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아까 그 여자는 누구야?”
“누구?”
“저기서 같이 걸어오던 여자.”
심각한 이수와는 달리 은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처음 보는 여자였어. 우산을 안 가져왔다고 잠깐만 실례 좀 하자는데 밀어내기도 우습고. 신경 쓰였냐?”
“…….”
“송이수. 네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정도로 뻔뻔한 놈 아니라는 거 알잖아.”
“…….”
“제발 좀 웃어라. 사람 겁나게 왜 그래?”
“…….”
“대체 뭐가 문젠데?”
말이 없는 이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기류에 은재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이수가 한 번씩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는 늘 불안했다. 언제 다시 손에 잡히지 않는 송이수로 돌아갈지 몰라 그는 늘 조마조마 했었다. 그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이수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1-1
일기를 써야 하나…….
책상 위에 펼쳐진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며 은재는 슬쩍 이마를 찌푸렸다. 덥석 받아든 물건이 다이어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들던 고민이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써 본 것 말고는 일기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어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뭘 써야 할까. 톡톡톡. 기다란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송이수…….”
스무 살.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가는 열병을 앓게 될 나이.
그러기에 모른 척하려 했었다.
몇 달쯤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릴 줄만 알았었다. 헌데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가는 이 감정을 어찌해야 좋을까. 펜을 내려놓은 은재는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친구들을 따라 예고도 없이 나타난 이수를 조르다시피 해서 빼앗아 온 다이어리 하나. 이수에게서 받은 첫 생일선물. 이젠 어쩔 수 없다. 고백을 못할 바엔 그냥 묵묵히 있어 주는 수밖에는……. 드러내지 못할 바엔 감추는 수밖에 없다.
내려놓았던 펜을 집어 든 은재는 다이어리를 한 장 넘겼다.
[생일 축하해.]
단정하고 짤막한 이수의 글씨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페이지를 넘긴 은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손끝에 힘을 실어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200x년 3월 26일.
입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즘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새로 가입한 동아리 활동에 늦게 귀가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더불어 할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지셨다.
스무 번째 생일. 열아홉과 스물은 분명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오늘 같은 날 함께 계셨더라면 아마 기특하다고 해 주셨겠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선우가 찾아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크를 사 들고 와서는 내 얼굴에 뭉개 버리며 녀석은 신이 나 낄낄거렸다. 덕분에 나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
대학생이 되어서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술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다는 거다. 주민등록증을 꺼내 들고 친구 녀석들이 마련한 생일파티에 끌려가 생일주를 받아 마셨다. 나는 이제 어른이다…….
그 자리에 송이수가 나타난 것은 꽤 뜻밖이었다. 이수 역시 그곳에 내 생일파티인 걸 모르고 나타난 모양이었다.
며칠 만에 본 이수는 좀 말라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하더니 힘이 든 걸까. 묻고 싶지만 아직 그럴 거리까지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선뜻 물을 수도 없었다. 지금 나는 송이수에게 선우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던 이수가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가는 것을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는데 출입구로 빠져나가는 이수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이수를 따라 나갔다.
“생일이라며?”
“응.”
“축하해.”
“고마워.”
무덤덤한 대화를 나누며 별 하나 뜨지 않은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이수의 긴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옅은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 냄새 같기도 했다. 와 닿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볼이, 코끝이, 가슴이 간질거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하얀 손목이 박히듯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을 뻗어 버릴 것만 같았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 하얀 손목을 쥐어 버릴 것만 같았다.
“선물 없어?”
어디서 그런 뻔뻔함이 나왔을까. 내 뻔뻔함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선물을 줘.”
“아무거나? 지금?”
“응, 지금.”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데 선물을 달라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이수의 눈빛은 밤하늘만큼이나 어둡고 차가웠다. 어쩌면 거절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가방을 뒤적인 이수가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을 때 가슴은 풍선 하나를 삼킨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너 정말 이상한 애구나.”
이수의 나직한 투덜거림도 달콤하게만 들려 왔다.
송이수!
사실 여기에 뭘 써야 좋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좋다. 생일 축하한다던 네 목소리가, 손끝에 와 닿던 네 손 끝이, 참 좋다.
* * *
“선배. 일 끝나고 뭐할 거예요?”
파티션 너머로 불쑥 고개를 내민 아라가 묻는 말에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서클렌즈 때문에 눈이 얼굴에 비해 유난히 커 보이는 아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소개팅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못 온대요. 선배 같이 안 갈래요?”
얼마 전 3년이나 사귀던 남자의 변심으로 실연을 당한 아라는 보란 듯이 겨울이 오기 전에 애인을 만들어야 한다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그러기 시작한 지가 아마 두 달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